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5 회: Part 3. A China Aster for Me -- >
"오른쪽, 조금만 더 들어보십시오."
누워있던 카렐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의사의 지시대로 오른쪽 다리를 조금 들어올렸다. 고통스러워하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는 황후의 표정이 파랗게 얼어붙어 있었다.
"언제쯤 내 발로 설 수 있겠나?"
카렐이 식은땀을 흘리며 의사에게 물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의사는 자신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직 2, 3일은 있어야 지팡이에 의지해서라도 설 수 있겠습니다."
카렐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구리상처는 여전히 쳐다보기도 끔찍한 몰골이었고 왼쪽어깨와 다리도 아직 너덜너덜한 벌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상태였다. 중요 장기들을 손상시킨 옆구리 상처 덕에 평소 회복능력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결과였다. 황후는 힘들어하는 카렐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클 땐 너혼자 컸는지 모르지만 이젠 엄마노릇할 기회를 제대로 주는구나."
"기왕이면 그런 기회 다시는 안생기면 좋겠군요."
카렐의 농담에 황후의 표정이 모처럼 밝아져 있었다. 갑자기 우베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일인가?"
"솔이 책을 구하러 마을에 잠시 다녀와도 되겠냐고 합니다. 다행히 오늘 약품을 구하러 인근 마을에 가는 인편이 있으니 그편에 함께 보낼까 합니다."
"음.......그래, 산을 넘어가는 길이어서 힘들텐데.....준비를 제대로 시켜서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카렐의 허락을 받고 돌아나온 우베는 이미 외출복 차림으로 밖에서 잔뜩 들뜬 얼굴로 기다리던 솔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모자 꼭 쓰고 얼굴 가리고 다녀. 넌 얼굴이 워낙 튀어서.....눈에띄여 좋을 건 없잖아. 그리고 이거, 할룩스 꼭 갖고다니고. 무슨 일 있으면 즉시 연락해. 바로 달려나갈테니까. 혹시라도.....근위대를 만나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말고. 녀석들도 엔간해선 민간인은 안건드리니까 그냥 평소같이 행동하면 될거야."
"예. 알았어요."
명랑한 표정의 솔은 우베가 시킨대로 모자를 깊이 꾹 눌러쓰며 밝게 대답했다. 한쪽에서 갈 준비를 이미 마친 민간인 복장의 원주민 병사 두 명이 빨리 오라고 손짓해보이자 솔은 우베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나갔다.
참으로 오랫만에 보통사람들이 사는 '큰 마을'에 나와본 솔은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찾던 책이 마을 서점에 없는 통에 결국 헛걸음한 꼴이 되고는 말았지만 평생을 거의 갇혀사는 신세나 다름없던 솔에게 이렇게 활기찬 분위기는 아주 어릴 때 페로 관에 들어가기 전의 유년시절 빼고는 가져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약제상 앞의 빈 수레에 걸터앉은 솔은 안에서 카렐의 약을 사고있을 일행을 기다리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다.
지금까지 카렐에게 솔의 위치는 그냥 피보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카렐은 아직 나이어린 솔을 '어린애' 로 취급할 뿐이었고 그 이상의 태도를 보인 일은 딱 한번의 가슴떨리는 기억을 빼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아버지 네피는 자신이 카렐에게 조금 더 가까운 존재---잘만 하면 황제의 소실 자리라도 잡을 수 있는---가 되어주기를 내심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솔 스스로도 카렐에게 부모님을 대신해 키워준 은인이며 보호자 정도의 역할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약을 산 일행들이 상점에서 나오며 솔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다 샀어요?"
"예. 빨리 돌아가죠."
재빨리 주변을 살핀 병사들은 약제상에서 사온 꾸러미를 가방에 잘 챙겨넣으며 급한 걸음을 재촉했다. 솔 역시 산길에 접어드는 그들의 뒤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빠져나오고 깊은 산길에 접어들자 병사들이 그제야 조금 안도했는지 한마디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까 그 약팔던 놈 말이야, 어디서 뒤지게 얻어맞았나 잔뜩 얼어 있던데."
"몰라, 마누라하고 싸우기라도 했나."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 일행들은 조금씩 더 깊은 밀림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대로된 길이라고는 없는 빽빽한 산길을 거의 평지인 양 능숙하게 넘어다니는 원주민출신 병사들을 솔도 꽤 잽싼 발걸음으로 뒤처지지 않고 쫓아갔다.
"어휴, 신통하시네요. 프라임분들 보통 이런 길에서 쩔쩔 매는데. 걸음이 웬만한 원주민도 못따라잡겠는데요? 숨도 하나도 안차하시고......"
병사 하나가 꽤 넓은 냇물을 단번에 훌쩍 뛰어넘는 솔을 보고는 신통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븅신, 이아가씨 아버지가 네피 대군령님이시잖아. 이아가씨 가디언 혈통이시라구."
"어, 정말이예요? 아이씨, 이거 막말했다고 나중에 디지게 깨지는 거 아냐?"
"깨지는 정도냐? 멍청한놈, 귀 좀 뚫고 살어. 근데 아가씨가 카렐 전하하고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사실이예요? 큭큭,"
"글쎄요,"
솔은 그들의 질문에 굳이 부인할 생각은 없는지 키득거리기만 했다.
"사람들이 그러던데, 아가씨 추군덕거리면 카렐 전하 손에 아홉토막나 죽을거라구."
"아홉토막이 아니고 구십토막날지도 몰라요."
솔은 그들의 농담에 가벼운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꽤 한참을 그들과 의미없는 농담따먹기를 하며 걸어가던 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멈춰서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요?"
병사 중 하나가 묻자 솔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 느낌이 든 것 같은데......"
"어휴, 과민반응이예요. 빨리 가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되니까."
다시 그들을 따라 몇발짝을 옮긴 솔의 시선은 이번에는 병사들이 메고 있는 짐에 가서 멎었다.
"잠깐만요. 뭔가 이상해요. 이상한 자극이 오는데......"
"예?"
"잠깐만요. 짐 좀 풀어봐요."
병사의 짐 중 하나를 거의 빼앗듯이 집어든 솔은 안에 들어있던 약 꾸러미를 끄집어내더니 그곳에 귀를 바싹 가져갔다.
"이거......"
상자를 열려던 솔이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가디언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예민한 감각기를 조금씩 울리고 있었다.
"도망가요!"
꾸러미를 내동댕이치며 자리에서 일어선 솔의 결사적인 외침소리와 함께 모퉁이 뒤에 숨어있던 수십의 산악병들이 일제히 손에 무기를 쥐고 일행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흩어져요!"
솔과 일행들은 허둥지둥 짐을 내던지고 급히 정글 속으로 뛰쳐들었다. 하지만 출발이 늦었던 한 병사는 곧바로 날아온 단검에 등을 찍히며 그대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뒷머리로 날아오는 칼날을 가까스로 피한 솔은 큰 나무둥치를 훌쩍 뛰어넘어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를 잡아!"
대여섯명의 산악병들이 정신없이 솔의 뒤를 쫓았다. 그들을 피해 결사적으로 언덕을 뛰어오르던 솔의 앞을 가로막은 건 깎아지른 계곡이었다. 도망칠 길이 막혀버린 솔이 헐떡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쫓아오던 산악병들이 천천히 칼을 솔 쪽으로 겨누었다.
"이걸......어떡해......"
앞을 막은 절벽과 병사들의 얼굴을 번갈이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솔은 결국 눈을 꼭 감고는 낭떠러지를 향해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뭐야!"
절벽 끝에 다다른 솔은 무서운 탄력으로 공중에 솟구쳤다. 쫓아오던 병사들이 어어 하는 새 특유의 탄력으로 계곡을 뛰어넘은 솔은 건너편 절벽 끄트머리에 위험천만하게 매달려 있었다. 무릎과 팔꿈치가 까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절벽을 버둥거리며 기어오른 솔은 가디언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의 체력을 하늘에 감사하며 다시 밀림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걸 어떻게 넘었지?"
정규군 병사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도망가는 솔의 뒷모습을 발만 동동 구르며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비켜!"
병사들의 뒤를 쫓아온 지휘관인 가디언들이 어물거리고 있는 부하들에게 날카롭게 소리치며 달려올라왔다. 그들은 병사들을 헤치고 절벽을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어 반대편에 착지했다.
"저, 썅, 도망쳐 봤자지!"
다시 뒤를 쫓아오기 시작한 근위대들을 피해 정글을 이리저리 달려가던 솔은 갖고있던 할룩스를 집어들고 무작정 소리쳤다.
"근위대들이예요! 도망치세요! 저흴 ㅤㅉㅗㅈ아왔어요! 거기도 곧......"
어느새 솔의 뒤에 달라붙은 근위대 가디언들이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사정없이 바닥에 패댕이쳤다. 솔이 쥐고있던 할룩스는 그대로 옆의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떨어져버렸다.
"잡았다!"
검은 전포차림의 근위대 가디언 하나가 절벽으로 미끄러지려는 솔의 멱살을 거칠게 붙들며 소리쳤다.
"셔틀 준비해! 당장! 집들 압축하고! 전하! 전하부터 옮겨! 빨리빨리!"
마을 중간에 선 제네르가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옆에선 혼자라도 딸을 구하러 가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네피를 시로와 조페가 겨우겨우 뜯어말리고 있었다.
"가면 너도 죽어! 녀석들이 사방에 쫙 깔렸을거라구!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야! 솔은 나중에 구하면 돼! 전하께서 몸값을 내실거라구!"
"썅! 니 자식이 그래봐! 그런 소리가 나와!"
네피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악을 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보내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네르가 카렐의 오두막으로 뛰어가던 우베를 붙들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전하께는 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 무슨 말인지 알았지!"
"예? 아......알겠습니다."
우베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적여보였다.
들것에 실린 카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셔틀에 오르고 있었다. 그는 서류꾸러미를 들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우베를 붙들고 물었다.
"우베! 무슨 일인가!"
"적들에게 발각된 것 같습니다. 여기 위치도 곧 드러날 것 같아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8번 부락이 낫겠군.....그런데 솔은 어쩌고? 아직 안돌아왔잖나?"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곧 따라올 겁니다."
카렐의 질문에 움찔 한 우베가 고개를 잔뜩 숙여붙이며 일단 되는대로 둘러댔다.
"조심해야 될텐데......"
얼굴을 조금 찡그린 카렐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을 아래 정글을 내려다보았다.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포박되어 질질 끌려온 솔은 근위대에 먼저 잡힌 두 병사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차마 볼 수 없을만큼 잔혹하게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경악을 하고 말았다. 카인이 침을 퉤 뱉으며 손에 들고있던 쇠꼬챙이를 집어던졌다.
"벌써 불었습니까?"
가디언의 질문에 카인이 냉담하게 대꾸했다.
"내장을 파내는데 지가 버티겠어? 지금쯤 제파 대장이 출동했겠지."
"그럼.....이년은 어쩌죠?"
"데려다가 심문하게 끌고가."
아무 생각없이 돌아서려던 카인의 시선이 문득 솔에게로 다시 향했다. 페로 관에서 이미 몇번이나 눈에 익었던 그 모습에 카인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솔이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지만 카인은 솔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고는 고개를 억지로 치켜올렸다.
"너......"
카인이 이맛살을 조금 찡그렸다.
"솔?"
겁에질린 솔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멍 한 표정을 지었던 카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솔을 끌고가려던 근위대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잠깐, 데려가지 마. 이거 재밌어지는데......네년이 왜 여기있지?"
카인이 피묻은 손으로 솔의 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왜있냐고!"
솔을 추궁하는 카인의 목소리가 숲을 쩌렁 울렸다. 완전히 얼어붙은 솔은 입도 떼지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했다. 그때 이들이 버리고 간 짐을 조사하던 근위대원 하나가 카인에게 다가왔다.
"뭐야?"
"이거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 근위대원의 손에는 약병들 사이에 감추어져있던 소형 녹음장치와 발신기가 쥐여 있었다. 솔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녹음내용을 듣던 카인의 표정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카인의 무서운 시선이 솔을 똑바로 향했다.
"네년이......그래서 페로가 널......."
카렐을 실은 셔틀을 1차로 보낸 제네르는 멀리서 다가오는 근위대 강습셔틀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 목소리를 더 높였다.
"시로! 가디언 10명만 데리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
"예!"
밧줄로 꽁꽁 묶어놓은 네피를 셔틀 안에 우겨넣은 조페도 양손에 칼을 움켜쥐고 급히 달려나왔다. 시간이 없어 미처 갑주도 챙겨입지 못한 채 자신의 얼룩무늬 준마에 훌쩍 올라탄 제네르는 창을 움켜쥐고 시로와 함께 제일 선두에 나섰다.
마을 조금 아랫쪽의 냇가에 내려선 근위대 소형셔틀에서 수십의 가디언과 산악병들이 큰 함성을 지르며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이번에 독기를 품고 직접 달려나온 제파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셔틀 빨리 이륙시켜!"
제네르가 셔틀 쪽에 크게 팔을 흔들어보이며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시로, 조페를 비롯한 전사단 가디언들이 몰려올라오는 근위대원들의 앞에 도열해서서는 그들의 1차 돌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 배신자놈!"
근위대원들의 선두에서 달려나온 제파가 제일 앞에서 막아서는 시로에게 대뜸 칼을 휘둘렀다. 멀리서는 근위대의 후속병력을 실은 셔틀들이 속속 다가오고 있었다. 제네르의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마침내 이편의 두번째 셔틀이 이륙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제네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됐어! 달아나!"
뒤로 물러난 제네르가 모아놓았던 말들의 엉덩이를 일제히 후려쳐 내보내자 조페와 십여명의 가디언들이 잽싸게 후퇴해 달려오는 말에 올라탔다. 하지만 제파와 싸우던 시로는 도리어 근위대원들에게 점점 포위되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제네르가 대뜸 말에 박차를 가해 시로 쪽으로 내달렸다. 말의 기세에 놀란 근위대원들이 흩어지자 그는 시로의 말고삐를 얼른 내밀었다.
"빨리 타! 빨리!"
제네르의 목소리를 들은 시로가 급히 고삐를 붙들었다. 제파의 칼을 쳐내고 달아나 말에 뛰어오르려던 시로는 너무 서두른 탓이었는지 발이 미끄러지며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제네르가 시로를 쫓아 달려오는 제파에게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몸을 살짝 피하며 돌아쳐서 창을 일격에 부러뜨려버린 쳐낸 제파는 바로 공중으로 솟구치며 제네르에게 칼을 휘둘렀다. 제네르가 말에 올라 있다고는 하지만 '특등급 가디언'인 제파에게 감히 달려든 건 사실 꽤나 바보같은 짓이었다.
창을 잃은 제네르가 급히 칼을 뽑아들려 했지만 미처 그럴 사이도 없이 제파의 칼끝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익,"
칼을 피하느라 거의 중심을 잃은 제네르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다. 칼날이 그의 윗쪽 가슴을 깊이 베고 빠져나가자 붉은 피가 안장 위에 쫙 번졌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시로가 급히 말에 뛰어올랐다. 피를 흘리며 흐느적거리는 제네르의 등뒤로 제파가 다시 칼을 치켜들며 달려들고 있었다.
"떨어져!"
시로가 있는힘껏 휘두른 도끼에 제파의 긴 바스타드 소드가 쨍 하는 요란스런 소음을 내며 튕겨나갔다. 한손을 뻗어 거의 정신을 잃은 제네르의 말고삐를 대신 붙든 시로는 있는힘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네르는 당장이라도 말등에서 떨어질 듯 흐느적거리고 있었지만 시로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정신차리세요! 예?"
이미 눈빛이 흐려진 제네르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말의 갈기를 움켜쥔 채 겨우 매달려 있었다. 근위대들을 가까스로 따돌린 시로는 기다리고 있던 조페와 함께 새 본부가 만들어질 8번 예비부락을 향해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제기랄! 다잡았는데!"
제파가 멀어져가는 적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뒤이어 도착한 셔틀에 타고있던 제롬이 사뭇 섭섭한 표정으로 제파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어쩔 수 없지......다음번에도 또 기회가 올테니 이걸로 만족해야지. 그런데 아까 그 여자기병은 누구지? 낯이 좀 익은 것 같던데."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동부출신 하급귀족이고 남극성당에서 경세지학 교수로 있었다고 하더군요. 카렐 그년의 오른팔입니다."
제파의 대답에 제롬이 순간 경악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엔지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제롬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궁싯거리고만 있었다. 병사들이 마을을 뒤지며 혹시모를 정보를 찾아 적들이 남겨두고 간 자료들이나 쓰레기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도보로 이곳까지 온 카인 녀석의 정찰대가 도착한 건 그때렸다.
"잡았습니까? 제파 대장?"
"조금 늦었어, 제길......그년은 뭐야?"
카인이 실실 웃으며 솔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솔의 얼굴을 본 제롬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지자 카인이 그를 놀리듯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어떻습니까? 이정도면? 끝내주는 미인이죠?"
솔에게 다가간 제롬이 그의 하얗고 매끈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낯선 남자의 접근에 당황한 솔이 버둥거리려 했지만 카인에게 붙들려 옴쭉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입김까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바싹 들이댄 제롬이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진짜 죽여주는데. 이런 년은 처음이야."
"솔이라고, 페로 관에서도 최고로 꼽혔었죠. 황족이나 대신급 이상 접대에나 얼굴만 잠깐 내보였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요상한 이유로 아무도 손은 대지도 못했지만."
"요상한 이유라니?"
제롬의 물음에 카인이 다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명색이 최고제후인 제롬을 가지고 노는듯한 그의 발칙한 태도에 제롬이 성을 낼 만도 한 상황이었지만 눈앞의 솔에게 완전히 넋이 빠져버린 제롬은 머릿속에 그 사실을 떠올릴 여유조차도 없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쓰다듬던 제롬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와 목과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솔이 또다시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카인이 그런 제롬을 더 자극하듯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조심하십시오. 제롬 델루지 각하. 알고보면 무서운 년입니다."
"무서운 년?"
"가디언 네피의 친딸입니다."
순간 기겁을 한 제롬이 솔에게서 얼른 손을 떼었다. 제파의 표정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솔의 옆 얼굴을 힐끗 바라본 카인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다시 속삭였다.
"그리고오......카렐 그녀석과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
제롬이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정말로 탐나는걸......이년이 이꼴된 걸 알면 카렐 그것 표정이 어떨까?"
솔에게 바싹 다가선 제롬 공이 거칠게 저항하는 솔의 입술을 강제로 덮치자 카인이 또다시 빈정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조심하십시오. 보긴 이래도 가디언 피가 섞어서 힘이 꽤 셀겁니다."
"상관없어. 나도 충분히 세."
보다못한 제파가 제롬의 팔을 붙들며 솔에게서 억지로 떼어놓았다.
"됐습니다. 훌륭한 인질을 확보했으니 이제 돌아가야겠습니다. 처자식도 있으신 공께서 부하들 앞에서 이런 모습 보이시는 건 좋지않으니 이제 그만하시죠."
"전리품을 차지하는 건 승자의 권리야."
솔의 입술을 마구 유린하고 난 제롬 공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떼며 중얼거렸다.
"각하, 이러시면 안됩니다."
제파가 말리는것도 아랑곳없이 거구의 제롬 공은 꽁꽁 묶인 솔을 어깨에 불끈 둘러메고 이미 비어있는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솔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제롬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파가 마지막으로 그의 앞을 막아서며 호소하듯 말했다.
"이러시면 인질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각하 품위에도....."
"걱정 마. 난 최고제후야. 내 첩 삼으면 될 것 아냐."
제파를 뿌리친 제롬 공은 솔을 끌고 빈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제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에 둘러선 병사들을 큰 소리를 질러 쫓아내버렸다.
"썅! 꺼져! 여기서 뭐해!"
열이 뻗친 제파는 발에 걸린 돌조각을 사정없이 걷어차 버렸다.
"대장님! 베흔 근위대장님께서 지금 오신답니다!"
제파는 당혹스런 얼굴로 제롬 공이 들어간 집 쪽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집 앞에 다가간 제파의 예민한 귀에 솔이 지르는 처절한 비명소리와 제롬의 거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차마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던 제파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고 말았다.
"썅!"
멀리로 베흔이 타는 검은색 셔틀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전긍긍하던 제파는 셔틀이 내려서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막 나오려는 베흔을 붙들고 절박하고 호소했다. 제롬이 여자를 겁탈하려 든다는 말에 그 차갑던 베흔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무어?"
씩씩거리며 그 집으로 달려간 베흔은 문짝을 부서져라 두들기기 시작했다.
"문 여십시오! 빨리 여십시오! 지금 도대체 뭐하시는 짓입니까!"
문은 생각외로 금방 열렸다. 성난 얼굴로 집 안에 뛰쳐들어간 베흔은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다.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솔의 얼굴은 이미 몇대를 얻어맞았는지 온통 피와 눈물, 침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네 왔나?."
흐뜨러진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제롬이 키득거리며 옷을 챙겨입었다. 베흔은 땅이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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