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6화 (66/1,132)

< -- 66 회: Part 3. A China Aster for Me -- >

28.

1번 셔틀로 8번 예비부락에 도착한 우베와 아메스는 제일먼저 카렐을 빈집 안으로 옮기고 해체해온 집들을 다시 설치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착한 두번째 셔틀에는 나머지 가디언들과 토로 경, 꽁꽁 묶인 네피가 태워져 있었다. 우베가 포박을 풀어줬지만 이미 완전히 진이 빠져버린 네피는 멍 하니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솔......"

"......죄송합니다. 저희가 당장이라도 녀석들하고 접촉해서 몸값을 주고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지난번 녀석들한테 훔쳐온 돈도 있고......"

네피는 바닥에 쭈그려앉은 채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그의 눈물이 우람한 근육질 팔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메스가 그런 네피의 등을 두들겨 주었지만 네피의 굵은 눈물자락은 멈추지를 않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푹 아메스가 우베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전하께도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말해야 돼요?"

우베는 많이 난처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노가 대단하실텐데......"

크게 한숨을 내쉰 우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카렐이 있는 집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카렐의 째지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썩을! 왜 이제야 얘기하는거야!"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 극도로 흥분한 카렐이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있는 듯 했다. 울고있던 네피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카렐의 집 쪽으로 걷고 있었다.

"카렐....."

문 앞에 멍 하니 선 네피가 얼굴이 벌개진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카렐을 바라보았다. 카렐의 달아오른 얼굴이 순간 지독한 죄책감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다가간 네피가 카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카렐은 그런 네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마을에 도착한 제네르의 얼룩무늬 말에는 아무도 타고있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제네르를 가슴에 꼭 껴안고 도착한 시로는 새 마을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를 안아들고 의사에게 달려갔다.

"제 잘못입니다, 모두 다 제 잘못이예요."

고통스러워하는 제네르의 손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며 애타하던 시로는 응급처치를 받는 제네르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제기랄, 환자가 둘로 늘었네. 심하지 않아야 할텐데."

우베가 갚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근위대의 군자금을 훔쳐내면서 잠시 축제분위기에 빠져들었던 전사단은 또다시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오후에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께서 오실겁니다."

"뭐, 뭐라구?"

베흔의 한마디에 제롬이 기겁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부인께서 황궁에 혼자 계시기 쓸쓸하시다고 하셔서 며칠만 제가 모시고있기로 했습니다."

베흔이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그런 그의 속셈을 모를 정도로 멍청한 제롬은 아니었다. 제발 말썽을 피우지 말고 ㅤㅋㅞㄹ크를 떠나달라는 베흔의 거듭된 권고에도 제롬은 솔과 함께가 아니면 절대 가지 않겠다며 버티던 참이었다. 이미 이틀이나 솔과 잠자리를 함께한 제롬은 그 계집아이에게 빠져도 단단히 빠져있음이 확실했다. 지금 이상황에서 그를 통제할 수 있는 건 솔을 첩으로 들일 수 없을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어머니 네페티 부인 뿐이었다.

"나 그렇게 기가막힌 여자는 처음이야. 몸값이건 뭐건 내가 다 낼테니까 나한테 넘겨. 내 첩으로 삼을테니까."

"안됩니다."

베흔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카렐과 네피녀석 양쪽을 다 꿰고 있으니......저희 입장에서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인질입니다. 첩으로 삼는 문제는 어차피 혼자 결정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닐텐데요......그 결정권을 쥐신 네페티 부인께서 곧 황궁에서 출발하실텐데 마중나가셔야죠?"

베흔이 여전히 능청스런 미소를 지으며 제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굴을 약간 찌푸려보인 제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쏘아붙였다.

"내가 그런다고 갈 줄 알면 오산일세. 근위대장."

씩씩대며 나가버리는 제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베흔이 결국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망할 자식.....도대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카렐이 아침부터 언덕 밑을 멍 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베가 머뭇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저녁 8시에......그쪽 본영에서 1차 접촉을 갖기로 연락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해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네피 대군령님도 그 소식에 그나마 안도하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가서 상황을 보고.....녀석들 제시금액도 알아보고 나서......돌아와 보고드리겠습니다."

카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오.....이게 쓸모있는 정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황궁에 있던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이 오늘 낮 3시에 ㅤㅋㅞㄹ크에 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새벽 페로 관 쪽에서 보내온 정보입니다."

카렐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살기가 번득이기 시작했다. 지난번 사고 이후 처음으로 보인 그의 살기어린 눈빛에 움찔 하고 놀란 우베가 자기도모르게 조금 뒤로 물러났다.

"네페티 부인이?"

"예......제롬 공의 모친......"

"얌전히 우리 지역에 들여보내 줄 수는 없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카렐이 우베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런 카렐의 시선을 읽은 우베가 고개를 조금 끄덕거려보였다.

"하지만 저희 힘만으로는......셔틀을 타고 올텐데.....

"총리쪽에 도움을 요청해. 오는 시간만 항로만 알고있다면 그쪽에선 그정도는 할 수 있을테니. 어차피 우리가 한 것으로 다 뒤집어쓰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카렐이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절대 다치시게 해서는 안돼......절대로."

네페티 부인이 탄 셔틀이 ㅤㅋㅞㄹ크에 가까와지자 제롬 공이 탄 다른 셔틀이 옆에 다가왔다. 창 너머로 아들의 셔틀을 확인한 부인이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어머니를 셔틀까지 타고 마중나오는 것이 제롬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는 건 네페티 부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단단히 큰 잘못을 저지른 저 아들녀석이 어머니인 자신에게 시작부터 잘보이려 어지간히 애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게 뭐지?"

제롬이 스캐너에 나타난 이상한 형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셔틀 조종사가 그쪽 조종사에게 대고 주의를 주자 그쪽에서 곧 알았다는 답변이 곧 돌아왔다. 이곳 ㅤㅋㅞㄹ크는 워낙 오지인만큼 드나드는 민간셔틀도 사실 드물게나 가끔 보일 때름이었다.

"민간의 화물셔틀같습니다."

"재수없게."

제롬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쪽 셔틀은 이쪽을 피하려는 듯 고도를 조금 높이고 있었다. 발밑으로는 ㅤㅋㅞㄹ크에서도 가장 숲이 빽빽하기로 유명한 북부밀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방금전의 화물셔틀이 제롬이 탄 셔틀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바깥구경을 위해 잠시 눈을 돌렸던 제롬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울린 엄청난 폭음에 기겁을 하고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충격에 셔틀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기랄! 이게 뭐야!"

겨우 기체의 중심을 잡은 셔틀 조종사는 제롬 공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맙소사! 저걸 보십시오!"

창쪽으로 고개를 디민 제롬은 어머니가 탄 셔틀이 조금씩 고도를 낮추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뭐야? 저쪽 조종사한테 물어봐!"

"......방금 지나간 셔틀이.......무언가 장난을 치고 간 듯 합니다. 저쪽 셔틀에 계기고장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잠시 불시착하겠다고 합니다."

"따라가! 따라가!"

제롬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이쪽이 위험합니다!"

부인이 탄 셔틀은 나무들 위를 스치는가 싶더니 키큰 나무들을 차례차례 들이받으면서 꽤 요란한 소리를 내고는 한참을 더 나아가고 있었다. 두세개의 빈 버블들이 차례대로 셔틀에서 튕겨나오고 있었지만 기체를 동강내고 완충장치를 무력화시킬 정도의 큰 사고 같지는 않았다. 셔틀은 나무들의 완충 덕택인지 다행히 정글 중간에 제대로 멈춰섰다.

"다행입니다. 동체는 무사하군요."

제롬의 셔틀 조종사가 주인을 달래주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제롬은 여전히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사실 저정도 사고로 사람이 다치지야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칫 이 일로 어머니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와지기라도 한다면 그로서는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착륙 안하고 뭐해?"

제롬이 짜증을 부리자 조종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워낙 정글이어서 착륙할만한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착륙할만한 곳을 찾느라 주변을 잠시 배회하던 셔틀은 하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추락한 셔틀이 '쓸고지나간' 엉망진창의 바닥 위에 셔틀을 세워야 했다.

"부상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버블도 제대로 작동됐고....."

셔틀 조종사가 문을 열어주며 제롬에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저으기 안심한 제롬은 몇명의 경호원과 함께 불시착한 어머니의 개인 셔틀 부근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뭐, 뭐야!"

이미 열려있는 셔틀 문과 그 위에 걸쳐져있는 경호원의 목잘린 시체에 크게 당황한 제롬이 급히 셔틀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하지만 셔틀 안에도 목이 잘리거나 칼에 베인 서너구의 경호원 시가 뒹굴고 있었고 조종사도 이미 목에 베어진 채 죽어버린 후였다.

"어머니! 어머니!"

셔틀에 무작정 뛰쳐든 제롬이 내부를 미친 듯 뒤져댔지만 다만 뒷쪽의 가장 상석에 걸쳐있던 부인의 보라색 케이프가 남아있는 부인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사색이 다 된 제롬은 바닥에 털석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의 명령으로 주변을 수색하던 경호원들이 가져온 건 이미 누군가가 마구 뒤진듯한 부인의 피묻은 짐가방이 고작이었다.

열 명의 호위병을 동반하고 근위대 본영에 도착한 우베는 신분을 확인하는 근위대들에게 흰 깃발을 흔들어보였다.

문을 열어주자 조심스럽게 당나귀를 몰아 안에 들어선 우베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건 입구에 걸려있는 원주민의 머리 두 개였다. 지난번 카렐의 약품을 구하기 위해 솔과 함께 보냈던 그 두 명의 원주민 병사들이었다. 전사단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친하다고 하기도 역시 뭣하겠지만----ㅤㅋㅞㄹ크 원주민들을 협박하기 위한 근위대 녀석들의 특별한 전시물임이 확실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 우베는 위병의 안내를 받으며 연병장을 지나 사령실로 쓰이는 막사에 다가갔다.

'대단하군.'

내부 구조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입력시키며 우베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잘 정돈되고 제대로 갖춰진 시설의 근위대 본영의 규모는 전사단의 본부 마을 정도와는 감히 비교가 될 것도 아니었다.

"제기랄,"

제롬이 막사 안에 들어선 우베에게 괜한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얼음같이 굳어있는 베흔, 무표정한 카인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낮에 있었던 네페티 부인의 실종사건의 충격을 애써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우베는 중앙에 앉아있던 제롬에게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를 해 보였다.

"소인 타르서스출신 평민계급의 우베 마르코스라 하옵고 전사단 통수권자의 보좌관을 맡고 있사옵니다. 남부 최고제후이신 제롬 플레렌 델루지 공을 이렇게 만나뵈어 영광이옵니다."

"전직이 보따리장사꾼이라 들었는데."

베흔이 먼저 선공을 개시했다.

"보좌관이라.....거 참 거창한 이름이군."

"수만의 정예병을 거느린 자칭 '대장군'도 보는 사람에 따라선 '수괴'가 될 수 있듯이 저희 천박한 보따리장사꾼도 스스로는 '소액무역상'라 부르고 있사옵니다. "

우베가 베흔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한 대답이었다. 베흔이 그를 무섭게 쏘아보았지만 우베는 베흔의 그런 시선을 교묘하게 피하며 앞에 미리 놓여있던 의자에 태연하게 앉았다.

"일단......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이틀 전에 있었던 불미스런 사건의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저희의 요구사항은 지난번에 전사한 두 명의 병사의 시신과 생포된 솔 양의 신병을 넘겨달라는 것입니다. 솔은 전투원이 아니고 그냥 민간인일 뿐이니......"

베흔이 미리 작성해놓았던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시신은 각각 2천 골드씩. 솔이라는 계집의 몸값은.....흠....."

베흔의 요구에 우베가 즉시 대꾸했다.

"시신이 2천 골드라니 좀 많이 과하시군요. 사병 시신 수습비는 20골드가 정상입니다."

"우리맘이야."

제롬이 거만한 자세로 쏘아붙였다. 베흔이 여전히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솔이라는 계집의 몸값은 5억을 주면 되겠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우베가 짐짓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도안되는 몸값은 협상을 않겠다는 말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런 이들 앞에서 괜히 처음부터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우베를 비웃듯 묘한 미소를 지어보인 베흔이 중얼거렸다.

"우린 솔의 신분을 알고있네. 누구 딸인지......누구 여자인지."

우베가 순간 웃음을 딱 멈추었다. 근위대들이 솔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로서도 너무나 뜻밖인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춘 우베는 들고온 가방을 정리하며 괜히 시간을 조금 끌고는 베흔에게 중얼거렸다.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군요. 제 주 임무는 솔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니 그 아이를 만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음대로."

베흔이 손으로 회의실 한쪽의 문을 가리켰다. 제롬은 우베가 솔을 단둘이 만나는 것이 도무지 맘에 안드는지 연신 무언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우베에게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 제롬을 베흔이 조심스럽게 막아섰다.

"맙소사,"

방에 들어선 우베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몸 곳곳에 멍이 잔뜩 든 솔은 손이 밧줄로 묶인 채 침대맡에 멍 하니 앉아있었다. 우베가 가방을 내던지고는 급히 솔의 두 뺨을 붙들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맞은거야?"

우베의 얼굴을 확인한 솔은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솔의 목과 가슴 위쪽에는 누군가가 입을 맞춘듯한 여러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우베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세상에......이걸 어떡해.......전하께서 가만히 안있으실텐데......"

우베가 솔의 어깨를 붙들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어느정도까지 당한거야? 솔직히 말해 봐. 알아야 우리도 어떻게 대처할 것 아냐."

"......미안해요."

솔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죽고싶어요......정말이요......죽고싶다구요."

우베의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원만한 포로협상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 된 셈이었다. 반 쯤 넋이 나간 솔은 계속 울고있었다.

"누가 그런거야? 제롬인가 저자식이야?"

고개를 끄덕인 솔이 호소하듯 입을 열었다.

"제발, 절 데려가주세요, 오늘밤도 또......그럴거라구요. 제발, 꼭 데려가주세요."

솔이 결국 우베의 옷자락을 붙들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우베는 솔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걱정 마. 오늘부터는 절대 못건드릴거야. 내가 약속하지. 조만간 데리러 다시 올께."

"안돼요, 제발, 제발 데려가주세요,"

솔이 울부짖었다. 카렐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알려야하나 눈앞이 캄캄했다. 우베는 울며 매달리는 솔을 일단 떼어놓고 힘없이 밖으로 나섰다. 제롬이 우베를 바라보며 여전히 뭣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표정을 정리하느라 약간의 시간을 소비한 우베가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상태가......별로 안좋군요."

"상태? 죽인것도 아니고, 피를 본 것도 아니고, 고문을 한 것도 아니고......뭐가 문제란 거지? 그냥 잠깐 데리고 놀았을 뿐인데. 아마 그년도 꽤 즐겼을걸."

제롬의 뻔뻔한 대꾸에 우베는 욱 하고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겨우 억누르며 짐짓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아하......그러신가요? 아차.......제가 한가지 더 말씀드리는 걸 잊었군요......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말씀입니다."

베흔과 제롬의 얼굴에서 동시에 핏기가 싹 가셔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제롬은 입술만 바들거리며 떨고 있을 뿐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정글 도적떼에게 잡혀가던 걸 저희 병사들이 구해내 보호중입니다."

흥분한 제롬이 우베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며 막사가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어떡한거야! 썅! 이 썩을놈들! 어떡한거냐고!"

"물론,"

제롬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꿈쩍도 않으며 우베가 계속 빈정거렸다.

"물론, 죽이지도, 피를 보지도, 고문하지도 않았습니다.......아직은 말씀입죠."

마지막 말에 힘을 잔뜩 주며 우베가 불안에 떨고있는 제롬의 초록색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분께선 '동등한 조건'에서 거래를 원하십니다. 글쎄, 부인께서도 '즐기기'를 원하실지......가서 여쭤보죠."

마음껏 빈정거린 우베가 뒤로 휙 돌아섰다. 지금 자신이 뭐라 쏟아내건 저들이 감히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임을 우베는 잘 알고 있었다. 서부 최고제후이며 남부 최고제후의 어머니인 네페티 부인의 몸값 정도라면 사실 솔 정도의 노예 백 명을 갖다바쳐도 부족할 판이었다.

막사 밖으로 사라지는 우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베흔의 표정이 어느새 절망에서 분노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모두 저 망할 개망나니녀석 때문이었다. 베흔은 뭐 잘했다고 혼자 흥분해 날뛰어대고 있는 제롬을 매섭게 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다 피도 안섞인 그 노인네를 닮아버린거냐."

솟구치는 울분을 이겨내지 못한 베흔이 자기도모르게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모든 건 저 망할 제롬, 친아버지의 냉정함과 끈기는 전혀 물려받지 못한 자신의 아들, 제롬 때문이었다.

++++++++++++++++++++++++++++++++++++++++++++++++++++++++++++++++++++++++++++++++++++++++++

대강 따져보니 이번주 중으로 파트 3이 끝나고 다음주엔 파트5에 접어들 것 같습니다.

파트 3은 주요 내용이라기보다는 카렐의 회복기간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과 그동안 밀어두었던 주변 이야기들, 앞으로의 이성관계(?)가 한번에 몰아서 등장하는 부분인만큼 ---그덕이 원본엔 18금도 많았습니다. ^^;;;--- 짤막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도 코멘트와 추천은 작가의 낙입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