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9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제기랄!"
뜻밖의 황당한 결과에 카렐이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와중에도 아직 의식이 남아있던 멍청한 셔틀 조종사가 카렐에게 또다시 칼을 내질러왔다.
"썅! 병신새끼!"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카렐이 한손으로 그의 목을 붙들고 뒤로 확 꺾어버렸다. 그 엄청난 충격에 조종사는 악 소리 대신 목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만을 남긴 채 그 충성의 댓가를 치르고 말았다.
엉망으로 꼬여버린 상황을 탄식하며 카렐이 엉금엉금 기어 조종실에서 빠져나왔다. 몸이 조금씩 풀리고는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셔틀이 구르면서 서너군데 멍이 들기는 했지만 다행히 심하게 다친 곳은 없는 듯 싶었다.
"카렐! 카렐!"
셔틀을 쫓아 달려온 네페티 부인이 아직 닫혀있는 셔틀 문을 거칠게 두들기고 있었다. 그에게 문을 열어준 카렐은 그대로 맥없이 셔틀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부인이 급히 카렐의 얼굴을 껴안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정신 좀 차려! 맙소사, 얼굴이 파래졌잖아,"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
지친 모습의 카렐이 허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부인을 구하기는 고사하고 사막에 함께 고립되면서 어쩔수없는 동반자가 되어버린 꼴이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카렐은 쥐고있던 단검으로 부인과 부하들의 손을 죄고있던 포박을 잘라냈다.
"어떻게 따라온거야? 응?"
"복잡합니다."
카렐이 다시 셔틀 안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며 부인의 부하 장교들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빨리 여길 떠나야 합니다. 곧 제후군들이 몰려올겁니다. 챙길만큼 챙겨야죠."
네페티 부인 옆에 있던 한 장교가 선임자인 듯 제일먼저 카렐의 옆에 뛰어오르며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챙길까요?"
"일단 병사들 갖고있던 무기 챙기고.....물하고 먹을거, 옷가지.....뭐든지 다."
"알겠습니다. 모두 들어와!"
장교들이 물건들을 챙기고 있는 새 조종석으로 다시 기어간 카렐은 일단 항법장치부터 작동시켰다. 셔틀이 뒤집어진 통에 글자나 화면도 모두 거꾸로 재생되고 있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어질어질한 카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애써 뒤집으며 거꾸로 된 글자와 각종 표식들을 더듬더듬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방금전의 장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태로는 셔틀을 못움직입니다."
"알아,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야 빠져나갈 것 아냐......제길할.....통제구역 딱 중간이군, 북쪽은 그냥 사막이고 남쪽은 계곡이 있으니.....숨을 수 있는 남쪽으로 가야겠다."
조종석 의자 밑에 있던 지도를 꺼낸 카렐은 일단 품 속에 우겨넣고 셔틀의 통신장치를 작동시켰다. 통제구역 안이니 개인통신장비로는 더이상 바깥과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베의 할룩스코드를 입력하자 잠시 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만 동동 구르는 우베가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무사하셨군요!"
"그래, 지금 네페티 부인을 모시고 있다. 통제구역 남쪽으로 좌표.....-0173, 6642 지점으로 가겠다. 도보로 갈테니 아마 며칠 걸릴거다. 일단 떠나면 통제구역이라 개인할룩스는 작동안될거다. 나하고 연락 안되더라도 거기서 미리 에너지장벽 뚫을 궁리 좀 하고 있어.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무사하십시오!"
몸이 어느정도 풀린 카렐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페티 부인의 부하들이 셔틀을 구석구석 뒤져 '쓸만한' 물건은 모두 챙기고 있었다. 물통을 집어든 카렐은 몇 모금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소화액을 게워낸 뱃속이 지독하게 쓰라려오고 있었다.
"식수는 11통 있고 식량은 병사들이 가지고있던 비상식량과 간식 약간이 전부입니다. 옷가지는 죽은 녀석들에게서 모두 벗겨냈고 무기도 탈취했습니다. 시미터 5자루와 단검 6개, 창 4개입니다. 지금 화장실과 세면실 물탱크에 구멍을 뚫어 물을 빼내는 중입니다."
"잘했네. 서둘러야 해. 빨리 떠나야 하니까."
카렐이 그 지휘관의 어깨를 두들겼다. 얼핏 살펴본 그의 가슴에는 '중랑장 수레드 알 유시프'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크지않은 보통체구에 검고 큰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목구비가 또렷한 전형적인 서부형의 사나이였다.
그를 돌려보낸 카렐은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네페티 부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카렐이 부인의 거칠어진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부인은 그 품 안에서 결국 쌓아두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겐이.....두겐 그애가......"
"압니다. 이제 진정하세요."
카렐이 부인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잠시 감정이 격해졌던 부인은 부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민망했는지 바로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유시프 장군!"
"예!"
"지금부터 이분의 명령을 내 명령으로 알고 따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최고제후님."
그가 '최고제후님'이라는 말에 특별이 더 힘을 주어 발음하며 부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최고제후군 중랑장 정도의 신분이라면 귀족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일개 가디언을 따르라는 부인의 명령에 뜻밖에 군말 한마디 없이 복종하고 있었다.
"모든 용기에 물을 채웠습니다. 지금 출발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서둘러야겠다."
셔틀에서 뛰어내린 카렐이 부인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구두를 신고있는 부인의 작은 발이 모래바닥에 푹푹 빠지고 있었다. 카렐은 죽은 병사에게서 벗겨낸 신발을 부인에게 신겨주었지만 너무 큰지 부인이 뒤뚱거리며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카렐이 하는 수 없이 부인에게 등을 들이댔다.
"제게 업히십시오."
"이래도 걸을 수 있어."
"압니다. 하지만 부인때문에 전체가 늦어지면 곤란합니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시프 장군이 잽싸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실필요 없습니다. 셔틀에 비상용 들것이 있으니 저희가 교대로 최고제후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뭐야?"
셔틀이 추락했다는 소식에 기겁을 하고 놀란 두겐은 벌벌 떠는 페데레스 사령관을 대뜸 추궁하기 시작했다.
"사고인건가? 아니면....."
"사고는 아닌 것 같사옵니다.....타고있던 병사들의 목이 칼로 베어져 있었던것으로 보아서는.....함께 타고있던 12명의 죄인들과 네페티 부인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셔틀을 추락시키고 도보로 달아난 것 같습니다."
두겐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의 실망스런 표정을 힐끗 살핀 페데레스 사령관이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염려 마시옵소서. 지금 천여명의 병사들을 풀어 일대를 수색중입니다. 설사 달아난다고 해도 그곳은 채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사막이옵니다. 녀석들은 절대 살아서 그곳을 나가지 못합니다."
"알아, 알아,"
도무지 마음에 안드는 사령관 녀석에게 한바탕 짜증을 낸 두겐은 이 사실을 학장에게 알려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은 이런 류의 실수를 가지고 아랫사람을 내놓고 책망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냐오냐하는 바도 절대 없었다. 학장은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겠지만 언젠가 그 '후환'이 돌아올 터였다. 그렇다고 학장에게 어설픈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두겐은 항상 자신의 뒤를 지키고 서 있는 그 금발의 미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샤드니."
"예."
얼핏 기생오래비같은 그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짧고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얇은 입술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네 생각은 어떠냐?"
"학장님께선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저녀석의 쌀쌀맞은 대꾸에 두겐이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이 말없는 모사녀석은 자신이 묻기 전에는 직접 나서서 조언을 해주는 법이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도움이 되어야 하는 때 정작 있으나마나 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녀석의 말버릇에 부아가 돋은 두겐은 아무래도 알리지 않는 편이 낫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누나를 사막에 내다버린다는 목적 자체가 어긋난 것도 아니었고, 사령관 말마따나 어차피 죽기는 매한가지니 긁어 부스럼만들 필요는 없었다.
"일단은 비밀에 붙이도록 해."
명령을 받은 페데레스 사령관이 대답을 마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샤드니가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긴 두겐을 살짝 노려보며 손에 쥔 할룩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탈진한 장교 중 한명이 모래바닥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급히 그를 일으켜세운 카렐은 흐르는 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허옇게 일어서있는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얼핏 꽤 가까와보이던 험한 바위계곡은 가도가도 그 크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쳐다보기 버거울 정도로 뜨거운 해는 여전히 그들의 머리 위에서 살인적인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기까지만 가면 돼. 그늘에만 들어가면 일단 살만할거다."
카렐이 쓰러진 장교의 입에 물을 조금 흘려넣어주고는 어깨에 불끈 둘러멨다. 들것에 실려 비교적 편하게 가는 부인조차도 축 늘어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참으실 수 있겠습니까?"
"편한 내가 못참으면 날 들고가는 사람들은 어쩌겠어."
카렐의 걱정스런 물음에 부인이 부하들 볼 면목이 없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은 손수건을 꺼내 부인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일단 햇빛만 가리면 괜찮을겁니다. 얼굴만이라도 가리십시오."
"고마워."
부인이 카렐의 거칠어진 손을 가볍게 붙들었다. 카렐은 사람 한 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선두에 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부인은 얼굴을 가린 손수건을 조금 들추고 그런 카렐의 뒷모습에서 떨리는 눈동자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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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놓고보니 평소보다 조금 짧네요. 분량을 생각하며 자르는 게 아니라서....
(그건 그렇고 인기투표에서 이 못난 작가에게도 드디어 한표가.....이 감격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