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교수회의를 주관하던 코리온은 회의에 약간 늦게 들어온 티모트 부학장을 살짝 노려보았다. 무려 3번이나 사죄의 뜻으로 허리를 굽혀보인 그는 코리온의 발밑에 만들어진 부학장 좌석으로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벽돌 돔으로 만들어진 파예드 아카데미 대강당 안에는 각각의 서열별로 동심원으로 나누어앉은 천여명의 교수들이 마루바닥에 방석 하나씩을 깔고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홀 안에는 안에 모여있는 교수들의 잔뜩 움츠린 낮은 호흡소리만이 들릴 뿐 적막하기까지 했다. 한쪽의 가장 높은 연단에는 당당한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코리온이 이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리온은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은 티모트 부학장 쪽을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들었던 부학장의 눈이 그만 코리온과 딱 마주쳐버렸다.
"헉,"
티모트 부학장이 급히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코리온의 그 기묘하게 빛나는 갈색의 눈동자가 약간 꿈틀대고 있었다.
"부학장께선 회의후에 잠시 내 방에 와주시면 고맙겠소."
"아, 알겠사옵니다."
떨고있는 부학장에게서 다시 신경을 끊어버린 코리온은 다시 교수들을 향해 돌아앉았다. 창밖에서 들어온 사막바람에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리고 있었다.
"여러 교수님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잘들 아실것이오."
"예."
코리온의 맑은 목소리에 미리 맞춘듯한 천여명의 대답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그들의 대답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코리온은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하심 예킨터스 교수에게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코리온의 하급교수시절부터 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충실히 보좌해온 이 교수는 코리온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중의 측근이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학장의 잠자리까지도 아무렇지않게 드나드는 그를 두고 말도안되는 추측을 하는 자들도 없지않았지만 철저한 금욕주의자이며 원리주의자로서의 '정신적 동질감' 이상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코리온에게는 그냥 웃고지나갈 말 그대로 '억측'에 지나지않았다.
학장의 눈짓을 받은 예킨터스 교수가 작은 물대야와 손칼을 들고 그의 옆에 꿇어앉았다.
"오늘은 우리 신성한 원리주의 유학자 40분이 그 천박한 자칭 개혁파들의 손에 학살당한지 정확히 300년이 되는 날이오."
교수들이 또다시 일제히 맞춘듯한 대답으로 홀 안을 울렸다.
"내 그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오늘부터 나의 남자로서의 신성한 상징인 수염을 기르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바요."
조용하던 교수들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속과의 단절을 모토로 삼는 훈고 원리주의 학자들에게 수염은 자존심이고 상징이었다. 물론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주창하는 소장파 원리주의 학자인 코리온은 다른 소장파 학자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단 한번도 수염을 기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세나우스 3세의 죽음 이후 무슨 이유엔지 1년 가까이 수염을 깎지 않아오고 있었고, 행여 그가 훈고 원리주의로 학풍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불러오던 터였다.
존경하는 학장이 수염을 깎는다는 말에 몇몇 훈고 학자들은 엎드려 통곡까지 하고 있었다. 학장이 수염을 깎는다는 것은 칩거하던 그가 무언가 일을 벌리겠다는 공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들 교수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사뭇 비장한 표정의 학장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선 예킨터스 교수가 칼날을 조심스럽게 그의 턱에 들이대자 그 싸늘한 감촉에 코리온이 약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검고 긴 수염이 바닥에 미리 펼쳐놓은 무명포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코리온은 자신의 목과 얼굴을 매만지며 수염을 깎고있는 '여자'인 예킨터스 교수의 손길에도 아무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학장의 수염을 깎아주는 예킨터스 교수의 눈꼬리에는 어느새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코리온은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치켜든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물로 닦아준 예킨터스 교수의 한마디에 코리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거친 수염 안에 숨겨져있던, 아름답기까지 한 미청년의 모습이 길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수염 뒤에 감추어져있던, 오른쪽 귀에 달린 선명한 연두색의 페리도트 귀걸이가 강당을 파고드는 희미한 햇빛에 그 맑은 빛을 제대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코리온이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그 보석만큼이나 청아하고도 힘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니안이 꿈꾸던 새 세상이 곧 밝으리니, 나 코리온 세닉 리쿠는 7대조이신 리 리쿠의 뜻을 받들어 교리라는 칼을 들고 그 선봉에 설 것이오."
"모두 따르겠나이다."
교수들의 일치된 대답에 돔 안이 또한번 울렁이고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코리온은 돔의 벽들을 때리며 되돌아와 그의 귓속을 울리는 그 힘찬 대답들을 느끼며 스스로 절정의 순간에 올라있음을 되새기고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코리온의 뒤를 따라 걷는 티모트 부학장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워보였다. 온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걸어가는 그의 얼굴은 누가보아도 겁에 질려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앞장서 걸어가는 큰 키의 코리온은 아무 말도, 표정도 없었다.
학장실 문이 열리자 코리온은 예킨터스 교수를 비롯한 심복들에게 밖에 그대로 있으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부학장만을 대동하고 안에 들어섰다. 학장과 독대하게 된 티모트 부학장의 공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코리온이 그제서야 그의 앞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신성한 유학자로서 신의를 배반함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인 것을 아시오?"
"......"
"그 천박한 황궁의 근위대장을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셨소?"
"제발.......용서해주시옵소서, 앞으로는......"
티모트 부학장이 코리온의 앞에 납죽 엎드렸다. 그의 앞에서는 어떤 변명도, 거짓말도 통하지 않음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코리온이 대뜸 그의 턱을 잡고 치켜올렸다. 그의 힘에 억지로 끌려일어선 티모트 부학장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또다시 코리온의 눈과 마주쳤다. 그도 마음을 꿰뚫어본다고까지 알려진 이 사이코에 가까운 무서운 학장에 관해 이미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코리온이 아무 톤없는 무덤덤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한비자께서 말씀하셨소. 진실로 공이 있으면 비록 소외되고 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진실로 잘못이 있으면 비록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사형한다고. 내 비밀을 지킬것을 그리도 일렀거늘, 그 천박한 황제령의 무리들과 통하다니......용서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소?"
"제발......"
갑자기 코리온의 오른손이 미처 예상치도 못하고 있던 그의 목을 꽉 움켜잡았다. 티모트 부학장이 버둥대며 코리온의 손목을 쥐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 미끈해보이던 외모와는 어울리지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굵은 힘줄이 넓은 소매 사이로 드러난 그의 오른팔에 선명하게 돋아나 있었다. 몸에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티모트 부학장의 처절한 마지막 몸부림을 코리온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감히, 괘씸하게."
이를 악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코리온은 이미 숨이 끊어진 그를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예킨터스 교수."
코리온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던 예킨터스 교수가 평소처럼 검은 무명포 차림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딩굴고있는 티모트 부학장의 시체를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태연한 얼굴로 힐끗 바라보았다.
"부르셨사옵니까."
"죽음으로서 이제 그 죄과를 갚았으니 장례는 정성스럽게 치러주시오."
"시로,"
한참 떠날 차비를 차리는 시로를 불러들인 카렐이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서부에선 각별히 조심할게 많네."
카렐의 진지한 말투에 시로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부에서 유학자들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라네. 무명포를 입은 자들은 유학자들이니 그들에게는 최대한 경의를 표하고 마주치면 무조건 길을 비켜주어야 해. 물론, 제네르 경이 유학자니까 다른 사람들도 제네르에게 그렇게 대할거야. 그리고 혹시......안좋은 일이 벌어진다해도 절대 유학자들에게는 무기를 겨누지 말게."
황당한 지시에 시로가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네르 경은 유학자네. 그곳에서는 제네르의 말이 곧 자네에겐 법이야. 알겠나?"
"알겠습니다."
말에 나란히 오른 제네르와 시로가 자신의 전용 셔틀이 기다릴 마을 아랫쪽을 향해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렐이 우베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예?"
"우리도 가지."
"가다뇨?"
"서부."
"엑,"
자기 말로 '정세가 걱정된다'라고 했던 서부에 카렐이 정말로 간다는 말에 우베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 있던 아메스도 약간 놀란 얼굴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근위대놈들 관심이 제네르에게 쏠릴테니 이기회에 서부 분위기 제대로 파악해야겠지. 네피, 나 없는동안 ㅤㅋㅞㄹ크를 잘 지켜주게나. 잠깐 분위기파악만 하고 올테니 오래걸리지는 않을거야."
"하여간 놀러다니는데 재미붙었어."
네피가 평소처럼 입을 삐죽거렸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아메스가 급히 끼어들었다. 그동안 행여나 자신의 소중한 자식과 너무 가까이하지 않나 호시탐탐 감시의 눈길을 놓지않는 세네피스 황후 덕택에 약혼자의 얼굴만 바라보며 애간장만 태워온 아메스가 카렐과 단둘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이 기회를 순순히 놓칠 턱이 없었다. 하지만 카렐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베가 서부에서 장사를 한 적이 있어서 그쪽 분위기는 잘 압니다. 많이 움직이면 드러날 수 있으니 아씨께선 제네르 경의 빈자리를 잘 지켜주십시오. 우베와 단둘이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아참, 유사시엔 페로 자이센 총리가 저 대신 지휘할테니 통수권문제는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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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정상 3연참정도 들어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