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5화 (85/1,132)

< -- 85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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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입니다.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평소처럼 검은 무명포 차림의 코리온이 부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앞장서는 두겐과 함께 두 명의 제후군 손에 강제로 이끌려 들어온 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학장실 안을 돌아보았다. 코리온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 2년 선배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5년만에 중퇴하셨지만 저희 명예로운 파예드 아카데미 출신이시기는 마찬가지시죠."

"도리를 찾는다는 것들이 믿음을 저버리다니, 헛배웠군."

네페티 부인이 옆에 선 두겐을 째려보았지만 그는 누나의 말 따위에는 아예 귓구멍을 틀어막은 듯 아무 대꾸없이 학장쪽만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은 부인의 독설에 평소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 도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부인."

"네 도리가 도대체 뭔데?"

흥분한 네페티 부인이 무심결에 코리온의 눈을 쏘아보았다. 코리온 역시 눈을 약간 꿈틀거리며 네페티 부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눈빛에서 압도당한 네페티 부인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절 똑바로 바라보시죠."

코리온이 부인의 턱을 거칠게 붙들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듯한 그의 기괴한 눈빛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네페티 부인이 거칠게 버둥거리며 눈을 감아버렸지만 코리온은 별 상관 없다는 듯 미소까지 지으며 그의 작은 턱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누굴 그리 애타게 기다리시는지는 모르겠으나......뜻밖입니다, 부인......설마 저승에 있는 부인의 지아비는 아니겠죠?"

두겐이 순간 당혹한 얼굴로 자신의 사촌누나와 학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코리온 특유의 매서운 눈빛이 사람의 생각까지 완벽하게 읽어낸다는 그 소문이 꽤 과장된 것이라는 것 정도는 두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의 생각을 홀로그램처럼 재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어느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코리온은 짐짓 부인에게서 관심을 끊은 듯 뒤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두겐 첸 플레렌 박사, 내 일찌기 기혼자의 도리를 이야기한 적 있소. 몸을 주었건 아니건을 떠나서 외갓남녀에게 정을 주는 것을 내 어찌 다루어야 한다 말했소? 그것도 우리학교 출신이라면 말이요."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두겐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불륜은 매춘과 더불어 서부에서는 어마어마한 중죄에 속했고, 특히나 이곳 출신인 누나가 그에 연루되었다면 저 무서운 학장의 처분은 단 한가지밖에 있을 수 없었다.

"학장님......"

"말해보시오. 내 뭐라 하였소?"

뒤돌아본 코리온의 눈이 어느새 살기를 번득이고 있었다. 물론 두겐이 답을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학장은 명예로운 파예드 동문이 '더러운' 죄를 저질렀을 때 몇배는 가중처벌해야 함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유곽을 출입하는 '중죄'를 저지른 두 명의 기혼 교수들을 치안대를 시켜 공개 주살한 일도 있었다.

두겐이 학장의 앞에 납죽 엎드리며 떨리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극형이 지당하다 판단되오나 한번이라도 회개의 기회를 주심이....."

그도 나름대로의 큰 뜻을 위해 누나의 지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최고제후로서의 지위가 탐나서 저지른 짓은 결코 아니었다. 당초 '대업'이 완수될때까지만 누나를 잠시 감금하고 나중에 다시 복귀시켜줄 생각이었던 두겐은 존경하는 학장의 판결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다.

"플레렌 박사. 내 가르침을 그리 헛들으셨소?"

학장의 한마디에 두겐은 순식간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이 무서운 학장에게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잠시 흐느끼던 두겐은 결국 무언가 각오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누님께서도 기꺼이 그 처벌을 받으실줄로 믿겠사옵니다."

"두겐, 너 정말 미쳤구나, 두겐, 네가......"

네페티 부인이 조금씩 뒷걸음쳤지만 곧 뒤를 가로막은 치안대 병사들의 거친 팔에 붙들리고 말았다. 코리온은 한구석의 조그만 탁자에 자리잡고 앉아 이쪽 일에는 짐짓 무관심한 척 책을 펼치고 있었다. 두겐이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군자가 큰일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고 집안을 바로잡음은 만고의 도리이오니 가문을 수치스럽게 하고서 어찌 이 큰 제국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누님. 누님을 바로 이끌지못한 이 못난 동생을 용서하십시오."

네페티 부인의 눈앞이 아찔 해왔다. 가장 믿던 사촌동생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을 넘어서서 이젠 그의 손에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페데레스 사령관!"

두겐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던 제후군 사령관이 들어와 꿇어앉아보였다.

"내일 계획되어있는 형은?"

"아침에 명을 따르지 않은 71명의 사병들의 참수가 예정되어있고 오후에 12명의 장교들을 적도 통제구역에 내버리기로 되어있사옵니다."

네페티 부인을 한 번 돌아본 두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에게 참형은 마땅치않으니 장교들과 함께 내치게. 가문을 욕되게 했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순간 페데레스 사령관이 움찔 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뜨거운 적도 통제구역에 물한방울 주지 않은 채 내버리는 것은 이곳 서부에서는 처형 중에서도 최악의 방법---그 시체조차도 찾을 수 없는---이었다.

서부 특유의 '퍼더' 계율에서 가문을 더럽힌 구성원들에 대한 형벌은 극히 가혹한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란 것도 가지각색이었지만 실상은 붙이는사람 마음이었고, 2제후인 세호 가가 마리안을 죽인 남편 페로에게 변변한 항의 한 번 못해본 이유도 이때문이었다.

그렇다고해도 40년간 플레렌 가 제후군을 이끌어온 그로서도 항상 천사같던 네페티 부인에 대해 뜬금없이 처형 명령이 떨어진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또한 네페티 부인은 남부 최고제후인 델루지 가문의 종부였고, 최고제후의 친어머니였다. 정치문제따위에는 그다지 밝지 않은 그로서도 이것이 강대한 남부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수도 있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두겐! 네가, 네가 날......어떻게......"

네페티 부인이 마지막으로 미친 듯 발버둥쳤다.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보인 페데레스 사령관은 부하들에게 부인을 끌고나가라고 눈짓을 해 보였다.

"저어, 그리고 두겐 각하."

"뭔가?"

"황실 근위대에서 연락입니다. 이번 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근위대장 베흔이 직접 3번 행성에 와 있다고 합니다. 에너지장벽때문에 진입을 못하고 있으니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공식 요청입니다."

두겐이 얼른 코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에너지장벽 가동 자체가 코리온의 명령이었으니 외부인들 들여보내는 것 역시 그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책을 읽던 코리온이 들릴듯말듯 중얼거렸다.

"왜 막겠는가.....하지만 우리측 정리도 필요하니 모레 들어오라 알리게."

코리온 리쿠 학장의 뜻은 확실해보였다. 모레면 코리온의 첫번째 계획은 사실상 모두 완결된 후일테고, 물론 네페티 부인도 그때 이전에 죽게 될 터였다. 결국 300년 전 1차 학란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넘겨버렸던 근위대를 이번에는 철저히 바보로 만드는 셈이었다.

"소식통 빠르기로는 장사꾼들만한 게 없지요."

남부 고위도지역에서 늦게서야 돌아온 우베가 거들먹거리며 이것저것 적어온 수첩을 꺼내들었다. 카렐이 개인컴퓨터를 집어들며 낮게 물었다.

"대공주저하나 네페티 부인에 관한 정보는?"

"대공주저하에 관한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대신......내일 플레렌 가에서 큰 처형이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제네르가 카렐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자리에 멍 하니 굳어있었다. 카렐이 많이 놀랐다는 것을 깨달은 제네르가 우베를 다시 재촉했다.

"자세히 말해봐."

"70명 정도의 제후군 병사들을 참수한다고 하는데 죄목은 모반죄라고 합니다. 이번 사건에 개입을 거부한 병사들인 듯 합니다."

"누가 모반을 저질렀다는건지 모르겠군."

푸아킨이 얼굴을 찡그린 채 이를 악물었다.

"서부에서는 여자를 참수하지 않습니다."

제네르가 절망하고 있는 카렐을 달래듯 말했지만 카렐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에 대한 처형은 보통 비공개로 하지."

"맞습니다. 참수보다는 화형이나 팽형......"

제네르가 생각없이 떠드는 우베를 무섭게 째려보자 그제서야 정신을 퍼뜩 차린 그가 무안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로가 생각이 틀린 듯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네페티 부인은 남부 최고제후 제롬 공의 친어머니인데 녀석들이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고해도 설마 부인을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남부하고 당장 한판 벌리자는 것이 되어버리는데."

"반대로 서부의 단결을 호소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설사 그런다고 지금 설마 남부가 우리와 동부, 서부 셋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

카렐이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방 안의 분위기가 또다시 가라앉고 있었다. 우베가 다시 수첩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중앙중계소는 현재 플레렌 가 소속 제후군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극에 있는 근위대 지부는 현재 총 인원이 500명 정도밖에 안되어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하고......에너지장벽때문에 3번 행성의 파견군 2만도 진입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파괴하고 진입한다면 선전포고가 되는 셈이니......"

"완전히 고립됐군."

카렐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뒤집어보기라도 하려는 듯 시로가 몸을 움츠리며 엉뚱한 주제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왜이렇게 춥죠? 낮엔 그렇게 뜨겁더니."

"이 행성 적도 부근엔 바다가 없어서 일교차가 가히 살인적이지. 그나마 땅속이니까 다행이고 바깥은 얼어죽기 딱좋을걸. 슬슬 자야겠군."

방 한구석의 난로에 불을 붙인 카렐이 제네르의 잠자리 옆에 세워놓으며 말했다.

"시로, 네가 여기서 제네르 경하고 같이 자. 건강한 사람이 옆에 붙어자면 그래도 덜춥겠지."

"전하께서도 아직 몸이 완전치 않으신데......전하 쓰십시오."

"한사람 뜨뜻한것보다는 두사람 뜨뜻한게 낫지. 여기 나하고 자는 거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장난스럽게 웃음지은 카렐이 반대편 니치의 담요 틈새에 몸을 우겨넣으며 말했다. 이런 밤중에 덮으라는 듯 꽤 두툼한 여러겹의 모직담요가 놓여있었지만 키 덕분인지 덮는 족족이 카렐의 발이 그 밑으로 빠져나와버리고 있었다.

"시로, 오늘밤에 제네르 경 감기걸리면 책임추궁할테니 알아서 해."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잠이 깬 카렐은 조심스럽게 옷을 들춰보았다. 아직까지도 충격을 막기 위한 드레싱을 하고 있는 옆구리는 덜 낫은 내장기관과 아직 완전치못한 근육들 덕분에 날이 춥거나 피곤할때마다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기가 일쑤였다.

"이익,"

옆구리를 움켜쥐며 애써 고통을 참아내던 카렐은 자기도모르게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조금 비틀었다. 페로를 얻어낸 이 가혹한 댓가는 앞으로도 한동안 그의 몸을 따라다닐 것이 확실했다. 고통스러워하던 카렐은 이 방 안에서 자신처럼 잠들지못하고 있는 또 한 명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안쪽의 니치에서는 시로의 넓은 가슴에 안긴 제네르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어두침침한 니치 속에서 시로의 검은 피부의 얼굴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가늘게 뜨고 있는 그의 눈동자만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정이 넘어간 지금까지도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제네르의 어깨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여간, 줘도 못 먹기는.'

시로의 어린애같은 모습에 카렐이 혼자 실소를 짓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는 제네르가 도리어 이상해보이는 건 카렐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듯 싶었다. 어느모로 보아도 숫총각임이 확실한 순진한 시로와, 무려 250년을 독신으로 살아오는 동안 도대체 지금껏 몇명의 애인이 있었는지 죽어도 밝히지 않고 있는 제네르의 차이랄수도 있겠지만.

"시로, 떨리더라도 좀 자 둬."

카렐이 잠을 못이루고 있는 시로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시로가 약간 쑥스러운 듯 잠든 제네르의 얼굴을 한 번 내려보았다. 어둠 속에서 제네르의 하얗고 품위있는 얼굴과---물론 지금은 그을려서 거의 갈색빛이라는 편이 정확하겠지만--- 시로의 야성적인 검은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켠에선 우베와 푸아킨 경, 베네루스가 서로 달라붙어 추위를 피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북부에서 셔틀 레이서 겸 테스트파일럿 출신으로 꽤 잘나가던 베테랑 조종사 베네루스는 어쩌다가 낸 운없는 사고 덕택에 면허까지 취소당한 불운한 전적이 있었다. 결국 그는 '초고속 아르다가 셔틀을 몰 수 있는 황제령의 화끈한 일자리' 라는 아메스의 말에 혹해서 카렐의 전속파일럿이 되어버린 황당한 인물었다.

이런저런 가까운 수하들과 함께하는, 춥지만 나름대로 안락한 밤이 조금씩 깊어가고 있었다. 기왕이면 내일은 오늘보다는 훨씬 더 편한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인지 망상인지가 카렐의 머릿속에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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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와 추천은 아마추어 작가의 양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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