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6화 (86/1,132)

< -- 86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41.

플레렌 가 종가 앞의 거대한 십자형 광장에는 아침부터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 최고제후가문에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궁금해하는 시민들이 새벽부터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해가 뜰 무렵에는 이미 광장에 발디딜틈하나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발 가 영지인 적도 일부 지역---어차피 사람이 살기는 거의 불가능한 쓰레기에 가까운 곳이었지만----을 제외하면 이 4번행성 거의 전부를 직할영지로 가지고있는 서부 최고제후가문인 플레렌 가는 외계영지까지 합치면 인구 수만으로는 남부의 델루지 가문과 동부의 슈트란 가문에 이은, 제국내에서 세번째로 거대한 제후가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때 델루지 가와 함께 제국 최강의 제후가문이었다가 노예폭동으로 3위로 주저앉게 된 자신들의 운명을 저주하며 지금까지 가장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펴 오고 있던 터였다.

주변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종가 안에서 백여명의 중무장한 병사들이 열을 맞춰 나오더니 십자형 광장 중앙의 둥근 제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곧이어 두겐을 선두로 플레렌 가 원로들이 차례대로 나와 제단 한쪽에 미리 만들어진 상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저게 누구지?"

광장에 모여든 많은 시민들 중간에 함께 어울려있던 카렐이 우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하지만 정작 우베는 작은 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카렐은 하는 수 없이 우베를 한팔로 번쩍 안아들었다. 앞이 확 트이자 우베가 어린애같이 좋아하고 있었다.

"우와, 높으니까 이렇게 좋은걸."

"잔소리 말고, 저기 제단 중간에 최고제후자리에 앉은 놈이 누군지 말해봐."

"남잔데요?"

"그건 나도 알아."

우베의 말도안되는 대답에 카렐이 짜증을 내며 주머니에 있던 망원경을 우베에게 내놓았다. 망원경을 눈에 대고서야 우베는 제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두겐 첸 플레렌.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의 사촌남동생이고 파예드 아카데미 출신입니다. 네페티 부인을 대신해 그동안 플레렌 가를 이끌어온 녀석이구요. 제법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좀 단순한데다가 그다지 세속적인 욕심은 없는 녀석이라고 알려져 있었죠."

"세속적인 욕심만으로 가문을 뒤집어엎으란 법은 없지. 딴엔 꽤나 고상한 목적이었겠지."

카렐의 다분히 감정섞인 말투에 우베가 어깨를 으쓱 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카렐이 자기도모르게 네페티 부인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을 눈치빠른 우베가 놓쳤을 리가 없었다.

잠시 후 처형당할 죄수들이 차례대로 끌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다 사병 아니면 하급장교들인걸. 그 윗대가리들은 어찌된거지?"

"글쎄요, 그네들은 고분고분 말 잘 들었을지도 모르고.....앗, 시작하나보네요."

구경꾼들에게 정숙을 명령하는 낮은 나팔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검은 무명포에 플레렌 가 문장이 새겨진 머플러를 두른 두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미리 알린대로, 감히 최고제후의 뜻을 거스르고 모반을 획책한 이들 병사 71명에게 참수형을 선고한다. 내 너희들이 배운 바 없고 무식하여 그런 것을 잘 알아 시신이나마 남길 수 있도록 은사를 베푼 것이니 이를 기뻐하라!"

두겐의 눈짓과 함께 병사들이 입마개를 한 죄수들을 차례대로 끌어내 제단의 모루 위에 올려놓고 칼로 목을 치기 시작했다. 서부에서는 그리 어렵지않게 볼 수 있는 참수형이었지만 무려 71명의 목을 한번에 베어버리는 건 흔한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마치 가축처럼 토막난 시신들이 제단 밑에 차례대로 쌓여갔고, 사실을 알고 뒤늦게 달려온 유족들의 울부짖음소리가 광장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강압통제를 거부했더는 것만으로 목을 치는 건 좀 심한 것 아닐까요?"

우베가 행여 주변사람 들을까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카렐에게 물었다.

"분위기를 잡을 필요도 있겠지. 복장불량에 태형 30대, 유학자들에 대한 예의불량 태형 30대, 음란문서소지는 사형, 자정 이후 음주도 사형, 간통도 사형인데 군인이 명령불복종한게 사형이라고 뭐가 이상하겠나."

"휴우......"

우베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오후 코리온의 명으로 발표된 '칙령'에는 방금 카렐이 말한 가혹한 형벌들 외에도 의무 교리교육 10일에 4시간, 각급학교에서의 교리교육 강화 등등 별 같잖은 조항들이 다 들어있었다.

어쨌든 저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서부 시민들도 아직까지 플레렌 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조차 못하는 듯 했다.

카렐이 늘어진 시체들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들에겐 은사를 내렸다고? 그럼 은사를 못받은 자가 있다는 뜻인가?"

길고도 끔찍한 병사들의 참수가 끝나자 두겐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이 제국은 엄한 교리에 따라 지배될 것이니, 최고제후에 대한 복종도 그 하나로다! 플레렌 가의 수장이며 서부 최고제후인 나 두겐 첸 플레렌은 교리를 어지럽히고,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철퇴를 내릴 것이니 모두 보고 본보기로 삼으라!"

시민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플레렌 가의 수장은 명목상이나마 네페티 부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두겐이 공공연히 자신이 최고제후임을 선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그들도 네페티 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쑥덕대고 있었지만 처형장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누구도 이를 드러내놓고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우베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저들이 부인을 살려둘까요?"

"글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알아보기는 해야겠지. 서부에서 참수보다 가혹한 형벌이라면......"

카렐이 얼굴을 찌푸렸다. 우베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화형이나 팽형이 있고 책형, 차형이 있고......"

어제 혼자 읊조리다가 제네르에게 혼구멍만 났던 것들을 다시 중얼거리던 우베가 잽싸게 카렐의 눈치를 다시 살폈다. 하지만 카렐은 생각외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화형이나 팽형은 요란스러우니 아닐 가능성이 높고, 책형이나 차형은 여자에겐 거의 내리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사촌누이인데 그런 형은 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형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중간에 서서 카렐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일 양심의 가책이 덜한 쪽으로 내릴거야......피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직접 볼 필요 없는......"

"혹시 사막에 내버릴까요?"

갑자기 카렐이 우베를 이끌고 플레렌 가 종가 담벼락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 들어가봐야겠다. 넌 부근 아무데나 눈 피할 수 있는곳에 숨어있도록 해."

"이미 환해졌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지."

입고있던 검은 튜닉을 벗어 우베에게 내민 카렐은 가지고있던 복면과 검은 망토를 눌러쓰고는 플레렌 가 종가 담 안으로 잽싸게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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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화분을 가지고 델루지 가 종가로 향하던 카렐의 머릿속에 지난 3년간의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던 황궁생활이 스쳐지나갔다. 사실 카렐에게는 시로를 제외하고는 근위대에서 알고지낼만한 사람도 전혀 없었다. 다른 가디언들처럼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함께 일해온 오랜 동료나 전우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근위대원들에게도 카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휴......"

근위대 표시가 붙은 대형차량을 본 남부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비키며 고개를 숙였다. 저들도 이 차의 대단한 위용에 그 안에 탄 사람이 대충 누군지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 초지를 뛰어다니는 양들의 건강한 모습이 카렐의 반쯤 흐려진 눈동자에 들어왔다. 카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실리페 황후의 자신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지만 '연인'으로서의 자신을 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카렐도 잘 알고있었다. 실리페 황후에게 카렐은 말잘듣고 테크닉 훌륭한 큰 노리개감에 불과했다. 그리고 황후와 억지로 보내야 하는 잠자리는 카렐에게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고문이나 별다를바 없었다. 매번 강제로 마셔야 하는 약간의 술도 카렐에게는 고통스럽기가 짝이 없었고 그때마다 이성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모습도, 그 후에 찾아오는 머리를 찢는듯한 두통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정작 그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누군가에게 장난감처럼 이용당한다는 자괴감이었다.

멀리 델루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하고 큰 대문이 보이고 있었다. 어릴적 수우에게 듣던대로 저 대단한 가문의 위용은 그 어마어마한 문에서부터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의 눈에는 저 거대한 대문이 마치 감옥문처럼 보이고 있었다.

"페로......수우......"

카렐은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작고 어린 떡갈나무를 문득 바라보았다.

부총리였던 페로와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장관직중 민생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2품 문관요직인 부총리는 '음지에서 일하는' 보안국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보안국장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고, 공직자들과의 접촉도 금기시되고 있었다. 공직자가 '서슬퍼런' 보안국장을 눈앞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이제 더이상 공직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러다보니 당돌하고 야심만만한 페로를 어떤 식으로든 얽어넣을 궁리만 하고 있던 베흔을 잘 아는 카렐로서는 자신이 페로를 볼 일이 없다는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화분을 손에 쥔 채 구름이 비쳐보이는 투명한 차 천장을 잠시 올려보던 카렐은 시선을 문득 국화 쪽으로 돌렸다. 이젠 성숙한 자태를 뽐내는 이 하얀 국화 한 송이는 황실정원사에게서도 놀랄만큼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정작 주인인 카렐 눈에는 이상하게도 무언가 허전해보였다. 카렐은 손끝으로 티끌하나 없는 흰 꽃잎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도착했습니다."

힐러 녀석이 차 문 옆에 똑바로 섰다. 흰색의 근위대 정복과 망토를 차려입은 카렐은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웅장한 위용의 델루지 가 종가 문 앞에 섰다.

나즈막한 언덕 위에 4개의 큰 중정을 끼고 지어진 이 거대한 석조건물은 구석구석 새겨진 꼼꼼하고 세련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정면의 거대한 광장 겸 정원을 원형의 긴 회랑이 감싸돌고 있었다. 건물 뒤쪽으로도 인공으로 만들어진 듯한 큰 호수와 분수대, 조각상들로 가득한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과 산책로가 펼쳐져 있었다.

저택 중앙의 큰 돌문이 열리자 화분을 든 힐러를 대동한 카렐이 천천히 안에 들어섰다.

"신임 파견군 사령관이신 가디언 카렐 님 드십니다."

집사의 보고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 화사한 꽃들과 흰 대리석 타일로 장식된 환하고 큰 방이었다. 방 한쪽에서 앵무새의 깃털을 어루만지고 있던 금발머리의 여인이 문득 손님쪽을 돌아보았다. 귀 밑의 선명한 상급귀족문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자그맣고 유약해보이는 체구와 햇빛에 제대로 드러난적이 없어보이는 고운 피부나 뒤로 틀어올린 화려한 머리모양만 보아도 이 여인의 신분은 족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얼핏 소녀처럼 앳되어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과 눈매에서는 이미 두 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은 바 있는 성숙함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이곳의 남부인들보다 훨씬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서부인 특유의 외모를 한 이 여인은 오랜 옛날, 수우 집을 처음 찾아갔던 어린 카렐과 페로를 '넋을 놓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남부 스타일의 품위있는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있던 네페티 부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부인이 집사의 말을 못들은 모양이라고 생각한 카렐이 그의 앞에 끓어앉으며 다시 소개를 했다.

"새 남부 파견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가디언 카렐이옵니다. 서부 최고제후이시며 남부 최고제후 델루지 가 종부이신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네......네가 카렐?"

부인이 꽤나 놀랐는지 잠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카렐을 올려다보던 네페티 부인이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카렐의 명치나 조금 넘어설만한 이 자그만 부인이 민망할정도로 바싹 다가와 발돋움까지 하며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카렐이 움찔 하며 뒤로 조금 물러나고 말았다.

"정말......맞네? 세상에......그 조그맣던 꼬마애가......."

부인은 카렐과 자신의 키를 비교하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네페티 부인은 팔을 위로 뻗어야 가까스로 카렐의 머리 끝에 닿을 정도였다. 부인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밖의 사실에 고무받은 카렐이 부인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힐러 부관과 집사가 자리를 비우자 부인은 카렐에게 접견실 중간의 자그만 차 테이블을 가리켰다.

"도대체 얼마만이야? 세상에, 이렇게 훌쩍 자랐다니,"

"103년만입니다."

옛날에도 방문객들에게 유난히 친절하던 부인의 태도는 여전했다. 카렐은 가져간 흰 국화를 부인 앞에 내놓았다.

"4달동안 직접 키운 국화입니다. 대단하게 귀한 건 못되지만.....제 정성이 들어간 것이니 받아주십시오."

직접 키웠다는 말에 네페티 부인은 잠시 아이같이 선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마워.....이런 소중한 걸....."

말뿐인 감사가 아닌, 정말로 기뻐하고 있는 부인의 선한 눈매에서 카렐은 국화를 가져오며 들었던 아깝던 생각을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부인은 그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 접견실 구석으로 다가가 과일바구니를 들고왔다.

"워낙 옛날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네가 꽃하고 과일 꽤 좋아했던 거 맞지?"

"사과를 좋아했죠."

"사과도 있을거야, 기다려봐,"

과일바구니를 뒤적거리던 부인은 안쪽에 들어있던 꽤 큰 사과를 카렐에게 내놓았다.

"이걸 어떻게 먹지? 하녀 불러 깎아달라고 그래야겠네?"

어릴 때부터 귀하디 귀한 몸으로 자란 부인이 과일을 깎을 줄 알 턱이없다는 생각에 카렐이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은 하녀를 부르려는 듯 탁자 위의 작은 종을 집어들었다.

"그냥 주셔도 됩니다."

카렐이 웃으며 부인이 내놓은 사과를 냉큼 받아들었다.

"사과 좋아하는게......꼭 누구하고 똑같네......"

이 말을 하는 부인의 표정이 묘하게 시무룩해져 있었다. 카렐은 그 잠깐새에 부인의 눈에서 흐르는 묘한 그리움을 읽고있었다. 카렐은 부인이 당연히 멀리있는 남편 테번 공을 보고싶어하는 것이라 혼자 짐작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부인께서 훌륭하게 가정을 꾸려나가고 계신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있습니다. 부군이신 테번 공도 조만간 찾아뵈어야겠군요."

부인은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 카렐의 이 의례적인 한마디에 별다른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접견실 안을 둘러보던 카렐의 눈에 벽에 붙어있는 테번 공의 큰 초상화가 들어왔다. 차마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고집으로 똘똘 뭉쳐보이는 저 쭈글쭈글한 테번 공과 반짝이는 금발의 매력적인 네페티 부인이 퍽이나 안어울린다는 건 아마도 이 집에 와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된 감정일 듯 싶었다.

남편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카렐에게 부인이 짧게 덧붙였다.

"남편은 출장나갔어. 한달은 있어야 돌아올거야. 부근에 있어도 집엔 잘 안오거든."

"적적하시겠군요."

말을 뱉어놓고 카렐은 아차 싶었다. 옛날의 친분으로 지금까지 편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상대는 서부 최고제후 겸 남부 최고제후의 부인이었고 더할나위없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일개 가디언인 자신이 사생활에 관해 말을 하는 것은 실수도 이만저만 실수가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냐, 괜찮아. 뭐, 그런 건 어차피 말 안해도 뻔한거지."

부인은 카렐의 말실수에도 뜻밖에 별로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친구같아서 좋은걸."

부인이 탁자 위에 올라와있던 카렐의 왼손을 붙들자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하며 뒤로 뺐다. 그의 오른손은 어느새 허리에 찬 단검 위를 짚고 있었다.

"이, 이런......"

근위대에서 카렐은 절대 접근하거나 손을 대서는 안되는 '요주의인물'이었다. 아직 야생의 본능에서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카렐은 누군가의 몸이 닿으면 본능적으로 공격하기가 일쑤였고 심지어 자신을 놀리려 옆구리를 붙든 실리페 황후에게 자기도모르게 단검을 뽑아든적도 있었다. 카렐의 뜻밖의 태도에 소스라치게 놀란 쪽은 네페티 부인이었다.

자신이 큰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카렐은 그답지않게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제가......아직.......문명사회에 제대로 적응을 못해서......야생에서 너무 오래 살다보니......"

"으, 음, 그래?"

부인이 놀란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약간 멋적은 듯 과일바구니를 만지작거렸다.

때맞춰 노크소리와 함께 하녀 둘이 차테이블을 밀고 들어왔다. 한참 난처하던 카렐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셈이었다. 돌아나가는 하녀의 귀에 대고 무어라 지시를 내린 네페티 부인은 차주전자에서 손수 차 한잔을 카렐에게 부어주었다.

"동부 베라카스 산 우전이군요. 비발효차로는 최상급품 같습니다."

카렐이 중얼거리자 부인이 약간 놀란 듯 카렐의 얼굴을 다시 올려보았다.

"냄새만으로 알아? 세상에, 속여먹지도 못하겠네?"

별것도 아닌 것에 부인은 어지간히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거의 야생동물 수준의 후각을 지닌 카렐에게는 사실 대단한일도 아니었다. 망가졌던 부인의 기분이 그제서야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부인은 어릴 때 페로와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던 그때의 그 아름답고 착한 '수우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고 카렐은 그와 마주앉아있는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전의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둘은 차를 마시며 잠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부인은 카렐의 유난히 큰 손을 바라보며 잠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몇몇 가디언들에게 돌연변이처럼 나타난다는 이 기형적으로 거대한 손은 그 길이만으로도 네페티 부인의 작은 손의 두 배는 충분했다. 찻잔을 쥔 부인의 손은 물론 크기는 접어두고라도 힘줄과 혈관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카렐의 소름끼칠 정도의 손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카렐은 방금전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한손을 조심스럽게 부인의 손 옆에 내려놓았다. 부인은 카렐의 방금의 실수를 용서할 정도로 충분히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부인은 이전보다는 훨씬 조심스럽게 카렐의 손등을 가볍게 짚었다.

"정말 크네. 단단하기도 하고.....신기해라."

무어라 대답하려던 카렐의 입은 접견실 문을 두들기는 집사의 목소리에 멈춰버렸다.

"플라칼 가 제례에 가실 시각입니다."

"벌써 그랬던가?"

부인이 시계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렐도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럼......소인 물러가겠습니다."

"잠깐, 기다려봐, 다 됐을텐데, 선물있어."

곧이어 들어온 하녀의 손에는 꽤 큰 바구니가 들려있었고, 그곳에는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가득히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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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분이 질문하셔서 덧붙입니다.

# 화형은 말 그대로 태워죽이는 형벌입니다. 하지만 화형도 그 종류에 따라 미리 연기를 잔뜩 피워 죄인을 질식시킨 후 태워죽이는 형벌이 있고(일종의 은사입니다.), 강한 불로 말 그대로 태워죽이는 것과, 가중형인 속칭 '장작구이'(파트 1에 잠깐 나왔었죠.)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많이 시행되었고, 수장형과 함께 여성에게 많이 행해졌습니다.

모든 처형방법이 신에게 공양하는 데서 비롯되니만큼 이 화형은 불의 신에 대한 공양으로 여겨졌습니다.

# 팽형은 물이 삶아죽이거나 끓는 기름에 넣어죽이는 (쓰면서도 속이 조금 그렇군요....으읍) 형벌로 중국에서 많이 시행되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도 팽형이 있기는 하였으나, 중국처럼 정말로 그렇게 죽이는 것이 아니고 미지근한 물에 넣고 벌이는 한바탕 쇼였습니다. 물론 형 후에 호적부에서 삭제되고 호패가 몰수되는, 서류상 죽은 것을 처리되었습니다.

이 형벌은 수장형과 함께 물의 신에 대한 공양의 일종입니다.

# 책형은 십자가형과 같이 못박아죽이는 형벌입니다. 동서양 공히 실시되었으며, 주로 1자형 나무말뚝에 손을 위로 해서 못박아죽이는 경우가 많았고, 중국에서는 목판에 못박아죽이는 방식으로도 행해졌습니다. (십자가 형태는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책형은 죽은 후에 시체가 공기에 쓸려 사라질때까지 걸어두는것을 특징으로 하는만큼 공기, 혹은 바람의 신에 대한 공양으로 여겨집니다.

# 차형은 사람을 눕혀 사지 관절에 쐐기를 대고, 공중에 약간 띄운 후, 온몸의 뼈를 수레바퀴로 내리쳐 으스러뜨리고, 매달아 죽을때까지 방치해두는 형벌이었습니다. 종종 책형의 가중형으로 함께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수레바퀴라는 형태의 특성에 기인해 태양신에게 공양하는 방식의 처형이라는 설이 우세합니다.

마우스가 고장이 나서 요즘 편집작업이 쉽지않군요. 빨랑 사야되는데....이놈의 귀차니즘 때문에.....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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