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쨌든 기원 196년의 제국은 지난 몇십년간 그래왔듯 황제의 철권통치하에서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웠고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었다. 황실의 지독한 재정적자도 카파키 가의 20억골드 지급보증으로 한결 나아졌고, 황제는 여전히 강력한 권위로 제국을 통제하고 있었다. 즉위 초기, 그다지 조용한 날이 없었던 '철의 유평대제' 세나우스 2세의 치세도 이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제국민들은 건국이래 처음 찾아온 태평성대의 공을 이 강력한 황제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196년의 새해 1월을 황제의 세째아들 오넬론의 결혼식과 함께 맞이하고 있었다.
"정말 끝내주는 미인인데요? 와,"
제파가 놀란 얼굴로 베흔의 옆에서 속삭였다. 아버지인 북부 최고제후 투르케스크 카파키의 손을 잡고 홀에 들어선 세네피스 카파키 부제학은 결혼식 전야파티장에 모인 귀족들의 시선을 모두 앗아버릴 정도의 대단한 미인이었다. 카파키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길고 반짝이는 갈색머리에 희고 깨끗한 피부, 엷은 회색의 기품을 지닌 눈동자에 크고 늘씬한 몸매까지 흠잡을곳없는 품위있는 절세미인의 풍모 그 자체였다.
유난히 여자에게 냉담하기로 유명한 냉혈한 베흔조차도 입을 조금 벌린 채 새 태자빈 후보의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을 지경이었다.
"우와, 저 눈색깔 좀 봐요."
셈이 투르케스크 공과 그 딸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티장의 유난히 밝은 조명 아래에서 그 둘의 회색빛 눈색깔은 마치 무지개처럼 조금씩 그 톤이 변하고 있었다. 베흔이 꽤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세네피스 태자빈의 눈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저 딸도 '그레이오팔'이었군. 북부에서 나타나는 아주 희귀한 돌연변이야. 의사들 말로는 코윈의 희한한 환경 때문이라더군. 북부에선 고귀한 혈통의 상징으로 친다던데."
"어쨌거나 돼지목에 진주목걸이구먼,"
시로가 오넬론 태자를 힐끗 바라보며 들릴듯말듯 중얼거리자 제파가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틀어막으며 친구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황제의 곁에 서 있는 세째 오넬론 태자도 다른 태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김새만으로만 보면 그럭저럭 빠지는 편은 아니었다. 저 천하의 바람둥이 황제가 못생긴 남자를 남편으로 두었을 리가 없다보니 6명의 태자들 모두 어느정도 중간 이상의 외모들은 다 갖추고 있었다.
남부 제3제후 호지 가 출신의 아버지를 둔 세째 오넬론 태자는 남부 형질 특유의 보통의 이목구비에 마른 몸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닮은 긴 얼굴에 다갈색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을 한 그는 얼핏 보면 유순하고 귀엽게 보이기도 하는 호남형의 남자였지만 묘하게 탁한 눈동자와 병색까지 있는 창백한 얼굴은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오랜기간의 방탕한 생활의 결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동생의 옆에 서 있는 주페 태자는 특유의 선한 눈빛과 안어울리는 듯한 강인한 인상과 유학자답지않은 근육질의 크지않은 단단한 체구를 지닌 남자였다. 서부 제2제후 세호 가 출신의 아버지를 둔 이 남자는 서부 혈통 특유의 가무잡잡한 피부와 꽤 또렷한 이목구비만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어머니인 세나우스 2세를 꼭 빼닮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S혈통이 발현된 천재적인 두뇌에 덧붙여 무예까지도 출중해서 황실 사람들을 탄복하게 했던 그는, 어느날인가 '무기를 잡지 않을 것'을 선언해 사람들을 실망시킨 이후로 이제는 철저한 원리주의 유학자로서의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80대에 접어든 이 젊은 유학자는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이미 명문 파예드 아카데미의 응교로 재직중이었고, 최초로 '실천적 원리주의'를 확립한 존경받는 석학이기도 했다. 어머니인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있는 그는 누가보아도 저 아름다운 여인의 신랑감으로 훨씬 잘 어울렸을 그런 남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맨 앞에는 탈라스 특유의 혈통을 물려받은 크고 우람한 체구에 또렷한 푸른색 눈동자를 번득이는 로노 장태자가 서 있었다. 곧 제수씨가 될 저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는 로노 태자의 눈이 묘하게 번득이고 있음을 베흔도 잘 알고있었다.
"하여간, 못말리겠군,"
베흔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미 몇 제후가의 딸들은 물론이고 동부와 북부 최고제후 부인에게까지 추군덕거렸다고 공공연히 소문나 있던 저 바람둥이 태자가 제수씨라고 그냥 건너갈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동생이 남자로서 문제가 있다면 더 말할나위도 없었다. 그런 눈빛을 읽었는지 저 세네피스 카파키와 꽤 친하다고 알려진 막내태자 레곤 호지 리쿠 공주가 이 문제많은 큰오빠의 옆구리를 꼬집고 있었다.
아직 60대에 불과한 이 막내태자는 세째 오넬론 태자와 함께 세나우스 2세 슬하의 유일한 동종(同種) 남매였지만 우유부단하고 겁많은 그 오빠와는 대조적으로 큰 덩치에 고집도 센 데다가 배포도 유난히 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레곤 공주 뒤에는 희한한 눈빛을 한 황제의 첫손자 S-7-1 코리온 대군이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며 곧 숙모가 될 세네피스 카파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
둘째숙부인 주페 태자가 엄한 얼굴로 조카를 돌아보며 꾸짖자 그 시선을 깨달은 코리온은 그제서야 자신의 큰어머니가 될 그 여인에게서 살기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묘하게 일그러들어있는 그의 표정은 여전했다.
구걸과 잡일을 번갈아가며 혼자 제국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도적떼에 사로잡혀 황실을 경악하게 했던 이 골칫덩이 대군은 20살에 파예드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는 전에 비하면 그럭저럭 조용히 지내오고 있었다.
물론 방랑벽에 기벽으로 똘똘 뭉친 이 괴짜 청년을 통제하고 학교에 붙들어매둘 수 있었던 건 이 문제생도를 자진해서 수하로 받아들인 지도교수이며 둘째숙부인 주페 태자 덕분이었다. 학교의 손꼽히는 석학이던 주페 태자가 이 천하의 문제아를 맡겠다고 나섰을 때 학장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결사적으로 말린 건 당연한 노릇이었지만 지식에 대한 욕구로 거의 미쳐가던 이 젊은이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만족시켜 줄 수 있었던 건 주페 태자밖에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이라면 20년은 보통으로 소요될 학부과정을 학부 최단기간인 단 9년만에, 40년 이상이 걸릴 박사과정을 4년만에 마쳐버린 이 청년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파예드 아카데미의 하급교수인 수찬까지 올라 스승인 주페 태자의 든든한 후학이자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훌륭한 며느리를 얻게 된 세나우스 2세 황제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새 며느리를 넋놓고 바라보는 귀족들의 모습에 잔뜩 기분이 뜰떠오른 세나우스 2세 황제는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세네피스 카파키에게 손수 술 한잔을 내려주었다.
"내 전부터 너같은 아름답고 현명한 며느리를 맞고 싶어했는데, 이제야 소원을 이루는구나."
예비 며느리를 바라보는 황제의 성깔있어보이는 입가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약간 긴 얼굴에 고집이 내비치는 얇고 야무진 입술, 검은 반곱슬머리와 암갈색 눈동자를 한 '철의 유평대제'는 아무리 좋게보아줘도 '미모' 혹은 '매력' 이라는 단어는 어느구석에도 달아줄 수 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보잘것없는 외모, 혹은 제국민들 평균신장에서 족히 한 뼘은 빠질 그 왜소한 체구에서 황제다운 '권위나 힘'을 떠올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로 큰 오산이었다. 그건 이 무서운 여인의 얼음장같은 인상이나 그의 무시무시한 통치전력을 모를 때나 가능할 일이었다. '사소한' 말실수로 대전에서 귀족이 참수당하고, 황실에 들어올 세금을 감히 빼돌린 부패한 지방관리가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정도는 그다지 놀라운 소식거리도 못되는 것이 바로 그의 통치방식이었다.
게다가 비공식적으로 따지면 2, 3백명, 공식적으로는 무려 100명의 남편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 어느 한 명도 감히 권력 따위에 머리를 들이밀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그들 중 몇은 황제의 눈밖에 나 '제거'되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것만 보아도 이 '철의 대제'의 사람다루는 법을 알 수 있을 터였다.
황제에게 첫 인사를 마친 세네피스 카파키는 그 뒤에 도열해있던 여섯명의 태자들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제일 앞에 있던 로노 장태자에게 허리를 굽혀보인 세네피스 카파키는 상례대로 그의 손등에 가볍에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 자주 뵙겠소. 세네피스 태자빈."
입가에 미소를 띤 로노 장태자가 갑자기 세네피스의 얼굴과 귀를 가볍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정말 못말리겠군,"
베흔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할 그 예비 태자빈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기도모르게 고개를 숙여버렸다. 하지만 그의 귀에 들려온 건 뜻밖에 너무도 침착한 대답이었다.
"장태자전하와 같은 분을 자주 뵙게 될 수 있다니 영광이옵니다."
가시가 돋은 것인지 아닌건지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며 그 예비 태자빈은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로노 태자의 음흉한 손길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닌걸.'
부드럽고 인자해보이던 세네피스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날카로움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베흔은 저 여자와 잘난 둘째태자가 만나지 않게 된 것을 다시한번 안도하고 있었다.
두번째로 인사를 받게 된 주페 태자는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그 형과는 대조적으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주페 태자의 약지에는 꽤 섬세한 세공이 된 연두색의 페리도트 반지가 맑은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반지를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던 세네피스는 이 야속한 남자의 눈을 한 번 힐끗 올려다보고 있었다.
"동생과 행복하길 바라겠습니다. 카파키 부제학."
주페 태자가 제수씨의 시선을 가볍게 피하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환대 감사하옵니다."
자신을 대하는 주페 태자의 유난히 쌀쌀맞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미소를 띠어보인 세네피스는 이번엔 자신의 신랑이 될 오넬론 태자를 향해 돌아섰다. 내일이면 자신의 여자가 될 이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인를 바라보며 태자의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가벼운 맞절 후 세네피스가 조금은 밋밋한 톤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무, 물론입니다.....오늘은 이곳에서 마음껏 즐기도록 하십시오....."
황족들과 세네피스 예비 태자빈과의 상견례를 지켜보던 베흔은 갑자기 뒤통수가 조금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심코 돌아본 곳에는 남편을 대신해 이곳을 찾아온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이 귀족들의 맨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앳티를 풍기는 부인의 얼굴은 오랫만에 만난 연인의 모습에 약간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베흔은 저으기 당황한 얼굴로 로노 장태자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로노 장태자가 이 아름답고 나이어린 최고제후에게 오래 전부터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베흔도 잘 알고 있었지만 워낙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이 부인에게는 그간 접근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저 문제많은 바람둥이녀석이 제수씨에게 정신이 팔려 귀족들 쪽에는 별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
부인에게 다가간 베흔은 주변에 모여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에게 깊이 인사를 올렸다.
"부군께선 어디가시고 혼자 오셨습니까?"
"북부에서 내일 아침에 오실겁니다. 제게 오늘 이 행사에 대신 참석해달라 말씀하셨습니다."
네페티 부인도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부인을 내려다보며 미소짓던 베흔이 로노 태자쪽을 다시 힐끔 바라보았다.
'이런 제길,'
베흔이 이를 악물었다. 로노 장태자가 어느새 네페티 부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밤을 북부에서 함께 온 가족들과 지낼 제수씨 대신 남편없이 혼자 온 네페티 부인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저으기 당황한 네페티 부인도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리고 있었다.
"가능하시다면 오늘밤은 궁 밖에서 숙소를 잡으시죠. 제가......"
베흔이 부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베흔이 더 하려던 말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바람둥이 덕택에 중간에 막혀 버렸다.
"오랫만입니다.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부군께서 북부에 계신다 들었습니다."
베흔이 얼굴을 찌푸렸다. 남의 남편이 북부에 있건 남부에 있던 무슨 상관이라고 쓸데없이 참견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바람둥이가 네페티 부인 남편의 행적까지 알고 있다는 건 너무나 뜻밖이었다. 부인이 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치밀하게 준비했음이 틀림없었다.
"황궁에 오랫만에 오신 것을 어머님 폐하를 대신해 환영드리겠습니다."
로노 장태자는 당혹스러워하는 네페티 부인의 손등에 스스럼없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손등에 하는 입맞춤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는 것이 상례였으니 이런 장태자의 행동은 누가보기에도 '괴상한' 짓임에 틀림없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장태자 전하."
네페티 부인이 로노 태자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며 그와의 거리를 살짝 벌려놓았다. 하지만 이 집요한 바람둥이는 다시 부인에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항상 집에만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모처럼 황제령에 오셨으니 맘껏 즐기다 가십시오."
"환대 감사하옵니다."
부인이 다시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부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붙들고있던 로노 태자가 그 작은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빈관에 좋은 방을 잡아두라 지시하겠습니다. 아니, 아름다운 부인께는 영빈관으로도 부족하겠군요. 148층 태자처소 중에 한칸이 비어 있습니다. 종종 최고제후분들께 제공되는 곳입니다. 혼자오셔서 신경도 쓰이실테니 그곳에 묵으시죠."
"환대 감사하옵니다만......황제령의 옛 친구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미리 약속했사옵니다."
고개를 숙인 부인이 빤한 수작을 부리는 이 바람둥이에게 붉어진 얼굴로 일단 거짓말을 둘러대고 있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던 베흔은 차마 더 이상 볼 수가 없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 때, 무심코 상석쪽을 올려다본 베흔은 그곳에서 이쪽을 그 희한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세네피스 카파키 부제학과 눈이 마주쳤다.
'저여자가 왜 날 쳐다보지?'
이상한 기분이 든 베흔은 이번엔 투르케스크 카파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다른 귀족과 황족들 사이에 섞여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느라 베흔 쪽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했다. 베흔은 다시 세네피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로노 태자와 실랑이중인 네페티 부인을 아무 표정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보는 그 특이한 시선에 베흔은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바싹 곤두서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본능적인 극도의 불안감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계실지 위치를 알려주시면 근위대원들을 보내 호위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난리통에는 치안이 불안해지는 것이 보통이라서....."
로노 태자는 아직까지도 네페티 부인을 아직까지 집요하게 따져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네페티 부인이 남부의 집을 떠나 황제령에 오는 것은 정말로 일년에 한번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혼자 오는 일은 정말로 거의 없다시피 한 터였다. 그의 꼬장꼬장한 남편은 이 어린 부인이 혼자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피곤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 짜증나는 태자는 하늘이 준 이 기회를 절대 호락호락하게 놓칠 리가 없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네페티 부인이 도움을 바라는 듯 베흔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시다면 친구분을 이리로 모셔오시죠. 34층에 영빈관 특실이 있으니 친구분과 밤새 함께 계시도록 조처해드리겠습니다. 근위대 1급 가디언들을 특별히 붙여드리겠습니다."
베흔이 부인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네페티 부인이 그제서야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면 되겠군요......알겠습니다."
로노 태자가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 눈치없는 근위대장이 기껏 잘되어가던 '작업'을 완전히 망쳐놓은 셈이었다. 실망한 장태자의 시선은 중앙의 테이블 곁에 혼자 서서 넥타를 마시던 예비 태자빈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네페티 부인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던진 로노 태자는 다시 세네피스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이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진땀뺐네요,"
네페티 부인이 베흔에게 평소같은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얼음같은 베흔의 가슴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부인만의 매력이었다. 그런 네페티 부인을 따뜻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베흔은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저 속을 알 수 없는 예비 태자빈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베흔이 슬쩍 돌아본 세네피스는 로노 태자와 바싹 붙어 무언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베흔은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이 시끄러운 파티장 안에서 그들의 귀엣말은 베흔의 예민한 귀로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베흔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저 여자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시 공격해오겠죠?"
칼을 손질하던 유시프 장군이 굴뚝의 그늘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던 카렐에게 물었다.
"아마도."
카렐은 자이납이 병영 주방에서 애교반 협박반으로 빼앗아온 양의 생간과 지라를 우물거리고 씹으며 대꾸했다. 해가 떠오르면서 끔찍하리만큼 뜨거운 열기가 땅에서 또다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마 해질무렵이 되겠지. 설마 이 뜨거운 날씨에 공격하는 자살행위를 하겠어?"
카렐은 다 먹고 난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 가 수비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교대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카렐은 얼굴에 전포를 덮은 채 그늘에 곯어떨어져 있던 제네르를 툭툭 걷어차 깨웠다.
"일어나, 셔틀에 돌아가서 자. 여기서 자다가는 낮에 탈진해버릴거다."
"예, 알겠습니다."
잠이 덜 깬 제네르가 눈곱을 떼며 힘겹게 몸을 조금 일으키자 카렐이 그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나도 눈 좀 붙일테니까 유시프 장군하고 발리 장군이 일단 1시까지만 지키고있어. 그때가서 페나페 장군하고 내가 교대할테니까. 시로하고 자이납은 어젯밤에 경계를 섰으니 충분히 쉬게 해 줘야지. 제네르 경이야 환자니 그렇고....."
"예. 쉬고 나오십시오."
유시프 장군이 칼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카렐은 아직 비몽사몽을 헤매는 제네르를 부축해 셔틀 안으로 들어갔다. 냉방이 되는 셔틀 안에서는 이미 나머지 사람들이 별로 세련되지는 못한 몰골로 사방팔방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곯아떨어져 있었다. 카렐이 제네르를 셔틀의 쪽방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자 제네르가 웃으며 그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그냥 여기에서 자도 됩니다. 네페티 부인 혼자 두려움에 떨고계실테니 전하께서 위로해주십시오."
제네르는 셔틀의 상석을 눕혀 잠자리를 만들고는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워 그다지 세련되지는 못한 몰골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카렐은 쪽방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섰다. 네페티 부인은 셔틀의 큰 창 밖을 바라보며 여전히 멍 하니 앉아있었다. 카렐은 그를 뒤에서 조심스럽게 껴안아주었다. 부인이 자신을 품어안은 카렐의 손등을 가만히 붙들며 혼자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지.....내가 널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게......옛날같이 말이야......"
카렐은 부인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남부에서 있었던 일은 저도 이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야."
카렐을 향해 돌아선 네페티 부인은 카렐의 긴 갈색머리와 회색빛 눈 언저리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부인의 이상한 태도에 카렐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다시 평소같은 표정으로 돌아온 네페티 부인이 카렐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이죠. 저와 함께 황제령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카렐이 목소리에 유난히 힘을 주어 대답했다.
"돌아가거든......부탁 있어."
부인이 카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의 귀에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말씀하세요."
"먼저 들어준다고 말해 줘."
카렐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페티 부인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네페티 부인은 눈에서 색기까지도 뿜으며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고 있었다. 어쨌든 부인의 지금 태도는 평소와 비교해서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부인의 약간 헐떡이는듯한 숨소리에 맞춰 카렐의 호흡도 조금씩 빨리지고 있었다.
부인이 카렐의 뺨과 턱, 귓불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며 다시 속삭였다.
"들어준다고 말해줘."
부인의 계속된 재촉에 카렐이 그의 허리를 돌려안으며 결국 원하던 대답을 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들어드릴테니 말씀하세요."
약간의 미소를 지은 네페티 부인은 카렐의 옷 속에 손을 밀어넣으며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돌아가거든......나한테 진한 키스 한 번 해 줘."
잔뜩 긴장하고 있던 카렐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이렇게 잔뜩 분위기잡으며 한 부탁치고는 너무나 시시하기 짝이없었다.
"지금이라도 해 드릴까요?"
카렐이 부인의 부드러운 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부인은 자신의 부탁 뒤에 짧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 어머니 눈앞에서."
기겁을 하고 놀란 카렐은 하마터면 부인의 입술을 깨물 뻔 했다. 카렐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알고있던 그 네페티 부인이 맞는지 잠시 의심하고 있었다.
부인은 카렐의 겨드랑이를 꼭 껴안으며 다시 속삭였다.
"난 어차피 이제 과부야. 남편이 죽었으니 델루지 가 종부라는 간판도 며느리 것이 되고 말았지. 제롬이 있는 델루지 가로 갈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부담스러운 짐덩어리밖에 못될거야. 그나마 서부 최고제후에서도 밀려났고, 친정에서도 쫓겨났으니.....난 이제......갈곳없는 몰락귀족일 뿐이야......네가 가까이해도 전혀 부담없는 그냥 귀족. 이젠 나도 제대로된 동반자가 있으면 해."
카렐이 부인의 파란색 선한 눈동자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카렐은 알고있는 지식을 동원해 부인의 이 이상한 태도를 나름대로 해석하려 애쓰고 있었다. 부인은 어딘가 기댈 곳을 원하고있음에 틀림없었다.
"저와......계속 함께하실 건가요?"
카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만 좋다면."
카렐은 차마 입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부인의 말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인은 카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다시 속삭였다.
"물론 당장 그럴 수 없는 건 잘 알아. 지금 원하는건......네 어머니 앞에서 너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것 뿐이야."
카렐은 긍정의 대답으로 부인을 꼭 껴안아주었다. 카렐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짐작으로나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한 네페티 부인을 믿지못할 이유는 없었다. 부인은 옛날부터 정숙하고 조신하기로 유명했고 장태자의 곁에 있기에 흠잡을데없는 빼어난 미모와 훌륭한 혈통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부인 정도라면 어머니인 세네피스 황후도 기뻐할 것이 확실했다. 카렐은 그렇게 믿었다.
++++++++++++++++++++++++++++++++++++++++++++++++++++++++++++++++++++++++++++++++++++++++++++
끄응~ 이번회도 스크롤의 압박이..... (난 왜 잘게 자르고싶어도 그게 안될까.....)
오늘 올릴 2회는 다 용량이 커서 3,4 연참이나 마찬가지가 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