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8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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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부임 초기의 카렐은 바빠서 눈코뜰새가 없었다. 지난번 암살미수사건의 뒷처리부터 시작해서 그에 따르는 일부 부대배치변경까지 겹쳐서 신임사령관이 처리해야 할 일은 끝도없었다. 이런 카렐에게 베흔이 찾아온다는 소식은 개인적으로 보기싫고말고를 떠나 접대라는 일거리 하나가 더 늘어나는 달갑지않은 뉴스였다. 중앙본부에서 온 전문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카렐에게 부관인 힐러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별 신경쓰실일은 없을겁니다."
"대장이 온다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써? 상전인데."
카렐이 예전같은 퉁명스런 말투로 내뱉었다. 이곳에 도착하고 근 보름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카렐은 굳이 이 일이 아니어도 이미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여기 계시지는 않을테니까요."
카렐이 눈살을 찌푸리며 또다시 '잘난체하는' 힐러 녀석을 째려보았다.
"베흔 대장님은 보통 델루지 종가에 머무르십니다. 저흰 별 신경쓸일이 없을겁니다."
"힘있으신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카렐이 가시가 잔뜩 돋힌 말을 내뱉자 상관의 베흔에 대한 반감을 알 만큼은 아는 힐러가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어쨌든 힐러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전용셔틀로 이곳 사령부에 도착한 베흔은 형식적인 업무보고만 받고서는 한두시간만에 델루지 종가로 휙하니 가 버렸다. 물론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던 카렐로서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면서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근위대장 본연의 임무에는 칼같이 충실한 베흔답지않은 이상한 행동인것은 사실이었다.
"4일이나 머문다더니, 나머지 기간 내내 델루지 저택에 있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러실겁니다."
힐러가 아무렇지않게 대답하자 카렐이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근위대 일은?"
"4일간 휴가신청하고 나오신 거랍니다."
"뭐야? 그럼 델루지 가로 휴가온거야?"
"그런 셈이죠."
힐러가 또다시 그 잘난체하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황궁에서도 베흔과 델루지 가가 유난히 사이가 좋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정도라는 것은 카렐도 뜻밖이었다. 어차피 베흔이 델루지 가와 좋게지내건 말건 카렐로서는 신경쓸바 없는 일이겠지만 괜히 기분이 개운치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대장이 테번 공과 사이가 좋은건가?"
"아뇨, 테번 공은 지금 황제령에 계실겁니다."
"그 노인네는 도대체 집에 붙어있는 날이 없군. 그럼 대장은 주인도 없는 집에서 궁상맞게 뭐하는거야? 샌드위치바구니 팔에 끼고 혼자 피크닉이라도 다닌대?"
카렐의 비꼬는듯한 말투에 힐러가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페티 부인하고 그럴지도 모르죠."
"엥?"
카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힐러를 내려보았다.
"듣자하니 부인 어릴 때 서부에서 대장이 구해준 이후로 꽤 가깝게 지내신다고 하더군요. 휴가때 종종 오셔서 부인의 개인가디언노릇 해주시는걸로 압니다."
황당해진 카렐은 자리에 멍 하니 서 있었다. 그 천사같은 네페티 부인과 악마사촌뻘인 베흔이라니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자존심덩어리 베흔이 부인의 개인가디언노릇을 한다니 기가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카렐은 기회닿는대로 베흔이 네페티 부인의 개인가디언 노릇을 하고있는 그 흥미로운 광경을 꼭 눈으로 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 '기회'가 온 건 운좋게도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부대배치의 일부변경이 끝나면서 그 결과를 최고제후가문에 보고하는 의례적인 절차가 남아있었다. 최고제후 테번 공이 없으니 네페티 부인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이 상례였다.
아침 일찍 자료를 옆구리에 끼고 델루지 가를 찾아가면서 카렐은 다른 가디언들처럼 네페티 부인 뒤에 고개를 조금 숙이고 뻣뻣하게 서 있는 베흔의 모습을 내심 상상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렐의 상상은 계속 가지를 쳐서 가디언을 벌줄 때 쓰는 짧은 채찍을 든 조그만 네페티 부인이 거구의 베흔의 어깨를 마구 때리고 있는 --- 물론 얼토당토않은 상상인것은 카렐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 황당한 지경까지 도달해 있었다.
카렐을 접견실로 이끌려던 집사를 가로막은 건 하녀 복장을 한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집사를 구석으로 잡아당기더니 그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카렐의 예민한 귀는 여자의 귓속말을 다 듣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벽에 걸린 풍경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도 늦잠을 자는군. 어지간히 피곤했나.......'
생각지도 않았던 부인의 행동에 카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미리 시간약속을 했음에도 곤하게 잠들었던 부인을 하인들이 감히 깨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집사는 카렐에게 잠시 기다리라며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1층 로비에 힐러와 우두커니 서 있게 된 카렐은 쓴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올라오십시오. 혼자들어오셨으면 합니다."
집사가 다시 나타난 건 3,4분정도 지나고 난 후였다. 힐러를 로비에 남겨두고 2층에 혼자 올라간 카렐은 제일 안쪽의 부인 침실 옆 쪽방으로 안내되었다.
"죄송합니다, 부인께서 어제 처리하셔야 할 일이 많으셔서......늦게 주무셨던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카렐은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쪽방에서는 실망스럽게도 '고대하던' 베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던 카렐이 결국 집사에게 다시 물었다.
"어제 저희 근위대장님께서 여기 오셨을텐데.....그분은......"
"아, 예, 근위대장님께선 어젯밤에 부인의 침소를 지키신 줄 압니다."
카렐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입을 애써 틀어막았다. 베흔이 개인가디언 노릇을 아주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이정도의 귀족들에게 있어 머리맡에 가디언을 세워놓고 자는 것은 그냥 일상의 한 부분이겠지만 베흔의 경우는 사정이 틀렸다. 황궁에서의 베흔도 드물게 황제의 침소를 지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밑의 다른 특급이나 1등급 가디언들의 일이었다. 그정도로 콧대높은 베흔이 이곳에서 기껏 제후의 침소를 지켰다니 우스운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침실쪽의 쪽문이 열리더니 잠이 덜 깬 얼굴의 네페티 부인이 가벼운 가운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황공하옵니다. 주무실 줄 알았다면 조금 늦게 올 것을......"
카렐이 머리를 조아려보였다.
"아냐, 괜찮아, 늦잠잔 내 잘못이지,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부인이 피곤한 얼굴에 애써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카렐이 내민 자료를 받아들었다. 표지를 살펴본 부인은 집사가 넘겨준 펜을 받아 서명을 해서 돌려주었다. 부인에게 '확인증'을 넘겨받던 카렐의 눈에 갑자기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꽤 강한 베흔의 체취였다.
"됐지?"
카렐은 쪽방 안을 잠시 두리번거렸지만 베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엉?'
카렐의 머리가 순간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카렐의 그 야생동물같은 예민한 후각에 느껴지는 베흔의 그 짙은 체취는 다름아닌 네페티 부인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순간 몇 가지 가능한 상황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올리며 카렐은 넋나간 사람처럼 잠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몇 가지가 아닌, 사실상 한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이젠 다 된건가?"
부인이 멍 하니 꿇어앉아있는 카렐에게 두번째로 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카렐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되었습니다.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뒷걸음쳐 나오는 카렐의 다리가 제멋대로 후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일을 마친 네페티 부인은 다시 침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쪽방에서 나온 카렐은 부인의 침실 문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저.....썅......"
카렐이 이를 빠드득 갈고 있었다. 맘같아서는 저 침실문을 확 열어젖히고 원수같은 베흔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을 스친 건 자신을 너무도 기쁘게 맞아주던 네페티 부인의 그 선한 얼굴이었다. 그는 확인증을 든 채로 2층 복도에 10분이 넘게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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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는지 몸에 가해지는 뼈를 짓누르는 압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지금껏 가까스로 의식을 유지한 카렐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랜딩보드를 다시 꽉 붙들었다.
"어헉,"
사막의 모래냄새가 섞인 뜨거운 공기가 확 밀려들어왔다. 랜딩보드와 함께 모래바닥에 동댕이쳐진 카렐은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흘러내리는 모래와 함께 옆의 사구를 따라 밀려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가까스로 손을 뻗어 자리에 멈춰선 카렐이 어질어질한 눈을 가까스로 치켜뜨며 사구 위를 올려다보았다. 셔틀의 반대편 문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카렐이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사구를 신나게 구른 덕에 몸의 피가 그럭저럭 돌기 시작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지금 그걸 좋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저 셔틀이 출발하기 전에 다시 탈취하지 못하면 네페티 부인이건 뭐건 꼼짝없이 모두 이곳에 고립되고 마는 셈이었다.
카렐은 자신이 저 셔틀에 무모하게 달려든 스스로를 이제와 뼈저리게 원망하고 있었다. 이제는 '적'인 저 여자를 구해서 도대체 뭣하겠다고.
갑자기 구역질이 난 카렐은 먹은것도 없는 뱃속에서 소화액을 잔뜩 토해내고 있었다.
잠시 머릿속이 멍 해졌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카렐은 둔해진 몸으로 사구를 엉금엉금 기어올라 셔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빨리 내려!"
다섯 명 정도의 무장한 제후군 병사들이 포박당한 12명의 제후군 고급지휘관들을 사막으로 사정없이 걷어차냈다. 낮게는 중랑부터 높게는 중랑장까지, 수백에서 수천에 달하는 병사들을 부렸을 이들 지휘관들은 사병들의 손에 거칠게 밀려나며 마지막 자존심이나마 고함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이 반역자들! 천벌을 받을거다!"
뜨거운 사막 모래 위에 내팽개쳐진 플레렌 가 제후군 지휘관들이 악담을 토해냈지만 소용없는 짓이라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있었다. 마지막으로 끌려나온 네페티 부인은 멍 해진 눈으로 난생처음 접한 이 끔찍하고 황량한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수수한 드레스가 뜨거운 모래바람에 휘날렸다. 등을 떠밀려는 병사의 손을 뿌리치며 부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나가겠다."
부인이 느릿한 걸음걸이로 셔틀에서 내려서서 끝까지 자신에게 충성하고 이 길을 택한 12명의 지휘관들 중앙에 똑바로 섰다. 셔틀의 문이 다시 닫히는, 야속한 광경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동자에 어느새 눈물이 조금 맺히고 있었다.
"에이! 썅!!"
무언가 시커먼 것이 반대편 사구 밑에서 뛰쳐올라서는 막 이륙하려는 셔틀의 문에 뛰어들었다.
"카렐!"
뜻밖의 상황에 경악한 부인이 목이 째져라 소리쳤다. 단검을 입에 문 채 문짝에 매달린 카렐이 자신을 밀어내려던 제후군 병사 한 명을 밖으로 거칠게 내던져버렸다.
"문 닫아! 문 닫아!"
셔틀 입구를 지키던 제후군 병사가 조종실쪽에 대고 결사적으로 외쳤다. 평소의 카렐 같았다면 바로 몸을 튕겨 셔틀 안으로 뛰어들었겠지만 카렐의 몸도 많이 둔해져 있었다. 문에 매달린 채 버둥거리던 카렐의 손에 병사 한 명의 발목이 잡히면서 그 역시 그대로 바깥으로 동댕이쳐져버렸다.
일단 셔틀 안으로 기어오른 카렐에게 앞을 가로막는 3명의 제후군 병사 정도는 문제가 될 바가 아니었다. 칼을 내질러오는 한 녀석의 배에 칼을 박아넣은 카렐은 나머지 한 손으로 다른 병사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녀석 역시 목이 비틀린 동료의 몸에 부딪히며 셔틀 안쪽에 딩굴고 말았다. 쓰러진 병사의 목을 사정없이 발로 짓밟아버린 카렐은 바로 조종석으로 들이닥쳤다.
"죽기싫으면 돌아가!"
카렐이 칼을 들이밀자 깜짝 놀란 조종사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피하려 했다. 카렐이 그의 뒷덜미를 세게 움켜잡았지만 멍청한것인지 충성스런것인지 이 조종사의 저항이 생각외로 완강했다. 카렐은 자신의 옆구리쪽으로 조종사가 내지르는 단검을 피하려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벌렁 자빠져 버렸다. 평소의 카렐같았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몸이 아직 반쯤 마비된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카렐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조종사도 넘어지는 적과 함께 좌석 옆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런 망할!"
셔틀이 갑자기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저공에서 막 이륙하려던 찰나에 통제를 상실한 셔틀은 자동으로 방향을 잡아볼 여유도 없이 그대로 한쪽이 땅에 끌리더니 모래땅에 처박히며 구르기 시작했다.
"이익!"
기겁을 한 카렐이 반사적으로 조종석 등받이를 움켜쥔 새, 조종사 역시 방금전까지 죽이겠다고 날뛰던 카렐의 다리를 생명줄인 양 꽉 껴안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요란스런 소음과 함께 바닥을 한 바퀴 구른 셔틀은 완전히 뒤집어진 채 모래 속에 반쯤 쳐박혀서야 가까스로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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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른 볼일로 컴에 못들어올 것 같아 일찍 두개 모두 올리고 나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