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6화 (56/1,132)

< -- 56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제길......"

움직이다말고 자리에 우뚝 멈춰선 페로는 막 밝아오기 시작한 하늘을 원망스럽게 올려보았다. 맞은편, 냇가 하류쪽 갈대밭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틀림없이 사람의 형상이었다. 무심코 돌아본 등뒤, 3, 4스타디아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숲을 빠져나온 족히 수백은 될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페로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앞뒤가 완전히 가로막혔음을 깨달은 페로는 등에 메고있던 카렐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렐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지만 페로로서는 더이상 들고 옮길 힘도, 그렇다고 저 많은 근위대들과 맞서 싸울 능력도 없었다.

페로는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카렐의 허리에 꽂혀있던 단검을 뽑아들고 그 아름다운 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 주인인 셀룬의 이름과 카렐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진 파란빛이 도는 화려한 칼날은 지금까지 거쳐온 주인들의 성격을 나타내듯 어디 한군데 흠간 곳 없이 곧게 서 있었다.

"미안해,"

깊은 한숨을 내쉰 페로는 쓰러져있는 카렐의 목에 그 칼끝을 들이댔다. 어차피 도망치지 못할 바에는 이것이 그가 카렐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은총이었다.

"자.....잠깐......"

갑자기 카렐이 힘을 쥐어짜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카렐의 목을 찌르려던 페로가 움찔 하고 말았다. 페로의 귀에 가늘게 들려 온 건 말발굽 소리였다. 근위대에는 공식적으로 기병이 없다는 것을 페로는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페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발굽소리가 들려온 냇가 하류쪽을 바라보았다.

"힘내, 카렐, 제발, 정신 차리고 있어,"

다시한번 카렐을 등에 불끈 짊어진 페로가 하류쪽을 향해 결사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쪽을 향해 하류에서 몰려올라오는 2백여명의 가디언의 선두에는 말에 오른 제네르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키큰 갈대밭을 가로질러 악을 쓰며 걸음을 내딛는 페로의 모습을 발견한 제네르가 창을 꼰아쥐고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압력을 가까스로 이겨내며 힘겨운 걸음을 내딛던 페로는 결국 다리가 풀리며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함께 바닥에 나딩군 카렐은 허벅지와 옆구리에 또한번 가해진 강력한 충격에 온몸을 비틀며 마지막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피가 멎은 줄 알았던 그의 허벅지에서 또 한덩어리의 피가 터져나왔다.

"카렐! 카렐!"

쓰러진 카렐을 껴안으려던 페로는 뒤어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장검을 움켜쥐며 반사적으로 뒤로 홱 돌아섰다.

"에이 썅!"

페로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칼을 가까스로 피한 근위대 하급가디언이 바닥의 진흙에 미끄러지며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쓰러진 가디언을 내리찍으려던 페로는 옆에서 다른 가디언이 목을 향해 내질러오는 칼을 기겁을 하며 피했지만 팔까지는 미처 안전하게 뽑아낼 수 없었다. 칼에 베인 왼팔에서 피가 벌컥 솟아오르자 페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페로의 등뒤에서 육중한 말굽소리와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등자를 단단히 딛고 양손으로 10척이 넘는 긴 창을 높이 움켜쥔, 동부기병 특유의 자세로 돌격해오는 제네르의 기세에 페로를 공격하던 2명의 가디언들이 허둥지둥 양옆으로 흩어졌다. 난전상황이라면 모를까 1차 돌격해오는 창기병을 향해 아무리 가디언이라도 장애물도 없이 섣불리 덤벼드는 것은 바보짓이었다.---이 사실은 근위대는 291년 카파키 가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5천명의 가디언을 잃는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 그 뒤를 이어 달려온 빠른발의 시로가 제네르의 옆을 엄호하며 섰다.

"전하를 보호해!"

제네르가 뒤에 달려온 5명의 전사단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들과 함께 달려온 킵이 거의 엉망이 된 조복만 어깨에 걸친 채 떨고있는 페로에게 입고있던 전포를 급히 벗어 덮어주었다.

"각하! 무사하십니까?"

"괜찮아, 괜찮아,"

페로가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으며 카렐 쪽을 바라보았다. 전사단 가디언들에게 둘러싸인 카렐은 이제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숲 쪽에서 몰려온 근위대들과, 하류쪽에서 올라온 이편 가디언들의 본대 사이에 또한번의 충돌이 벌어졌다.

4백여명의 정규군들과 백여명의 가디언으로 조직된 근위대들과, 2백여명의 순수한 가디언들만으로 조직된 전사단측과의 싸움은 충돌과 거의 동시에 근위대들이 진형을 깨고 달려들면서 난전으로 번져버리고 있었다.

"난전에 말려들지 마라! 자리만 지켜! 퇴각할 시간만 확보하면 돼!"

전사단을 이곳에 묶어두려는 근위대의 수작임을 간파한 제네르가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네피가 흐느적거리는 카렐을 번쩍 안아 제네르의 말 위에 앉혀주었다.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가는 제네르의 뒤를 페로를 업은 킵과 다섯 명의 페로가디언들이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퇴각! 퇴각해!"

카렐을 태운 말이 멀어져가는 것을 확인한 네피와 시로가 몰려드는 근위대들을 막아서고 있는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뒤로 휙 돌아선 가디언들이 먼저 퇴각하고 있는 제네르와 킵 일행을 쫓아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로서는 도저히 이곳을 독자수색할 능력이 없어서......냇가 하류부터 수색해오면서 근위대 움직임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근위대가 외부에서도 공격을 해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겠습니다."

제네르가 정신을 잃어가는 카렐을 달려주듯 큰 소리로 말했다.

"제네르......"

제네르의 가슴에 기대앉은 채 힘겨운 호흡을 겨우 이어나가고 있던 카렐이 들릴듯말듯 쉰 목소리로 입을 오물거렸다.

"예! 말씀하십니오!"

제네르가 한손으로 말고삐를 바싹 움켜쥐며 목청껏 대답했다.

"내가 쓰러지면......총리가 선임자네."

"예에?"

제네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개미만한 소리였지만 그 뜻은 확실했다. 마지막 기운을 쏟아낸 카렐은 더 이상 말할 기운이 없는지 그의 가슴에 기대며 깊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카렐이 쓰러졌을 때는 페로가 선임자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현명한 사람이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카렐을 꽉 껴안으며 제네르가 힘있게 말했지만 그에게서는 더이상 반응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떨어졌던 충격 때문인지 허벅지와 옆구리에서 다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이 바싹 타들어간 제네르는 말에 더더욱 박차를 가해 달려나갔다.

푸엘 숲 입구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토로 경과 다룬, 아메스, 보벤 경은 말을 타고 나타난 카렐의 모습에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뒤이어 킵의 등에 업힌 페로까지 나타나면서 그곳은 일시에 환호성에 휩싸였다. 하지만 격앙된 모습의 그들을 거칠게 밀치며 제네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급합니다, 언제 전하의 숨이 끊어지실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빨리 응급수술 준비해주십시오!"

"북쪽에서 쳐오는 근위대 병력이 만만치 않다는데.....어쩌죠?"

"뭐?"

제네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조페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함께온 전사단 의무관이 말에서 끌어내린 카렐의 상태를 살피며 경악하고 있었다.

"다 죽더라도 전하만은 지켜야 된다. 당장 수술준비 안하고 뭐해!"

토로 경이 흥분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외쳤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어보인 제네르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조페에게 다시 물었다.

"쳐오는 근위대가 몇인가?"

"가디언 3천과 정규군 1천 정도."

기겁을 한 아메스가 입을 쫙 벌리고 말았다. 토로 경이 혼자 중얼대기 시작했다.

"우리 병력이 6백명이니까.....잘하면 서너시간은 막을 수 있을거야......"

토로 경의 황당한 '무대포'에 얼굴을 조금 찌푸려보인 제네르가 의무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동중엔 수술 안되겠나?"

"원하신다면 일단 응급처치를 하고 나중에 수술하실수도 있겠지만 가는 시간중에 어느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수송선으로 이동중 중력변화나 기압차를 버틸 수 있으실지도 의문이고.....아시다시피 저희 수송선은 화물선을 개조한 것이다보니 수술실이 없습니다. 이곳 마을 병원 수술실을 이용해야 합니다."

한숨을 내쉰 제네르는 의사가 분주히 수술준비를 갖추는 모습을 멀뚱하니 바라볼수밖엔 없었다. 지도자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느냐, 이곳에서 버티느냐,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카렐이 그 마지막 순간에 페로를 언급한 이유를 잘 알고있었다. 그는 킵의 등에 실려나오고 있는 페로를 힐끔 바라보았다.

다룬이 축 늘어진 페로의 몸을 미리 준비해두었던 모포로 감싸주었다. 체온이 떨어져 입술까지 파랗게 변해버린 페로는 들것에 실려오던 카렐 쪽을 멍 하니 바라보았지만 카렐의 모습은 몰려드는 전사단 간부들과 의무관에 가려 곧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페로의 상태를 확인한 킵이 서둘러 수액이 든 앰플을 페로의 팔에 설치해주었다.

"피를 많이 잃으셨군요......크게 다치신곳은 없으신 것 같은데.......왜이리 탈진하셨는지....."

"난 괜찮아."

다룬이 내민 따뜻한 물잔을 받아든 페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섰다. 카렐을 실은 들것은 마을 한쪽의 작은 병원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됐습니다. 셔틀 준비중이니 빨리 관저로 돌아가야겠습니다. 4천의 근위대들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 가야지......"

보벤 경이 페로를 재촉하자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페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렐......은?"

"글쎄요, 자기들이 살리든말든 하겠죠. 이젠 저희가 상관할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방금보니 응급수술을 한다고 준비하는 것 같던데......타고온 수송선에 수술실이 없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빨리 돌아가야......"

"근위대가 몰려온다며 수술을 어떻게 해!"

페로의 언성이 높아지자 보벤 경이 뜻밖이라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때까지도 페로를 그다지 곱지않은 시선으로 쏘아보던 토로 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됐다! 두 시간만 사수한다! 기사단은 정면에......."

기사단에 지시를 내리려던 토로 경은 제네르가 갑자기 자신을 막아서고 나서자 대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녀석 뭐야?"

"전하의 마지막 명령이십니다."

"뭐?"

"지금부터 전하가 깨실때까지 전사단 지휘권은 페로 자이센 경이 갖습니다. 명령권은 총리각하께 있습니다."

쨍그렁 소리와 함께 페로가 물을 마시던 잔이 바닥에 떨어져 마치 투명한 수정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카렐이 자리를 대신할 명령권자로 전사단 내부인물도 아닌, 페로 자신을 지목한 것이었다.

"말도안돼......보나마나......"

토로 경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사자인 페로 또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망설이던 제네르가 페로에게 가슴에 손을 가져가는 정식 경례를 올리며 힘있게 물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현재 북쪽에서 4천명의 근위대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약 15분 후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옵니다. 전하를 이곳에서 수술할지, 일단 모두 철수해 ㅤㅋㅞㄹ크로 돌아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페로에게 공손히 말하는 제네르는 그 반 혼수상태의 와중에 카렐이 내린 이 절묘한 명령의 의도를 잘 알고있었다. 카렐은 이기회에 페로의 책임감을 자극해 그를 자신의 집단과 완전히 묶어버리려는,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을 시도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핼쓱해진 얼굴의 페로가 조용히 되물었다.

"ㅤㅋㅞㄹ크로 이송했을때 소요시간과 생존확률은?"

"이송 소요시간은 최소 50분, 생존확률은 현재의 50%수준으로 떨어진다는 의무관의 견해입니다."

"......이곳에서 수술시간은?"

"최소한 3시간."

"이쪽 병력은?"

"저희 병력은 중장기병 3백과 가디언 3백입니다."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페로가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유리한 지형지물은 고사하고 끝도없이 펼쳐진 넓은 개활지가 전부였다. 그나마 뒤쪽은 북극해의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보벤 경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페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퇴각해야 합니다. 이런 곳에서 두시간은 고사하고 삼십분도 못버팁니다. 저깟 도망가디언 죽어도 무슨 상관입니까, 계속있으면 각하까지 위험해지십니다!"

깊은 호흡을 한 번 내쉰 페로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역시도 자신의 목숨을 내맡기는 카렐의 의도를 모르고있지 않았다.

"킵."

"예!"

"페다이하고 헨지 녀석을 불러라. 수련장에서 천 오백 차출해 최대한 빨리 이리로 오라고 해. 고속셔틀 이용을 허용한다. 배수진을 치고 이곳을 사수한다. 그리고 녀석들은 우리의 상황을 모른다. 돌격전보다 포위 섬멸전을 시도할 것이니 시간을 끄는 건 충분히 성공가능성이 있다."

"예에?"

페로의 심복들이 주인의 뜻밖의 명령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가 당연히 퇴각명령을 내릴 것으로 생각했던 전사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창백한 얼굴로 담요를 덮고있던 페로의 얼굴에서 평소같은 고집과 총기가 다시 번득이기 시작했다.

"보벤 경은 당장 TSG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황족들에게 이곳 상황을 알리게. 당장 큰 힘은 못되겠지만 깨끗하게 일을 마무리하려는 베흔에겐 큰 정치적 부담이 될 테니."

페로가 이번에는 옆에 선 딸 아메스에게 손을 내밀며 힘있게 말했다.

"아메스. 내 전포와 새 칼을 가져다다오.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쭈삣거리던 전사단 사람들이 페로에게 그제서야 고개를 숙여보였다. 페로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토로 로버넬 경이 이끄는 200기의 기사단은 양익에 산개해 녀석들이 양 측면으로 마을 포위를 시도하는 것을 막는다. 제네르 하크로딘 경은 100명의 기사단을 이끌고 남측 숲에 매복했다가 접전이 개시되는 즉시 적의 후방으로 돌아 녀석들의 후속부대 도착을 지연시킨다. 녀석들의 병력이 4천이나 되는만큼 진격속도도 더딜 것이다. 아마도 병력을 2분 내지 3분해서 진격할 것인즉 제네르 경의 활약여하에 따라 적의 실질적 공격력을 반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토로 경과 대조적으로 제네르는 페로에게 힘있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페로는 그 뒷켠에 있던 가디언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전사단 가디언과 내 가디언 까지 총 4백은 백명씩 3분 배치한다. 중앙은 네피가, 좌익은 다룬, 우익은 시로가 맡고 조페와 킵은 100명을 이끌고 예비로 2열대기한다. 집결시간 포함하면 수련장에서 이곳까지 고속셔틀로 45분이면 도착하니 30분만 목숨걸고 지켜주기 바란다. 30분이다! 준비시간을 따져보면 긴 시간이 아니다!"

명령을 내려가면서 페로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었던 그의 얼굴에도 평소와 같은 단호함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뭐든지 징발할 수 있는 기물은 다 끌어내 삼면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불을 붙여! 총리인 내가 모두 배상한다고 말해라!"

"역시....."

위치로 돌아가며 제네르 경이 아메스를 힐끗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페로 경을 그리도 탐내셨을만 하군......"

아메스는 무사히 살아돌아온 아버지를 보며 한껏 기쁜 표정을 지어보이며 칼을 쥐고 직접 그 옆을 지키고 섰다. 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페로는 카렐의 수술이 행해지고 있는 작은 마을병원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그랬나? 근위대가?"

보벤 경의 다급한 보고를 받은 레곤 대공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였다. 대공주 옆에 있던 모사 푸아킨도 보벤 경의 믿기지않는 보고에 낯을 찡그리고 있었다. 의심많고 신중하기로 유명한 늙은 푸아킨은 보벤 경의 보고의 진위를 따지고 있는지 조용히 별 반응도 없었지만 다혈질의 대공주는 그 성격값을 이번에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래, 베흔 그놈이 사고를 틈타서 총리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황실의 대 행사인 추도회에서?"

"그뿐이 아니옵고 지금 북극에서 대병력을 동원해 총리각하와 수색작업을 도와준 코아 전사단 사람들을 몰살시키려 하고 있사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황실의 신용이 크게 실추될까 염려되옵니다."

"실추 뿐인가, 개망신이지!"

흥분한 대공주는 바로 옆에 있는 보좌관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잠시 통신을 시도하던 보좌관은 약간 난감한 얼굴로 대공주에게 알렸다.

"근위대장과는 연락이 안되옵니다."

"어쩐다......"

"빨리 조치를 취하셔야 하옵니다. 전하. 이번 일로 총리각하께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일은 걷잡을수 없어지옵니다. 누가 황실행사에 참석하겠사옵니까?"

대공주도 다급한 나머지 좌우로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그의 결단이 늦어지면서 보벤 경의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결국 보다못한 푸아킨이 신중한 투로 입을 열었다.

"공주저하. 일단 이곳에 와 있는 각지역 제후들을 부르심이 더 합당한 듯 하옵니다."

"제후들을?"

"어차피 근위대장은 황가의 명령에 복종할 인물이 아니옵니다. 각지역 제후들을 불러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십시오. 남부제후는 근위대장의 제일 큰 지지세력인데다가 현재 상중이오니 이럴 때 불미한 사건이 생김은 같은 사고를 당한 남부제후에게도 또한 큰 망신이 될 것이옵니다. 결국 가장 입장이 난처해지는 남부 최고제후가 직접 수습할수밖에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래......그렇겠군. 푸아킨. 각지역 최고제후들을 당장 여기 불러.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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