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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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새끼 무슨 생각이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베흔이 멀리 북쪽 옥상 중앙을 지키고 선 카렐 쪽을 돌아보았다. 일기투를 거부하는 정도로 사기가 크게 떨어질 제후군부대도 아니었고 도리어 적군을 저렇게 흥분시키는 것은 어쩌면 역효과를 가져올수도 있는 일이었다. 장군들 사이의 말장난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구경은 했지만 어차피 저정도로 뒤집힐 전세도 아니었다.
카렐은 자신, 아니 발리를 쫓아 도시를 향해 몰려오는 적군들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베흔의 눈에 띈 건 말을 탄 채 선두에서 미친듯이 달려오는 제후군 지휘관들의 모습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보병들의 후미에 위치하고 있어야 할 세 명의 교위들을 비롯한 이십여명의 기마 지휘관들은 느릿한 말에 올라타고는 결사적으로 달아나는 발리의 뒤를 쫓아 경보병들로 이루어진 주력부대보다 한참 앞서서 카렐이 지키고 있는 북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부하들의 앞에서 구겨진 체면을 회복하려는 틀림없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베흔이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녀석......일부러 끌어냈군,"
옥상에서 뛰어내린 카렐이 말에 뛰어오른 건 순간이었다. 흰 말에 올라탄 카렐은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칼을 뽑아들며 혼자서 무서운 기세로 내달리고 있었다.
"썅! 네놈은 뭐냐!"
흥분해있던 수번 교위가 적이 누군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카렐을 향해 창을 내질렀지만 어차피 상대가 될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내질러오는 수번의 긴 철창을 타고 불꽃을 뿜으며 나아간 카렐의 긴 대도가 그의 가슴을 순식간에 두동강을 내 버렸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그의 가슴 윗부분 몸통이 한참을 날아가 고운 사막모래 위에 피얼룩을 그리며 처박혀버렸다. 그의 상반신 일부와, 하반신을 실은 말은 주인이 아직 죽은 줄도 모르는 듯 계속 내달리고 있었다.
"뭐야!"
새파랗게 질린 마네토가 말 위에서 몸을 일으켜세우며 마치 비명처럼 고함을 꽥 지르고 말았다. 휘하 대대장 중 가장 믿을만한 녀석인 수번이 창한번 제대로 못휘둘러보고 당한 것이었다. 곧바로 방향을 돌린 카렐은 다시 말에 박차를 가해 수번의 옆을 달려오던 다른 교위를 뒤쫓기 시작했다.
"으익!"
상대방의 실력을 눈치챈 그 교위는 필사적으로 말고삐를 움켜쥐며 박차를 가했다. 뒤를 따라오던 말발굽소리가 작아지자 저으기 안심한 교위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상대의 발이 사람을 싣고 전력질주하는 말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죽어!"
순식간에 말등에 뛰쳐오른 카렐의 칼이 갑옷의 목부분, 경갑을 산산조각내버리며 찢고들어갔다. 그자리에 멈춰선 말의 등에는 목이 찢겨져나간 그 주인의 시체가 그대로 얹혀져 있었다. 그 교위의 목을 내던진 카렐은 어느새 다른 지휘관을 표적삼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휘하의 세 명의 교위 중 두 명을 잃은 마네토는 반 쯤 넋이 나가 있었다. 차라리 전장에서 분을 풀라며 흥분해 달려나가는 젊은 지휘관들을 그냥 내버려둔 틀림없는 자신의 잘못이었다.
마네토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십여명의 부대 간부들을 문득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2명의 동료 지휘관을 코앞에서 잃은 그들 모두 경악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 검은 옷 입은 녀석......혹시......"
부대 참모 하나가 허겁지겁 파일을 뒤지기 시작했다.
"등급없는 가디언.....카렐......같습니다."
몇 장교들이 자기도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네토는 '가디언들을 다 죽이라'는 그 명령이 무언지도 깨닫고 있었다. 교위가 두명만 죽은것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들 모두 각자의 부대를 이끌어야 할 대대장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두 명의 대대장급 교위와, 두명의 중대장급 중랑을 눈깜짝할새 죽여버린 저 '검은옷의 괴물' 녀석이 여유만만하게 적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그 와중에도 무섭게 돌격해들어간 보병들은 어느새 적들의 구조물 아래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별다른 공성장비도 없이 사다리와 발판 몇 개를 들고 진격해들어가던 그들의 머리 위로 옥상의 발 가 병사들이 일제히 던진 투창이 비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수십이 창에 명중해 쓰러지는 가운데 공격측 역시 그에 질세라 반격을 가했지만 높이에서 우위에 있는 발 가 병사들을 조금 위협하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걸고 올라가! 순서대로! 빠지는 놈들은 목을 벤다!"
초급지휘관인 분대장과 보궁수들이 병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목이 째져라 악을 써대는 소리와 창에 찔려 신음하는 비명소리에 그다지 높지 않은 구조물 밑은 일시에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다리를 걸고 기어올라가려는 플레렌 가 병사들과, 결사적으로 막는 발 가 수비병들과 필사의 사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플레렌 가 쪽에서도 몇분새 생각외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썅, 동부 경기병 놈들이라면 저깟 이백 정도는 몇십분이면 다 끝일텐데,"
별것도 아닌 적 투창에 무수히 쓰러지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마네토가 애가 타는지 괜히 이로 입술만 잡아뜯고 있었다. 사막 '지하도시'라기에 말 그대로 땅바닥에 뚫린 동굴만 생각했던 그는 적들의 구조물이 의외로 까다로운 요새로 드러나자 조금은 당혹해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 소모전을 펼치면 얼추 이길 것 같기는 했지만 사실 그도 공격준비를 너무 안이하게 했다는 것을 이제와 후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적들 사이에서 약점을 메우고 있는 가디언들의 막강한 전력과, 구석에 몰린 쥐 신세가 되어버린 저 발 가 녀석들의 결사적인 저항도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게다가 일선 지휘관들이 무려 4명이나 전투 시작도 전에 떼죽음당해버린 건 무엇으로도 보충할 수 없는 큰 타격이었다.
가뜩이나 기분나빠하던 마네토의 귀에 남쪽을 공격해들어가던 대대 쪽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보고가 들어왔다.
"가디언들입니다! 황금색 팔찌를 한 놈들인데 열 명씩 달려들어도 도저히 당할수가 없습니다!
이번엔 황금색 팔찌 가디언이라는 말에 마네토의 눈앞이 또다시 아찔해졌다. 겨우 경비병 이백뿐인 이곳에 왜 3천이나 되는 대병력이 보내어졌는지 그 이유가 드러나고 있었다. 마네토는 떨리는 손으로 스코프를 조절해 전장쪽을 바라보았다.
키 높이의 두 배정도 되는 구조물 위에 올라선 이곳 경비병들이 사다리를 걸고 쳐올라오려는 플레렌 가 병사들을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고 그 검은옷을 입은 살인귀가 취약지점들을 쫓아다니며 재수좋게 뛰어오른 아군들을 족족이 도륙하고 있었다. 이건 야전이 아닌, 틀림없는 공성전이었다.
방금 보고가 들어온 남쪽도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무시무시하게 큰 소름끼치는 플람베르주를 움켜쥔 웬 괴물같은 녀석이 병사들을 거의 산산조각내서는 그 시체토막을 아군 진영으로 마구 흩어 내던지고 있었다. 그 무서운 기세에 겁을 먹은 병사들이 이탈하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였다.
"셔틀로 강습 안되겠나?"
"공중 에너지장벽이 있습니다. 지상에서 돌파되지 않으면 셔틀이나 점프로는 접근 불가능합니다."
마네토가 다시 전장쪽을 돌아보았다. 경비병들 후방에는 이 도시의 민간인들까지 몰려나와 이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강습부대를 내려보내도 민간인들에게 밟혀죽을 판이었다.
"장군님, 지금 쓸데없이 병력손실이 너무 큰데.......저희가 시간에 쫓기는 게 아닌 바에야 일단 퇴각해서 공성장비를 보강하고 재공격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서너시간이면 충분히 될 텐데......"
부장 중 한 명의 의견에 마네토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너시간 후면 낮인데, 여기서 더위먹고 쓰러질 일 있어?"
"하지만 이대로는 이긴다 해도 피해가 너무....."
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숫자가 백 명을 넘게 헤아리고 있었다. 부장들의 불만에 마네토는 시계를 다시 보았다. 공격시작한지 약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사령관님이 적어도 1시간 이전에는 퇴각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퇴각하지 말라고' 라는 말에 부장들이 갑자기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뒤집어 해석하면 1시간이 지나고 나면 퇴각한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왜 하필 1시간입니까?"
"내 알게 뭐야,"
마네토가 대뜸 신경질을 내며 부장들을 째려보았다.
"어쨌든 1시간 내로 적들을 돌파하면 모르지만 그 시간 지나고 나면 물러나라 했으니까 명령대로 해."
유시프 장군과 함께 가장 위험한 무너진 계단 바로 앞을 지키던 제네르는 위로 올라오려는 두 명의 적병들을 방패로 거칠게 떠밀며 장검을 휘둘렀다. 처음에 들고 시작했던 단창은 이미 날이 뭉개져서 부러진 채 바닥에 딩굴고 있었고, 카렐에게서 하사받은 이 장검은 쥐고있는 오른손과 함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칼에 가슴을 베인 적 병사가 계단 밑으로 나동그라졌다. 공격하는 적들도 지쳐 있었지만 제네르 역시도 상대의 계속된 공격에 거의 탈진했는지 가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투창이다!"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제네르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치켜들었다. 꽤 강한 힘으로 날아온 짧은 투창은 제네르의 투명한 방패를 사정없이 때리고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힘에 밀려 뒤로 완전히 나동그라졌던 제네르는 제법 큰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교수님!"
발리가 큰 할버드를 휘두르며 제네르가 지키던 자리를 대신 막아섰다. 제네르가 쓰러지는 모습에 허둥지둥 달려온 카렐이 그의 팔에서 방패를 떼어냈다.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비껴냈어야 되는데......죄송합니다."
제네르가 이를 악물며 팔을 움켜쥐었다. 건틀렛을 벗겨내자 퉁퉁 부어오른 그의 왼팔이 드러났다.
"것보라구, 지난번에 왼팔 다친 것 때문이야."
제네르를 일단 뒤쪽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놓은 카렐은 그의 투구를 급히 벗겨냈다.
"머리 멀쩡한 것 보니까 아직 죽진 않겠다. 잠깐 좀 쉬어."
카렐은 제네르의 고운 금발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되겠다, 일단 퇴각해."
시간을 확인한 마네토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공격시작한지 1시간이 지난 지금, 공격군 측의 사상자는 2백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물론 적들 역시 적어도 오륙십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듯 싶었지만 '1시간 후에는 퇴각하라'는 샤드니의 특별한 명령이 있었으니 공격을 계속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령에 따라 연락병들이 일제히 퇴각나팔을 불자 메디스 시를 공격하던 플레렌 가 제후군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던 매운 댓가를 제대로 치른 셈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샤드니 그녀석은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 싶었지만 휘하 보병들이 자력만으로 저곳을 멋지게 점령하는, 근사한 광경을 원했던 마네토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길, 이젠 저녁때나 기다려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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