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8화 (78/1,132)

< -- 78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우와, 얼마만에 와보는 공용터미널인지 모르겠네."

큰 가방 두개를 낑낑대며 들고 우베가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오자 가늘고 긴 가방 하나만을 든 카렐이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평소 입는 검은 수트 위에 옆이 완전히 트인 무릎 아래까지 오는 원피스같은 소매없는 튜닉을 걸쳐입고 화려한 단검 하나만을 허리에 찬 카렐은 무사라기보다는 꽤 키가 크고 품위있는 여자귀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복장도 카렐 말로는 남부파견군 사령관시절 즐겨 입던 스타일이라지만 이것 역시 그다지 가디언답지 않아보이기는 검은 수트나 매한가지였다. 카렐이 이렇게 내킬 때마다 '귀족으로 위장'할 수 있는 건 우람한 체구의 다른 가디언들과는 달리 날씬하기까지 한 몸매와, 그리고 지극히 '시민적인' 흠잡을데없는 외모 덕분이었다.

아픈 손을 털며 우베가 또다시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휴, 이 큰 가방을 두개나 힘도없는 저한테만 맡기시고......너무 불공평하잖아요."

"그럼 자네가 이거 들겠나?"

"예!"

카렐이 쥐고있던 긴 가방을 내밀자 신이 나 냉큼 받아들었던 우베는 그대로 중심을 잃으며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볼쌍사납게 바닥에 나동그라진 우베가 투덜거리며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아이, 씨, 이게 도대체......"

"내 카타나하고 소도일세.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내가 누군지 광고할필요는 없잖나? 바꾸겠나?"

카렐이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우베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휴, 됐습니다. 됐어요."

우베가 투덜거리며 내려놓았던 두 개의 큰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푸엘 숲에서 페로를 구하다가 망가뜨린 옛날의 칼을 대신해 페로가 최고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새로 만들어준 카렐의 대도는 얼핏 보기에는 보통의 것보다 꽤 긴, 붉은 코팅된 은회색 카타나에 불과했지만, 금속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오스뮴과 이리듐의 특수한 합금으로 만들어진 별난 칼이었다.

다만 이 문제의 재료가 그 비중이 무지막지하게 높다는 것과, 그 가공에 가히 초인적인 인내를 요한다는 점에서 결국 그 날렵하고 폼나는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카렐 혼자밖에는 쓸 수 없는 '더럽게 무거운 칼'이라는 것이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물론 엔간한 가디언이라면 드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빠른 속도를 위주로 가볍게 한손 혹은 양손을 넘나들며 사용되어야 하는 카타나의 특성상 이 별난 칼을 완전하게 '제어'한다는 것은 그 칼만큼이나 별난 이 주인 외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왔다.

게다가 카렐 말로는 소도, 다시말해 와키자시라지만 조그만 우베에게는 족히 대도 크기가 되고도 남음직한 두번째 칼 역시 카렐의 체력에 맞게 만들어진 살인적인 무게는 별반 다를바도 없었다.

어쨌든 카렐의 장난에 제대로 속아넘어간 우베가 무어라 계속 투덜투덜거리며 그 키큰 주군을 쫓아 플랫폼 쪽으로 향했다.

"2등실이시군요. 맨 윗층 되겠습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크지않은 객실엔 2개의 자그만 침대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제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우베는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며 카렐 모르게 가방을 한쪽으로 걷어차 치워놓았다.

"기왕이면 널찍한 1등실로 하시지....."

"뭣때문에 그렇게 주목을 끌려고 하는데?"

카렐의 반박에 마땅히 할말이 없어진 우베가 다시 머리를 긁적거렸다.

"서부 아켐까지는 10시간쯤 걸릴겁니다......아참, 혹시 들으셨나요?"

"뭘?"

카렐이 키작은 우베를 대신해 무거운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으며 건성 되묻자 우베가 약간 조심스런 투로 말했다.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이 어제 서부에 도착하셨답니다."

짐을 정리하던 카렐이 순간 멈칫 했다.

"그 얘기를 왜하는데?"

"아뇨......그냥......"

머뭇거리며 카렐의 눈치를 살피던 우베가 꽤나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분 지난번에 인질로 잡혀오셨었을때요......."

"......"

"전하 이름 중얼거리면서 밤새 울고계셨어요."

우베가 또다시 카렐의 눈치를 잽싸게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카렐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엿본거냐?"

"아, 아뇨, 이상한 뜻을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 들었어요, 정말이예요."

"지나가다 들은 놈이 밤새 운 건 어떻게 알아?"

카렐의 추궁에 할 말을 잃어버린 우베가 손가락 장난질을 치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우베야 자기와 딱 맞는 자그만 체구에---키 큰 솔과 함께 있으면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보일 것이라는 라손의 말에 그도 어느정도는 동의하고 있었다.--- 미모와 권력까지 갖춘, 그런 여자를 흠모한 것이 뭐 이상할것도 없겠지만, 그도 네페티 부인이 감금되어있던 곳 주변에서 왜그리 많은 전사단 남자들이 밤새 쓸데없이 어슬렁거렸었는지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어쨌든 네페티 부인의 태도나, 그를 떠나보내던 카렐의 모습에서 눈치빠른 우베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잡아내지 못했을 턱이 없었다.

"다른 특별한 건 없었고?"

카렐은 생각외로 그 이상 화를 내지는 않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우베가 작게 대답했다.

"뭐 밤중에 몇번 헛구역질 하신것밖에는....."

입술을 가볍게 깨문 카렐은 별 말 없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우베에게 등을 보이고 말았다. 2개월이 되지 않은 초기태아를 강제유산시켜버리는 그 '실파니' 호르몬제의 가장 큰 부작용이 바로 5,6시간동안 계속되는 구토증상이었다.

"네페티 부인은 근위대편이야."

카렐의 짐짓 냉랭한 한마디에 우베가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담요를 머리위까지 뒤집어쓴 카렐이 들릴듯말듯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까.....플레렌 가 위치하고 연락처는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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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에 처음 배속받은 카렐에 대한 세나우스 3세 황제의 묘한 관심은 정도 이상이었다. 물론 석고로 떠다붙인 것 같은 카렐의 철저한 무표정과 옆에 다가서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서슬퍼런 살기 덕에 보통의 여자들처럼 대놓고 추군덕거리던지 할 엄두는 전혀 내지 못했지만, 눈에 보이는 곳에 세워놓고 '그냥 구경하기'만으로도 충분한 낙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황제는 카렐에게 '황궁 밖에 오래 내놓는 일'을 도무지 시키고싶지를 않아했다. 어느날 황제가 카렐을 근위대 보안국 책임자로 임명하라는 말도안되는 지시를 내린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근위대 보안국은 황궁의 최종경비와 황제령 내의 불순분자 색출을 담당하는 근위대 내의 엘리트 핵심조직이었고, 야만인 상태에서 벗어난지 이제 겨우 6달밖에 안된 카렐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된다며 펄펄 날뛰는 베흔에게 황제가 황제다운 '명령권'을 발동시켜 의지를 관철시킨 것은 그 사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베흔의 걱정은 카렐이 보안국장으로 임명된지 채 한달이 되지않아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흔이 별 이유도 없이 잡아두었던 8명의 개혁파 유학자들을 카렐이 증거불충분으로 멋대로 풀어주면서 둘의 갈등은 천천히 수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베흔은 그제서야 카렐이 더이상 '푸엘 숲의 야만인'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카렐은 자신에 대한 황제의 '묘한 관심'을 반대로 역이용해가면서 항상 '정도'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수준에서 베흔의 무서운 견제를 교묘하게 피해갔다.

때로는 황권강화를 주장하는 철없는 유학자의 목을 비틀어 죽이면서, 때로는 베흔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상물정모르는 근위대원을 앞장서 축출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베흔이 역모로 잡아들여온 귀족들을 뻔뻔스럽게 풀어주기도 해가며 카멜레온같이 그때그때 옷을 바꿔입는 카렐의 보안국장으로서의 행적은 상급자인 베흔으로서도 그의 설익은 변덕 탓으로 치부해야 하는 것인지, 아예 반골취급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와중에서도 근위대 내에서 베흔의 권위를 그가 야금야금 먹어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로 이래저래 속앓이를 하던 베흔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이미 카렐이 보안국장으로 3년이나 근무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남부제후지역을 방문중이던 세나우스 3세 황제는 괴집단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꽤 심한 부상을 입고 몸져눕게 되었다. 이 '괴집단'의 정체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베흔은 그것이 남부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무장저항집단의 소행이라며 남부파견군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고, 황제는 결국 베흔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갈수밖에는 없었다.

근위대의 2인자 격인 보안국장에서 1급 가디언들이나 맡는 파견군 사령관으로 가는 것은 누가보기에도 명백하게 '좌천'이었지만 황제를 앞세운 베흔의 결정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결국 카렐은 베흔과의 첫번째 파워게임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남부로 떠나는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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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이 직접 서부로 떠났다고?"

보벤 경의 보고에 페로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느낌이 별로 안좋은데......근위대들이 쫓으면 어쩌려고?"

"보좌관 우베만 대동하고 귀족으로 가장해 일반여객선을 타고 비밀리에 떠났다고 합니다. 우베가 서부에서 보따리장사꾼을 했었다니 데려가긴 적임자였겠죠."

"카렐도 뭔가 이상한 걸 느낀건가......그래도 위험할지 모르는데."

볼토에게 판을 대동시켜 서부로 파견한것도 한참 걱정이 되던 차에 믿음직한 카렐이 직접 서부로 떠났다니 페로로서는 내심 든든하면서도 일변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스치고 있었다..

"서부쪽 우리 가디언부대는?"

"지시하신대로 천 명 비상근무중입니다. 저희 영지는 비교적 변방이어서 당장 큰 문제는 없을겁니다."

페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령에서의 세력을 키울만큼 키운 페로는 근 몇십년간 동부와 서부에 영지를 만드는데도 나름대로 힘써오고 있었고, 그 덕에 동부에서는 6제후, 서부에서는 11제후의 위치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동부쪽 영지는 종조부이며 동부 최고제후인 샤자한 공의 도움으로 큰 염려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서부 루쿠스탄에 위치한 영지는 아직 기반이 그다지 튼튼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카렐한테 볼토 연락처하고 우리 가디언부대 접속코드 알려주도록 하고, 지금까지 들어온 관련정보들 보내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페로가 다시한번 초청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남극성당에서 육서과정의 학부와 박사과정을 모두 마친 유학자이기도 한 페로 역시 그들 원리주의자들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생도시절 먼발치서 몇번 마주한 적 있던 코리온의 그 겁날정도로 묘한 기운을 간직한 눈빛과, 그리고 명문 파예드 아카데미의 상급교수였던 그가 일개 박사생도였던 자신에게 지나가듯 던졌던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네 눈속의 그 허함을 채워줄 것은 세속의 권력과 돈이 아닌 듯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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