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4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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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뭐야?"
볼일을 마치고 사랑채로 돌아온 페로의 탁자 위에 꽤 큰 문서 하나가 놓여 있었다. 미리 옆에서 기다리던 보벤 경이 냉큼 대답했다.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왔습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의 친서인 듯 합니다. 원래 서부의 저희 영지로 보내진 것인데 그쪽에서 다시 이곳으로 전송한 겁니다."
문서 봉투를 읽은 페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봉투에는 '서부 제11제후 페로 슈트란 자이센'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중앙귀족가문의 대표인 페로는 제후지역에서의 적극적인 세력확장으로 서부의 루쿠스탄 행성계에 영지를 개척하면서 서부11제후의 위치에 올라있었고, 자신의 텃밭인 동부에서는 비옥한 베라카스 행성계를 차지하면서 하급제후들의 우두머리격인 제6제후까지 올라서 있었다.
제후지역에서 하급제후들의 순위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점에서 최고제후부터 제5제후까지의 소위 상급제후들의 순위가 세력판도의 변화에도 전혀 변동이 없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물론 이런 상급제후들의 자리지킴은 상급제후로 올라오고 싶어하는 하급제후들의 쓸데없는 야심을 차단하는 그들간의 일종의 '보험적 담합'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페로의 동부 내의 세력이 실상 제5제후 카나 가를 족히 능가하고도 남을 수준이었지만 순위가 뒤집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그때문이었다. 물론 이미 최고의 중앙귀족가문으로서의 자리가 굳건한 페로에게 자신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기도 한 동부 상급제후들의 지위를 탐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편이 더 정확했지만.
"서부제후 자격으로 보낸거군."
봉투를 뜯은 페로는 안에 들어있던 꽤 큰 격문을 넓게 펼쳐보았다.
"이놈, 정말 글씨하난 알아줘야겠는걸."
페로가 자기도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남극성당에서 육서과정 박사까지 수석으로 마친 페로였지만, 그 학력에 걸맞지않게 글씨는 지독한 악필인 것이 페로의 남모르는 비밀이었다. 물론 페로가 듣기로는 자기보다 더 형편없는 악필---친필로는 창피해서 도저히 책도 못낼만큼---이 십경과정에 잘나가는 교수로까지 있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페로였기에 용이 꿈틀대는듯한 코리온의 놀라울정도로 박력있는 필체에 그답지않은 '동경의 시선'을 보내는것도 이상한일이 아니었다.
"이 사이코께서 뭐라고 그러셨나?"
격문을 한자한자 조심스럽게 읽어내려가던 페로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뭐랍니까?"
보벤 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페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패도정치를 거부하고 왕도정치를 추구한다나. 글재주는 알아줘야겠지만 역시 미친놈은 미친놈이군."
페로가 투덜거리며 격문을 보벤 경에게 내밀었다. 글을 읽은 보벤 경도 함께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뜻으로 이런 글을 보낸걸까요? 이런 도덕교과서같은 글을....."
"서부제후들 발목을 묶으려는 뜻이겠지. 서부제후들만큼 유학자들한테 약한 놈들도 없을테니.....이런 격문까지 받고 공공연히 코리온을 거역하지는 못할거야. 녀석.....서부를 완전장악할 계획이군."
페로의 눈치를 보던 보벤 경이 약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놈을......어떡하실겁니까?"
한숨을 한 번 내쉰 페로가 잠시 생각끝에 대답했다.
"아무래도 서부에 가봐야겠다. 3제후 발 가 쪽에 직접 방문하겠다고 알려주게. 지금 상황에서 서부에서 우리 손을 잡아줄 가문은 그쪽 뿐이야. 코리온 그놈이 서부를 몽땅 다 꿀꺽 하게 만들수야 없지. 최소한 분열이라도 시켜놔야 할 것 아니겠어."
"2제후 세호 가는요?"
"그네들 이런 세력싸움에 함부로 코 안 디밀고 박쥐노릇하는 건 유명하니까 아마 한동안은 가타부타 반응도 없이 눈치만 보겠지. 어쨌든 서둘러."
카렐 일행은 전날보다는 훨씬 나아진 상황에서 두번째 밤을 맞고 있었다.
절벽 틈새의 좁은 공간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죽은 낙타의 등을 덮었던 큰 천조각으로 입구를 틀어막고 주워온 말라죽은 관목과 죽은 병사들의 비상용 키트로 작으나마 불도 피웠다. 틈새 제일 안쪽에서는 일행이 타고 온 네 마리의 큰 털북숭이 낙타가 이 추운 날씨에도 웅크려앉아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한참 배가 고팠던 장교들은 잘라온 낙타고기를 불 위의 좋은 위치에 거느라 한바탕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얼떨결에 이 장교들의 여종으로 전락해버린 낙타병 자이나브 카메네이 분대장은 한구석에서 낙타고기를 열심히 자르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은 한참 왁자지껄해진 그들 중간에서 카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안을 두리번거리던 부인은 얼마못가 맨 구석에서 낙타에 혼자 기대앉아 몰래 식사중인 카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고기를 먹고있는 광경을 들킨 카렐은 무슨 죄라도 지은 양 머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이야, 먹을 게 생겨서."
부인이 카렐의 옆에 걸터앉으며 그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단검을 빼앗아들었다. 카렐은 사람의 목을 찔렀던 그 단검으로 낙타 생간을 혼자 잘라먹고 있던 참이었다. 부인은 아직 꽤 많이 남아있는 간을 먹기좋게 잘라 카렐의 입 안에 직접 넣어주었다. 전혀 귀부인답지않은 그 모습에 카렐이 씁쓸한 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카렐의 입가에 묻은 피를 옷소매로 닦아주며 부인이 중얼거렸다.
"너 싸우는건 처음봤어. 말로 듣기만 했지.....그정도인지 몰랐어."
카렐은 별 대답없이 부인이 다시 내민 간조각을 넙죽 받아먹었다. 부인은 물론이고 카렐 역시 먼지와 소금기를 잔뜩 뒤집어쓴 엉망진창의 몰골이었다.
부인은 반 쯤 떨어져나간 카렐의 코 보호대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너덜너덜해졌네."
"어차피 뗄 때가 다됐는걸요."
카렐이 처음으로 입을 열자 부인의 입가에 엷으나마 미소가 감돌았다. 카렐은 누더기 같아진 천으로 얼기설기 감싼 부인의 작은 손을 조용히 붙들었다. 방금 전 카렐이 천을 찢어 손수 감아준 것이었다.
"동상은 많이 나았나봐. 이젠 별로 안아파. 네덕분이야."
"아직 나은 건 아닐겁니다. 그냥......통증에 익숙해진 것이겠죠."
카렐은 여전히 부인의 손을 붙든 채 나머지 한손으로 그의 거칠어진 금발머리를 귀부터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부인이 다 먹고 난 접시를 옆에 내려놓자 카렐은 그를 끌어당겨 가슴 앞에 바싹 앉히고는 평소 입던 검은 망토로 푹 감싸주었다.
"얼마나 더 가야돼?"
"도보로 6일 정도 거리지만 낙타를 구했으니 절반정도 단축될 것 같습니다. 에너지장벽 덕택에 대대적인 공중정찰을 못하고있으니 저희에겐 도리어 다행이죠."
부인은 얼핏 냉담하게 눈을 감아버린 카렐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여기서 나가면......날 어떡할거야?"
"......"
"나 전처럼....."
"주무세요."
카렐은 부인의 시선이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뭐라 더 말하려던 네페티 부인은 그런 카렐의 태도에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어버리고 말았다.
플레렌 가에 이어 코리온의 '교리정치'안에 두번째로 지지를 밝힌 건 4제후 샤디 가문이었다. 샤디 가문의 종장인 알리 이븐 샤디 경은 남극성당 출신이었음에도 원리주의 유학에 심취해있는, 코리온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알리 경을 바라보며 코리온이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의 용감한 결단을 저 겁많은 세호 가와 발 가가 본받았으면 좋겠구려."
코리온이 그답지않은 가시돋힌 말을 내뱉었다. 안그래도 코리온은 하루종일 그 두 가문의 지지발표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려오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플레렌 가에 맞먹는 세력가인 제2제후 세호 가는 페로와 베흔이 대립해온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런 새로운 상황에 있어서도 '모험을 걸'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했다. 그들의 기회주의적 성향을 잘 아는 코리온도 세호 가의 지지에는 어느정도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기회주의자인 세호 가는 기대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으실 듯 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옛날 주페 태자저하 시절에도....."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코리온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코리온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코리온이 스승이던 주페 태자와 얽힌 일 때문에 세호 가와 사이가 유난히 좋지 않다는 것은 서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태자의 부계가문이던 세호 가는 그에 대한 지원도, 보호도 거부하면서 그의 몰락에 일조했고, 심지어 사후에는 새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로 그를 가문 족보에서 지워버리고 시신까지 훼손해 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가문이었다.
"발 가는?"
코리온이 하심에게 물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네페티 부인의 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것 같습니다."
코리온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플레렌 가에서는 이미 몇시간 전 네페티 부인을 퍼더에 의해 주살했음을 각 가문에 밝힌 바 있었다. 서부에서 퍼더에 의한 처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금기중의 하나였다. 네페티 부인의 이모가 종장으로 있는 발 가 쪽에서 펄펄 뛰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코리온은 자신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까지도 요구하고 있는 셈이었다.
"속좁은 녀석들......그깟 아녀자 때문에....."
혀를 끌끌 차며 무언가 중얼거리던 코리온이 다시 알리 경을 돌아보았다.
"샤디 가의 병력이 어느정도요?"
"치안군을 제외하고 정규군 보병 3만 3천과 낙타병 5천이옵니다."
"아무래도 지지를 늦추고 있는 소인배 하급제후들 중 하나 정도를 혼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내 패도정치를 원치않으나 왕도정치를 좀먹으려는 소인배가 있으니 이를 어쩌겠소."
"명령만 내려주시옵소서."
알리 경이 힘있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4제후 정도의 병력이라면 하급제후가문 하나 정도 박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하급제후들은 자신들끼리의 순위경쟁에 서로 제살깎기식 소모전을 끊임없이 벌여오고 있던 터라 페로가 6제후로 있는 동부를 제외하면 상급제후의 끄트머리인 제5제후와 하급제후 최강인 제6제후 사이에도 상당한 세력차이가 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코리온에게 제대로 충성을 보일 기회라고 굳게 믿은 알리 경은 생각외로 '손쉬운' 지시가 내려진 데 크게 고무된 표정이었다. 코리온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경의 믿음이 날 흐뭇하게 하는구려. 그럼......루쿠스탄에 있는 11제후인 역적 페로 자이센의 영지를 박살내주시면 감사하겠소."
학장실 내에 순식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급제후'라는 말에 마냥 신나하던 알리 경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싹 사라지고 있었다. 중앙 최고귀족인 페로가 서부에서 '이름만 하급제후'임을 잘 아는 두겐 공과 하심 예킨터스 교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알리 경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서부 영지에 가디언 천 정도가 있다 들었소. 가능하면 두겐 공께서도 알리 경께 병력 2만 정도만 빌려주시면 고맙겠소."
"아, 알겠사옵니다......"
플레렌 가가 돕는다는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는지 알리 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리 경이 황황히 자리를 비우자 두겐 공이 코리온에게 머리를 숙이며 물었다.
"송구하오나......지금 페로를 공격하심은......."
"피를 좋아하는 더러운 역적에게 어찌 어부지리를 주겠나."
코리온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성한 이곳 서부를 자신들의 세력권이라 착각하고 있던 더러운 황실의 떨거지들이 우리 유학자들에 의해 철퇴를 맞을 것이니, 그 간교한 역적 페로 자이센이 어찌 그 틈을 취하려 들지 않겠는가. 그들에게도 하늘의 뜻을 보여주어야 가당치 않겠나?"
코리온의 말귀를 알아들은 두겐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네페티 부인의 몰락으로 손해를 본 근위대의 틈새로 페로가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겠다는 심산이 확실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서부가 페로도, 근위대도 아닌 제3의 독립된 세력을 형성한 것임을 제국 전체에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코리온의 명령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두겐의 뒤에는 여느때처럼 깔끔한 모습을 간직한 샤드니가 말없이 서 있었다. 창을 바라보며 서 있던 코리온이 고개를 반 쯤 숙인 채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고있는 샤드니에게 한 번 가벼운 눈길을 주었다.
"대장님! 대장님!"
아직 해도 뜨지않은 새벽부터 지부장이 베흔이 숙소로 급히 들이닥쳐왔다. 새벽까지 뒤척거리다가 가까스로 잠들었던 베흔은 피곤한 눈을 겨우 뜨며 지부장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제기랄, 뭐야,"
"찾았습니다! 19번 통제구역 부근에서 플레렌 가 1군단 기동부대 녀석들이 수색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잠이 확 깨버린 베흔은 급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지부장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좋아, 내가 직접 가겠다. 그곳 정밀지도하고 셔틀 준비해. 제후군 놈들한테 들키면 곤란하니까......잠깐, 에너지장벽 해체장비 있나?"
"그런데 그게....."
"그게 왜!"
지부장이 머뭇거리자 베흔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대형장비는 파견군 사령부에만 있습니다. 저희 지부엔 간이장비밖에 없어서.....19번 통제구역은 3200급 에너지장벽이라서 저희 장비로는 해체할 수 없습니다."
"썩을!"
베흔이 갈아입던 옷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신경질을 부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혼자 이런저런 육두문자를 늘어놓던 베흔은 잔뜩 겁에 질려있는 지부장에게 성난 목소리로 일렀다.
"좋아, 어쨌든 난 셔틀을 타고 그쪽으로 가겠다. 너흰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반드시 밝혀내! 녀석들 통신감청을 하건 한놈 잡아 반쯤 죽여놓건 네맘이다.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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