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 회: Part 3. A China Aster for Me -- >
"병신새끼들,"
멀찍이 떨어진 산 꼭대기에 시로와 나란히 서서 망원경으로 마을을 내려다보던 네피가 키득거리며 사탕수수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의 손에서 사탕수수를 빼앗아 집어든 시로가 자기도 덩달아 씹으며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파녀석 안됐어. 쯧쯧......일고보면 황실에 꽤 충성스런 놈인데.....이런 똥통에 발을 빠뜨리다니......수에보 녀석은 워낙 베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어쨌든 지금은 적이야."
자기 말에 훌쩍 뛰어오른 네피가 거의 버둥거리듯 자기 말에 겨우 기어오르는 시로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며 다시 킬킬거렸다.
"아주 작품이다."
"아씨, 등에 도끼때문에 중심 못잡아서 그래,"
"닥쳐, 누군 도끼안멨냐?"
"씨, 말을 타봤어야 말이지."
가까스로 반대편 등자에 발끝을 꽂아넣은 시로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로의 등을 그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후려치며 네피가 먼저 말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빨랑 따라와. 그래갖고 어디 가디언 지휘하겠냐?"
"녀석들은?"
산자락에서 둘을 눈빠지게 기다리던 제네르가 시로에게 급히 물었다. 산에서 빠져나와 다시 셔틀을 타고 다시 ㅤㅋㅞㄹ크의 남부정글, 루콘 산악지대까지 날아온 네피와 시로는 새로 만들어진 엉성한 마을에 말을 몰고들어오며 아직 정리가 덜 된 듯한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꽤나 엉성한 자세로 말에서 기어내린 시로가 아픈 엉덩이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제파가 이끄는 정규군부대 만 명 정도가 들어왔고 수에보녀석이 또 그정도 데리고 주변에 산개한 모양입니다. 우리 쓰던 마을을 캠프로 쓰려는 모양이던데요."
"그놈의 코딱지만한 마을 미어터지겠네."
조페가 한마디 덧붙이자 사람들 사이에 잠시 웃음이 오갔다. 네피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사는 다 된건가?"
"그럭저럭.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뻔했잖아."
조페가 그냥 평범하고 작은 산악마을처럼 만들어진 동네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빽빽한 활엽수림 중간에 만들어진 이동용 주택들 위는 큰 잎사귀들과 너와로 덮여 얼핏 보아서는 그냥 허름한 원주민들의 집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전사단에 속한 원주민출신 병사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마을 정돈을 하고 있었다.
"페로 경이 미리 연락 안해줬더라면 정말 날벼락 맞을 뻔 했지."
역시 허름한 평상복 차림의 제네르가 원주민들의 작업광경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은 저어기 북쪽 계곡너머에 따로 마을 만들어서 주둔하고, 여긴 가디언 약간하고 원주민 병사들만 있을거야."
"전하는?"
시로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조페는 대답대신 마을 가장 한구석의 작고 허름한 '진짜 원주민 집'을 가리키며 씨익 웃어보였다. 아니나다를까 그 집 앞 마당에는 카렐이 평소 돌보던 화단과 화분들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이동주택은 싫으시대나봐. 아참, 네피 너희집은 저어기, 문앞에 큰 바나나잎 덮은 집이야. 원래는 다 합숙인데 가족딸린 유일한 가디언이라서 특별히 선처한거야. 알아둬."
아직 엉성한 집들을 둘러보며 네피가 한숨을 내쉬었다. 게릴라전도 좋고 일단 몸을 숨기는것도 좋지만 명색이 태자라는 사람이 이런 정글 한구석에서 화전민이나 별반 다를바 없는 꼴로 사는 것도 꽤나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어쨌든 카렐이 다시 기력을 되찾을때까지는 이렇게 정글에서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할 판이었다.
아메스로부터 근황을 보고받은 페로는 측근들앞에서 그답지않은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베흔새끼 머리에서 연기 좀 나겠구나. 카렐이 들어옵쇼 하고 벌려논 거미줄에 탁 걸려버렸으니....."
"아메스 아씨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게릴라전이면 환경도 열악할텐데......."
보벤 경이 조심스럽게 묻자 페로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삐딱하게 돌아앉으며 대꾸했다.
"됐어, 그정도 고생은 겪어야 지가 자이센 가문 사람이지. 괜히 자이센 가문 자식들이 100살을 절반도 못넘겼겠어? 어차피 안죽을놈은 지가 죽고싶어도 못죽어."
아버지가 맞나 싶게 들리는 페로의 얼핏 냉담한 태도에 자리에 모여앉은 측근들이 그 어이없음을 침묵으로 애써 표현하고 있었다.
"이번에 들어온 2만은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나머지 6만은 어떡해야 되죠?"
"글쎄,"
페로가 그다운 오만한 표정을 있는대로 지으며 아랫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리를 이리저리 꼬아가며 측근들의 대답을 기다리던 페로는 그들이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고있자 답답한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문제는 뭔지 아나? 돈이야. 돈. 8만이나 되는 병력을 황제령으로 철수시키면 그동안 제후들이 부담하던 파견군 유지비를 황실예산에서 고스란히 부담해야 된다고. 그리고 부수되는 세금수입까지 없어지니 부담이 장난이 아니지. 두개 합쳐놓으면 적어도 재정에서 5억골드 정도는 마이너스요인이 발생할거라고."
"하지만 그정도는 남부와 서부가......"
측근들의 말을 무시해버리며 페로가 혼자 말을 이었다.
"들어봐. 연초에 황제가 죽으면서 장례비용으로 예비예산을 왕창 다 써버렸단 말이야. 가뜩이나 쪼들리던 황실 예산에서 말이야. 그런데 총리인 내가 추가예산 승인을 안해주고 있으니 눈먼 제후가 아니라면 절차 타령하면서 제발로 돈 갖다가 바치지는 않겠지. 남부가 근위대가 빠져나간 공백도 감당하고, 5억이나 되는 돈까지 갖다바치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서부도 있으니......"
보벤 경이 고집스럽게 말에 끼어들자 페로가 결국 신경질어린 눈을 치켜뜨며 그를 째려보았다. 촌수로만 따지자면 거의 90세나 연상인 6촌 재종형이 되는 그였지만 페로의 성깔에 감히 대드는 것이 결코 현명치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플레렌 가에서 오늘 근위대 지원을 거부했어. 베흔 녀석은 틀림없이 남부가 지원을 하면 서부도 따라올거라고 믿었을텐데 어긋나기 시작한거지. 요즘 서부가 근위대놈들 뜻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고 있어.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아직은 더 조사해봐야겠고......베흔 녀석으로서는 어쨌든 뒷통수 맞은 셈이지. 그리고 또하나가......"
"각하. 판이옵니다."
문밖에서 오늘의 사랑채 당직경비인 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여보이고 들어온 판은 약간은 난처한 표정으로 방에 도열해앉은 십여명의 동부제후들을 바라보았다. 페로의 눈짓에 보벤 경이 급히 그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무슨 일인가?"
"타르서스에서 손님입니다."
"타르서스?"
판의 귀엣말에 놀란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페로가 그에게 들이라는 손짓을 보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검은 망토로 온몸을 가린 한 사람이 들어와 얼굴의 후드를 벗으며 페로 앞에 꿇어앉았다. 작고 다부진 체격에 검은 곱슬머리의, 전형적인 타르서스인의 외모를 한 그는 페로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지고하신 페로 슈트란 자이센 총리각하께 문안드리옵니다. 소인 볼토 트라우제라고 하옵고 현 타르서스 지방장관을 맡고 있사옵니다."
"재작년 취임식 때 한 번 본 일이 있구려.....참으로 오랫만이요."
볼토는 좌우에 앉은 다룬과 킵이 약간 부담스러운지 입을 열지 못한 채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믿을만한 녀석들이니 염려놓으시오. 여기 온 건 아무도 모를 것이오."
볼토의 입장을 눈치챈 페로가 미소띤 얼굴로 차 한 잔을 손수 부어 내밀었다. 평민 대상인 출신인 볼토는 특별히 근위대측에 친하지도, 그렇다고 페로 사람도 아닌, 특별히 모난 곳 없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관료였다. 이런 사람이 자신에게 한밤중에 몰래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페로가 긴장하기에 충분했다.
페로가 내민 따뜻한 찻잔을 받아든 볼토는 다시 고개를 숙여보이며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타르서스는 척박하고 물산이 빈약한 곳이옵니다."
"알고있소."
페로의 조금은 성의없는 대답에 볼토가 또한번 긴장한 가슴을 잠시 억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 황제령의 분위기가 심상치않으면서......이곳의 주업인 과수농업과 보석산업이나 비단무역, 수공산업이 많은 타격을 받고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얼마 전부터 근위대에서 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황실에 제공할 것을 압박받고 있사옵니다."
볼토의 말을 들은 순간, 페로의 머리위에 바위라도 매달린 듯 아찔 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아직 얼마 마시지도 않은 볼토의 잔에 차를 더 부어주었다.
"베흔이 강도짓은 안했을 것이고, 틀림없이 명분이 있던지......장관이 약점을 잡혔던지......둘 중의 무엇이오?"
페로가 눈을 부릅뜨며 묻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볼토가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지금까지......매년 천만골드씩의 자금을 근위대에 직접 바쳐왔사옵니다."
"오호.....장관직을 유지시켜주는 댓가로? 장관 역시 그만큼 이상의 이익이 있으니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겠죠?"
페로가 무서운 표정으로 몰아붙이자 결국 볼토는 머리를 바닥에 붙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황실에 매년 지불하는 별궁 사용료 천만을 근위대에서 비공식적으로 직접 지불할 것을 요청해와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지금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사옵니다. 이젠 그 일로 들볶이는 것만 생각하면 밤잠을 못이룰 지경이옵니다. 소인 모든 것을 떳떳히 밝히고 장관직을 그만두고 싶으나 그리하오면 소인은 같은 타르서스인들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하옵니다."
"그래......타르서스인들 별난 성격은 좀 유명하긴 하지. 그래도 1년에 천만씩의 뇌물이라......황궁앞에서 참수당해도 할말없는 액수군.......쯧쯧,"
페로가 다시 삐딱하게 앉으며 사뭇 매서운 눈길로 고개를 숙여붙인 볼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사실을 이제라도 알아낸 것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지만 이자 앞에서 총리 체면에 처음부터 값싸게 굴 필요는 없었다. 일단 겁을 잔뜩 주어놓고 나서 이자의 속셈을 파악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페로의 계속된 침묵에 볼토 역시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한참만에 반대편으로 기대앉으며 페로가 다시 물었다.
"내가 뇌물주는 관리들에게 얼마나 호된지 모를리가 없을텐데......날 찾아온 이유는?"
그제야 조금 안정을 찾은 트라우제 장관이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첫째는......소인 타르서스 지방장관을 하루빨리 그만두고 싶사오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제 안전 또한 장담할 수 없고......제발 제 장관직을 거두어 주시옵고......"
제발 장관에서 물러날 수 있게 해 달라는, 얼핏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요구에 페로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하고 말았다. 하지만 타르서스인 출신의 전현직 지방장관들이 그동안 당했던 흉측한 일들을 머리에 떠올린 페로는 이자의 요구가 아주 어처구니없지만은 않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말인가?"
"그, 그러하옵니다."
볼토가 이마를 땅바닥에 가져가며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둘째는......"
"그 5억의 자금을 근위대에 털리는 걸 막아달라는 말이겠지?"
볼토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페로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페로는 빈 연적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며 꽤 한참동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볼토는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린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사실 이렇게 오만을 떨고있는 페로로서도 무려 5억의 군자금이 근위대 손에 들어가는 건 어떡해서든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덤으로 이정도의 대상인까지 자기 사람을 만들 수 있다면 더할나위가 없는 것이고.
한참의 침묵끝에 페로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장관이 날 찾아와 체면도 버리고 직접 이렇게까지 용서를 구하니 앞으로의 행동을 보아 일단은 묻지 않을 것이오......그대가 장관직에서 안전하게 물러나는 방안은 내 찾아보도록 하겠소. 그러나 그 5억은.......나로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소이다."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자 절망해버린 볼토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가 때맞춰 씨익 웃어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예?"
"궁금한 게 있는데, 그 5억의 지불방법은?"
"그건.......타르서스 지역 내에선 곤란하고.....수에니 반도의 근위대 출장부대를 통해서......5천만은 이미 지불했고 나머지는 다음달에 현금으로 주기로 되어 있사옵니다."
"원한다면 나머지 4억 5천만 중 2억은 다시 건질 수 있게 해드리겠소이다."
페로의 음험하기까지 한 표정에 볼토가 자기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