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1화 (91/1,132)

< -- 91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42.

페데레스 사령관에 애원반 협박반으로 가까스로 4번 행성의 진입허가를 얻은 베흔은 일단 의례차원에서 남부 고위도에 있는 파예드 아카데미부터 찾았다. 밉든곱든 코리온 리쿠 학장은 작금의 이 지역 사태에 대해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인물이었고, 유학자 피살사태 진상파악 명목으로 진입허가를 얻은 베흔의 입장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정이었다.

뻗치는 성질을 애써 참으며 학장실을 찾아간 베흔을 제일 먼저 맞은 건 웃는 낯의 하심 예킨터스 교수였다.

"학장님께선 아침식사중이십니다. 좀 일찍오셨군요."

무심코 시계를 바라본 베흔은 그제서야 이곳의 현재시각이 아침 7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킨터스 교수 말마따나 방문객 신분으로 올 만한 시각이 아닌 건 사실이었다.

'제길할,'

베흔은 평소의 자신답지않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탓하며 의자도 아닌, 방석같지도 않은 천쪼가리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기다리는 수모를 감수할수밖에 없었다.

"식사중이시니 40분만 더 기다리시죠."

냉담하게 한마디를 던진 하심은 자기 의자에 털석 앉아 무슨 서류일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제국 최강의 군사집단인 22만의 황실근위대를 이끄는 천하의 베흔을 앞에 내려다보며 예킨터스 교수는 접대 따위는 할 생각도 없는지 태연하게 자기 일만 하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베흔도 자신을 도무지 무서워할 줄 모르는 저 방자한 여자의 목을 그 큰 손으로 비틀어주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그런 베흔이 저린 다리를 참느라 몸을 비비 꼬기 시작할 무렵에야 안쪽에서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따르시죠."

저린 다리를 두들기며 일어난 베흔은 그제서야 가슴을 넓게 펴며 근위대장다운 당당한 자세로 학장실 안에 들어섰다.

"황제령에서 오신 근위대장 가디언 베흔 님이옵니다."

하심의 소개에 베흔이 먼저 고개를 숙여보였다. 자리에 앉아있던 코리온 리쿠 학장은 앞에 놓여있던 아침상을 물리며 베흔에게 바로 앞의 두툼한 방석을 가리켰다. 또한번 방석에 앉아야 된다는 사실에 베흔의 저린 다리가 그나마 더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은 베흔이 무심코 돌아본 코리온의 아침상은 손바닥만한 그릇에 담긴 쌀죽 한그릇과 차 한잔이 고작이었다. 이 별난 학장은 검소하고 고기를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는 그 희한한 식성과 결벽증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고 베흔의 한모금거리도 되지 않을 저 깨끗한 그릇은 이 소문이 틀린것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베흔은 황당함을 애써 감추며 코리온의 앞에 높인 방석에 일단 자리잡고 앉았다. 가볍게 입을 헹구며 베흔을 바라보는 코리온의 눈꼬리에 웃는 것인지 찡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참으로 묘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코리온과 공식석상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나치다가 만난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1대 1로 개인적으로 만나기는 베흔 또한 처음이었다. 아니,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만남을 가지는 건 처음이라는 편이 정확했다. 먼 옛날, '공적으로' 마주했을때만 해도 자신이 이 특이한 녀석과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하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코리온은 귀 옆을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만입니다. 근위대장님."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쿠 학장님."

베흔은 고개를 숙이는 척 눈을 약간 내리깐 채 코리온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베흔은 코리온에 대한 아무 예습도 없이 찾아올 정도로 서툰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베흔의 낌새를 모를 리 없는 코리온이 짐짓 웃음띤 얼굴로 베흔에게 차 한잔을 손수 내놓았다.

"황제령에서 말안듣는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고초가 많으시오."

"제위가 바뀔때마다 늘상 있어온 일이지요."

은근히 가시돋힌 그 말에 베흔은 여전히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베흔도 내심 말하고싶은 주제를 터뜨릴 타이밍을 탐색하고 있었다. 일개 근위대장에 불과한 베흔이 제국의 대군이며 서부의 정신적 지도자라고까지 불려지는 이 녀석에게 먼저 따지고들어가는 것은 어쨌든 그다지 모양이 좋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논쟁 자체로도 천하에 자신을 당할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코리온은 이런 사소한 탐색전 스타일의 지루한 대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코리온이 한참 눈치를 살피던 베흔의 짐을 덜어주었다. 베흔은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온 말을 풀어놓았다.

"세가지이옵니다. 첫째는 연락이 두절된 레곤 대공주저하의 행방에 관한 수색협조요청이옵고,"

"어머님는 내가 모시고있소."

코리온이 너무나 손쉽게 대답을 토해놓자 도리어 먼저 말을 꺼낸 베흔이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코리온이 데리고 있는 것은 베흔도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무시무시한' 근위대장의 탐문에 '모른다' 느니 '다녀가셨다'느니의 대답으로 둘러댈줄로 알았던 코리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장남인 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게 무슨 문제가 되지는 않을진대.....묻는 이유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베흔은 서둘러 변명을 생각해냈다.

"종친들이나 대신들께서 대공주저하를 뵙고 싶어하고 계시옵니다. 그분들의 요청에 의해 근위대에서 탐문하고 있었을 뿐이옵니다. 대공주저하께 외부로 자진해 연락하시도록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어머님께 연락드리겠소. 둘째는?"

코리온이 내심 조소하며 베흔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코리온의 적극적인 태도에 지금 대화의 주객이 전도되어가고 있음을 베흔도 느끼고 있었다. 베흔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전혀 자신을 두려워하고있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베흔이 두려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28일에 이곳에서 있었던 결의문 발표식에서 44명의 유학자가 피살......"

"그 문제는 지금 우리 교내 치안대에서 조사중이니 조사가 끝나는대로 근위대측에 통보해주겠소."

속이 빤히 보이는 대답임은 말을 하는 코리온도, 듣고있는 베흔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300년 전 1차 학란 때 근위대에 항의하러 찾아왔던 원리주의 유학자들을 향해 자신이 했던 그 말과 토시하나 틀리지 않았다. 베흔으로서도 어차피 이 말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터라 그다지 놀라거나 분개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코리온은 바로 다음번 말을 내놓았다.

"아참, 죽은 자는 44명이 아니고 43명이요. 남극성당 교수였던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은 그자리에서 도망친 것 같소. 누구더라.....시커먼 옷을 입은 꺽다리같은 놈이 들어와서는 겨드랑이에 끼고 채갔다고 하더군. 칼꽤나 쓴다고 하던데......"

베흔의 머리가 띵 해왔다. 다 큰 어른을 겨드랑이에 끼고 달아날 정도면 가디언이 틀림없었지만 보통 체격의 가디언이었다면 '덩치'라던지 '괴한'이라고 표현해야 정상이었다. '꺽다리'라는 말을 들을 가디언이라면 가디언 중에서도 가장 날렵한 몸매를 가진 카렐 뿐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카렐이 이곳에 직접 왔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똑똑한 베흔은 그 사실에 놀라기에 앞서 자신에게 '카렐임을' 이토록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코리온의 의도를 먼저 의심하고 있었다. 코리온은 자신과 카렐을 도발시켜 이곳에 쏠린 관심을 돌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베흔 입장에서는 이 문제로 코리온과 직접 논쟁을 벌일 실익이 전혀 없었다. 먹힐 인간도 아니지만.

"세째는 같은날 연락이 두절된 서부 최고제후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에 관한 탐문입니다. 장남이신 남부 최고제후 제롬 플레렌 델루지 공의 부탁이십니다."

베흔은 첫번째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롬의 이름을 팔아 미리 보호막을 치는 나름대로의 수작를 부렸다. 물론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코리온이 빙긋이 웃음짓고 있었다. 그의 이상한 표정에 잠시 머뭇거리던 베흔이 질문을 이었다.

"물론 이곳과 플레렌 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은 잘 아오나......"

"아, 그 문제는 내가 알고있소."

코리온의 뜻밖의 태도에 베흔이 또다시 덜컥 놀라고 말았다. 베흔의 예상대답은 '플레렌 가의 일은 잘 모른다' 던가 '왜 아무 관계없는 자신에게 묻느냐'는 둥의 대답이었지만 코리온은 또다시 그의 예상과는 어긋나가고 있었다. 베흔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만 청천벽력같은 코리온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고 단호했다.

"내 듣기로 퍼더에 따라 가문에서 주살되었다는 것 같더군."

아무러한 베흔도 이 상황에서 도저히 자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왔다. 창백해진 얼굴로 벌벌 떨고있는 베흔에게 코리온의 평소같은 청아한 목소리가 귓속에서 웅웅거렸다.

"어제 집행되었다 들었소. 퍼더의 경우에 죄목은 보통 공개 안하니......이유는 모르겠고, 구체적인 건 퍼더를 집행한 플레렌 가 쪽에 알아보시구려."

새벽 일찍 눈을 조심스레 뜬 카렐은 잠든 네페티 부인의 얼굴부터 살폈다. 얼굴이 약간 창백해져 있었지만 카렐의 가슴에 줄곧 대고 있어서였는지 얼어붙던지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부인은 카렐이 움직이려 하자 한기를 느꼈는지 잠결에도 카렐의 품을 더 깊이 파고들어왔다.

카렐인 뒷춤의 단검에 또한번 조심스레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 사실도 모르는지 이 여인은 카렐의 옷 속에 민망할정도로 손을 깊이 집어넣으며 그에게 달라붙어오고 있었다.

'제발, 독해져라. 카렐.'

카렐이 밤새도록 몇번이고 스스로에게 주입했던 말을 또다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일단 이 여자만 죽인다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장교들과 불침번 한 명 정도 없애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나면 챙겨놓은 물과, 비상식량을 들고 이곳을 여유만만하게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이 여자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다혈질 제롬 녀석은 펄펄 뛰며 당장 서부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날뛸 것이 확실했다. 물론 항상 가슴보다 머리가 먼저 움직이는 베흔 녀석이 옆에서 뜯어말리겠지만 어쨌든 전통우방으로 알려진 서부와 남부는 그 사이에 큰 금이 갈 것이 확실했다. 그 와중에 잘만하면 카렐이 어부지리를 챙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여자는 여기서 죽여버리는 편이 자신에게 이득이었다.

카렐은 부인의 뒷목을 쥔 손에 다시한번 살짝 힘을 주었다.

"미안해, 카렐."

잠꼬대인지, 진심인지 부인이 카렐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어눌해진 발음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카렐은 왼손에 들어간 힘을 자기도모르게 확 빼버리고 말았다. 가슴에 기댄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부인은 이미 반 쯤 깨 있는 상태였다.

"아직 새벽입니다. 더 주무세요."

카렐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부인의 거친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부인의 어깨를 받쳐주고 있는 왼팔에서 전해저오는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감촉이 카렐의 머릿속을 또다시 어지럽히고 있었다.

"너도 더 자. 힘들었잖아."

가슴을 파고들어오는 부인의 모습에 카렐은 결국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단검을 쥔 손을 놓고 말았다.

'어차피 가다가 다 죽을텐데......괜히 내 손 더럽힐건 없지.'

자신의 판단을 애써 합리화시키며 카렐은 단검을 쥐고있던 오른손으로 부인의 굳어진 어깨를 가만히 주물러주었다. 부인이 다시 잠든것을 확인한 카렐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빼며 부인의 옆에서 빠져나왔다.

"몇시입니까?"

"5시."

불침번의 질문에 카렐이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짧게 대답했다.

"모두 깨우게. 부인은 빼고. 더워지기 전에 지금 출발해야 돼."

새벽공기를 가슴깊이 들이키던 카렐에게 잠에서 깬 유시프 장군이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왜?"

"1명이......못 일어났습니다."

카렐이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11명의 동료들 사이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어제 카렐이 오후내내 어깨에 짊어지고 왔던 그 사람이었다. 카렐은 무덤덤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겉옷은 벗겨. 오늘밤에 써야할테니.."

설마설마 하는 마음에 극도의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플레렌 가를 쳐들어가듯 찾아간 베흔은 미리 기다리던 두겐의 접대를 받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자신을 향해 아무렇지않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저 뻔뻔스럽고 가증스런 유학자놈의 머리통을 그자리에서 산산조각내 팥죽을 만들어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알아낼 건 알아내고 난 후의 문제였다. 게다가 이 '놈'은 이제 어쨌든 서부 최고제후인 두겐 '공' 이었다.

두겐은 베흔을 보자마자 사무적으로 물었다.

"누님때문에 오시었소?"

베흔의 손이 하마터면 두겐의 멱살을 움켜잡을 뻔 했다. 두겐은 아무렇지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누님은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신 고로, 저희 서부의 법도에 따라 합당하게 처형이 집행되었소이다."

말문이 막혀 잠시 할 말조차 잊었던 베흔은 자기의 입에서 빠드득 이가는 소리가 들리는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누라니!"

베흔은 어느새 유학자, 그것도 최고제후에게 존대를 해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베흔의 무례한 태도에 낯을 찌푸리며 두겐이 말을 이었다.

"그건 저희 가문의 명예에 관련된 비밀이므로 밝혀드리기가 곤란하구려. 다만 도저히 극형을 피할 수 없는 정도의 죄과셨다는 것 정도는 알려드리겠소."

부인과 두겐의 그 친밀했던 관계를 잘 아는 베흔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않게 늘어놓는 뻔뻔스런 배신자 두겐 녀석을 짓밟아 갈아마시고싶은 욕망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나마의 침착을 유지할 수 있는것도 베흔이었기 때문이었다. 베흔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부인과 엉킨 기억들이 계속 스쳐지나가면서 그의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버리는듯한 무력감이 갑자기 엄습하기 시작했다.

베흔이 굳어버린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여 말을 이었다.

"시댁인 델루지 가문과 장남이신 제롬 플레렌 델루지 공이 계신데 아무리 이곳 법도라지만 마음대로 집행하다니......"

"전날 연락하고자 했으나 아시다시피 이쪽 통신이 지금 두절되어 있어서.....통신이 재개되면 공식적으로 통보할 예정이었소."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두겐을 바라보며 차마 대놓고 화조차 낼 수 없는 베흔의 속이 어느새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시신이라도 넘겨주시오......장남이신 제롬 공께서 상주가 되시오니 그분께 시신이라도 넘겨드림이 가당할 것이니......"

"그건 곤란하겠습니다."

베흔의 요구를 두겐이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누님은 사막에 버려져 주살되었으니 그 시신을 어찌 찾겠소. 내 대신 장례를 위해 미리 잘라둔 머리카락은 내드리겠소이다. 제롬 당조카님께 전해드리고 장례 잘 치러주기를 부탁드리겠소."

두겐의 보좌관이 비단 보자기에 싼 부인의 머리 한웅큼을 베흔에게 내놓았다. 머리카락을 빼앗듯 받아든 베흔은 거의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젠 저 꼴보기싫은 유학자놈을 때려죽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종사도 쫓아내버리고 타고온 셔틀 문을 안에서 잠가버린 베흔은 아직 부인의 체취가 남아있는 그 옅은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슴에 품어안고 그의 생애 두번째로 '눈물'이라는 것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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