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2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해가 떠오를 때까지 들것에서 잠에 빠져있던 네페티 부인은 누워있는 자리가 흔들리는 느낌에 문득 눈을 떴다. 일행은 계곡의 그늘쪽 절벽 밑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제와 그다지 달라진 건 없는 모습이었지만 단 하나, 선두에서 걷고있는 카렐의 어깨에서 어제까지 얹혀있던 그 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장교들의 머릿수를 세어본 부인은 곧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깨달았다. 눈물이 솟구친 부인의 눈이 어느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깨셨군요."
유시프 장군의 목소리에 카렐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부인에게 다가온 카렐이 손가락 두개 만한 시커먼 바 하나를 내밀었다. 그 자그만 크기에도 불구하게 제법 묵직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군대 비상식량이라서 맛 따위 생각하고 만든 건 아니겠지만 영양은 충분할겁니다. 딱딱할테니 잘 씹어드십시오. 드시고 나서 물 한모금 마시면 뱃속에서 부피가 커져서 속이 든든해질 겁니다."
바를 받아든 부인은 난처한 얼굴로 자신의 들것을 지고가는 장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최고제후의 손에 들린 먹을 것을 차마 바라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부인의 귀에 들려오는 듯 했다.
부인은 앞장서 가고 있는 카렐 몰래 바 중간을 잘라 뒤를 따르는 부하에게 내밀었다.
"뒷사람들하고 나눠먹게."
거칠게 고개를 가로젓는 그의 손에 부인이 억지로 바를 쥐여주었다. 남은 반조각의 끄트머리를 조금 잘라먹은 부인은 들것 앞쪽을 들고가는 부하의 손에 나머지를 살며시 쥐여주었다.
제일 앞장서서 걷던 카렐이 갑자기 멈칫 하자 부인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움찔 하고 말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는 듯 싶던 카렐은 바로 뒷사람에게 물통을 넘기며 다시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모금씩만 마셔."
부인은 그제서야 카렐이 자신의 행동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1명의 생존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덧붙여 최고제후인 자신의 권위을 최대한 살려주기 위해 자신의 손을 빌려 얼마 안되는 먹을것을 분배하게 만든 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부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정작 카렐은 완전히 굶고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저어, 카렐......"
"전 아직 괜찮습니다."
카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너......오래 못견딘다고 했잖아....."
부인의 걱정어린 한마디에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베흔은 부인의 머리카락뭉치를 손에 쥔 채 4번 행성의 근위대 지부 사무실에 몇시간째 멍 하니 앉아있었다. 당장 플레렌 가를 요절내겠다며 길길이 날뛰던 제롬 공은 제발 얼마간만 참아달라며 가까스로 진정시켜놓은 상태였다.
거의 한나절을 바보처럼 앉아있던 베흔의 원망이 엉뚱하게도 카렐에게 돌아간 건 이미 오후도 다 지나간 후였다.
"썩을 놈! 이 망할 씹어먹을 놈! 먼저 와 있었으면서 그거 하나 못막다니! 그럴거면 뭣하러 바람났냐구! 천하에 못난 놈! 썅!"
가슴이 답답해진 베흔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에게 손에 쥐여져있는 부인의 머리카락은 무언가 부족했다. 시체도 보지 못했고, 죽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도 없었다. 그도 서부에서 사막에 내버리는 것이 확실한 처형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시신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로서도 도저히 사실을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지부장!"
베흔의 째지는 목소리에 지부장이 기겁을 하고 달려와 부동자세를 잡았다.
"플레렌 가에서 관리하는 통제구역이 어딨지? 사형수 내버리는 곳 말이야!"
"10여군데 됩니다."
"그렇게 많이?"
베흔의 눈앞이 또다시 캄캄해졌다.
"거기 버려져서......살아남을 수 있나?"
"물과 식량을 일체 주지 않고 내버리니 절대 불가능합니다. 대개 반나절을 못넘기고 죽습니다. 어차피 일교차도 상상을 초월하고 보통 한 축이 도보로 보름 이상 걸리기 때문에 걸어도 죽게됩니다. 그나마 2800급 에너지장벽으로 막혀있어서 일체의 통신도 불가능하고 밖으로 나오지도 못합니다. 몇백년간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베흔이 다 알고있는 내용의 재탕이었지만 베흔은 새삼스럽게 다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제후군쪽에 우리 세작 있나?"
"있긴 합니다만 최근 정세때문에 잠시 활동을 중단중입니다."
베흔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모든 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에게는 네페티 부인의 시신을 찾는다는 한가지 목표만은 생긴 셈이었다. 절대 이대로 돌아갈수는 없었다. 백골이든, 말라붙은 시체라도 좋으니 반드시 부인을 찾아가야 했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이 일행이 걷는 누렇고 황량한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나마 계곡 사이 그늘을 걷는 덕에 어제보다는 한결 나아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일행은 오늘 하루에만 이미 2명을 더 잃고 난 후였다. 첫번째 죽은 사람은 대강 흙무덤이라도 만들어줬지만 두번째로 죽은 교위 한 명은 그정도의 손길을 받는 행운조차도 누리지 못했다.
"후우......"
앞장서서 잘 걷던 카렐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싸매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뒤따라오던 유시프 장군이 바닥에 꿇어앉은 카렐의 팔을 급히 붙들었다. 잠시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은 카렐이 조금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그런 카렐을 바라보는 네페티 부인의 눈가에 근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도 카렐이 먹지 못하면 얼마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난 괜찮아."
애써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카렐이 갑자기 반대편 계곡 아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깐,"
카렐이 갑자기 망토를 벗어던지고는 방금 지나온 계곡 한구석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카렐은 땅을 정신없이 파헤치고 있었다. 장교들 중 하나가 카렐을 가리키며 머리가 돌은 모양이라며 손짓을 해보였지만 카렐은 여전히 맨손으로 땅속을 파헤치고 있었다.
"가서 도와주지 않고 뭐해!"
네페티 부인의 호된 꾸지람에 유시프 장군을 비롯한 세 명의 부하들이 카렐에게 다가갔다. 흙 속을 들여다보던 카렐의 입가에 모처럼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뭐죠?"
"풀. 옛날에 잠깐 정착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죽은 모양이야."
카렐은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있던 몇 포기의 바싹 마른 풀을 뿌리째 조심조심하며 뽑아냈다.
"뭐하시려구요? 먹지도 못할 것 같은데......"
"밤에 땔감으로 써야지."
카렐의 아이디어에 그제서야 그들은 땅바닥에 달려들어 함께 풀을 파내기 시작했다. 풀을 파내던 카렐이 현기증이 나는지 또한번 주춤거렸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동안 잠깐 쉬십시오."
유시프 장군이 카렐의 어깨를 짚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어나려던 카렐이 갑자기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누군가.....다가오는군."
"예?"
"빨리들 챙겨. 여길 떠야겠다."
꽤 많은 말라죽은 풀을 가져온 주머니 속에 챙긴 일행은 급히 남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카렐이 또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엔간한 스캐너보다도 훨씬 정확한 가디언 특유의 감각기관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물체를 감지해내고 있었다.
"숨어!"
카렐의 명령에 일행은 일제히 바위 틈새나 모래 밑으로 몸을 감추었다. 사막전에 이미 충분히 익숙한 서부 지휘관들이라서 그런지 반응 또한 카렐이 놀랄 정도로 대단히 정확하고 즉각적이었다.
잠시 후 높이 공중에 나타난 건 사람 주먹만한 정찰용 무인비행체였다. 카렐은 잔뜩 긴장한 네페티 부인의 입을 틀어막은 채 호흡까지도 멈추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라면 인간의 몸에서 발산하는 특유의 적외선과 수분만으로도 탐지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수코팅된 자신의 검은 망토를 뒤집어 누란 안감을 밖으로 드러낸 카렐은 최소한 다른 지휘관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카렐은 어느새 몸에 뜨거운 모래와 방금 파낸 마른 풀까지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유시프 장군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막에서는 흔하게 쓰이는, 그러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탐지 회피법이었다.
잠시 후 기계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장교들이 모두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숨어있던 모래 밑에서 기어나왔다.
"휴우, 대단하시군요, 저런 것도 감지해내시고......역시 명성이 괜히 나온 건 아니시군요."
유시프 장군이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있던 카렐은 갑자기 칼자루를 움켜쥐며 낮게 중얼거렸다.
"유시프 장군, 전투준비하게."
"예?"
"북쪽에서 기척이 와. 저 셔틀을 따라오는 모양이다. 진동으로 봐서 기병인 것 같은데 계곡이라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깨달은 유시프 장군이 가져온 몇 안되는 무기들을 장교들에게 각자 분배시켰다. 카렐은 떨고있는 네페티 부인을 한구석의 잘 안띄는 곳에 앉혀두고는 뒤집은 망토를 몸에 감고 계곡 옆의 절벽을 잽싸게 기어올라 바위 옆에 도마뱀처럼 찰삭 달라붙었다.
각각 5명씩 계곡 양옆에 매복한 일행은 북쪽에서 점점 가까와오는 규칙적인 발굽 소리에 귀를 잔뜩 기울였다. 눈이 밝은 카렐이 북쪽을 바라보고는 유시프 장군에게 근위대식 수화를 보냈다. 제후군인 그에게까지 통할지 확신은 없었지만 다행히 그가 알아들었다며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어쨌든 꽤 경험이 많아보이는, 이곳에서 죽어 없어지기는 아까운 군인인 것이 확실했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건 분대 단위인 5기의 낙타병들이었다. 기병용 창과 시미터, 중장갑으로 무장하는 낙타병은 최소 10년 이상의 우수한 경력을 가진 지원자만이 될 수 있는, 서부제후군에서는 최고의 정예병에 속하는 병종이었고 낙타병 한 명당 훈련된 보병 10명의 전력으로 칠 정도였다.
어느덧 많이 가까와진 그들의 무장이 조금씩 분간되기 시작했다. 보통때라면 남부 중장기병이 울고 갈 정도의 중장갑으로 무장하는 낙타병들이었지만 이번에는 날씨가 날씨인만큼 경장갑을 차려입고 있었다. 기병용 스코프와 캡, 사막에 적합한 가벼운 갑옷에 날이 붙은 건틀렛과 바닥에 길고 치명적인 스파이크가 부착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긴 털이 북실북실한 개량종 쌍봉낙타의 몸통에도 꽤 꼼꼼하게 장갑이 씌워져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카렐은 유시프 장군에게 또다시 수화를 보냈다. 만일의 경우, 자신이 뒤의 3명을 맡을동안 선두의 2명을 맡아 저지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들을 다 죽이고 말고의 차원이 아닌, 시간이었다. 저들이 본대에 지원요청을 하는 순간 일행의 운명은 끝난다고 보는 편이 정확했다. 어떡해서든 들키지 않던가, 저들이 할룩스에 손을 대기 전에 모두 처치해야만 했다.
낙타병 선두에서 나아가던 녀석이 갑자기 움찔 하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 굵은 세로줄이 한 개 쳐져 있는 것을 보아 이 낙타병분대의 선임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래 속에 잘 숨어있는 장교들은 미동조차 없었고 가디언도 아닌 엔간한 보통의 분대장이라면 잡아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날이 덥군."
그 분대장이 깜짝 놀란 스스로를 감추려는 듯 엉뚱한 날씨탓을 하며 낙타에 속도를 조금 가하기 시작했다. 순간 카렐은 저 낙타병 분대장이 절대 만만한 녀석이 아님을 깨달았다. 창을 몇번이나 고쳐쥐는 것을 보아 녀석은 이미 숨어있는 장교들을 포착해 낸 것임이 틀림없었다. 저리 잘 숨어있는 저들을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모르지만 녀석들은 짐짓 못본 척 앞으로 나아가서는 뒤따라올 지원부대가 퇴로를 막는대로 이편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수작임이 확실했다.
결심을 굳힌 카렐이 들고있던 작은 돌덩이를 그들의 등 뒤로 휙 내던졌다.
"뭐야?"
카렐이 던진 돌에 낙타병들의 시선이 흐뜨러진 그 순간을 놓치지않은 카렐이 매달려있던 절벽에서 바로 몸을 날려 후열을 바람같이 덮쳤다. 두 손에 칼을 단단히 움켜쥔 카렐이 자신을 향해 막 고개를 돌리려던 낙타병과, 그 낙타의 목을 단 한칼에 베어버리고 말았다.
"적이다!"
분대장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그들이 일제히 창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목이 베어져 쓰러지는 낙타를 박차고 다시 뛰어오른 카렐은 옆 낙타에 타고있던 병사의 목까지 그대로 베어버렸다. 낙타높이보다도 높이 뛰어올라 그 등을 밟고넘으며 공격하는 카렐의 앞에 높이의 우세는 사실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썅! 어딜!"
또다시 낙타를 타고넘은 카렐은 막 할룩스를 작동시키려 하던 세번째 병사의 팔목을 재빨리 후려쳤다. 팔목이 잘린 채 버둥거리던 그의 얼굴을 곧이어 덮친 건 카렐의 큰 손이었다. 눈 깜짝할새 그의 목이 뒤로 홱 돌아가면서 역시 낙타 밑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후열을 지키던 3명의 낙타병들이 카렐의 손에 모두 당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5초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전열의 분대장을 포함한 2명의 낙타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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