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9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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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구조물 꼭대기 높은 굴뚝에 걸터앉은 카렐이 물을 마시며 주변을 빙 둘러보였다. 그의 발밑에는 미처 수습되지 못한 운없는 플레렌 가 병사들의 시체 몇 구가 한참 뜨거워지기 시작한 날씨 속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선들거리며 불어오는 사막 바람에 그의 검은 튜닉자락이 펄럭거리면서 굴뚝은 멀리서 보면 마치 검은 깃발을 걸어놓은 깃대처럼 보이고 있었다.
1시간동안의 전투로 지친 발 가 수비병들을 대신해 민간인들이 부상자들을 돌보고 엉망이 된 시설물들을 정리하느라 부산했다. 몇몇 민간인들은 용감히 싸워준 수비병들에게 물과 음식을 직접 차려 내주고 있었고, 함께 싸우겠다며 무기를 들고나와 수비대장 베나지에게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민간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멀찍이 지평선 부근까지 물러난 적들의 모습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녀석들이 도대체 왜 물러난거지?"
"저녁때쯤 장비보강해서 다시 공격하려는 속셈 아닐까요?"
저 높은 굴뚝 꼭대기에 카렐이 어떻게 올라갔는지가 도무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시프 장군이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카렐이 굴뚝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글쎄, 나라면 준비가 부족했어도 이쪽에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여서 죽이되든 밥이되든 끝장을 봤을텐데. 솔직히 이쪽 수비병들도 20명이 넘게 죽지 않았나?"
"저녀석이 워낙에 겁이 많아 그러나보죠. 그리고 대대장 3명 중에 2명하고 중대장 2명이 전투 시작도 하기 전에 죽어버렸으니 녀석도 난감했을겁니다. 아까 보셨지만 그 두 대대 녀석들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던데요."
유시프 장군의 웃음섞인 대답에 카렐이 일단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지휘관의 성격에 따라 시작했으면 무조건 몰아붙일수도 있고, 안좋다 싶으면 바로 퇴각해 다른 방안을 강구하는 녀석도 있을 수 있었다. 괜히 깊이 따지고있다 생각한 카렐은 일단 그쪽에서 관심을 끊어버렸다.
"저녁엔 녀석들 정말 제대로 준비하고 쳐 올게야. 그 전에 근위대 지부 녀석들이 장벽을 뚫어줘야 할텐데."
걱정스러운 얼굴의 카렐은 남쪽 옥상에서 부하 가디언들과 둘러앉아 무언가 상의중인 베흔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래서야 저새끼를 언제 죽이냐고. 제길."
카렐이 피묻은 칼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 한모금을 더 들이켰다. 며칠새 많이 상하고 거칠어진 카렐의 얼굴은 살이 쏙 빠져서 약간 야위어보이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날카로워보이는 카렐의 얼굴은 매처럼 번득이는 눈과 어울려 소름끼칠 정도로 스산한 빛을 뿜고 있었다.
"저, 어, 이거.....드세요."
민간인 소년 하나가 벌벌 떨며 카렐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 안에는 올리브, 망고, 포도, 사과 등등의 과일들이 가득히 들어있었다. 굴뚝에서 뛰어내린 카렐은 피묻은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는 한구석에 있던 사과 두 개를 집어들었다. 카렐의 옆에서 굴뚝에 기대 힘없이 앉아있던 제네르는 올리브 몇 알을 집어들었다.
"팔은 좀 가라앉았나?"
"이제 괜찮습니다."
제네르가 왼팔을 흔들어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그는 팔에서 오는 통증 때문인지 도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여간 욕심 하고는."
카렐이 옆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다정하게 돌려안자 제네르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고 있었다. 올리브알을 깨물은 제네르는 카렐의 겨드랑이에 편하게 기대앉으며 처음으로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사과를 심지째 절반정도 베어물은 카렐은 갑자기 공포가 번지기 시작한 제네르의 얼굴을 문득 바라보았다. 그런 제네르의 시선 끝에는 멀찍이서 이 둘을 노려보고 있는 살기어린 표정의 베흔이 서 있었다.
베흔은 자신이 씹고있던 반쯤 남은 사과를 문득 바라보았다. 눈앞의 저 밉살머리스러운 녀석도 자신과 같은 것을 손에 쥐고있었다.
자신과 카렐이 어딘지모르게 비슷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베흔 자신도 끔찍할정도로 듣기싫어했지만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적을 죽일 때의 습관, 누군가를 죽인 후에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살기띤 표정과, 상대의 피를 맛보며 느끼는 그 묘한 흥분까지, 녀석은 자신을 너무나 닮아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단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똑같은 키와 큰 손, 심지어 즐겨먹는 과일에서도 그 기분나쁜 '유사성'은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베흔은 저녀석이 더 싫었다.
저녀석을 향한 자신의 미움을 누군가는 '광기'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할일없는 호사가들이 상상하듯 자신이 미쳐서도 아니었고, 카렐의 능력을 시기해서라던가 카렐에게 흑심을 품었다가 거절당했었다는 말도안되는 소설 따위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저녀석이 싫은 이유는 세네피스 카파키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원수같은 카파키 가의 피가 섞였다는 그 이유 그 단 하나뿐이었다.
꼴보기싫은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그 자식에게 육신과 총명함을 물려준 사람. 투르케스크 카파키의 7번째 자녀이며 4번째 딸, 지금은 카파키 가 4대 종손, 옛 남극성당 수석부제학, 세나우스 3세 황제의 황후이기도 했던 그 무서운 여자.
그리고 지금의 카렐에게 전사로서의 의지와 강직함을 물려주었을 또 한 사람.
공교롭게도 그의 생애를 통틀어 치욕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이 둘은 모두 카파키 가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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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우스 2세 황제와 동부 탈라스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S-6-1 로노 클라투스 리쿠 장태자는 제법 똑똑한데다가 야심 또한 만만치않은 남자였지만 때때로 폭발하곤 하는 거친 성격때문에 어머니인 황제에게 두통거리를 안겨주곤 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난폭한 성격보다도 사실상 더 심각한 문제는 무절제한 여자관계였다. 그는 '장태자'라는, 황제 바로 다음의 직위를 앞세워 황궁내의 시녀들이나 귀족가문 딸들은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상급귀족가의 정실부인들까지도 분별없이 침실로 끌어들여 손가락질당하기가 일쑤였다.
제위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어야 할 4명의 배우자---이후 황후, 황비, 2명의 황빈이 될---를 모두 갖춘 후에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 그의 이런 행동들은 황제의 철권통치로 가뜩이나 불만이 잔뜩 쌓여있던 몇몇 귀족들 입에서 '그어머니에 그아들'이라는 수치스러운 뒷말이 오가게 된 근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로노 장태자는 그 대책없는 여자문제와 '아주 가끔' 스스로의 감정을 잘 추스리지 못한다는 단점만 뺀다면 최소한 겉보기로는 흠잡을데가 없는 제위 후계자였고 베흔 역시도 그의 이런 모습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녀석들이 그 약점만 교묘히 잘 이용한다면 더 다루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어쨌든 그는 어머니인 세나우스 2세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나쁘지않은 성적으로 남극성당을 졸업한 준재였고, 나름대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유머감각, 리더쉽도 갖춘, 크게 무리없는 제위 후계자임이 틀림없었다.
그간의 '킹메이커'로서의 피곤한 역할에 이젠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한 베흔 역시도 이번에는 지나간 두 번의 혼란기처럼 골아픈 일 없이 자연스럽게 후계구도가 잡혀가는 것에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어머니인 세나우스 2세 황제였다. 세간에서는 황제가 후계구도에 도무지 무관심하다는 불평섞인 소문이 파다했지만 실상 더 큰 문제는 황제가 둘째 아들인 S-6-2 주페 세호 리쿠 태자에게 내심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S-6 세대에서 유일하게 혈통이 제대로 발현된 천재로서, 남극성당에서 학부를,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준 상급교수인 응교로 재직중이던 주페 태자는 이종형인 로노 장태자와는 대조적으로 학구적인데다가 누군가는 피곤하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정치에 대한 식견 또한 탁월해서 이후에까지 원리주의의 최고의 명저로 손꼽힐 정치철학서 '왕도제언' 30권을 직접 집필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책이나 붙들고 늘어지는 다른 원리주의 유학자와는 달리 2차 혼란기 당시 50세의 젊은 나이로 30만이 넘는 대군을 직접 지휘해 승전을 이끌어낸 탁월한 무장이었고, 연배가 훨씬 높은 1, 2세대 유학자들에게서 존경을 이끌어낼만큼의 매력과 권위 또한 겸비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누가보기에도 여섯 태자들 중 인물만으로는 가히 최고임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베흔이 보기에도 그를 유달리 총애하는 황제의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남극성당 수석 부제학이던 명망높은 유학자 세네피스 카파키 정도면 그 너무도 잘난 태자의 배우자감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사실 카파키 부제학이 속한 중도파와는 결코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원리주의계열 유학자인 것이 굳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같은 유학자인데다가 인물이 인물이니만큼 카파키 가에서 자신들의 똑똑한 딸과 그리도 결혼을 시키고 싶어했던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문제의' 주페 태자와 세네피스 카파키의 혼담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가장 놀란 이는 다름아닌 베흔이었다. 카파키 가의 수장인 투르케스크 카파키가 2차 혼란기 이후 자신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던 베흔으로서는 이 위험한 태자와 카파키 가가 손을 잡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세나우스 1세의 죽음에 북부와 동부 제후들이 연관되었다는 의혹으로 촉발되었던 2차 혼란기는 결국 16명에 달하는 두 지역 제후들의 목숨을 잔혹하게 앗아가며 끝을 맺었지만 그 당시 쌓인 해묵은 감정은 아직까지도 묘한 지역간 대립의식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당시 아버지였던 최고제후와 적장자인 형이 황궁 앞에서 산채로 껍질이 벗져겨 죽는 끔찍한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던 투르케스크 공에게 그 처형을 주도했던 베흔이 철천지 원수로 각인되어있으리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지나간 2차 혼란기 이후 북부 최고제후의 지위를 물려받아 무너져가던 북부지역을 착실하게 재건해온 그는 한때 리 리쿠와 함께 제니안 그룹에 몸담았던 1세대 유학자였고 남극성당 교수 출신의 전형적인 문관 엘리트귀족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유학자답지않은 다혈질의 불같은 성격과 매사 직설적인 태도로 '독단적인 인물'이라는 혹평도 아울러 듣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베흔이 정작 더 신경쓰고 있는 건 무려 7명이나 되는, 하나같이 흠잡을데없는 그의 자녀들이었다.
특히나 장녀이며 그의 오른팔인 오르마즈 레즐린 카파키는 아직 젊은 나이였던 성전의 해에는 물론이고, 2차 혼란기에도 최고제후였던 할아버지의 휘하에서 북부의 모든 군권을 위임받았을 정도로 탁월한 용장 겸 전략가로 손꼽히고 있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성전의 해에 한때나마 그와 전우로서 함께했던 베흔은 그의 능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2차 혼란기 당시 근위대의 개입과 병력의 열세로 어쩔 수 없이 패장의 멍에를 쓰고 만 오르마즈 경이었지만 검은 갑주 차림에 검은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던 그의 신출귀몰한 용병술과 무용은 아직까지도 남-서부 제후군은 물론이고 근위대에게도 되새기기 싫은 '검은 사신'의 악몽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종전 직후 베흔은 패장이 된 그를 없애기 위해 나름대로 꽤 애도 써 보았었지만 녀석이 똑똑한 탓인지, 베흔이 못났던 탓인지 모두 실패하고 아직까지도 멀쩡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번 혼담의 주인공인 투르케스크의 막내딸 세네피스는 무장으로서 제국을 떨게 한 맏언니와는 대조적으로 유학자로서 아버지의 '두뇌'역할을 해온, 그의 왼팔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중도파 유학자의 지도자라는, 유학자로서의 대단한 유명세 외에 사생활이나 성격 등등에 관해서는 묘하게도 거의 알려진바가 없는 꽤나 수수께끼같은 인물이었다.
어쨌든 저 무서운 북부 최고제후의 일곱 자녀들 면면만 보아도 베흔으로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투모카프 자이센 총리가 펼쳤던 몇년여간의 공포정치와 근위대 증강사업, 허영심많은 황제를 위한 황궁의 대대적인 증개축공사로 거의 바닥나가던 황실 재정을 되살려준 카파키 가에게 이미 황제는 태자 중 한사람과 카파키 가의 종가 구성원 중 한사람과의 결혼을 약속해놓은 상태였다.
문제라면 황제의 여섯 태자들 중 둘째태자인 주페와 세째태자인 오넬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실혼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열상 다음번의 정실혼은 주페가 되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카파키 가의 종가 자녀들 중에서도 미혼자는 저 잘난 막내딸 한명 뿐이었다. 결국 베흔으로서도 이 최악의 상황을 가슴을 쥐어뜯으며 지켜볼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베흔에게 주페 태자 본인이 이 혼사을 고사했다는 사실은 기대하지 않났던 엄청난 행운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밝힌 대로라면 주페 태자 스스로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베흔이 휘하들을 동원해 파악한 바로는 그건 순전히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소문에 따르자니 세네피스 카파키에게는 이미 10년이 넘게 깊이 사귀어온 애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남자는 공교롭게도 주페 태자의 남극성당 동기생이었고 둘도없는 절친한 친구라고 했다.
그런저런 것들을 따져보자니 이 '도덕적인' 서생나으리는 친구를 위해 제국 최고의 신부감으로 꼽히던 이 명문가 출신의 똑똑한 여인---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은 황실의 며느리가 될 수밖에 없을----과의 혼인을 포기하는 천하의 바보짓을 한 셈이었다. 최소한 베흔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이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한 이는 그 친구가 아니었다. 공짜로 고민거리 하나를 덜게 된 베흔과, 형 대신 이 과분한 신부감을 차지하게 된 세째 오넬론 호지 리쿠 태자였다. 주페 태자의 결정은 태자 본인에게도, 어떤 식으로건 애인을 빼앗기기는 매한가지인 그 친구에게도, 형편없는 남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 세네피스 카파키에게도 하나도 득될것이 없던 황당한 선택이 되어가는 듯 했다.
어쨌든 주페 태자의 '바보짓' 덕택에 고민거리를 덜은 베흔은 느긋한 기분으로 세째태자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투르케스크 카파키 녀석은 태자를 사위로 맞는 것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사위가 될 세째 S-6-3 오넬론 태자는 여섯 태자중에서 한마디로 최악의 인물이었다. 겁많고 우유부단한 성격은 말할것도 없고 베흔이 파악한 바로는 '남자로서의 능력'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황당한 것은 보통의 황실이나 귀족의 결혼수순에 따르자면 오넬론 태자와 저 여자는 이미 약혼단계에서 '합방'을 해 보았어야 했지만 아들의 '결점'을 알고있는 황제가 거의 생떼에 가까운 억지를 부려서 그 단계를 건너뛰게 했다는 것이었다.
투르케스크 녀석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얼마나 참담한 표정이 될는지를 상상하며 베흔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녀석의 그 잘난 딸이 너무나 안됐다는 그답지않은 동정심까지 품고 있었다.
여하간에 한고비를 넘긴 베흔으로서는 로노 장태자를 중심으로 한 후계구도가 좀 더 안전해지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최소한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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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은 베흔의 살기어린 눈빛에 잠시 떨고있던 제네르의 어깨를 힘있게 껴안아주며 자신을 묘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베흔을 덩달아 매섭게 쏘아보았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으니까."
베흔은 여전히 카렐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렐은 어느모로 보아도 그 밉살머리스러운 카파키 가 사람의 전형이었다. 당장 그 어머니인 세네피스 황후와 비교해도 외모는 말할것도 없었고 겉과 속이 딴판이라는---물론 이 모녀사이에 그 겉과 속이 반대로 나타나기는 했지만---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성격까지도 똑같았다.
"네페티 부인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어,"
베흔이 혼자 중얼거리며 뒤로 돌아섰다. 베흔 역시도 네페티 부인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부인이 자신 외의 누군가를 가까이 했다는 것이 화가 치미는 일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이해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무엇보다도 분개하게 한 것은 그것이 다름아닌 카렐, 다른사람도 아닌 세네피스 황후의 친자식인 카렐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전에는 부인이 카렐의 정체를 몰랐으니 그렇다쳐도 카렐이 누군지를 알고 난 지금까지도 카렐을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분개하는 차원을 넘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이었다.
세네피스 황후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 뼈저리게 잘 알고있을 바로 그 네페티 부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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