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0화 (70/1,132)

< -- 70 회: Part 3. A China Aster for Me -- >

32.

주로 불안정한 행성들이 대부분인 북부제후지역에서 사실 사람이 살만한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초에 이주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이기도 한 이 북부지역은 당시 초기이주시의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었던 '풍부한 지하자원'의 보고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약한 육체로는 견디기 힘든 수준의 가혹한 환경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살기를 꺼리는 곳이기도 했다.

결국 북부민들은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동셔틀, 혹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광공업 컴플렉스 내에서 '노동자'로서 살던지, 아니면 선택받은 피 혹은 억세게 좋은 운을 타고나서는 몇 되지않는 '그나마 살만한 곳'에서 원격으로 노동자를 등쳐먹고 사는, 두가지 인생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보니 북부는 노예제도가 엄연히 존속하는 이 제국 내에서 명목상으로는 노예가 가장 적은 특이한 곳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평민들은 노예제를 대신하는 소위 '고용계약'에 의해 실상 노예나 별반 다름없는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민들은 자신들이 제국 내에서 가장 잘 사는 제후민들이라는 엄청난 착각을 하며 살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들이 받는 '급여'라는 것은 제국민의 평균치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형적으로 거대한 갖은 종류의 합법적, 불법적인 향락, 위락산업---물론 이들을 고용한 자들이 직, 간접적으로 운영하는---은 이들의 '부유해진' 주머니를 순식간에 다시 털어가기에 충분한 수준이었고, 더불어 제국에서 가장 퇴폐적인 지역이라는 그다지 명예스럽지는 못한 꼬리표를 함께 선사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에게 돈을 주고, 그에 비례한 더 많은 돈을 거둬들여가며 끊임없이 재산을 불려온 이들 북부제후들은 가장 비옥한 지역을 차지한 남부와 맞먹을 정도로 부유한 자들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품격을 지키며 산다고 자부하는 다른 지역 제후들---특히나 걸핏하면 '도리'를 입에 달고사는 서부제후들---에게 천박하다며 무시당하기가 일쑤였고, 실제 그들의 재산이라는 것도 실제로 존재하는 재산인지 아닌지조차 알쏭달쏭한 금융자산, 유동자산, 투자자산 등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이 붙은 채 장부상에나 적혀있는 숫자놀음인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 중 가장 '선택받은 피'에 속하는 북부 상급제후들은 이곳에서도 그나마 제일 살만하다는 코윈---다른 지역 사람이 보기에는 실상 얼음뿐인 살벌한 불모지에 불과했지만---에 모여서 서로서로 땅따먹기하듯 자기 영지를 그어놓고는 때로는 돕기도 하고, 때로는 으르렁거리기도 해 가며 '북부제후'라는 이 별볼일없는 소속감을 애써 자위하고 있었다.

코아 전사단 소속의 수송선이 내려선 곳은 이곳에서도 그나마 제일 나은 지역이라는 적도 부근의 카파키 가문 직할영지였다. 일찍부터 미리 나와 세네피스 황후를 기다리던 황후의 먼 친척들은 열린 해치 사이로 그리도 고대하던 자신들의 종장의 모습이 나타나자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종장도 없는, 몰락해버린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마셔보는 옛 고향의 공기에 황후는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위험한 길에도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제일 앞서나와 황후를 반기는 건 레곤 대공주의 모사이기도 한 옛 가신 푸아킨이었다.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대공주께서는?"

"아드님 일로 지금 서부제후쪽에 계시옵니다. 이곳에 오실 수 있을는지 여부는 유동적입니다. 대신 제게 황후폐하를 맞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서부에 있는 아들이라면......코리온 대군?"

갑자기 눈을 매섭게 치켜뜬 황후가 따지듯 묻자 푸아킨이 조금 난처한 듯 대답했다.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 정신병자 녀석은 아직까지도 말썽인가?"

황후가 그답지않은 상소리까지 섞어가며 투덜거리자 푸아킨은 차마 할 말이 없는지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해치에서 내려선 황후에게 카파키 가 방계친척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보였다. 직계의 유일한 생존자인 황후에게 있어서는 모두 촌수를 따지기도 골치아픈 먼 친척들이었지만 황후는 그들 하나하나의 손을 꼭 잡아주며 이 오랫만의 친척상봉을 맘껏 즐기고 있었다.

130여년 전 500여명의 직계들은 이미 모두 다 죽어 사라졌으니 이제 세네피스 황후가 명목상이나마 이 가문의 종장, 그리고 북부 최고제후가 되어야 할 터였다. 물론 이쪽의 기대대로라면.

"다른 제후들은? 왜 자네들뿐인가?"

세네피스 황후가 친척들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명색이 '최고제후'의 귀환임에도 그를 마중나온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카파키 가 방계 친척들이 고작이었다.

"60년쯤 전부터......다른 제후들은 저희 가문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50년 전부터는 제후회의도 2제후 펠머슨 가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거의 몰락해버린 최고제후가문의 비참한 모습을 또한번 확인한 세네피스 황후는 우울한 시선으로 그 눈동자와 똑같은 회색빛 암울한 코윈의 하늘을 말없이 올려보고 있었다. 황후로 있던 시절, 중상정책과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공업지역인 북부를 강력히 지원했던 황후였지만 이제는 무너져 한 줌 먼지값도 되지 못할 옛 영광일 따름이었다.

"저희는 모두 방계라서......펠머슨 가 녀석들이 직계 종장이 아니면 회의를 주관할 수 없다고 다른 제후들을 모두 선동하는 통에......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사실 황후를 이곳에 불러들인 것 자체부터가 카파키 가로서는 꽤 큰 모험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황후로서도, 카파키 가로서도 더 늦기 전에 북부에 어느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해야 하는, 아니면 최고제후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다음번 제후회의가 보름 후로 알고있습니다만."

황후의 등뒤에서 들린 건 카렐의 그 특이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다음번 제후회의는 당연히 황후폐하께서 주관하실 수 있겠군요."

결국 듣다못한 푸아킨이 황후에게 다시 다가와 말했다.

"291년의 집단학살 이후로 펠머슨 가는 황실에서 불하한 꽤 많은 개척지를 차지했습니다. 현재로서 카파키 가는 펠머슨 가를 직접 상대할 정도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옵니다. 현재 카파키 가의 규모는 제4제후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근위대의 핍박 속에서 그나마 유지한 것도 이분들의 노고 덕분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황후는 푸아킨 경과 카렐의 얼굴을 잠시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때 카파키 가의 외무를 총괄하던 가신이었던 푸아킨은 황후 쪽에서는 중요하게 써먹을 수 있는 쓸모있는 인물이었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푸아킨의 귀에 잠시 무어라 속삭여준 황후는 순간 입이 쩍 벌어져버린 그에게 단단히 일렀다.

"이젠 저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게나. 알겠는가?"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된 카파키 가의 종가는 방계 친척들이 묵고 있는 남쪽의 별채를 제외하고 본채는 거의 비어있었다. 황후는 옛 종장이던 아버지가 쓰시던 큰 응접실에 우두커니 선 채 벽에 걸린 아버지의 큰 초상화를 멍 하니 올려보고 있었다. 초상화는 누군가가 난도질한 듯 너덜너덜해졌을 정도로 칼자국이 선명했지만 최소한 막내딸과 외손녀에게까지 이어질 또렷한 회색빛 무지개톤의 눈동자와 갈색의 머리카락만은 선명했다.

"저분도 한때는 촉망받던 초기 유학자셨지. 내가 유학자의 길을 택한 이유이기도 했고......하지만 2차 혼란기에 남-서부 연합군에 패한 할아버님과 큰아버님이 근위대 손에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셔야만 했지. 그 뒤로 아버지은 복수심에 눈이 멀으셔서 돈과 권력만 추구하는 속물이 되고 말으셨고."

고개를 조금 숙인 황후는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안고 있는 카렐의 큰 손을 꼭 붙들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무기로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황실을 협박해 나를 세째태자와 결혼시키면서 아버지는 나름대로 승리감을 만끽하셨을거야. 하지만 난......그때까지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고......결혼식 겨우 4일 전에 처음 얼굴을 본 태자라는 남자는 술과 여자에 찌든 기색이 역력한......한심하기 짝이없는 인간말종이었지. 그때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었던지......"

황후는 처음으로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장갑을 벗은 카렐은 어머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리도 고대하셨던 내 결혼식은 황제 암살사건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고.....그래, 제국을 호령했던 그 한때는 좋았지. 꺼지기 직전에 더 환해지는 불꽃처럼 말이야."

황후는 약간 삐딱하게 걸려있던 초상화를 똑바로 고쳐걸며 그 위에 붙어있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아버지가 옛날 그 아버지와 똑같이 처형당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먼저 죽은 6명의 자녀들 생각을 하셨을지......오르마즈 언니의 경고를 듣지 않은 후회를 뒤늦게 하셨는지.....아니면 비참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한 못난 막내딸 걱정을 하셨을지....."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 황후는 결국 카렐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시 이렇게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이렇게 돌아왔지......나 역시도 아버님이 산채로 껍질이 벗겨져 죽어가는 모습을 두눈으로 똑똑히 봤고, 무서운 복수심도 그대로 품고 있고 말이지.....그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하지만 난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을거다. 내겐 황제가 될 내 핏줄이 있으니까."

291년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직계 생존자인 세네피스 황후가 정확히 125년만에 처음으로 참석한 카파키 가의 제사 분위기는 침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같은 날 처형당한 오백여명이 넘는 가족과 친척의 신주가 모셔진 앞에서 엎드려 눈물을 흘리던 황후는 결국 맏언니 오르마즈의 상을 받들던 중 의식을 잃고 실려나가고 말았다.

"유일한 직계이시니.....전하께서 하시지요."

푸아킨이 작은 목소리로 뒤에 서 있던 카렐에게 말하자 그는 별다른 머뭇거림도 없이 불편한 걸음걸이로 제단 앞에 똑바로 섰다. 어떻게 가디언 따위가 제사를 주재할 수 있냐며 친척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지만 카렐은 그에도 아랑곳없이 제문을 다 읽고 불에 태워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불의의 자들은 후손의 손에 이제 그 댓가를 치를 것이니, 고인들께서는 이제 편안히 영면하시옵소서."

불붙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종잇조각들이 카렐의 무지개톤 회색빛 눈동자에 점점이 반사되고 있었다. '복수' 운운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카렐은 지금껏 카파키 가의 학살극이 특별이 잘못되었는지 아닌지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최소한 자신의 핏줄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되기 전까지는.

신주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카렐은 그 중 자신과 똑같은 색깔의 특이한 눈동자를 가진 단 두 사람---외할아버지 투르케스크와, 이모였던 오르마즈 카파키---의 모습에서 문득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했구나......잘했다. 저분들도 기뻐하실거다."

제사장의 침묵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에 뒤돌아본 홀 입구에는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던 세네피스 황후가 무척이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주저하께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까? 전하께는 친 고모가 되시오니......"

푸아킨이 앞에 꿇어앉은 채 조심스럽게 묻자 카렐의 옆에 앉아있던 황후가 대답했다.

"내가 직접 알릴테니 일단은 잠자코 있게."

"알겠습니다."

황후가 대신 대답한 건 카렐이 대답을 안해서는 아니었다. 카렐은 한참 전부터 다른 생각에 한참 몰두해있는 상태였다.

의자 손잡이를 똑똑 두들기며 생각에 잠겨있던 카렐이 한참만에 푸아킨에게 물었다.

"펠머슨 가의 군사력은 어느정도인가?"

"아시다시피 북부제후는 4차 혼란기 이후로는 제후군 운용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던 터라서 여타 제후에 비해 군사력은 매우 미약한 편입니다. 펠머슨 가도 주축인 정규군 가병이 보병대 2만명과 창기병 3천 기 정도가 고작이고 경호원으로 데리고있는 가디언 100명이 전부입니다."

"카파키 가의 가병은......"

"가디언 60여명에 정규군 보병대 만 5천명, 창기병 2천이 고작입니다."

"북부 근위대 파견군은 제후군보다 정예인데다가 그 수도 3만 정도나 되니까......그정도면 베흔이 확실히 북부를 통제하고 있는 셈이군?"

카렐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놓은 카파키 가의 보고자료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정도 병력이라면 옛 영광 타령하며 북부 곳곳에서 판치는 무장게릴라들---근위대에 저항하는 이들을 왜 같은 북부인인 제후군들이 잡아야 하는지는 조금 의아한 일이기는 했지만---과 중요시설 경비에 투입하는 정도로도 바닥나버릴 수준이었다.

"우베."

"예. 전하."

우베가 앞으로 나서며 힘있게 대답했다.

"자네의 장사꾼 소질이 필요할 듯 하네."

"말씀만 주십시오."

우베가 빙긋이 웃어보였다. 카렐은 그의 앞에 두툼한 서류뭉치 한권을 던졌다.

"페로 관에서 입수한 펠머슨 가 관련정보들하고......내가 짬날때 해킹했던 관련정보들이네. 최근들어서 펠머슨 가 지역에서 유난히 파업사태가 많았어. 그 배후가 있는 듯 하니 내용을 분석하고 카파키 가 사람들과 함께 주동세력들을 파악해주게. 시로!"

"예!"

시로가 깜짝놀랄만큼 큰 소리로 대답했다.

"수송선에 함께 데리고 온 가디언 6백은 철저하게 보안을 지켜야 하네. 답답해 죽을 지경인 건 이해하겠지만 얼마간만 참아주면 나중에 크게 한탕 벌리게 해 줄테니."

"알겠사옵니다."

"카토!"

"옛!"

여전히 근위대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카토가 카렐의 호명에 평소처럼 근위대식의 경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지난번 북극의 전투에서 네피의 손에 포로가 되어 전향한 근위대 1등급 가디언 카토는 그 우직하고 냉정한 성격 덕에 카렐의 눈에 특별히 띄어 카렐의 개인경호원으로 발탁되어 있었다.

"카파키 가 제후군 사령관과 함께 머무르게. 얼마 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필요하면 활용할 수 있도록 말이야. 자이센 부장."

우베의 옆에 앉아있던 아메스가 고개를 숙여보였다.

"근위대가 틀림없이 이번 일로 펠머슨 가와 접촉했을겁니다. 지금쯤 이곳에 온 우리를 해치려는 공작을 진행중일것에 틀림없으니 페로 관과 연계해서 관련정보를 계속 탐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렐은 마지막으로 옛 가신 출신인 푸아킨과 토로 경을 돌아보았다.

"푸아킨 경께서는 다른 북부제후가에 다녀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제후 펠머슨 가부터 5제후 딜라코프 가까지 모두 들르시고 황후폐하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친서를 돌려주십시오. 근위대 녀석들이 틀림없이 분열책동을 하려 할테니......슬슬 분위기부터 잡아야죠."

세네피스 황후의 친서를 가지고 펠머슨 가를 찾은 푸아킨을 맞은 건 종장인 조르그 펠머슨이 아니고 그 아들 셰니 펠머슨이었다. 매부리코에 유난히 긴 얼굴의, 전형적인 북부인의 얼굴을 한 셰니 펠머슨 경은 작고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다분히 거만한 태도로 이 옛 최고제후가문의 가신을 맞았다.

"아하, 푸아킨 아니신가? 요즘 대공주저하 밑에서 일한다더니, 웬일이지?"

"카파키 가의 공적인 일로 조르그 경을 만나뵈어 왔사옵니다. 조르그 경께 미리 연락을 드렸는줄 압니다만."

"이런이런, 자네 오랫동안 북부를 떠나있더니 이쪽소식엔 깜깜이군. 아버님은 요즘 몸이 안좋으셔서 일체의 공무를 놓고계시다네."

물론 푸아킨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간에는 수명개조 당대세대인 조르그 펠머슨이 최근 무슨 이유엔지 심각한 정신이상으로 아들 손에 사실상 연금되어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푸아킨은 짐짓 그 사실을 몰랐던 척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품에 지니고있던 친서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어보였다.

"그리고 자네같이 똑똑한 사람이 호칭을 틀리다니, 유감이네그려. 북부에서 모든 제후들은 아버님을 조르그 '공'으로 부른다네."

"최고제후이신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전 황후폐하께서 돌아오신 이상 최고제후나 국구에게만 허용되는 '공'이라는 직함은 가당치않은줄로 아옵니다."

푸아킨의 대답에 셰니 펠머슨의 얼굴이 순식간에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사실 그가 놀라는 건 세네피스 황후가 돌아왔다는, 이미 알고있던 뻔한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근위대에 수배받고 있는 신분인 자신의 도착 사실을 이렇게 다른 제후가에 공포하고 다니는, 대담한것인지 무식한것인지 알 수 없는 황후의 행동 때문이었다.

"황후......께서 돌아오셨다고 그랬나?"

"카파키 가문 제사 참석차 오늘 새벽에 이곳에 오셨사옵니다."

셰니 펠머슨이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푸아킨이 내민 친서를 받아들었다.

"그래, 그래, 정말로 북부의 대경사로군......이곳엔 얼마나 계실 예정이신가?"

"월말에 있을 제후회의때까지 머무르실 것으로 아옵니다."

친서를 읽던 셰니 경의 길고 뾰죽한 콧날이 조금씩 씰룩거리고 있었다. '명목상' 최고제후인 황후가 제후회의에 참석하려 든다면 그 저의는 보나마나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기쁜 표정을 지어보인 셰니 경은 받은 서신을 옆에 치워놓으며 사뭇 기쁜 투로 대답했다.

"알겠네. 찾아와줘서 고맙네. 아버님과 상의해보고 다음 일정을 알리겠네."

"감사하옵니다."

뒷걸음질쳐 나가던 푸아킨을 쏘아보던 셰니 경은 기분이 많이 상한 듯 방금 받은 친서를 한손으로 구깃구깃 우그러뜨려 버렸다.

"성깔대로만 사셔서는 곤란하죠."

장막 속에 숨어있던 베흔과 쿠베가 천천히 모습을 나타낸것도 그때였다. 베흔은 셰니 경의 손에 쥐여있던 이미 꼬깃꼬깃해진 친서를 다시 펼치더니 꼼꼼히 읽어보았다. 가는 붓으로 미려한 예서체로 쓴 고대어 문장들은 그 하나하나가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후훗, 역시 세네피스 황후의 화려한 필력은 여전하군요. 부제학시절에서도 제국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명필 문장가로 꼽혔었는데.....천박하기로 소문난 북부에서 이런 학자가 나왔었다니, 대단하죠?"

"가디언 주제에 고대어를 읽어대는 건 안웃긴줄로 아남?"

북부를 완전히 무시하는 베흔의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셰니 경이 대뜸 신경질을 말로 뱉어내고 있었다.

"오랜 권력도 대단한 노력을 기반으로 해야만 하죠."

셰니의 신경질에 대답과 함께 의미없는 웃음으로 답례한 베흔은 친서를 조심스럽게 접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셰니 경이 베흔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에게 원하는게 뭐요?"

"대단한건 아닙니다."

베흔이 셰니 경 옆의 의자에 털석 앉으며 옆에 놓여있던 사과를 집어들고는 한 입 베어물었다.

"경께서는 원칙대로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명목뿐이지만 최고제후가 돌아왔으니 한 번쯤 문안인사라도 드리러 가셔야겠죠. 제후회의때까지 최대한의 예의로 대하시면 될겁니다. 그쪽에 황후와 함께 온 자들이 누구누구인지도 파악해야 할 겁니다."

"그럼 제후회의땐?"

"그땐 제가 따로 말씀드리죠."

눈깜짝할새 사과 한 개를 다 먹어치운 베흔은 또 한개를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셰니 경이 갑자기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내가 근위대장과 이렇게 개인적으로 접촉한다는게 이 북부에선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는 잘 알겠지요?"

"댓가라도 필요하신가요?"

베흔이 실실 웃으며 되묻자 셰니 경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199번부터 202번까지 컴플렉스 말이요. 상속인이 없어서 곧 황실재산에 편입될 예정이라던데."

"그런데요?"

"우리 가문 먼 직계 한놈이 그쪽가문 방계인데.....상속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면 고맙겠소."

"서자에게 상속권이 없다는 건 상식일텐데요."

베흔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셰니 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앉아있는 이 탐욕스럽고 잔혹한 근위대장이 '못된 놈'인 것은 사실 천하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권력이 이만큼이나 굳건한 건 그가 황실을 위해 '지킬 것'은 확실히 지키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베흔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셰니 경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무언가 착각하고계신 모양인데.....전 근위대장이고 황실을 수호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감히 황실 재산을 탐내려 하시다니, 저로서는 심히 불쾌하군요. 지금 제가 이곳에 온 건 펠머슨 가에게 무언가를 '드리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동안 펠머슨 가에 직간접적으로 베푼 호의에 대한 댓가를 '받으러' 온 겁니다. 앞으로를 생각하신다면.....욕심이 지나치게 크시군요."

셰니 경이 많이 당황한 듯 옆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사과 한 개를 주머니에 더 우겨넣은 베흔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쿠베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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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미스테리중의 하나, 왜 꼭 오탈자는 올린 후에야 발견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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