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유학자들을 둘러싼 서부 병사들이 코리온의 명령에 잠시 주춤거리고 있었다. 서부인들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리쿠 학장의 지시였지만 유학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 역시 서부인에게는 최악의 금기 중의 하나였다.
"뭐하나!"
머뭇거리는 병사들을 돌아본 장교 한 명이 큰 시미터를 치켜들며 바로 앞에 있던 남극성당 교리의 머리를 정면으로 내리찍어 두조각내고 말았다. 터져나온 피와 뇌수가 카펫이 깔린 바닥에 끔찍한 얼룩을 그려내자 앞장서는 장교의 모습에 결국 병사들 역시 폭발하듯 칼을 뽑아들고는 이들 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학장님의 명이시다! 다 죽여!"
장교가 죽은 유학자의 머리를 발에 밟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병사들에게 짓밟힌 학자들이 죽음 앞에서 자존심마저 내버린 채 목숨을 애걸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미친 듯 흥분한 병사들은 그들의 애원에도 아랑곳없이 유학자들의 목과 가슴에 칼을 내리꽂았다. 한 학자는 단상의 코리온 앞에 엎드리며 목숨을 빌어보려다가 뒤에서 내리쳐온 칼에 그대로 목이 잘려 바닥을 나딩굴고 있었다.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바로 1차 학란의 정반대의 재현이었다.
제네르는 자신을 향해 뒤에서 내질러오는 시미터 날을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피했지만 언제 베었는지 왼팔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망할!"
그 병사가 다시 칼을 올려치자 이번엔 제대로 경계자세를 잡고있던 제네르는 다시 몸을 비틀어 칼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제네르는 그 두 번의 공격으로 이미 상대가 그다지 칼을 잘 쓰는 병사는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지 날래지는 않은 세번째 찌르기 공격이 그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어왔다.
"이 풋나기같으니!"
자신이 상대하는 유학자가 무명포를 입은 '동부기병'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그 운없는 병사는 얼떨결에 뻗은 어설픈 찌르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 병사의 팔을 순식간에 나꿔챈 제네르가 발을 걸며 그를 순식간에 바닥에 꼬꾸라뜨렸다. 팔이 비틀린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리자 냉큼 그것을 빼앗아든 제네르가 기합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병사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가벼운 가슴받이를 맹렬한 기세로 뚫고들어간 칼끝은 한때 그 주인이었던 병사의 가슴에 치명타를 가했다. 칼을 뽑으면서 상처에서 터져나온 피가 제네르의 얼굴과 흰 무명포를 범벅으로 만들어버렸다.
"같이 공격해! 싸울 줄 아는 놈이다!"
병사들의 지휘관인 듯 한 자가 저으기 당황한 얼굴로 한 무리의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 달려온 세 명의 병사 중 한 명이 제네르에게 제법 날카로운 측면공격을 했지만 실전감각으로 단련된 상대의 칼에 곧 가로막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제네르가 자신의 목과 등을 향해 날아오는 다른 병사 둘의 공격을 감지한 건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단신으로 싸우는 그로서는 옆을 받쳐줄 그 누구도 없었다. 그는 최대한 몸을 뒤로 뺐지만 이미 몇번 경험한 적 있는 살을 찢는 고통이 그의 몸을 엄습해들어왔다. 하지만 제네르는 고통에 주저앉아가면서도 칼을 비틀어 자신의 칼과 엉킨 상대의 칼을 축으로 삼아 그의 목을 마지막으로 내질렀다.
"헉,"
피를 토하며 적병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은 제네르의 칼은 이미 상대의 목을 꿰뚫은 후였다. 하지만 베인 귀와 뒤에서 공격받은 옆구리 늑골 부근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특유의 갈색 눈동자를 꿈틀거리며 처참한 학살광경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코리온이 문득 천장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들어오던 창 하나가 갑자기 산산조각나더니 검은 복면을 쓴 키큰 자가 밧줄을 걸고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손님이신가?"
코리온이 겁도없이 카렐을 향해 단상에서 걸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제네르를 공격하던 제후군 둘이 용감하게, 아니 멍청하게 카렐의 앞에 뛰어들었다가 제대로된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칼과 함께 두동강이 나 버렸다.
"맙소사! 제네르!"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던 제네르를 발견한 카렐은 다시 덤벼들어오는 병사들 둘을 순식간에 베어버리고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은 그를 급히 일으켜세웠다. 카렐의 재빠른 눈은 쓰러지는 병사들의 전포자락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플레렌 가의 문장을 보고 말았다. 신음하던 제네르를 한쪽 겨드랑이에 껴안은 카렐이 급히 밧줄을 붙들었다. 카렐로서도 죽어가고 있는 나머지 유학자들까지 다 챙겨줄 방법은 없었다.
"그대의 주군께서 오셨군!"
카렐이 코리온 쪽을 홱 돌아보았다. 순간 밧줄을 타고 오르려던 카렐과 코리온의 눈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코리온이 순간 눈동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실전'에서 눈싸움에 지는 것은 절반의 패배를 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카렐도 전사로서의 거의 본능적인 반응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살기로 번득이는 카렐의 회색 눈동자와 코리온의 갈색빛 날카로운 시선이 처음으로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저자의 눈을 보시면 안됩니다!"
제네르가 급히 카렐의 얼굴을 가로막았지만 이미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확인한 후였다. 문득 정신을 차린 카렐은 제네르를 겨드랑이에 낀 채 밧줄을 쥐고 무서운 속도로 공중으로 솟구쳐 강당을 빠져나갔다.
"학장님! 학장님!"
예킨터스 교수가 달려와 멍 하니 서 있던 코리온을 붙들었다. 코리온은 그답지않은 넋나간 표정으로 카렐이 사라진 부서진 천창만을 올려보며 서 있었다.
"어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맙소사, 왜그러십니까?"
"저......저자의 눈을 읽을수가 없어......"
코리온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람의 눈이 아니야......"
제네르를 껴안고 가까스로 강당을 빠져나온 카렐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백여명의 제후군들을 훌쩍 뛰어넘어 무서운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로! 시로!"
카렐이 할룩스에 대고 셔틀에서 기다리고 있을 시로에게 결사적으로 외쳤다. 강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이곳 생도들은 피로 범벅이 된 흰 무명포 차림의 제네르를 팔에 안고 정신없이 달리는 큰 키의 무사를 멍 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카렐이 그들을 향해 목이 째져라 외쳤다.
"2차 학란이다!"
카렐의 고함소리에 생도들 사이에 일제히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생도들에 기숙사로 달아나는 생도들까지 아카데미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네르를 안은 채 미리 기다리던 셔틀에 뛰어오른 카렐은 등뒤에서 들리는 코리온의 방송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이순간부터, 이 제국은 유학자들의 것임을 선언하며, 경전의 뜻에 따라 통치될 것임을 알린다. 이에 반대하는 자는 신성한 제니안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니 어떤 변명으로도 이를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제네르가 숨을 헐떡거리며 피에젖은 흰 무명포를 벗어던졌다. 왼쪽 귀와 옆구리,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상처 따위는 잊은 듯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망할, 다 죽었어요! 다 죽었다구요!"
"알아, 알았으니까 제발 진정하게,"
카렐이 반쯤 넋이 나간듯한 그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사십명이 넘는 동지들을 어처구니없이 눈앞에서 잃은 그의 표정은 파랗게 공포에 질려있었다. 여전히 날뛰는 제네르를 카렐이 품에 꽉 껴안아주었다.
"완전 미친놈이라구요! 세상에......"
"이제 괜찮네, 괜찮아. 시로하고 내가 옆에 있잖나. 제발 진정해."
"이제 어디로갈까요?"
전사단 셔틀 조종사 베네루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일단 이 행성을 빠져나가야겠다. 여관쪽으로 가! 우베하고 푸아킨 경이 거기 있을테니까!"
아카데미 밖은 거의 폭동에 가까운 난리가 벌어져 있었다. 방송으로 코리온의 격문을 전해들은 이곳 졸업생 유학자들이 새 지도자인 코리온의 이름과 새로운 '교리정치'를 연호하고 있었다. 220여년 전, 원리주의 지도자였던 주페 태자가 '왕도 통치'를 선언하며 나섰던 이래, 이들 원리주의자들은 다시 등장한 새로운 지도자 코리온이 앞장선 또한번의 교리혁명에 거의 광기에 가까운 호응을 보이고 있었다.
여관 옥상에서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우베와 푸아킨 경이 급히 셔틀에 올라탔다. 우베가 피를 흘리는 제네르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물었다.
"하크로딘 단장님! 이게......."
"유학자가 40명이 넘게 학살당했네. 이 행성은 조만간 통제불능이 될 것 같아.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머리에 떠오른 듯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대강당에서 유학자들을 죽이던 병사들은 틀림없이 플레렌 가 소속 경보병들이었다. 카렐이 셔틀 조종사 베네루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떠나기 전에 플레렌 가 종가쪽에 잠깐 들러야겠다. 우베! 넌 플레렌 가 쪽에 연락해봐. 네페티 부인이 이런 짓에 협조하실 분이 절대 아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어!"
전용 셔틀을 타고 뒤늦게 아켐 4번 행성으로 향하던 베흔은 서부 파견군측으로부터 파예드 아카데미에서의 모임이 참혹한 학살극으로 변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몇명이나 죽었는데!"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파악이 안되고 있습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이 개혁파 학자들을 참살했다면 약 40명에서 45명 정도가 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썩을!"
순간 흥분한 베흔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남극성당에서 있었던 1차 학란의 복수를 고스란히 당한 셈이었다. 기원 117년에 남극성당에서 원리주의 학자 40명이 학살당했던 그 뒷수습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베흔 자신이었다.
당시 개혁주의의 추종자로 계급제 도입을 반대하던 세나우스 2세 황제에게 원리주의자들이 거의 쏟아붓듯 상소를 올리면서 황제의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해오고 있던 상태였다.
결국 1차 학란은 근위대와 황제의 묵인하에 계급제를 반대하던 남극성당 내 급진개혁파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종의 친위쿠데타였다. 당연한 결과로 그 사건을 주동한 자들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고, 원리주의 유학자들의 가슴에 뼈아픈 원한만을 남겼던 것이 이렇게 다시 되돌아온 셈이었다.
"진압 가능하겠나?"
베흔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물었다.
"유학자들을 진압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녀석들을 체포할수도 없고.....교내에 저희가 진입할수도 없습니다."
베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쪽 행성 지부 시켜서 아카데미 부근도시에 병력을 배치하고 기다리고 있도록 해. 곧 도착하겠다."
그동안 '믿음은 안가지만' 최소한 표면적으로나마 자신을 지지해오던 서부지역에 혼란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근위대에 큰 타격이 아닐수가 없었다. 물론 서부에 영지를 확보하고 세력확대를 노리던 페로 쪽에도 역시 타격이 되겠지만 자기마당을 빼앗길 근위대쪽에 더 불리한 결과임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몇시간 남았나!"
베흔이 조종사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5시간정도 남았습니다!"
"망할! 플레렌 가하고 통신은 아직도 안돼?"
"예! 그쪽에 도무지 연락이 안됩니다. 지금 그쪽 근위대 지부 비상용 통신망을 통해 시도중입니다."
베흔은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다른 건 접어두고라도 네페티 부인이 있는 플레렌 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네페티 부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뜻밖의 소식에 크게 당황한 페로는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한 채 마루를 계속 서성거리며 연락담당 보좌관에게 소리만 질러대고 있었다.
"연락 안돼? 안돼냐고!"
"아켐 4번 행성 중앙중계소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쪽과 일체의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페로가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유학자들 40여명이 학살된 것 같다는 볼토의 마지막 연락이 있고 난 후 그쪽과 일체의 연락이 끊어져버린 터였다.
"4번 행성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쪽 컴플렉스에서 당장 연락병 파견하도록 해! 만일을 대비해서 직접통신장비 갖추고! 알겠나?"
"예!"
"그리고 킵 녀석 서부 컴플렉스로 보내서 대기하게 해."
지시를 내리는 페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조용하던 제후지역이 동요하기 시작하면 그동안의 제위다툼이 또다시 혼탁국면에 접어들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타르서스를 장악하면서 나름대로 유리한 국면을 선점했다고 생각했던 페로에게도 이번 사태는 결코 달갑지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다른사람도 아닌 카렐이 지금 연락이 두절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