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 회: Part 3. A China Aster for Me -- >
방 중간에 앉혀진 네페티 부인은 겁에질린 창백한 표정으로 주변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근위대출신 가디언인 시로와 조페가 주스와 넥타를 권했지만 부인은 많이 긴장한 듯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이틀 전 제파에게 다친 상처로 오른팔과 가슴에 붕대를 한 제네르는 조금은 침통한 표정으로 포로로 잡혀온 네페티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 역시 무슨 일인지 그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가 먼저 부인을 향해 약간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걱정마십시오. 아무도 부인을 해치지는 않을 겁니다. 덥고 목마르실테니 이거라도 드십시오. 안그러면 여기선 지치십니다."
시로와 조페는 거부하던 네페티 부인은 제네르가 내민 음료잔을 받아들고는 그제서야 억지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제네르,"
둘의 친근한 대화에 사람들이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부인과 제네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페가 그런 제네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분 아세요?"
"조금요. 아주 좋으신 분입니다."
제네르는 부인이 마시고 돌려준 물잔을 한구석에 내려놓으며 아직 심하게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꼭 껴안아주었다. 제네르의 가슴에 기댄 채 떨고있던 네페티 부인이 조심스런 말투로 물었다.
"카렐은......어디 있지?"
"많이 아프셔서 다른 곳에 계십니다."
"나도 알아.......만날 수 있을까? 할말이 꼭 있는데......"
제네르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문밖을 문득 바라보았다. 그는 부인에게만 들릴정도로 작게 속삭여주었다.
"어차피......만나게 되실겁니다."
잠시 후 병사 한 명이 들어와 모두에게 알렸다.
"우베 님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그분을 만나고 계십니다."
우베가 돌아왔다는 말에 기대 반 설레임 반으로 별 생각없이 서로 마주보던 그들의 귀에 카렐의 째지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간부들이 모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뭐?"
잠시 후 이 자그만 움막의 나무문이 부서질 듯 홱 열리더니 눈이 붉게 충혈된 네피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리고는 묶여있던 자그만 네페티 부인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고는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버렸다.
"왜이래? 뭐하는짓이야?"
시로와 조페가 네피를 가로막고 말리려 했지만 흥분한 네피는 갑자기 괴력이라도 솟는지 그 둘을 확 떠밀어버리고는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진 부인의 멱살을 다시 움켜잡았다. 상황을 눈치챈 네페티 부인의 그 선한 얼굴에 극도의 공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년도 똑같이 해 줄테다. 이번엔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네피가 부인의 어깨를 거칠게 끌러내리자 사람들이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시로와 조페가 다시 달려들어 네피의 손아귀에 질식 직전이 되어버린 네페티 부인을 가까스로 끄집어냈다.
"바보짓하지 마. 네피."
모두 일제히 문을 향해 머리를 숙여보였다. 목발을 짚은 카렐이 문에 기대 눈을 번득이며 우베와 함께 서 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우베가 모여선 사람들에게 비키라며 눈짓을 해 보였다.
"카, 카렐?"
카렐의 얼굴을 본 네페티 부인의 얼굴이 거의 백짓장이 되어버렸다. 부인은 흘러내린 어깨를 허둥지둥 추스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무표정하게 부인을 내려다보던 카렐이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아들이 한 짓에 대한 댓가를 대신 치러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상황인지 대강 눈치를 챈 제네르가 아연질색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눈을 가늘게 뜬 카렐이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모두 나가."
"예?"
"모두 나가라고 그랬다. 알았나?"
"전하, 심정은 이해하옵니다만 이러시면......"
제네르가 그답지않게 카렐의 앞에 넙죽 꿇어앉으며 그의 다리를 붙들었다.
"이분을 아시지 않으십니까, 못난 아들의 허물로 벌하시기는 너무나 여리신 분이십니다. 제발, 진정을 찾으시옵소서."
제네르가 카렐에게 마지막으로 간하려 했지만 그의 다음번 말은 네피가 거칠게 내뱉은 말에 가로막혀 버렸다.
"이년도 똑같이 해놔야 돼!"
"모두 나가!"
카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결국 모두 급히 오두막을 비워주는 수 밖에 없었다. 제네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없이 서 있는 우베를 바라보았다.
"상태가 도대체 어떻길래."
우베는 차마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였다. 마을 언덕 귀퉁이에는 얼빠진 듯한 표정의 네피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네페티 부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렐은 목발을 짚고 비틀거리며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일으켜세웠다. 네페티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난......아들녀석을 말리러 가던 길이었어."
"그래서요?"
카렐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내게......똑같이 하려고?"
네페티 부인이 벌벌 떨며 물었다.
"그럴수도 있겠죠......솔은 제겐 친딸같은 존재니까......"
카렐이 히죽거리며 웃어보였다. 부인의 크고 선한 눈망울이 그의 죄책감과 공포를 나타내듯 어느새 잔뜩 젖어들어가 있었다. 부인의 멱살을 쥔 카렐 역시 이를 악문 채 가쁜 숨만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부인의 가슴에 아직 달려있는 상장을 바라본 카렐은 결국 그의 멱살을 쥔 손을 스르르 놓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공평치는 않겠군요."
큰 숨을 내쉰 카렐은 자신의 흔들리고 있는 감정을 감추려는 듯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네페티 부인이 카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베흔과는 여전하시겠죠?"
부인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편을 그렇게 해놓은 것이 베흔이라는 걸 모르시지는 않을테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카렐의 발 아래 고개를 숙인 네페티 부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몹쓸 짓이라도 하려고 마음먹고 왔는데.....당신 얼굴을 보니 차마 못하겠군요."
"제발, 그만해......차라리 날 욕보이던지......복수를 하란 말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시죠? 7년동안 연인으로 있던 사람한테, 당신을 욕보여 달라구요? 정말로 웃기신 분이군요."
냉랭하게 대꾸한 카렐이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려는 듯 물 한 컵을 벌컥 들이켰다.
"후훗, 근위대 남부파견군 사령관과 남부 최고제후 부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라......뭐, 지금보니 로맨틱하긴 했군요."
다시 돌아선 카렐이 네페티 부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내게 원했던 게 애정이 아니라 특별한 잠자리 뿐이었다는 걸 몰랐던 건 틀림없는 제 잘못이었죠. 그래도 얼토당토않은 폭도진압을 나갔다가 죽음에 직면한 제 지원군요청을 당신이 왜 묵살했는지, 그정도도 모를만큼 바보는 아니었나봅니다. 그냥......흔해빠진 배신의 하나였겠죠. 물론, 더 오래되고 더 힘있는 애인인 베흔의 요구이기도 했겠지만......"
"제발, 차라리 복수를 하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그러세요? 가슴뼈가 으스러지고 턱뼈와 늑골이 산산조각나서 후송된 전 어떻구요? 제가 그 몸으로 도적들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때 베흔과 잠자리를 하고 계셨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다정하게 연극공연도 다녀오셨고. 모르죠, 그 직후에 자이센 가로 소유권이 넘어가지 않았으면 남부에서 얼마나 더 흉칙한 꼴을 당했을지."
"제발, 그게 아냐, 내 말을 들어줘, 그땐....."
"당신에겐 이제 관심없습니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쏘아붙이던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부인의 목덜미와 어깨에 코를 가져갔다. 잠시 킁킁거리던 카렐의 입가에 악마적인 미소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베!"
카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카렐의 부름에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우베가 허겁지겁 뛰쳐들어왔다.
"예?"
"의무실에 가서 '실파니' 호르몬 용액을 주사기에 적당량 담아달라고 해. 그렇게만 말하면 알아들을거다."
"에......예? 아, 알겠습니다."
카렐은 벌벌 떨고있는 부인을 잠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우베는 몇분 걸리지 않아 붉은 액체가 조금 들어있는 주사기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우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건.....의무관 말이......"
"넌 입다물고 나가있어. 다른데 말하지나 말고."
"물론.....입니다."
네페티 부인을 힐끔 돌아본 우베는 얼른 뒷걸음쳐 방에서 빠져나가버렸다. 목발을 내려놓은 카렐은 그때까지 바닥에 꿇어앉아있던 부인에게 바싹 다가갔다.
"굳이 부인께 복수할 필요도 없겠군요."
"무슨......소리야......"
카렐이 갑자기 부인의 아랫배에 손을 가져갔다.
"아직 배가 나오지는 않았군요. 입덧을 않으시는 걸 보니 1, 2개월정도 됐습니까? 아기 아버지는 당연히 베흔이겠고?"
새파랗게 질린 네페티 부인이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카렐이 대뜸 그의 목을 그 큰 손으로 거칠게 붙들었다.
"제발, 이러지 마, 제발. 이애는 베흔 아이가 아냐, 남편 유복자야, 정말이야,"
주사기를 집어든 카렐은 바늘을 부인의 얼굴 앞에 바싹 들이댔다.
"제롬 그새끼를 임신했을때도 모두 남편의 아이인줄로 알았었겠죠?"
"정말이야, 근위대장님 아이가 아냐,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상관없습니다. 이번 복수의 대상은 베흔이 아니고 제롬이니까. 동생을 유산시켜버리는 정도면 충분한 복수가 되겠죠? 가거든 그 두 남자들한테 알려주는 것 잊지 마십시오. 제가 부인의 뱃속에 들어있던 새 생명을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말이죠."
울부짖는 네페티 부인을 억지로 껴안은 카렐은 그의 목 옆에 주사바늘을 사정없이 찔러넣었다. 주사바늘이 파고드는 고통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부인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부인의 결사적인 몸부림도 멈추었다. 바늘을 뽑아낸 카렐은 주사기를 구석으로 내던져버렸다.
"결국은......"
네페티 부인이 카렐의 가슴에 기댄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내 죄는 그럼 어떻게 되는거지?"
"구차스런 용서보다 잊는 것이 편할때도 있습니다."
카렐이 다시 목발을 짚고 일어서자 부인이 카렐의 발목을 급히 붙들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그건 내 뜻이 아니었어. 정말이야."
애원하는 부인에게 카렐은 냉랭하게 쏘아붙였을 따름이었다.
"그대로 베흔하고나 잘 사시죠."
부인에게서 쌀쌀맞게 돌아선 카렐은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서 들려온 부인의 비명소리에 밖에서 전전긍긍해하던 사람들이 약간씩 쭈삣거리며 들어와 일제히 부인의 얼굴부터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멀쩡한 모습'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네페티 부인을 보고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제네르가 큰 숨까지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그때까지도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부인을 다시한번 껴안아주었다.
"우베. 솔과 부인을 1대1로 교환하겠다. 부인을 제일 좋은 방에 모셔."
감정없이 밋밋한 말투로 지시를 내린 카렐은 다시 목발을 짚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리고 있었다. 이 오두막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그들 중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다만 카렐이 부인에게 '몹쓸 짓'은 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정도밖에는.
ㅤㅋㅞㄹ크의 서부 늪지대에도 늦은 저녁의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다. 늪 반대편에는 코아 전사단에서 온 사람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 올라탄 제네르와 시로, 우베가 그 선두에 말없이 서서 방금 도착한 근위대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호, 오랫만이군. 시로."
베흔이 시로에게 갑자기 아는척을 하기 시작했다.
"황궁의 호화스런 독실을 놓고 떠나더니, 새로구한 바나나잎사귀 초가집은 어떠신가?"
"황궁보다는 백배 속편합지요."
시로가 웃음띤 얼굴로 대꾸했다.
"지난번 반역은 어쩌다 용서받았지만 이번 반역은 거열형을 받아도 모자랄것일세."
"어련하시겠습니까."
둘간의 의미없는 신경전은 우베의 한마디에 일단 중지되었다.
"자. 그럼 그쪽에서 먼저 보여주시죠."
근위대원들이 셔틀에서 솔을 데리고나와 앞쪽에 세워놓았다.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제네르가 애써 당혹감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근위대 병사들이 시신이 담긴 두 개의 관을 전사단쪽에 가져다놓고는 재빨리 물러났다. 이번엔 우베가 핏기가 가신 표정의 네페티 부인을 그들 앞에 세워놓았다.
"네 짓이군. 제롬."
제네르가 반대편에 서 있는 제롬을 알아보고는 말을 건넸다. 제롬이 난처한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네르가 그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오랫만에 본 남극성당 동기동창을 이런 입장에서 마주해야 하다니.....참 황당한걸."
"닥쳐, 이 거지 꾸정물통쟁이 같으니."
제롬의 약간 심하다싶은 한마디를 그대로 웃어넘긴 제네르는 솔에게 오라고 눈짓을 해 보이고는 네페티 부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이며 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한숨을 내쉰 네페티 부인은 쭈삣쭈삣 뒤를 돌아보며 더딘 발걸음으로 아들과 베흔 쪽으로 걸었다. 제롬이 무사히 돌아온 어머니를 꽉 껴안았지만 부인의 시선은 그 뒤에서 떨리는 표정을 가까스로 감추고 있는 베흔에게 줄곧 멎어있었다.
"녀석들이 몹쓸짓은 하지 않았습니까? 카렐 그것이 틀림없이......"
베흔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네페티 부인이 고개를 무겁게 가로젓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그다지 솔직하지 않은 대답이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 짓 안했어요. 아무 짓도......"
부인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사단 일행을 싣고온 저 작은 셔틀 안에 카렐이 타고 있는 것을 부인은 잘 알고있었다.
포로교환 광경을 셔틀 안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카렐은 결국 말없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 자신이 황손임을 부인에게 밝히면서 내심 의기양양해하던 자신의 모습에서 지독하게 유치해진 스스로를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부인에게 자신이 베흔보다 '나은 사람' 임을 호소하고 싶은 본심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흉칙한 몸과 끔찍한 전력에 괴로워하던 자신을 갈등조차 없이 따뜻이 보듬어안아주었던 세상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 사랑만큼이나 뼈아픈 상처를 남겼던 네페티 부인이었다.
하지만 부인의 뱃속에 있던 새생명을 짓이겨버린 것에 후회는 전혀 없었다. 그것이 솔을 능욕한 제롬에 대한 복수였던, 부인을 다시 빼앗아간 베흔에 대한 지독한 질투 때문이었건, 아니면 그 둘 모두였건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