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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4화 (54/1,132)

< -- 54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무슨 소리죠?"

말을 몰고 가디언들과 함께 달려가던 제네르는 갑자기 들려온 크고 우렁찬 울림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네르가 타고있는 얼룩무늬 말이 많이 놀란 듯 갑자기 제자리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카렐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랑이.....소리......"

"예?"

카렐이 바위산 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이 여름마다 묶여있곤 했던 그 끔찍한 언덕의 밑자락에 도착한 카렐은 의심어린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 주변에 쫙 깔려있는 숱한 적들의 느낌이 그의 감각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공격!"

또한번의 포효소리와 함께 숲 뒤쪽에 매복해있던 근위대원들이 순식간에 우루루 몰려나와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어느정도는 예상했던 기습이었기에 선두와 양익에 있던 페로 가디언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서며 그들의 1차 돌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 뒤로 상대적으로 등급이 떨어지는 전사단의 가디언들이 조페의 지휘를 받으며 근위대에 섞여있는 정규군들을 노리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 귀찮은 놈들!"

검은 말에 올라탄 카렐이 칼을 뽑아들고 괴성과 함께 기세로 산 위쪽으로 내달렸다. 말의 기세에 놀라 급히 양옆으로 갈라서던 근위대원들 중 몇이 돌진해오는 카렐의 칼에 어깨와 머리가 명중하며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언덕 윗쪽과 양쪽의 계곡에서 수백에 달하는 근위대원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카렐이 페로 가디언들을 지휘하며 선두에서 근위대원들을 맞상대하고 있었지만 족히 천여명은 되는 근위대원들의 삼면 파상공세에 이편 가디언들이 결국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전하! 이대로 힘듭니다!"

제네르가 카렐에게 필사적으로 외쳤다. 카렐이 망연한 표정으로 절벽 위를 올려보았다.

"전하! 물러나오십시오! 이대로 있으면 포위됩니다!"

카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고삐를 쥔 왼손을 천천히 놓으며 제네르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당장 퇴각한다! 이제 경이 총지휘하시오!"

앞뒤가 조금 안맞는듯한 이상한 명령에 제네르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말등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카렐은 자신을 둘러싼 수십의 근위대원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전하!"

카렐은 그 빠른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산 꼭대기를 향해 홀로 내달리고 있었다.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제네르 경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차라리 혼자 처리하겠다는, 카렐의 뜻을 이해한 그는 그때까지도 근위대에 계속 밀려나고 있는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퇴각! 온 길을 따라 퇴각한다!"

"올라옵니다!"

산 밑을 내려다보던 카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페로를 둘러싸고 있던 근위대 가디언들이 사방으로 최대한 멀리 흩어졌다. 혼자서 무언가를 연신 중얼중얼하던 페로가 그쪽을 휙 돌아보았다.

"열어!"

셈의 부하들이 호랑이 우리의 문을 홱 열어제끼자 피냄새를 맡은 거대한 호랑이가 페로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상 입구를 지키던 근위대원 둘의 목을 순식간에 날린 카렐이 꼭대기에 올라선 건 그때였다.

페로는 모든 것을 각오한 듯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카렐로서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근위대원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던지, 페로를 먼저 구하던지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최악의 결정의 순간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호랑이를 쏘아보던 페로의 처절한 눈동자가 카렐과 마주쳤다.

"제발......오지 마, 카렐......"

근위대의 특급들은 카렐을 보고서도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베흔은 이 상황에서 카렐의 선택이 단 하나밖에 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카렐의 빠른 발이 페로를 향해 방향을 꺾었다. 페로가 무심결에 카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아악!"

카렐의 사력을 다한 기합소리와 동시에 공중에 녹색빛의 큰 반원이 그려졌다. 그리고 페로의 손목을 묶고있던 쇠사슬 마디 하나가 그 참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끊어져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임무를 다한 카렐의 녹색빛 카타나가 귀청을 찢는 소음과 함께 찢어져 버렸다.

"잡아!"

베흔의 고함소리와 함께 땅 속에 묻혀있던 거대한 가시철창이 일제히 공중으로 솟구쳤다. 한팔로 페로의 허리를 낚아챈 카렐이 반사적으로 철창을 뛰어넘으려다가 머리를 부딪히며 도로 안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잡았다!"

셈과 카인, 쿠베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하지만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벌떡 일어선 카렐이 큰 고함을 지르며 가시철창을 무서운 기세로 들이받았다.

"뭐야,"

베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렐의 어깨에 받힌 철창 한구석이 찌그러들고 있었다.

"저 괴물같은 놈! 기름! 기름가져와!"

얼떨결에 철창에 같이 갇힌 호랑이가 카렐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철창을 거세게 들이받던 카렐의 옆구리를 호랑이가 덥석 깨물었다. 카렐은 호랑이에게 옆구리를 물린 채 그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철창을 다시 들이받았다. 카렐의 옆구리를 문 호랑이도 결사적으로 턱을 놓지 않았다. 가시철창을 들이받던 카렐의 어깨는 이미 뼈가 드러날정도로 완전히 망가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팔로는 페로를, 나머지 한팔로는 옆구리를 물어뜯는 호랑이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카렐은 마지막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철창을 다시 받았다. 그와 동시에 둘의 머리위에 기름세례가 쏟아졌다.

카렐은 페로의 머리위로 쏟아지는 기름을 몸으로 막아내며 그대로 부서진 철창 밖으로 튕겨나갔다. 찢겨나간 카렐의 옆구리에서 살점과 피가 쏟아지며 호랑이가 철창 안으로 도로 나동그라졌다.

"불붙여!"

근위대원이 집어던진 불꽃이 순식간에 카렐의 망토에 거대한 화염을 일으켰다. 카렐은 페로를 껴안은 채 그대로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려버렸다.

"썅! 저 미친놈!"

흥분한 베흔이 달려왔지만 절벽은 쫓아내려가긴 너무나 높고 가파랐다. 몸에 불이 붙은 카렐은 페로를 껴안은 채 거의 수직에 가까운 흙과 바위절벽을 차례대로 부딪히며 떨어지고 있었다. 절벽에서 자라던 몇 그루의 작은 나무들이 그의 몸에 부딪히며 꺾여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거의 절벽 밑에 도착한 카렐은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물에 빠지더니 그 뒤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카렐이 빠진 강물에 붉은 선혈이 번지고 있었다.

"쫓아가! 당장!"

"모르겠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제네르가 아메스의 급박한 질문에 숨을 몰아쉬며 겨우 대답했다.

"올라가신 거 본 게 마지막일세.......총리가 근위대들한테 잡혀서 그 위에 있는 것 같았어......헉, 헉, 그리고....호랑이가......."

왼쪽 어깨를 다친 제네르 경은 전포를 찢어 피가 흐르는 상처를 감싸며 망연하게 앉아있던 아메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당장 쫓아가야 합니다, 아메스 아씨!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다룬이 흥분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메스가 칼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섰다.

"당장 전열을 정비해 재진격한다. 최소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아야 해. 카렐 님이 아버님을 구하신건지 아닌건지도 모르잖아. 혹시 이곳으로 돌아오실지도 모르니까 스무 명 정도만 흩어져서 여길 지키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간다."

제네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카렐의 마지막 명령대로 총 지휘를 맡은 제네르는 부대의 진두에 서서 카렐이 갔던 길을 조금 돌아 방금전의 그 바위산으로 다시 접근을 시도하기로 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정찰로 내보냈던 가디언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뭐?"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있던 근위대들이 모두 물러난 모양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제네르는 조페와 다룬을 대동하고 급히 바위산 꼭대기로 뛰쳐올랐다. 하지만 그곳에는 한구석이 부서진 채 흉물스럽게 놓여있는 거대한 철창과 심하게 다친 채 죽어가고 있는 큰 호랑이 한마리, 몇 구의 시체가 고작이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던거지?"

제네르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발밑에는 이가 나간, 아니 날 한쪽이 찢겨지고 휘어져 이젠 못쓰게 되어버린 카렐의 녹색빛 카타나가 딩굴고 있었다.

"총리각하 옷자락입니다!"

다룬이 부서진 쇠창살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작은 천조각을 집어들었다. 그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피와 살점이 바닥에 쫙 번져있었다. 절벽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다가간 제네르 경은 무심결이 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곳곳의 마찰흔적과 꺾여날아간 키작은 나무들이 이 절벽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로 뛰어내리셨다......."

최소한 페로와 카렐이 아직 죽지는 않았을 희망이 있다는 사실에 일행의 표정에 잠시 희색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일시에 무너뜨리듯 아메스가 입을 열었다.

"이 부근을 어떻게 수색하지?"

"어떻게라뇨? 싹 다 풀어서......"

단순한 다룬이 언성을 높이자 제네르가 맞받아쳤다.

"우린 이곳 지리를 전혀 몰라. 유일하게 아시던 전하까지 없어지셨으니.......무작정 어떻게 뒤진다는거지?"

제네르는 카렐이 대강 그려준 이곳 푸엘 숲의 약도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 킵에게 쌍봉 밑의 냇가에서 대기하라 하셨으니 미리 이 방법을 생각하셨던 것 아닐까요? 그러면 물을 타고 그곳으로 직접 찾아오실지도....."

아메스가 조심스런 예상을 내놓자 제네르가 힘없이 대답했다.

"거긴 여기서 100스타디아 가까이 떨어진 곳이야. 이몸을 하고 가실 수 있으실까?"

자리에 쭈그려앉은 제네르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는 핏자국을 더듬었다. 정확히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상태를 보아서는 카렐도 제상태는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별수없죠."

그새 네피를 닮았는지 사탕수수를 우걱거리고 씹고있던 '근위대출신' 조페가 아직 다 수습되지 못한 근위대원들의 시체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근위대에 빌붙는수밖에."

한참을 떠내려온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온 페로는 경계어린 눈으로 일단 사방을 둘러보았다. 강에서 갈라져나온 지류인 듯한 이 크지않은 냇가 주변은 유난히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페로가 차가운 공기에 이를 따닥거리며 떨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페로는 발자국이 남지 않을 바위를 골라 일단 발을 디뎠다.

"제길할,"

끄응 소리를 내며 힘을 준 페로는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카렐을 가까스로 물 밖으로 끄집어냈다.

"썅, 더럽게 무겁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일부러 이끼 위를 골라밟은 페로는 자신보다 한참 무거운 카렐을 등에 짊어지고 휘청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냇가 부근의 습지를 빠져나와 침엽수 사이, 죽은 나무가 엉켜있는 틈새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단 몇걸음만에 다리에 힘이 완전히 빠져버린 페로는 쓰러진 나무 틈새에 카렐을 뉘여놓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반 쯤 의식이 되돌아온 카렐이 실눈을 뜨고 멀찍이 앉아있는 페로에게 힘없는 시선을 보냈다. 목과 얼굴 한쪽, 손에 심한 화상을 입은 카렐은 추운지 불에 타 이젠 절반밖에 남지 않은 망토로 연신 몸을 가리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페로는 그를 한 번 쏘아보았다가 도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빨리 일어나, 근위대들이 따라올테니."

입고있던 머플러와 비단조복을 벗어 물을 짜낸 페로는 누워있는 카렐에게 퉁명스럽게 지시를 내렸다.

"여전하시군요,"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떨구었다.

"제게 몸이 어떠냐고 말 한마디 안하시다니......근위대에 그렇게 한심한 꼴을 당하시더니 그 대단하신 자존심에 상처를 제대로 입으셨나보죠?"

카렐이 망토자락으로 옆구리를 가리며 쏘아붙였다.

"뭐야?"

약점을 공격당하자 순간 발끈 한 페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누워있는 카렐에게 다가왔다.

"썅, 너때문이야, 누가 끼어들랬어? 너깟놈 없어도......나혼자 절벽에서 뛰어내릴 참이었어. 왜 끼어들어서 일을 크게 만드는거야?"

성이 머리끝까지 오른 페로는 누워있는 카렐을 몇 번이나 사정없이 걷어차며 말도안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은 카렐은 조금씩 움찔 할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 이 망할것아! 앙? 누가 꾀병부리면 봐준대? 일어나란 말이야! 네년 때문에 나까지 잡혀죽어야겠냐!"

카렐은 그제서야 눈을 조금 떴다. 페로를 올려다보던 카렐은 그 매서운 눈을 치켜뜨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기싫으니까 꺼져, 이 개새끼야,"

"뭐, 뭐라구?"

페로가 잠시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꺼지라구.......그랬어, 은혜도 모르는 이 천하의 개망나니새끼,"

"네가, 네가 지금 나한테 감히 욕을 했어?"

페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망토자락으로 몸을 연신 가리며 카렐은 이를 악문 채 계속 페로를 노려보았다.

"그래, 이 개만도 못한 십새끼야, 꼴보기싫으니까 당장 꺼져. 너깟놈 달고가면 느려터져서 나까지 죽어. 씨발, 그러니까 너혼자 가. 강물 따라 내려가면 쌍봉우리 밑에 네 그 지랄같은 다룬하고 킵 새끼들 기다리고 있을거야. 알았냐? 니 그 기생오래비같은 쌍판대기 이제 보기도 싫으니까 내눈앞에서 당장 꺼져."

카렐의 입에서 나온 생전처음 들은 욕에 너무나 황당해진 페로는 잠시 아무 말도 잇지를 못했다.

"망할 년,"

흥분한 페로가 자리에서 휙 돌아서버렸다.

"그래, 가주마. 나 혼자 가줄테니까 잘난 너 혼자 연명 잘 해봐! 썩을 년, 씨발,"

카렐을 마지막으로 한 번 세게 걷어찬 페로는 물을 짜낸 옷을 덜덜 떨고있는 몸 위에 걸치며 성큼성큼 냇물을 따라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혼잣말로 연신 욕지거리를 늘어놓으며 걷던 페로는 자신의 조복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붉은 핏자국에 순간 멈칫 하고 말았다. 그는 카렐을 눕혀놓고 떠나온 덤불 쪽을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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