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3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세수를 하고 나오던 네페티 부인은 쌀쌀한 극지의 아침공기를 맘껏 들이켰다. 4번 행성에서도 가장 날씨가 온화한 북극 부근에 위치한 플레렌 가의 종가는 남극과 더불어 이 행성에서는 보기어려운 '겨울'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때 제수스 자이센이 이끌던 노예폭동무리에 습격당했던 이후로는 꽤 오랜기간동안 평온함을 유지해왔던 이 종가는 치안군을 제외하고도 무려 8만에 달하는 플레렌 가 제후군과 7백명에 달하는 플레렌 가문 사람들의 총 본산이었다.
네페티 부인의 오빠였던 브라코 발 플레렌과 그 일가가 제수스 자이센의 폭도들에게 학살당하면서 세력이 많이 위축되었던 이 서부 최고의 명문가는 다른 서부제후들의 엄청난 비난을 무릅쓰고 종장직과 최고제후 상속인이던 24살의 나이어린 네페티 부인을 부유한 남부 델루지 가로 시집보냈던 터였다. 물론 현재는 그때 받은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기반으로 착실하게 가문의 부활을 위한 준비를 쌓아가고 있었다.
"누님, 근위대장 베흔이 3시간 전에 이쪽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네페티 부인의 사촌동생인 두겐 첸 플레렌이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알려왔다. 안그래도 심상치않은 친정의 분위기에 걱정이 태산이던 네페티 부인은 믿음직한 베흔이 온다는 소식에 반가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약간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남부로 시집간 네페티 부인을 대신해 그간 플레렌 가의 실무를 사실상 이끌어온 두겐은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부모처럼 돌보아준 이 사촌누나를 친어머니처럼 잘 따라오고 있었다. 파예드 아카데미 경학 박사과정을 졸업한 두겐은 가문의 일이 없을때는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꽤 열성적인 유학자이기도 했지만 약간은 단순한 성격인 것이 흠이기도 했다.
네페티 부인이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너희 학교에서 있다는 모임이 오늘 아침이지? 지금쯤 하고있겠네?"
"예. 그럴겁니다."
두겐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듣자하니 졸업생들 다 모이라고 했다던데 넌 왜 안가고?"
"누님께서 모처럼 와계신데 제가 어찌 자리를 비우겠습니까."
"네가 학교 모임에 빠지는 일도 다 있고, 별일이네."
네페티 부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동생의 옆을 지나쳐 넓고 잘 가꾸어진 종가 정원인 헤네랄리페로 나섰다. 남편 테번 공이 죽은지도 3달이 지나면서 그도 이전같이 밝은 표정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젠 나도 가문 일에 직접 신경 좀 써야겠어. 최고제후답게 이제 웬만한 건 직접 챙기고.....남편도 없는 남부에 계속 머물러있을 필요도 없지. 이제 남편 상도 끝났으니 내 짐들 다 남부에서 가져올까봐."
잘 다듬어진 덩쿨장미를 만지작거리며 부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남편이 죽은 건 틀림없는 비극이었지만 어찌보면 그에게는 해방의 의미기도 했다. 자그만 체구의 두겐은 누나의 말에 별다른 대답도 않은 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뒤따라 걷고만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두겐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교수도 참석한다 들었습니다."
"정말?"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두겐이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얼굴이라도 볼 겸 내가 가볼걸 그랬나? 누구 보내서 끝나는대로 이리 좀 불러올 수 없을까? 한번 만나보고싶은데......"
파예드 아카데미는 부인에게도 사실 낯선 곳은 아니었다. 한때 그곳 생도였던 네페티 부인은 남부 최고제후 테번 공과 강제로 결혼해 남부로 떠나면서 미처 학부과정 졸업도 못한 채 타의로 학교를 중퇴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쯤......다 끝났을겁니다."
두겐이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부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생 처음보는 동생의 특이한 웃음에 네페티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하. 페데레스이옵니다."
정원에 서 있던 네페티 부인과 두겐에게 플레렌 가 제후군 사령관인 호옌 페데레스가 다가와 무릎을 끓었다.
"작전완료되었습니다."
"작전?"
네페티 부인은 제후군에게 어떤 지시를 내린 바가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네페티 부인 앞에서 두겐이 굳어진 얼굴로 페데레스 사령관에게 물었다.
"학장님께서 만족하셨겠군. 남김없이 다 죽였겠지?"
"그게......"
"뭐가."
"검은 복면을 한 자객이 들어와서 우리 병사 4명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녀석들중에 칼을 쓸 줄 아는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석 손에 두 명이 당했습니다. 금발에 파란눈을 한 키큰 여자 유학자였습니다."
그들의 대화에 너무나 놀란 네페티 부인이 동생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두겐은 누나를 손으로 거칠게 밀어놓은 채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그럼 놓쳤다는 말인가?"
"복면쓴 녀석이 그 유학자를 데리고 빠져나갔습니다. 나머지 43명은 모두 처치했습니다."
"두겐! 너, 너 도대체 무슨짓을 한 거냐!"
네페티 부인이 동생의 옷자락을 확 붙들었지만 두겐은 자그만 누나를 또다시 한손으로 밀어버리며 페데레스 사령관에게 물었다.
"학장님께서 다른 지시는 없으셨나?"
"명령하신대로 학장님 지시에 따르고 있습니다. 중앙중계소를 폐쇄했고 모든 공용터미널을 폐쇄했습니다. 10분 후면 행성 전체에 장벽이 가동될겁니다."
"적도쪽에 발 가 놈들은?"
"아직 신경쓸일이 아닌 듯 합니다. 3번 행성의 종가쪽은 아직 조용합니다. 하지만 유학자들이 하는 일이니 함부로 반대하고 나서지는 못할겁니다."
"두겐!"
두겐은 그제서야 멍 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있던 네페티 부인을 돌아보았다.
"곧 유학자들의 새 세상이 열릴겁니다. 누님께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군자가 큰 일을 함에 어찌 사사로운 정 따위에 연연하겠습니까. 페데레스 사령관. 누님을 집 안으로 모시게."
"뭐?"
깜짝 놀란 네페티 부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병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두겐의 지시를 받은 두 명의 건장한 병사들은 이 자그만 부인의 팔을 거칠게 나꿔채 자리에서 일으켜세우고 있었다.
"이게 반란이란 걸 아는거냐! 두겐! 네가 감히......"
한때 자신의 수족이던 플레렌 가 제후군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네페티 부인은 제대로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서부를 그동안 동생들의 손에만 맡겨놓았던 네페티 부인에게는 변변한 '자기사람'하나 없었다. 그리도 신임했던 동생의 느닷없는 배신에 충격을 받은 부인은 울부짖을 기운조차 잃은 채 그 분노와 치욕스러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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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만에 달하는 남부지역의 근위대 파견군은 13만에 달하는 근위대의 제후지역 파견군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고 있었다. 황제 암살미수사건으로 해임된 전임자의 뒤를 이어 이 자리를 물려받은 카렐은 골아픈 베흔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곳이 차라리 낫다고 나름대로 자위는 하고 있었지만 시커멓게 타들어간 속과 망가져버린 자존심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베흔 그 망할 새끼,"
남부제후지역의 수도인 비엔 5번 행성에 도착한 카렐은 자신에게 경례를 올리는 새 부하들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울화통이 확 치밀어올랐다. 상급가디언들을 수족같이 부리던 황궁 보안국장 자리에서 그의 눈에는 도무지 미덥지 않은 약해빠진 정규군들과 낮은 등급의 가디언들을 데리고 일해야 하는 이런 자리로 밀려난 데 대한 자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나마나 '황궁에서 좌천된 신임사령관' 운운하며 뒷구멍에서 쑥덕댈 저녀석들에게 자신의 자존심 역시 산산조각 부서져버릴 터였다.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저희 파견군부대 사령관으로 오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자신의 새 부관이라는 5등급 가디언 힐러 녀석이 카렐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너희한테는 영광이겠지만 나한테는 개망신이다.'
카렐은 이 말이 목구멍까지 쳐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카렐은 기분도 가라앉힐 겸 셔틀이 착륙한 파견군 사령부 부근을 죽 둘러보았다. 카렐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셔틀에서 단 한번도 창밖을 내다본적이 없었다.
"경치가 꽤 좋군."
카렐의 입에서 생각없이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실제로도 비엔 행성의 목가적인 풍경은 제국 내에서도 최고로 알려져 있었다. 사령부 앞에는 꽤 크고 맑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호수를 빙 둘러 '흑림'으로 더 잘 알려진 빽빽한 혼합림과 낮게 비탈진 목초지가 번갈아가며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솜털구름이 떠있는 유난히 파랗고 맑은 하늘 역시 이 아름다운 전원풍경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카렐은 난생처음 보는 이런 풍경을 잠시 넋놓고 바라보았다. 황제령도 제국 내에서 '꽤 살만한 행성'축에 들었지만 이 비엔 행성 앞에서는 감히 명함조차 디밀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이 바다로 뒤덮인 비엔 행성은 작은 대륙들이 남부와 북부 중위도에 군데군데 흩어져있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의 계절들은 적당한 수준의 온도와 풍경의 변화를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곳은 처음이시죠?"
힐러 녀석이 카렐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녀석 딴에는 생각없이 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뜩이나 기분이 상해있던 카렐은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에 얼굴을 약간 일그러뜨릴수밖에 없었다. 약간 당황한 힐러가 고개를 숙이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랫사람에 대한 카렐의 행동이나 말투는 근위대 내에서도 꽤 거친 편이었다. 100년간의 야생생활에 뒤따라오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놓고 '괴물 유전자 때문'이라느니 '베흔을 닮았다'느니 하는 억측을 제멋대로 해오고 있었다. 카렐은 첫번째 이유까지라면 그냥 참고 들어줄 수 있었지만 베흔을 닮았다는 그 말만은 정말로 끔찍하게 듣기싫어했다.
그래서 1년쯤 전부터는 아랫사람들에게 품위있게 대하기 위해 나름대로 꽤 애를 써오고 있었고, 어느정도 성과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핵심요직에서 좌천된 이마당에 품위 따위를 따지기는 지금 그의 기분이 너무나 최악이었다.
카렐이 여전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 숙소가 어디야?"
"예, 안내해드릴테니 따라오십시오."
카렐은 힐러를 따라 성큼성큼 언덕을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남부 근위대 파견군 사령부는 비탈진 산허리의 꽤 잘 가꾸어진 숲 중간에 주변의 호수와 초지를 내려다보는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곳 위치를 잡은 녀석은 아마도 전술적인 고려보다는 주변 경치에 더 신경을 썼던 모양이었다.
"여깁니다."
힐러가 낮으막한 나무울타리 문을 열어주었다. 제법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가진, 크지않은 붉은 벽돌집이었다. 목조 인테리어로 잘 꾸며진 집 안의 내부 시설들은 황궁의 첨단기자재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꽤 따뜻하고 포근함을 주는 분위기였다. 야생에서 살아온 카렐에게는 어찌보면 꽉 막힌 황궁보다 이쪽이 더 편안할수도 있었다.
카렐의 가방들을 들어다 준 병사들이 밖으로 사라지자 카렐은 가방에서 많지않은 내용물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른 꽃잎이 들은 병 몇 개, 꽤 많은 책들과 옷가지, 황궁에서부터 정성껏 키워온 흰 국화 한포기가 사실상 짐의 전부였다. 카렐의 가방 속에서 쏟아져나온 꽤 많은 책들, 특히 고문자로 쓰여진 어려운 유학서적을 보고는 힐러가 저으기 놀란 표정으로 카렐을 다시한번 돌아보고 있었다. 어쨌든 가디언들이 유학을 공부하는 건, 아니 고문자라도 읽을 수 있는 건 그다지 흔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책정리를 돕던 힐러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바로 옆에 최고제후 델루지 가문 종가가 있습니다. 신임 사령관이 부임할때는 제일먼저 그곳부터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니 오늘 저녁에 찾아가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미리 시간약속 잡아 둬."
"지금 최고제후 테번 델루지 공께선 서부로 출장중이시니......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혼자 계실겁니다. 어떤 선물을 준비시킬까요?"
지금껏 아무 생각없이 있던 카렐은 그제서야 어릴 적 몇 번 만난 일 있던 수우의 어머니인 네페티 부인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우, 페로와 함께 놀던 어린시절 거의 자기집처럼 드나들던 어린 카렐을 친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사람이 바로 네페티 부인었다.
"선물?"
어릴 때 부인에게 받은 정을 생각하면 그냥 상례적인 방문선물 정도로는 조금 곤란할 듯 싶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카렐의 눈에 곱게 캡슐에 싸서 가져온 흰 국화가 들어왔다. 그동안 들인 정성을 생각하면 좀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그곳에만 눈이 가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필요없어. 내가 준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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