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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8화 (68/1,132)

< -- 68 회: Part 3. A China Aster for Me -- >

29.

어둠이 깔린 페로 관 서문에 얼핏 평범한 차 한대가 들어섰다. 십여명의 가디언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차는 행랑과 사랑채를 지나 집안에서도 가장 은밀한 서측 안채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외부인의 접근이 완전히 통제된 안채 내부는 썰렁하다 싶을 정도로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셨습니다."

차를 호위하고 들어온 십여명의 고급 페로가디언들이 일제히 안채 주변의 각자 맡은 위치로 가서 서고 있었다. 안채 문이 열리더니 깔끔한 차림의 페로가 모렌 박사와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차에서 제일 먼저 내려선 우베가 페로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페로가 평소처럼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약간 끄덕 해 보였다. 뒤이어 내린 5명의 기병들이 지팡이를 짚은 카렐을 부축해주고 있었다. 서로 시선이 마주친 카렐과 페로는 보일듯말듯 약간의 눈웃음을 서로에게 보내고 있었다.

"우베 마르코스 보좌관은 옆방을 쓰도록 하십시오. 수행기병들은 맞은편 행랑에 방 7개가 있으니 충분할겁니다. 보안을 위해 식사나 다른 필요한 물품은 밖에서 저희 사람들이 가져다드릴 겁니다."

모렌 박사가 우베에게 일렀다. 모두 자리를 비우고 방 안에 단 둘만 남게 되자 페로는 그제서야 카렐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네가 온다고 그래서 난 뭐 잘못들은건줄 알았어. 세상에, 결국 이렇게 돌아오다니."

"정말 반가워. 페로."

카렐도 밝은 얼굴로 페로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많이 나아졌네."

"응. 그럭저럭."

"오늘밤은 일단 편히 쉬어. 공식발표는 내일 있을거야. 동부제후 쪽에서 파견한 대사들도 모일테고."

"그래, 그러지."

'동부제후'들이라는 말에 카렐이 내심 긴장한 가슴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카렐이 페로의 지지를 받아 이쪽의 제위 후계자로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들이 바로 동부제후들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동부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페로에 비한다면 카렐 입장에서는 사실 그들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일 별다른 수단도 없었다. 그리고 제위 도전을 포기해준 페로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큰 댓가를 해 주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오늘부터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되새기며 카렐은 다시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룬의 호위를 받으며 안채를 나서는 페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베가 옆에 있던 모렌 박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총리각하께선 항상 저렇게 치장에 신경쓰시나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악세사리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기시죠. 매일 그날그날 옷과 장신구를 결정해주는 복장전담하고 재봉사가 따로 있을 지경이니까."

모렌 박사가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이번에 카렐을 수행하고 온 '꼬맹이' 라손 바얀 부단장이 그 말에 '감동'받았는지 두 손을 꼭 모아쥐고 페로가 나간 문만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동부 여인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페로의 집에 간다는 말에 단장으로 있는 친구 제네르에게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해서 합류한 그는 페로의 수려한 외모를 본 이후로 연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우베가 그런 라손 들으라는 듯 약간 비꼬는 투로 또다시 물었다.

"듣자하니 여기 미녀들이 천하제일이라고들 그러던데, 후훗, 총리각하도 알아주는 미남이시고.....손짓 한번에 잠자리로 순순히 들어올 여자들이 지천이니 얼마나 행복하실꼬, 아마-매일-밤-여자가-바뀌-시겠죠?"

우베가 마지막 말에 잔뜩 힘을 주어 한마디한마디 또박또박 발음하자 라손이 눈을 치켜뜨며 그런 우베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깔깔대며 웃음지은 모렌 박사가 냉큼 대꾸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총리각하는 보통 혼자 주무시니까. 여자건 누구건 엔간해선 함께 안주무세요."

"어라? 정말요?"

라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남쪽 안채 미녀들은 그냥 접대역일 뿐이죠."

"어, 혹시 그럼......혹시......남자로서 문제가......"

우베의 황당한 의문에 라손이 그를 또다시 째려보았다. 모렌 박사가 폭소를 터뜨리며 대꾸했다.

"왜 여자하고 잠자리를 잘 안하시는지는 모르겠어요. 젊으셨을때부터 무슨 이유인지 여자들을 무지하게 싫어하셨다니까. 뭐, 아메스 아씨 태어난 거 봐선 특별히 몸에 문제가 있으신 것 같지는 않은데."

우베가 한숨을 내쉬며 마루에 털석 주저앉았다.

"에이그, 난 그렇게 까다로운것도 필요없는데 왜 여자가 안생길꼬. 캬아......솔 정도만 돼도 평생 마누라 얼굴만 바라보고 살 수 있을텐데."

"그 키에 솔한테 매달려 살지나 말지."

라손의 일갈에 우베가 기가막히다는 듯 대뜸 대꾸했다.

"얼씨구? 지금 남말해요?"

도토리 키재기를 하듯 코를 맞대고 삿대질을 해대는 '콩알' 우베와, '꼬맹이' 라손을 바라보며 수행기사들이 웃어야하는것인지 말아야하는 것인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다음날 회의를 평소같은 북측 사랑채 회의실이 아닌 서쪽 안채에서 한다는 말에 페로의 보좌관 보벤 경은 약간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안채에 들어선 보벤 경은 상석에 카렐와 나란히 앉아 귀엣말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페로를 보고는 경악을 하고 말았다. 1대 1 회의라면 당연히 카렐과 페로가 방의 양쪽 끝에 마주앉아야 정상이었지만 그 둘은 상석에 나란히 자리잡고 앉아 아랫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거기 앉게."

페로는 보벤 경에게 상석과 하석의 중간 자리를 가리켜보였다. 뒤이어 들어온 우베와 라손, 다룬과 킵은 어디에 앉아야 하나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거기들 앉지 않고 뭣들하나?"

페로가 아직 서서 머뭇거리고 있는 아랫사람들에게 재촉하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제일 아랫자리에 줄을 맞추어 앉았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실리페 황후는 '이 이상한 자리배치'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런 상황을 금방 파악할 정도로 충분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실리페 황후는 페로가 채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기도 전에 카렐의 옆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보벤 경은 배치 자체가 당혹스러운지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리배치만 보아서는 카렐은 페로와 동격이었고 자신보다 윗사람이었다. 그런 보벤 경의 불만을 넌즈시 무시해버린 페로가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우리 가디언부대와 코아 전사단은 군사동맹체를 결성한다."

페로의 선언에 우베가 올 것이 왔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정보는 공유하며, 서로에게 지원군 및 피신처를 제공한다. 나와 옆에 있는 카렐이 공동 통수권자가 된다."

"헉,"

보벤 경은 물론이고 함께있던 동부 대사들까지 당혹스런 얼굴로 눈짓만을 주고받고 있었다. 페로가 그런 그들의 눈치를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 동맹체에는 내 가디언 총 만여명과 그 지원조직 일체, 코아 전사단의 가디언부대 1000명과 슈로 기사단, 정규군조직과 지원조직이 모두 포함되며, 차후에 휘하에 추가되는 병력도 모두 이에 해당된다. 즉, 코아 전사단도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내 가디언부대 역시 카렐의 명에 복종해야 한다. 이 통수권에는 작전권뿐만이 아니고 그 운영전반에 관련된 모든 것이 포함된다. 나와 카렐의 통수권은 동등하며 독립적이나, 원칙적으로 모든 사안은 둘의 협의하에 결정할 것이다. 이상이다."

페로가 카렐을 돌아보자 카렐이 고개를 조금 끄덕거려보였다. 이번에는 카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부명령체계 혼란을 막기 위해 동맹체 결성사실은 일단 극비로 한다. 자이센 가문 가디언들의 경우 특급가디언들과 페로 자이센 총리의 보좌관, 동부 5제후 종장까지만 이 사실을 통지하며, 코아 전사단의 경우 전사장급 이상 간부에게만 이를 통지한다."

말을 마친 카렐은 아직까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있는 보벤 경을 바라보며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알겠습니까? 보벤 슈트란 경."

",,,,,알겠습니다."

보벤 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여느 다른 귀족들이나 마찬가지로 '일개 가디언'인 카렐이 직계상 자신보다 상위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감, 아니 속에서 치솟는 지독한 거부감을 애써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50년 전에 카렐 님 처음 여기 처음 왔을 때 딱 저분위기였는데."

다룬이 옛생각이 나는지 옆에 앉은 킵에게 중얼거렸다.

"모두 한잔씩들 하지."

페로가 우베와 라손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페로에게서 직접 술을 하사받은 라손은 좋아 입을 다물지 못하며  받은 술을 차마 마시지도 못하고 바라만보고 있었다. 페로에게 술병을 넘겨받은 카렐은 아직 불만이 그득한 얼굴로 앉아있던 보벤 경에게 제일먼저 팔을 내밀었다. 당혹스러워하는 보벤 경의 전에 술을 부어준 카렐은 다룬과 킵에게도 각각 술을 내리고 바로 옆에 있던 실리페 황후를 돌아보았다.

황후가 카렐의 귀에 대고 가늘게 속삭였다.

"결국 일보 전진이군."

한 번 피식 웃어보인 카렐은 황후에게도 술을 내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앞에 있던 큰 잔에 술을 가득 담아 들어보였다. 페로는 미리 준비해온 쥬스잔을 들어올렸다. 카렐이 술잔을 드는 모습에 우베가 기겁을 하고 놀라며 반 쯤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술을 드시면......"

놀라 멍 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며 잔을 한 번 거칠게 맞댄 둘은 서로 상대의 입에 들고있던 잔을 들이댔다.

하지만 얼핏 웃음띤 얼굴로 쥬스를 들이키는 카렐에게는 페로에 관련된 것 외에 또한가지의 고민거리가 남아있었다.

"페로 경과의 동맹이라,"

우베의 보고서를 앞에 놓고 회의를 하던 전사단 간부들은 모두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다만 토로 경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한숨만 내쉬고 있었고, 네피는 옆에서 좋은 말로 달래는 아메스에게 계속 뭐라 툴툴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가장 현실적인 대안 아닌가요?"

시로가 웃으며 말하자 토로 경이 다분히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다음엔?"

"예?"

"근위대를 물리친다고 치자고. 그 다음엔?"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토로 경이 좀 더 언성을 높였다.

"그 때 페로 자이센 총리 그인간 봤잖아! 그런 사람이 제위를 양보할 것 같아? 어쩐지, 그 딸을 이리 보낼 때부터 알아봤어. 손잡을 인간이 따로있지!"

"말씀이 심하시군요."

제네르가 중간에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아메스를 힐끗 돌아보며 입을 열었지만 토로 경의 흥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심하긴 뭐가 심해! 전하를 죽이려고까지 들었던 인간을 어떻게 믿냐고? 지난번에 칭찬 한 번 듣더니 자네 완전히 그쪽편 됐구먼? 왜? 페로 그녀석이 나중에 대단한 감투라도 줄 것 같아 그러나? 허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자네야 동부 사람이니까."

토로 경의 악담에 가까운 한마디에는 토로 경---그리고 그를 위시한 전사단의 구 북부 세력들---의 의심이 그대로 서려 있었다.

한때 동맹까지 결성하며 전통적인 우방관계를 자랑했던 북부와 동부는 세째태자와 결혼했던 세네피스 당시 태자빈의 북부 세력이 동부가 지지하던 장태자 세력을 누르고 제위에 오르면서부터 삐걱거려오기 시작했던 터였다. 그리고 북부가 근위대에 몰락할 때 동부 역시 그들의 지원을 묵살하면서 한번씩 '주고받은' 상황이었고, 원래부터 사이가 안좋았던 남부나 서부만큼은 아니겠지만 옛날의 '전통우방' 따위의 말은 감히 꺼낼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현실도 알고 다 안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믿을만한 놈과 손을 잡는 게 순리지. 페로 그새끼하고 동맹을 결성한다고? 말도 안돼."

토로 경이 손사래를 치며 연신 씩씩거렸다. 그간 이래저래 제네르에게 평소 묵은 감정이 많던 토로 경이 이번에 마음먹고 그를 몰아붙이려는 모양이었다. 아끼던 슈로 기사단의 지휘권이 넘어간 것을 넘어서서 카렐의 칙령을 명목삼아 제네르가 병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을 그도 모르던바가 아니었다.

제네르가 토로 경에게 핀잔받고 있는 모습에 발끈 한 시로가 뭐라 한마디 하려는 것을 눈치빠른 조페가 잽싸게 뜯어말렸다. 이 싸움에서는 같은 귀족인 제네르가 맞서는 것이 제격이었다.

제네르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들었지만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너무 앞서가지 마시지요. 전하께서 어떤 식으로건 그 일에 결정을 지으실 것으로 압니다. 전하도 안계신 와중에 그런 식으로 분열을 조장하시는 건 어른다우신 행동이 아닌 줄 압니다."

토로 경을 앞장세운 북부출신 구귀족 세력과, 제네르를 위시한 병부의 젊은 신진 귀족세력과 가디언들은 결국 '페로 경과의 동맹인정여부'를 놓고 첫번째 파벌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네르는 카렐이 자신에게 '자신의 입을 대신해달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떠난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흥분한 토로 경이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 것을 보다못한 슈벨 수반이 급히 말리며 모두에게 알렸다.

"분위기가 좀 그러니 한시간 후에 황후폐하를 모시고 회의속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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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일까지 파트 3 엔딩을 위한 3연참을 해볼까 합니다만 될지......(이놈의 급한 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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