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4화 (84/1,132)

< -- 84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플레렌 가와 연락이 안됩니다. 그쪽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베가 제네르의 상처를 살펴보던 카렐에게 알려왔다. 플레렌 가 소식에 그 역시도 창백해진 얼굴로 카렐을 올려보았다.

네페티 부인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한쪽으로 치워놓은 카렐은 일단 이 상황의 득실을 따져보려 애쓰고 있었다. 저들 유학자세력이 무슨 식으로건 '야심'이 있는 것은 일단 분명했고, 제3의 세력의 등장은 지금 당장에서는 섣불리 유불리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상태라면 남부 최고제후를 아들로 둔 네페티 부인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그럼 저흰 일단 이곳을 뜰까요?"

우베의 질문에 카렐이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푸아킨 경을 힐끗 돌아보았다. 대공주의 행방이 아직 묘연한 상황에서 이런 혼란통을 일단 떠나자는 말에 그가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그는 그 주름투성이의 늙은 얼굴에 도무지 안어울릴정도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카렐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 넌 제네르 경과 함께 3번 행성 발 가 영지로 일단 대피해라. 그쪽은 페로 경과 그런대로 친분이 있는 쪽이니까 ㅤㅉㅗㅈ아내지는 않을거다. 일단 치료가 우선이니까."

"저도 남겠습니다, 전하."

제네르가 피묻은 손으로 카렐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안돼. 상처를 치료해야 돼. 몸도 안좋은데 어쩌려고."

"전 유학자입니다. 학란이 벌어진 이곳에서 상황을 파악하는데 저만한 적임자가 어디있습니까,"

제네르의 '결코 틀리지 않은' 말에 카렐도 잠시 머뭇거릴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제서야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허리에 달린 개인 컴퓨터에 할룩스를 연결시켰다.

잠시 후 나타난 형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볼토와 판의 모습이었다. 페로와의 연락이 두절된 후 어찌할바 모르고 당황하고 있던 그들은 '또다른 명령권자'인 카렐의 모습에 갑자기 구세주라도 만난 듯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뒤이어 판이 어지간히 급한 입놀림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들도 놀라기는 놀란 모양이었다.

"어떡하죠? 계속 있어야 합니까? 지금 밖에 난리들입니다. 치안군들이 돌아다니면서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고 방송하고 다니고, 행동이 조금만 이상한 사람들도 마구 잡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외부와 통신도 모두 두절되었고......"

"알고있어, 알고있으니까 제발 좀 진정하고......"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판의 입을 일단 틀어막은 카렐은 그들에게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3번 행성으로 대피하도록 해. 그리고 여길 나가거든 바로 페로 관과 ㅤㅋㅞㄹ크에 이쪽 사정 설명하고 페로 경의 다음번 지시를 기다려라. 우린 대공주저하하고 네페티 부인의 행방을 확인하는대로 이곳을 떠나겠다."

"뭐라고?"

빨리 아켐에 도착하기만 기다리며 셔틀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베흔은 청천벽력같은 보고에 잠시 멍 해져 있었다. 베흔의 정보참모이며 보안국 부국장인 1급 가디언 루토가 지부 비상연락망을 통해 들어온 전문을 베흔에게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행성 에너지 위성이 가동되었다는 보고입니다. 별도 허가를 받지 않으면 진입불가입니다."

"그건 최고제후 권한 아냐!"

"그렇습니다. 네페티 부인께 불상사가 생긴 것 같습니다."

루토는 핏기가 사라져버린 베흔의 표정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통신두절이 있을 때부터 어느정도 걱정은 했지만 근위대에 예고도 없이 에너지 장벽을 가동시켰다는 건 모든 정황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플레렌 가가 네페티 부인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일단 3번 행성의 파견군 사령부로 가겠습니다. 그쪽에서 플레렌 가에 진입허가를 별도로 요청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루토의 말에 베흔이 넋나간 얼굴로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는 천하의 근위대장 베흔이 이토록 무력함을 느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단검을 쥔 손에 자기도모르게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제길할......"

"아까 그녀석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학장실로 돌아온 코리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까지 200년이 넘도록 코리온을 보좌해온 그였지만 이 대담한 유학자가 누군가와의 눈싸움에서 밀린 건 그서도 처음 목격한 일이었다. 지친 표정의 코리온은 그의 질문에 문득 자리에서 멈춰섰다.

"가디언 카렐. 자칭 코아 전사단 수괴다. 싸움 하나는 제국에서 최고라고 하더군. 천박하기 짝이없는 가디언 혈통이지만......눈빛 하나는 보통 녀석이 아니더군."

안정을 되찾은 코리온은 이번 상대와의 첫번째 만남이 자신의 승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순순히 시인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학장실 탁자 앞에 자리잡은 코리온에게 하심이 목에 조금 힘을 주어 말했다.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은 일단 연금했다고 합니다."

"이리로 모셔오게나. 참으로 가엾은 분이시나......어쩌겠나. 동문을 치욕스럽게 한 죄과는 갚아야 하는 것을."

코리온의 긴 장발이 그의 매서운 눈을 반 쯤 내리덮었다.

"잠시 비켜있게."

그는 다시 붓을 집어들고는 앞에 놓여진 큰 종이에 무언가를 정신없이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심은 학장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옆에서 절대 기척조차 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깊은 호흡을 통해 절반 무의식상태에 접어든 후 본능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글을 쓰면서 무언가를 생각하지도, 계산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눈을 감은 채 글을 쓰거나 흐느적거리는 몸과 손이 완전히 따로 움직이는 기이한 광경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때문인지 거의 미친듯이 글을 쓰고 난 코리온은 항상 심하게 땀을 흘리거나 힘들어하기가 일쑤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으십니까?"

붓을 내려놓으며 갑자기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코리온의 모습에 교수가 저으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 그의 걱정에 화답하듯 깊은 숨을 또한번 내쉰 코리온은 옆으로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학장님!"

예킨터스 교수가 정신을 반 쯤 잃은 코리온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직접 격문을 쓰느라 지쳐있던 학장이 결국 한계에 다달은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예킨터스 교수가 땀을 비오듯 흘리는 코리온의 손발을 정신없이 주물러주고 있었다.

"자리로 옮겨드려! 뭐해!"

학장을 껴안고 있던 예킨터스 교수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다른 교수들이 쓰러진 코리온을 들쳐업고 학장실 뒷켠의 작은 침소로 뛰쳐들어갔다.

코리온 자신도 그다지 약한 몸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이며 부마인 예르마크 세닉 경은 남부의 무사가문인 4제후 세닉 가 출신의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한 군인이었고, 어머니인 레곤 대공주 역시 황족으로는 드물게 큰 체구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코리온 역시 남자다운 훌륭한 체구와 잘생긴 외모를 갖고 태어났지만, 오랜동안의 금욕적인 생활은 이 남자를 날씬하고 여성적이기까지 한, 미청년으로 바꾸어놓은 후였다. 하지만 그 부모의 흔적은 큰 키와 균형잡힌 골격, 그리고 밤새 수백의 교수들과 피말리는 논쟁을 벌이고도 다음날 아침 멀쩡한 얼굴로 다시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그 강인한 체력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수하의 등에 업혀가면서도 코리온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방금 쓴 글을 서부지역 모든 제후들에게 보내주게."

교수들 손에 자리에 눕혀진 코리온은 심하게 지친 듯 그대로 축 늘어져버렸다. 하심이 그의 몸을 조이는 벨트와 옷들을 풀어헤치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선선한 바깥바람이 오래된 책내음으로 가득한 이 침침한 학장실 작은 침소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분을......모셔올까요?"

교수들을 모두 내보낸 하심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럴 것 없네. 아직은......"

코리온이 천장을 올려보며 또한번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마치 습관처럼 한손에 끼워진 연한 연두빛 페리도트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학교 부근을 일단 빠져나온 카렐 일행이 갈 곳은 이 행성에서 유일하게 플레렌 가 영지가 아닌, 적도 발 가 영지의 메디스 시 뿐이었다. 의도했던 아니든, 카렐 일행도 자객을 피해 도망쳤던 지난번 푸아킨과 결국 비슷한 신세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크지않은 지하공간들이 거미줄같이 얽혀 거대한 카타콤베를 이루고 있는 메디스의 지하도시는 이 행성의 발 가 영지 내 유일한 '거주지'였지만 그 사는사람은 주둔중인 군인 포함해 기껏 삼천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 황폐해보이는 사막도시는 지나가는 차량들의 중간지착지 내지는 별난 취향의 사막 여행객들이나 보따리장사꾼들이 아니라면 별다른 가치도 없었을 그런 곳이었겠지만 4번 행성 내의 유일한 외부제후 영지로서 순전히 그 상징성 덕택에 적지않은 발 가 병력이 머무르고 있는 군사요새이기도 했다.

어하간에 이곳에 돌아온 카렐 일행은 지난번 푸아킨 경이 묵었던 그 허름한 여관에 일단 여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6명으로 늘어난 일행을 위해 얻은 큰 방에는 오래된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 군데군데 움푹 패여들어간 니치들에는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도록 두툼한 모직물이 몇겹씩 깔려있었다. 꽤 깊은 천창을 뚫고들어오는 햇빛이 이 휑 한 방 안의 유일한 조명이었다.

망토를 벗어 제네르를 감싸안고들어온 카렐은 행여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쪽의 제일 큰 니치에 눕혀주었다.

"내 밑에 오고나서 몸이 성한날이 없군.....정말 면목없네."

"의사라도 불러야 할까요?"

우베가 바깥을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카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 위험해. 플레렌 가 녀석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쪽에 틀림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거야. 셔틀에 있는 의료함 가져왔지? 내가 직접 손봐줄밖에."

시로가 들고 온 의료함을 내밀자 카렐이 브레이서를 풀고 손을 일단 깨끗이 씻었다.

"우베 자넨 극지에 다시 돌아가서 뭐든지 좋으니까 소식 좀 파악해 봐. 자네 여기서 보따리장사할 때 알고지내던 지인들 많을테니 그쪽에 좀 알아보게."

"물론입죠."

카렐이 던진 금덩이를 받아든 우베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얼른 달려나갔다.

우베를 내보내고 제네르의 옷을 벗기려던 카렐은 그때까지도 눈치없이 자신을 멍 하니 쳐다보고 있던 시로와 푸아킨을 한 번 째려보았다.

"뭘봐?"

"아, 예,"

순간 얼굴이 빨개진 시로가 푸아킨과 베네루스를 데리고 허둥지둥 자리를 비켜주었다.

"의사가 기계로 봉합할때보다 아파도 좀 참게나."

"예."

지금까지 의사와 옛 애인 외에는 맨몸을 드러내본 적이 없었을 제네르가 단추를 끌르는 카렐의 손길에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참, 나, 지금껏 아메스도 단추에 손한번 대본일이 없는데 휘하 기사단장 옷을 먼저 벗기다니, 이게 뭐람."

카렐의 푸념에 가까운 농담에 제네르의 잔뜩 굳어있던 표정이 한결 풀어지고 있었다. 끌른 단추 사이로 드러난 제네르의 상체는 군인답게 생각보다 꽤 탄탄했다. 다른 여자들같이 볼륨감이 있다던가 풍만하다던가 하는 표현과는 물론 상당히 거리가 있음에 틀림없었지만 무수한 흉터들을 마치 장식품인 양 달고 있는 잘 발달된 근육질 몸매였다.

"탈라스 출신들이 몸에 흉터를 지우지 않는 게 전통이라더니 사실이었군."

"그쪽에서는 흉터가 명예의 상징이죠."

"그래도 이건 좀 심한걸."

카렐이 가리킨 건 제네르의 왼쪽 가슴에 남아있는, 거의 젖가슴을 함몰시킬 정도의 큰 상처였다.

"포로수용소에서 삽에 찍혔던 거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제네르가 상처에 약을 바르는 카렐의 손끝에 통증을 느꼈는지 눈물을 찔끔거렸다.

"주군께서 직접 상처치료까지 해주시는 좋은 곳이 어딨겠습니까."

"나도 이젠 이런거 진절머리나."

카렐의 대꾸에 제네르가 그 와중에도 약간의 웃음을 흘렸다.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든 카렐은 칼에 벤 팔을 꼼꼼하게 꿰매주고 있었다.

"내가 푸엘 숲에서 혼자 지내면서 상처 꿰매는 짓에 도가 튼 걸 다행으로 여겨."

"그러믄입죠."

따끔 한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제네르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페티 부인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이젠 옛날 일이죠."

제네르가 천창을 올려보며 힘없이 대답했다.

"4차 혼란기 때 주페 태자저하와 네페티 부인 부탁으로 코리온 대군 주변을 감시하는 일을 했었죠. 그랬다가 들통나서 학교에서 퇴학당했지만......그 뒤로도 계속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었죠."

"그랬군."

".......네페티 부인이 많이 걱정되시죠?"

상처를 꿰매던 카렐의 손이 잠시 자리에 멈추었다. 제네르가 카렐을 바라보며 씽긋 웃음짓고 있었다.

"훗, 알고있었군."

카렐이 짐짓 무표정하게 다시 상처를 꿰매가기 시작했다.

"지금 내겐 아메스와 솔이 전부네."

"그러셔도 자신을 속이실수는 없을겁니다."

이번 바느질이 조금 아팠는지 제네르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자 카렐이 약간 머쓱해진 표정으로 배를 마무리지었다. 그의 귀를 꿰매기 시작한 카렐이 낮게 중얼거렸다.

"푸엘 숲에서 괴물로 변해서 나왔다고 생각한 날 처음 사람으로 대해준 분이 네페티 부인이셨지."

"그랬군요."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의 크지않은 상처를 마무리지은 카렐은 다시 그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밤에 다시 나가실겁니까?"

"오늘밤은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을 것 같네......힘들어서 몸이 더이상 말을 듣지 않아. 나도 제상태는 아니잖나. 일단 좀 쉬고......"

카렐은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