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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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십시오, 총리 각하."
미리 대기하고 있던 킵과 판, 볼토가 다룬을 대동하고 서부 영지에 도착한 페로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천여명의 믿음직한 가디언들이 열을 맞춰 서서 황제령에서 이곳을 직접 찾아온 주인 페로를 맞아주고 있었다. 평소처럼 화려한 비단포 차림의 페로는 루쿠스탄 행성계의 5번 행성에 자리잡은 자신의 영지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어차피 쓸만한 행성들은 이미 웬만한 제후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뒤늦게 서부에 세력을 마련해야했던 페로에게 환경이 좋은 행성계를 따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 결국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에 가깝던 이곳 루쿠스탄을 영지로 삼으면서 페로가 내세운 무기는 페로 슈트란 자이센이라는 그 이름 뿐이었다. 한편 잔혹하고, 다른 한편으로서는 맺고 끊음이 분명한 그의 강철같은 성격은 강력한 리더쉽과 안전을 원하는 많은 이주민을 불러들였고 페로 또한 이곳을 제국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도적떼가 없는 지역으로 만들어줌으로써 그들의 기대에 충분히 보답해줄 수 있었다.
어쨌든 거의 15년간을 페로의 허리가 휠 정도로 돈만 쳐먹던 이 지역은 20년 전부터는 서부 최대의 인공 농업 컴플렉스로 탈바꿈해서 이미 페로에게 그 투자금액 이상의 이익을 안겨주기도 했고, 지금은 오기를 원하는 이주민들을 다 수용못하고 돌려보내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와 있는 제1컴플렉스는 페로가 소유한 서부의 3개 컴플렉스 중 가장 오래된 곳이었고 가장 규모가 큰 곳이기도 했다.
"황제령 경계의 제3개척 컴플렉스는 그 규모도 너무 작고 이주민도 거의 없으니 일단은 신경 안써도 될 거다. 제2컴플렉스는 판 네가 300명만 데리고 가서 지키고있어. 다룬, 킵은 나머지 병력 데리고 여길 지키고 있도록 해. 난 볼토와 함께 발 가 종가에 머무르고 있을테니 유사시엔 언제든 달려올 수 있을거다."
컴플렉스 지배인이 보고를 마친 후 페로가 간단하게 명령을 내렸다. 서부 정세가 위험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설마 외지고 개척도 덜 된 이런 곳에 큰 문제가 생기리라는 걱정 따위는 그다지 하고있지 않았다.
가디언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페로는 볼토에게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혹시 아켐 4번 행성 쪽에서 이곳으로 무슨 연락이나 카렐 관련된 소식 없나?"
볼토가 페로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과는 모든 통신이 완전두절된 상태입니다. 안에서 아무리 애쓰셔도 바깥과 연락은 불가능할겁니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쉰 페로는 허리에 차고있는 칼자루만 만지작거리며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분위기도 바꿀 겸 볼토가 용기를 내 페로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3제후 발 가에서 이번에 플레렌 가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면서요? 사실입니까?"
"응."
페로가 자리에 털석 주저앉으며 평소 다른 아랫사람들을 대하듯 조금은 오만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대꾸했다.
"에너지장벽 때문에 4번 행성에 있는 자신들의 코딱지만한 영지 재산권이 침해되었다고 플레렌 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지. 그것도 싸가지없다 싶을 정도로 격하게."
"간이 부은겁니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겁니까?"
볼토의 질문에 페로가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볼토가 그런 그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듣자하니 그곳의 발 가 영지는 쓸모없는 사막 한줌하고 이삼천 명 사는 소도시 하나가 고작이라는데......게다가 최고제후인 네페티 부인도 그렇고......이러다가 발 가하고 플레렌 가하고 원수지간이 되는 것 아닙니까?"
"네페티 그여자가 아직까지 살아있기나 하겠나? 이모인 발 가 종장 사우드 부인도 지 조카 죽었을 게 빤하다고 눈썹하나 까딱 안 하고 말하던데. 약아빠진 사우드 발 부인 그여자가 기껏 조카하나 죽었다고 감히 최고제후에게 싸우자고 덤빌 생각없이 무모한 여자로 보이나?"
페로가 아무렇지않게 대답하자 볼토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이번에 들어간 공식 항의는......"
"잘나빠진 코리온 녀석을 도발해본거겠지."
"도발이요?"
"그 음흉한 여자 속을 어떻게 다 알겠나마는, 아마 4번 행성에 그 한줌밖에 안되는 자기네 영지에 제발 문제를 일으켜달라고 미끼를 흔들고 있는 것이겠지."
"무엇때문에요?"
볼토의 당연한 궁금증에 페로가 아켐 지역의 지도를 작동시키며 대답했다.
"지금 그여자는 시간이 필요해. 코리온을 무턱대고 지지했다가는 옛날 주페 태자 때 꼴날지도 모르게 생겼고, 그렇다고 서부에서는 무슨 교주처럼 행세하는 그녀석의 그럴싸한 교리정치안을 대놓고 싫다할수도 없고. 이럴 때 적당히 깐죽거려서 그 한줌밖에 안되는 땅덩이를 놓고 플레렌 가와 분쟁이라도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면 발 가는 시간을 벌게 되지."
"정말......"
볼토가 기가막힌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발 가는 최소한 얼마간은 코리온 눈치 안보고도 내부반발 운운하면서 그새끼하고 플레렌 가가 내세운 '교리정치' 나부랭이 지지 안하고 버팅길 수 있을테니까. 지지가 늦어지면 피보는 쪽은 발 가가 아니고 코리온 쪽이거든. 옛말에 있지않나, 얻어맞은 놈이 다리뻗고 잔다고. 그여자는 플레렌 가를 박박 긁어서 재산권 침해문제를 분쟁으로 만들고 싶은거고, 플레렌 가는 그걸 피해가야 하는 입장이지."
볼토가 그제야 이해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코리온 녀석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글쎄, 발 가 항의를 못들은 척 한귀로 흘려버리던가......아니면 빼도박도못할 약점을 잡아 발 가를 궁지에 몰던가......둘 중의 하나 아니겠나?"
똑똑한 페로는 이미 서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 그리고 발 가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줌밖에 안되는 땅'에 바깥소식과 단절된 카렐과 베흔, 네페티 부인이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술병 잠깐만 주게."
"예에?"
카렐의 뜻밖의 요구에 깜짝 놀란 우베가 유시프 장군 일행들과 함께 마시고있던 술병을 마지못해 카렐에게 내밀었다. 시계는 이미 자정이 가까와진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술은 뭐하시려고요....."
우베와 제네르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양젖술병을 든 카렐을 올려보았다.
"뭐하긴, 술을 마시기밖에 더하겠나."
태연하게 대꾸한 카렐이 갑자기 술을 병째로 확 들이켰다.
"으익!"
제네르가 급히 술병을 붙들었지만 이미 카렐은 한모금 이상을 들이킨 후였다.
"에엑,"
카렐이 구토가 나오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급히 물컵을 들이켰다.
"아휴, 정말, 이럴걸 왜드시냐구요."
우베가 토악질을 겨우 참아내고 있는 카렐의 등을 두들겨주며 입을 삐죽거렸다. 비틀거리며 우베를 뿌리친 카렐은 벽에 걸려있던 푸른색 클록과 쿠크리를 끌러내렸다. 우베가 다시 카렐의 팔을 붙들었지만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이고, 취하시더니 색깔도 구분 못하시나, 그 옷 하크로딘 단장님 껍니다. 아니, 그 칼은 제꺼라구요,"
"알아. 잠깐만 빌려줘."
그의 키에는 도무지 안어울릴정도의 짤막한 쿠크리를 품 속에 숨기고는 남의 클록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카렐이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네르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우베가 그런 제네르에게 입을 삐죽거리며 카렐을 따라 나서려 했다.
"저게 지금 웃을일이예요? 빨리 가서 모시고와야지 뭐하시냐구요."
심각한 표정의 우베를 붙든 제네르가 카렐의 니치에 벗어져있는 검은색 수트와 망토, 무기벨트를 가리켰다.
"저게 왜요?"
술집 앞에서 주운 빈 술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델리호텔 앞에 도착한 카렐은 호텔 문이 부서질듯 확 열고 들어섰다. 당혹스런 표정의 호텔 지배인이 다른사람 눈에라도 띌까 이 주정뱅이 손님을 급히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로비에서 술을 마시며 희희낙낙하던 4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코를 찌르는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파란 망토의 무장도 않은 주정뱅이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탁자 위에 금조각을 턱 올려놓은 카렐은 지배인의 멱살을 확 움켜쥐며 완전히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 하나 줘."
"아......예, 어떤 방으로 드릴까요?"
"몰라, 그냥 좋은거 줘."
지배인이 지독한 술냄새를 겨우 참으며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열쇠를 손에 쥔 카렐은 무언가를 계속 흥얼거리며 객실쪽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카타콤베의 방과 방 사이의 복도에는 조명이 켜져있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음침한 분위기였다. 또한 지하공간의 특징상 조명만큼이나 중요한것이 환기였다. 게다가 지하 2층인 이곳은 환기가 지상과제일 터였다. 안그래도 낡아빠진 환기덕트가 복도를 따라 중간중간 그 시커먼 구멍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객실 문마다 문짝의 거의 절반 크기의 사운드필터---공기는 통과시키되 소음이나 빛은 차단하는---가 이 호텔의 환기를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렐은 코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지만 지난번 북부에서 베흔과의 난투극으로 코뼈가 망가지면서 많이 떨어진 후각은 아직 완전치는 못했다. 그나마 각각의 문에 달린 이 사운드필터를 통해 나오는 공기에서 안에 있는 사람의 체취를 구분하는 정도는 가능한것을 감사하는 정도였다.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복도를 한참 헤매던 카렐은 앞에서 역시 길을 헤매돌아다니고 있는 검은옷차림의 한 명의 손님을 발견했다. 자기처럼 방 앞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던 그 손님은 무슨 나쁜 짓이라도 들킨 양 허둥지둥 카렐 반대편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하고있는 몰골이나 하는 짓을 봐선 아무래도 남의 객실 엿보고다니는 관음증환자나 뭐 그런 족속일 것이 뻔했다.
"별 미친놈 다보겠네."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한참을 헤매 돌아다니던 카렐은 익숙한 냄새에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카타콤베의 막다른 복도 끝 방, 그곳 사운드필터 안에서 느껴져오는 베흔의 체취였다.
"네놈, 이제야 걸렸다."
카타콤베의 파다 만 구멍 틈새에 일단 몸을 숨긴 카렐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 안에는 단 둘이 있는 모양이었다. 카렐은 허리에 찬 쿠크리를 어루만지며 '어떻게 기습해야하나' 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하 2층의 이 호텔엔 기본적으로 카렐이 묵는 1층과 같은 '큰 방'은 애시당초 없었다. 카렐은 자신이 받았던 열쇠로 들어갔던 방 안을 상기했다. 이곳은 최대 2인실이 고작이었고 작은 방 내부에는 태피스트리니 커튼이니 샹들리에니 거추장스러운 장식물들이 꽤나 요란스러웠다. 어쨌든 괜히 비싼 호텔은 아니었다.
이런 방 안에서 베흔의 거대한 플람베르쥬나 카렐의 카타나 모두 거추장스러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짧고 치명적인 단검이나 쿠크리는 최선의 무기였다. 다만 문제라면 소음이었다. 터널을 통해 울려퍼질 소음은 주변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모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베흔 혼자 있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도 너무나 아까왔다.
'그래도 기회닿은 때 죽여야지,'
일단 베흔만 죽이면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그랬듯이 부인을 끌어안고 빠른발로 냅다 튀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카렐은 쿠크리를 조심스럽게 움켜잡고 문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일단 무조건 돌격해 저 합성수지제 문을 산산조각내고, 그러고 나면 넓적한 칼날 안쪽에 날이 돋은 쿠크리로 단칼에 베흔의 목을 날려야 했다.
"그래, 네놈 이제야 끝장나는구나,"
카렐이 다리에 막 힘을 주려는 순간 복도 반대편에서 웬 남자들의 귀에익은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카렐이 급히 몸을 감추었다. 로비에서 술을 마시던 4명의 근위대원들이 술을 다 마셨는지 히히덕거리며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보안국장시절 자신의 밑에서 일하기도 했던 1급 가디언 루토의 모습도 보였다.
'망할, 꼬이네,'
카렐이 다시 몸을 깊이 감추었다. 카렐이 숨어있는 구멍 앞을 지나친 그들은 베흔이 있는 방문을 거칠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뭔가?"
베흔이 신경질섞인 투로 문을 홱 열고 나타났다. 대장의 태도에 조금 놀란 루토가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흰 이 맞은편 방들에 있겠습니다. 피곤하셨을테니 좀 주무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떠날 때 제대로 일어나기나 해."
잘 있는 것을 건드린 것이 꽤나 귀찮다는 듯 베흔이 투덜거리며 그들을 바로 맞은편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들 4명은 문도 활짝 열어놓은 채 그 방 안에서 또다시 소란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저어......”
막 문을 닫으려는 베흔의 등뒤에서 네페티 부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렐이 자기도모르게 구멍에서 눈 한쪽을 삐끔히 내밀고 있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께요.....답답해서....."
"같이나가시죠."
"아뇨, 멀리 안가요. 저 복도중간 홀에 잠깐 앉아있다올께요."
얼굴에 베일을 뒤집어쓴 네페티 부인이 방에서 총총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부인이 없으면 차라리 베흔을 기습하기 유리할수도 있었다. 맞은편 문에서 쏟아져나와 앞을 막아설 4명의 녀석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베흔을 조용히 암살하는 것은 어쨌든 이미 물건너간 상태였다..
"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슬픔에 가득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네페티 부인이 카렐이 숨어있는 굴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카렐은 잠시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를 못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부인을 나꿔채 도망가고 싶지만 일단 베흔과, 저 패거리들을 죽이고 난 후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시로를 불러서 같이 처리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카렐은 품 속에서 할룩스를 빼들었다.
'응?'
카렐은 부인이 가고있는 어두운 복도 반대편에서 부인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옷 차림의 한 사람을 다시 발견했다. 바로 한참 전에도 방들 사이를 괜히 기웃거리고 다니던, 그 관음증 환자인지 뭔지 이상한 녀석이었다. 부인의 뒤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카렐은 그자의 그 묘한 눈빛에서 순간 변태적인 호기심 그 이상의 것---사람들이 흔히 '살기'라 부르는---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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