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6화 (76/1,132)

< -- 76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타르서스 지방장관에서 물러나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던 볼토 트라우제가 총리대신 페로에 의해 독직혐의로 해임된 건 카렐이 북부에서 돌아오기 5일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타르서스에 파견한 천 여명의 페로 가디언들은 지방청사로 쓰이는 별궁과 장관 청사를 사실상 점거해버렸고, 볼토 역시도 조사 명목으로 페로 관에 끌려와 있었다.

물론 실제 조사는 고사하고 북측 사랑채 부근의 근사한 별채를 배정 받아 가족들과 모처럼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건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리고는 총리대신이라는 직위를 앞세워 자신의 최측근 심복을 새로운 타르서스 지방장관으로 덜컥 발령내어버린 페로는 이제 3번 도시에 이어 황제령 타르서스까지 사실상 손아귀에 집어넣은 셈이었다.

신임 지방장관 취임식 참석을 마치고 타르서스에서 돌아온 카렐에게 ㅤㅋㅞㄹ크에서 기다리던 제네르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전하 코는 여전하시군요."

카렐이 베흔과의 난투극으로 부서졌던 코에 댄 보호대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카렐 역시 아직 몸이 완전한 상태는 결코 아니었지만 이런 시국에 부상 타령만 하며 속 편하게 쉬고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2달이면 거의 나으리라는 모렌 박사의 예상과는 달리 3달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카렐은 몸 곳곳을 엄습하는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약간 늦게 따로 도착한 우베가 들고 온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아, 자. 우편물들입니다. 페로 관에서 가져왔습니다. 모이세요."

"세상 좋아졌어. 총리하고 가까워진 덕에 우편물도 다 받고?"

시로가 키득거리며 혹시라도 자신에게 온 것이 없나 뚜껑을 냉큼 열어보았다. 물론 가족도, 변변한 친구도 없는 가디언인 그에게 누가 우편물을 보냈을 턱이 없었다.

"뭐야, 달랑 두개잖아?.......어? 두개가 똑같네? 하나는 황후폐하한테 가는거고 하나는 하크로딘 단장님 껍니다. 누가 보냈지?......아이 씨, 이건 웬 그림이야?"

투덜대는 시로가 가리킨 우편물의 '발신지'에는 얼핏 커다란 눈동자 모양같아보이는 문양과 함께 정신없이 휘갈겨 쓴 고대어가 적혀있었다. 고대어를 읽은 카렐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서부의 파예드 아카데미로군."

"엑, 그 천하의 벽창호들이 무슨 일이래?"

아메스가 두 개의 꽤 큼직한 봉투를 집어 들고 한 번 흔들어보았다.

정규교육은 전혀 받은 일 없는 보통의 가디언들이 파예드 아카데미와 남극성당의 그 묘한 라이벌 관계에 관해 알 리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디언들에게 아메스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서부제후지역에 있는 원리주의 꼴통들 집합소죠. 남극성당하고는 웬수지간이고."

아메스는 두 개의 우편물 중 제네르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임자에게 내밀었다.

"거기 녀석들이 나한테 뭘 보냈지? 학계에선 나하곤 완전히 원수지간인데."

몸을 조금 일으켜 자신에게 온 우편물을 받아 든 제네르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가 자기 팔을 다 벌려야 겨우 펼칠 수 있는 큰 종이를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펼쳐놓자 옆에서 어깨너머로 글씨를 힐끗 바라본 아메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어휴, 어떤 놈이 쓴 건지 글씨하난 쥑여주네."

"코리온 세닉 리쿠 학장 글씨로군.......당대 최고 명필 아닌가."

글을 읽어 내려가는 제네르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가자 고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내려온다고 알려진 총 5만자가 넘는 이 난해한 고문자는 기본적인 뜻풀이만 하는데도 최소한 6천자 이상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그 살인적인 학습량 때문에 귀족들, 그것도 유학자가 아니라면 엔간해서는 가까이 접할 일조차 없는 글자였다.

"한 번 보시죠."

제네르가 카렐에게 글을 내밀었다. 순전히 독학으로만 유학을 공부한 카렐이 가끔 유학자인 제네르를 깜짝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제네르도 공식적으로는 '무학'인 카렐이 살아 꿈틀대는듯한, 엔간한 학부 생도들도 읽을 엄두를 못 낼 이 난해한 초서체를 정말로 읽을 수 있을지 조금 반신반의하고는 있었다. 물론 글자를 읽는 능력과 학문적 역량이 반드시 관련 있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제네르도 그의 학문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도무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제네르의 걱정을 비웃듯 카렐은 눈 깜짝할새 끝까지 다 해독해낸 후였다.

"결의문 행사라......"

카렐이 입술을 깨물었다. 글을 함께 읽은 아메스 역시 걱정스런 표정으로 카렐을 올려보고 있었다. 카렐이 급히 아메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메스 아씨. 이 사실을 아버님께 알려주십시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죠?"

우베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어오자 카렐이 낮게 대답했다.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열흘 후에 유학자 집회를 갖는다는군."

"안가면 되잖아?"

네피가 사탕수수를 질겅거리고 씹으며 아무렇지않게 되묻자 그 '단순함'에 다른 가디언들조차 대뜸 곱지않은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제네르가 유학자답게 침착한 말투로 대답했다.

"파예드 아카데미는 남극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유학 교육기관입니다. 남극성당이 주로 정치가들을 배출한다면 이곳은 주로 원리주의 사상가들을 배출하고 있는 권위 있는 곳입니다. 이곳의 초청을 무시하는 건 큰 실례입니다. 그리고 안건이......제국의 새로운 통치권을 위한 결의문발표라고 하니 이만저만 큰 사건이 아닙니다."

제네르의 설명에 뒤이어 카렐이 짧게 한마디 덧붙였다.

"제국을 계급국가로 만들어놓은 게 바로 이들이네."

"계급'이라는 말에 아메스를 빼면 내놓을만한 계급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전무한 이 전사단 수뇌부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에 빠져들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쁜 놈들이네."

잠시동안의 침묵을 결국 평민인 우베가 가시돋힌 말로 깨뜨려놓았다. 그의 명쾌하기까지 한 한마디에 가디언들도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서투른 일반화에 제네르가 일단 제동을 가했다.

"원리주의 유학자들은 제국 내에서 가장 도덕적인 인물들입니다. 넓게 보면 전체 유학자중의 70% 정도가 이 부류에 속합니다."

"도덕적이긴 개뿔,"

네피가 씹던 사탕수수를 퉤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 입심이 얼마나 셌던지 씹고 난 조각은 한참 멀리 떨어진 절벽 뒤로 굴러가 사라져버렸다.

"계급제 만든 새끼들이 도덕은 얼어죽을 도덕이야?"

네피의 막말에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인 제네르가 말을 이었다.

"뭐,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어쨌든 의리와 도덕을 숭상하고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숭상하는 자들이죠. 개중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사는 훈고 원리주의자들도 있으니까. 황제조차도 교리와 규율 아래에서 도덕에 충실한 왕도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덕택에 지금까지 황제들에게 귀여움을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죠."

"진짜 개뿔들일세. 황제가 도덕 타령한다고 나라꼴이 퍽이나 잘 돌아가겠네."

감정 섞인 말투로 내뱉은 우베는 제네르가 펼쳐놓은 그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그림에 가까운 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양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원리주의 설명에 계속 시큰둥한 전사단 사람들을 바라보며 제네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전사단 내에서 그와 '논쟁'을 벌일 사람은 아직 어설픈 아메스를 빼면 결국 카렐과 세네피스 황후 뿐이었다.

"솔직히 저희 전사단의 이상과는 많이 어긋나가는 녀석들이죠. 하지만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한번 집결하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인 코리온 리쿠 학장이 직접 나섰으니......"

"잠깐, 리쿠? 그럼 황족이야?"

네피가 카렐의 얼굴을 한 번 빤히 바라보고는 제네르에게 다시 묻자 제네르가 평소처럼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레곤 대공주의 장남이니까 전하의 사촌 오라버니가 되겠네요. 전하 같은 태자는 아니고 태자급 바로 아래인 대군급이죠. 그러니까......공식적인 명칭은 '세나우스 2세 황제와 데오도스 호지 사이에 난 제6태자 레곤과 예르마크 세닉 사이의 장남 코리온 대군'이 되겠군요."

네피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물었다.

"아씨, 거 더럽게 기네. 몬 이름이 그 모양이야?"

제네르가 초청장을 조심스럽게 접으며 중얼거렸다.

"좀 기벽이 있지만 엄청난 천재입니다. 일설에 사람 마음까지 읽는다고 하던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요주의인물입니다. 전하, 아무래도 제가......"

"어쩔 수 없군."

초청장을 다시 한번 확인한 카렐이 결국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근위대들도 설마 이 초청장을 받고 간 사람을 어찌하진 못할 테니.....어차피 교내는 공권력이 못 들어가는 곳이니 뭐 별일 없겠지. 그래도 일단 시로를 데려가게. 혹시 모르니 무기하고 갑주도 챙기고. 내 전용셔틀 빌려줄테니."

베흔은 정보망을 통해 입수한 코리온의 초청장을 앞에 펼쳐놓고 얼굴을 잔뜩 찡그려 붙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앉아있던 제롬 공은 한낱 가디언에 불과한 근위대장이 자신이---명색이 남극성당 박사과정까지 졸업한--- 읽기에도 골아픈 저 난해한 코리온의 글을 아무렇지않게 읽어가는 모습에 어지간히 놀라고 난 후였다.

"어렵군. 이게 우리에게 이로운 일인지 아닌지도 판단이 안서. 도대체 그 망할 사이코 자식이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잠깐 기다려 보시죠."

베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푸른 클록을 뒤집어쓴 자그만 사람 한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베흔에게 고개를 숙여 붙였다.

"어서 오십시오."

베흔이 그답지않게 너무도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리둥절해 하는 수우 앞에서 클록을 벗은 그 사람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얼핏 평범해보이는 서부 여자였다. 하지만 검은 무명포에 학이 새겨진 보랏빛 머플러를 걸친 위엄 있는 차림이 상당한 고위급 유학자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 정도의 유학자라면 가디언인 베흔은 물론이고 최고제후라도 공손한 예의를 보여야 함이 제국의 법도였다.

"파예드 아카데미의 티모트 부학장이십니다. 이쪽은 수우 플레렌 델루지 전하이시고 옆에는 남부 최고제후이신 제롬 플레렌 델루지 공이십니다."

티모트 부학장이 유학자다운 공손한 태도로 둘에게 인사를 올렸다. 베흔이 웃음띤 얼굴로 초청장을 내보이자 티모트 부학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학장님께서 한달 정도 칩거하시면서 결정하신 걸로 압니다. 측근들 말로는 큰 개벽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니 꽤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보이옵니다."

"다른 내용은요?"

베흔이 여전히 친절한 태도로 물었다.

"주요 유학자들을 초청한 것과는 별도로 저희 학교 출신 유학자들에게 같은 날 아켐 행성계로 집결하라 명하신 모양입니다."

"옛날에 계급제 주청 할 때하고 비슷한 모양이군."

"그때하곤 틀립니다."

제롬 공이 중얼거리자 베흔이 고개를 단호하게 말하며 가로 저었다.

"그때는 집단상소를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상소의 대상이 없습니다......아켐은 서부제후지역의 수도인데 이대로 놔두면 서부제후지역이 혼란상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최고제후이신 네페티 부인께서 잠시라도 그곳에 가 계심이 나을 듯 합니다."

"그래야겠군."

제롬 공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흔이 티모트 부학장에게 다시 공손하게 물었다.

"혹시 초청자 명단 가지고 계십니까?"

티모트 부학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품 속에서 꽤 긴 명단을 꺼내 베흔에게 내밀었다.

"모두 219명입니다. 각 학파별로 고르게 안분된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나누자면 105명이 원리주의 계열이고 63명이 중도파, 51명이 개혁파입니다."

명단을 살피던 베흔이 피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대로 세네피스 황후하고 제네르 하크로딘 그년이 있군요. 하나는 옛 중도파 지도자, 하나는 소장 개혁파 지도자, 후훗, 헤데론 자이센은 명단에는 있지만 그 자존심에 갈 리가 없을 테고......."

"그 둘이 갈까?"

수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베흔이 건성 대답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하나 정도는 분위기 파악하러 보내겠죠."

"또 한번 기회로군."

제롬 공이 싱글거리자 베흔이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섣부르게 행동할 일이 아닙니다. 공식 초청자 명단에 있는데 근위대에서 그걸 빌미로 공격한다면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파예드 교내는 공권력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니 자칫 일만 그르칠 수 있습니다.  체포조는 일단 보내겠지만 분위기를 보아 체포 여부를 결정해야겠습니다. 티모트 부학장님,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쪽에서도 누군가 가보는 게 좋긴 할텐데, 작은 아버님이 가실 분이 아니시고,"

페로가 보벤 경과 새 측근 볼토 트라우제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그도 타르서스 지방장관에서 '자의에 의해' 쫓겨난 후로 사실상 페로의 보좌관 역할을 맡아보고 있었다. 때맞춰 들어온 페로의 비서가 보고를 올렸다.

"전사단에서 연락입니다. 그쪽에서 제네르 하크로딘 경이 파예드 아카데미 행사에 갈 것이라 합니다."

"위험하지 않을까?"

페로가 정색을 하며 묻자 보벤 경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세네피스 황후를 보낼 수도 없지않겠습니까. 다행이군요. 한명이라도 갈 사람이 생겨서."

"그런데 영 불안한걸. 그 코리온 새끼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만만한 녀석이 절대 아닌데....."

명석하고 눈치 빠른 페로조차도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지 초청장 사본을 펼쳐놓고 생각에만 잠겨있었다. 잠시 궁싯거리던 그가 볼토를 가까이 불러들이며 말했다.

"볼토 자네가 잠깐 가주어야겠어. 물론 사업차 가는 걸로 해두지. 지금 당장 가서 서부쪽 분위기 돌아가는 것 좀 파악해주게. 제후들 동향하고 주변 분위기 파악 좀 해봐. 판 녀석하고 가디언 20명을 붙여주지."

"알겠습니다."

페로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볼토 트라우제가 밖으로 사라지자 보벤 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경을 꽤 많이 쓰시는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페로가 제국의 대형지도를 작동시키며 중얼거렸다.

"보라구, 제일 강력한 남부는 확실히 베흔을 지지해. 세력상 세번째 쯤 되는 동부는 확실히 나를 지지하지. 제일 떨어지는 북부는 표면상 중립이지만 뒷구멍으로 전사단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있어. 물론, 카파키 가의 지배력이 떨어져서 그나마도 믿을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그런데 서부는......"

페로가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세력상으로는 남부에 거의 필적하지만 2제후 세호 가나 3제후 발 가에 비해서 최고제후 플레렌 가의 세력이 그다지 압도적이지를 못해. 그나마 최고제후 격인 네페티 부인이 남부 최고제후가문 종부라서 같은 서부 내에서도 불만이 꽤 높고. 아다시피 서부 녀석들은 남부에 대해서 은근히 라이벌의식이 있거든."

"압니다."

"그리고 북부처럼 2제후가 대신 세력을 잡은것도 아니고, 그나마 나하고 얽힌 문제때문에 어정쩡한 입장이지. 3제후 발 가는 아직은 세력이 조금 밀리고. 한마디로 정치, 군사적으로 어느 가문도 '확실한 주도세력'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형국이거든. 결국 지금 결정권을 쥔 게 바로 원리주의 유학자들이란 말이야. 유학자라면 껌뻑 죽는 서부에서 그네들이 그동안 조용하게 있었던 게 도리어 비정상이지."

보벤 경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페로는 계속 머릿속을 엄습하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오......"

페로가 갑자기 신중한 태도로 말꼬리를 끌고 있었다.

"예?"

"코리온 그 녀석은 선대황제의 장조카야. 선대황제가 형제들을 죽이면서 그 자식들까지 모두 몰살시켜버렸으니......선대황제의 5공주가 제위 승계권이 없다면 핏줄만으로는 승계 1순위자가 되는 셈이지."

카렐이 가져온 파예드 아카데미 초청장을 읽은 세네피스 황후의 표정은 평소의 자신만만하던 그의 표정과는 달리 묘하게 침통해져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그럴 것 같습니다."

황후 앞에 앉아있던 카렐이 고개를 숙여보이며 대답했다.

"리쿠 학장은 초면이지?"

세네피스 황후가 카렐의 눈치를 흘끔 살피며 물었다.

"예. 평소 황실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고 아카데미 안에만 머물러있는 인물이어서......."

코리온의 초청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내려간 황후가 갑자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옛 생각이라도 드는지 그의 눈가에 잠시 묘한 우수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초청장을 조심스레 접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장태자가 태어나면 리쿠 학장에게 교육을 부탁할 생각이었단다."

"중도파 석학이신 어머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셔도 충분하셨을 것이옵니다. 어찌 장태자를 절대황권을 부인하는 저들 원리주의자와 함께하도록 하셨겠습니까."

"발현된 S혈통은 같은 류의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그 가르침을 감당할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넌......"

갑자기 뜬금없는 미소를 지은 황후가 손을 뻗어 카렐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카렐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어머니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코리온의 초청장을 한쪽에 치워놓은 세네피스 황후는 자신보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딸의 얼굴과 적갈색의 머리칼을 그 희고 고운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네가 내 곁에 있어 정말 행복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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