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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12화 (112/1,132)

< -- 112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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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통같은 근위대 새끼들,"

칼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또다시 굴뚝에 앉아있던 카렐이 가까이 다가온 베흔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시간이 4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근위대 지부 녀석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베흔은 카렐의 악담을 짐짓 못들은 척 자리에 그대로 서서 적진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녀석들한테 가디언이 보강된 모양이다."

멀찍이 선 베흔이 딱딱한 투로 말했다.

"낮에 루토 녀석이 봤다는군."

"재수 옴 붙었네."

카렐 역시 베흔에게서 시선을 멀리한 채 고깃조각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멋진 새 카타나군."

베흔이 카렐의 칼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칭찬해줘서 고맙구만."

카렐이 고깃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 멋장이 콧수염 좀 다듬지그래. 엉망이군."

카렐의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대답에 베흔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 원수같은 놈과 대화같은 대화를 나눈것도 참으로 오랫만이었다.

"병신같은 지부 새끼들,"

베흔이 침을 퉤 뱉었다. 그는 돌아가는대로 느려터진 지부장녀석 모가지를 쳐버려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고 있었다. 적들에게 가디언이 보강되었다면 오늘 저녁의 공격이 분수령이 될 공산이 높았다.

"하나, 둘, 셋, 넷......한 이십명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더 숨어있는지도 모르지만."

제네르가 스코프를 작동시키며 중얼거렸다. 적들에게 보강된 20명 정도의 가디언이라면 특별히 고급가디언이 아니라면 이쪽의 가디언들만으로 충분히 제압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녀석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쪽 가디언들을 피해 발 가 수비병들만 골라서 공격할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단 방어선이 뚫린다면 카렐이나 베흔으로서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카렐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적진에서 큰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수비대장 베나지의 고함소리와 함께 150여명의 발 가 경비병들과 백여명의 민간인 지원병들도 아침처럼 도시 구조물 옥상에 도열해 섰다. 카렐도 칼을 뽑아들며 북쪽 벽 중앙을 지키고 섰다. 그 때 제네르가 카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남쪽을 보십시오."

"응?"

무심코 돌아본 남쪽 구조물 위에서 베흔이 이쪽에 무언가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시민의 육안으로는 거의 분간이 되지 않을 꽤나 복잡하고 빠른 그 손짓은 근위대 최고위 가디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암호 수화였다. 카렐이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뭡니까?"

카렐이 작은 목소리로 제네르의 뒤에 대고 속삭였다.

"지부 녀석들이 작업을 시작한 모양이다. 일단 통신만 개설했고 본격적인 작업은 이곳을 공격개시하면 녀석들 주의가 흐뜨러지는 틈을 타서 할거라는군. 칫, 더럽게 일찍오셨군,"

카렐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아직까지도 하늘을 뒤덮고있는 에너지장벽을 빙 둘러보았다.

"그럼......여기 경비병들은 어쩌죠? 버려두고 저희만 도망갑니까?"

제네르가 저으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입술을 가볍게 깨문 카렐은 비장한 태도로 구조물을 지키고 선 발 가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뼈대를 이루어주고 있는 카렐과 베흔 일행이 빠져나간다면 이곳의 수비벽은 바로 붕괴될테고 얼마못가 아비규환의 학살장으로 변해버릴 것이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퇴각계획을 따로 잡고 체계적으로 빠져나가는 편이 안전했다.

그는 한쪽에 서 있던 베나지 나하스 대장을 손짓해 불렀다.

"여기 셔틀이 모두 몇대지?"

"민간셔틀 합쳐서 이십여대 될겁니다."

베나지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최대탑승가능인원은?"

"대개가 화물셔틀이니까......꾸역꾸역 우겨넣으면 한 이천명은 타겠죠. 잘하면 더될수도 있고."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량을 이용한 탈출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셔틀에 최대한 싣는수밖엔 없었다.

"좋소, 이곳을 안떠날 사람도 있을테니 이곳을 떠날 사람들만 일단 추려서 모두 셔틀에 옮겨타도록 하시오. 저녀석들이 민간인을 맘먹고 해치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나중에 돌아올 수도 있을테니 짐 따위는 모두 놔두고 몸만 나오도록 하시오. 경비병들은 학살대상 1호일테니 셔틀에 경비병들 탈 공간은 반드시 남겨두고. 밑에서 치료받고 있는 부상병들도 모두 옮기도록 하시오."

"지금 이곳을 버리라는 말씀입니까?"

베나지가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가망없는 저항하다가 다 죽는것보다는 낫겠지. 원하는 민간인들을 탈출시킬 수 있다면 경비대장으로서 당신의 임무는 다하는것 아니겠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베나지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로부터의 지원과 연락도 끊긴 상황에서 이런 힘겨운 저항도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리라는 건 뻔한 노릇이었다.

"시 공무원들 시켜서 당장 실시하도록 하죠."

"에너지장벽이 뚫리는대로 알려주겠소."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베나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렐이 제네르에게 휘파람을 불어보였다.

"일석이조로군."

"예?"

"좋은일 한 번 하는거고."

"그리고요?"

"한번에 많은 셔틀이 우루루 빠져나가면 추적대가 우리 셔틀을 쫓을 확률도 그만큼 낮아지겠지. 못떠나게 잡아놨다가 한번에 풀어야지. 지난번에 우리 셔틀 스피드에 당했으니 이번엔 만만치 않을지도 모르거든."

제네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아침에 비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문제는 근위대 녀석들이 장벽을 뚫을동안 이곳을 버티어주는 일이었다.

적진에서 또한번의 나팔소리가 울렸다. 가디언들은 절대 앞장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 확실했다. 아마도 혼전중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경비병들의 뒷쪽으로 기습을 해 올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아침에 한 번 호되게 당한 적 보병들이 이번엔 훨씬 신중한 태도로 열을 맞춰 다가오고 있었다.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들에게서는 아침과 다른 특별한 공성장비도 보이지 않았고, 병사들의 무장이나 진형에도 큰 변화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별볼일없는 발판만을 끌고 이쪽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저 적 1진 후미에 말없이 따라오고 있는 가디언들 몇이 달라진 것의 전부였다. 딴에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발 가 병사들이 도리어 더 의아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쪽에서도 남쪽 중앙엔 베흔이, 그 주변으로 루토를 비롯한 4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간격을 맞춰 서 있었고 북쭉 중앙의 카렐과 그 좌우로 시로와 자이납이 각각 자리를 맡아 서 있었다. 발리 힐거 교위가 옆에 선 제네르가 사뭇 걱정되는지 그에게 바싹 붙어서고 있었다.

"몸도 성치않으신데.....힘드시면 언제든 제 뒤로 피하십시오."

"이정도도 못이기면 어떻게 기사단장라고 하겠나."

제네르가 웃으며 칼로 자신의 반투명한 기사단 방패를 탕탕 두들겼다. 이들의 뒤에서는 시 공무원들의 인도를 받으며 민간인들이 화물셔틀에 차례로 오르고 있었다. 조심스레 진격해들어오는 적들과의 거리가 어느새 꽤 가까와져 있었다.

"공격!"

플레렌 가 쪽에서의 큰 돌격나팔소리와 동시에 적들이 수십개의 거대한 발판을 밀며 무서운 기세로 치고들어왔다.

"떨어뜨려!"

베나지 대장이 후방에 대기중인 민간인 지원병들에게 외치자 그들이 낮 내내 제작한 금속제 파이프와 나무로 만든 수백개의 커다란 기름칠된 삼각뿔을 밀고와 바닥에 쏟아놓았다. 뜻밖의 장애물에 적들이 밀고오던 발판이 앞으로 전진을 못하고 가로막히고 말았다. 게다가 돌진해오던 적군들까지 구조물에 막혀 잠시 전진이 지체되고 있었다.

"나쁘지않은걸, 베흔 녀석이 슈로 기사단을 절단낼때 썼던 방법이라 좀 찝찝하지만."

카렐은 자신이 아침에 지시했던 것이 일단 쓸만한 것으로 드러나자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젠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시의 살림살이라도 다 쏟아부어야 할 판이었다.

장애물에 막힌 적군들이 발판의 바퀴를 뜯어내고 발판만 밀고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들의 머리 위로 기름과 불덩이가 쏟아져내렸다. 매캐한 기름탄내가 퍼지면서 주변이 일제히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리자 적군 쪽에서도 이에 질세라 기름과 불로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내화성능은 기본인 장갑으로 무장한 보병들이었기 때문에 불 공격은 사실상 별 효용은 없는 시간끌기용의 요란스런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다만 제후군들이 들고오던 발판이 불 공격으로 여기저기 타고 손상되어 여러개가 못쓰게 되어 버린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발판 걸어! 전진해!"

함성소리들 사이로 적 지휘관들의 악을 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침같이 사다리로 구조물을 직접 기어오르는 무모한 공격은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카렐의 왼쪽에서 갑자기 둔탁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썅!"

시로의 무지막지한 고함소리와 함께 적이 애써 건 발판이 도끼날에 산산조각나며 매달려있던 적병들 여럿을 바닥에 떨어뜨려버렸다. 구조물 곳곳에서 발판을 걸려는 적병과 이를 떨구려는 이쪽 수비병과의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아침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민간인들은 다 옮겨실었습니다, 남겠다는 사람이 600명 정도 됩니다. 수비병들을 실을 셔틀 두 대는 비워놓았습니다."

베나지 대장이 카렐에게 달려와 외쳤다. 이제 저 밥통같은 근위대 지부 녀석들이 방어벽을 뚫어주는 일만 남아있었다. 적들의 공격도 생각외로 그다지 위력이 없어보였고 이대로만 간다면 날이 추워질때까지 한두시간정도 버티는 건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상황은 순조롭다는군."

마네토 앞에 모습을 나타낸 두겐의 보좌관 샤드니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무장같은 냄새는 털끝만큼도 풍기지 않아보이는저 서생 녀석은 제후군 사령관 페데레스 장군을 대신해 이곳에 상전으로 와서는 지휘관인 마네토의 속을 긁어놓고 있었다.

"아침엔 수고했네. 첫작업은 조금 소음이 심해서......1시간정도는 소란을 떨어줘야 했거든."

저 쌀쌀맞은 샤드니 녀석은 아침에 간부 4명과 병사 80여명이 전사했다는 보고에도 '안됐다'는 입에 발린 말한마디나 격려는 고사하고 그들의 희생을 고작 '소란'정도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는 흰 무명포에 보랏빛 머플러를 두른 이녀석이 하는 짓만 봐서는 정말 유학자가 맞기나 한건지 헛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어쨌든 저녀석은 가문 내 위계에서 자신보다 상급자였으니 배알이 뒤틀려도 시키는대로 듣는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녀석이 조만간 제후군 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돌고 있었다.

"얼마나 더 걸린답니까?"

마네토의 사무적인 질문에 샤드니가 시계를 보며 대꾸했다.

"하루 종일 쉴새없이 했다니까 이제 거의 끝났을거야. 10분 정도?"

"응?"

발밑에서 울리는 미세한 진동을 제일먼저 감지한 건 동쪽 끄트머리를 지키던 자이납이었다. 그의 오른쪽에 서 있던 근위대 가디언 루토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자이납을 돌아보았다. 창백해진 자이납이 시미터를 꼰아잡고 급히 도시 안으로 뛰쳐들어가자 루토는 그 묘한 진동이 올라오고 있는 동쪽 구조물 외벽 쪽을 조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이게 뭐야!"

루토가 비명 비슷하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이유인지 벽이 안쪽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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