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6화 (116/1,132)

< -- 116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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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으로서,"

페로가 가방을 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각 제후지역들간의 분쟁해결을 담당하는 것 또한 제 임무입니다."

두겐도 페로가 꺼내려는 말을 대강은 눈치챈 듯 약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서부제후지역 수도인 이곳 4번 행성의 폐쇄조치가 길어지면서 다른 지역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두겐 공이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길게 이야기해야 이 잘난 녀석에게 꼬투리만 잡히기 십상이었다. 페로가 그런 두겐을 몰아붙이듯 쉴새없이 말을 이어갔다.

"폐쇄조치 자체는 이곳 주인이신 최고제후의 전권사항이니 저로서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최소한 폐쇄사유와 해제시기 정도는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폐쇄조치는 교리정치안에 대한 지지와 함께 혹시나 있을 지 모르는 불순분자들의 동요를 막기위한 임시적인 비상조치였습니다."

두겐 공이 예상한대로 판에박힌 대답을 뽑아내자 페로가 그를 가볍게 째려보았다.

"서부는 어차피 교리에 의한 정치가 되어가고있지 않았습니까? 서부만큼 정교일치가 잘되고있는 곳도 있던가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황실에서의 정교일치는 명목뿐이죠. 윰 포고령에도 정교일치를 국가의 근간으로 함을 명시하고 있는데도 말씀이죠."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두겐이 페로를 향해 첫 공격을 개시하자 페로도 기다렸다는 듯 반격을 날렸다.

"근간으로 한다 정했을 뿐이지 서부처럼 교리를 국법으로까지 채용라고는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승이 확실한 리 리쿠의 수나*를 국법에 채용함은 가당할 것이나 근본도 불확실한 하디스*나 유학자들의 합의 자체가 불가능한 이즈마*, 퀴야스*를 제국법률로 채택하기는 무리가 있소이다."

페로가 총리다운 당당한 태도로 두겐에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디스와 이즈마는 종교회의를 통해서......"

"예컨대 퍼더의 경우에 서부에서는 이즈마라 하여 이를 인정하고 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이를 수나와 하디스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제도라 하여 배격하고 있으니 그들과의 조화를 어찌 꾀할 생각이십니까? 이런 문제가 종교회의를 연다고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실제로 기원 229년에 있었던 종교회의에서도......"

두겐은 이 자리에 코리온이 함께 있지 않은 것을 통탄하며 미치 치밀하게 준비해온 듯 한 페로의 달변에 대응할 말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파예드 아카데미 학풍의 가장 심각한 단점은 그 심각한 폐쇄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면역력부족'이었다. 결국 몇몇 고위급 학자들을 제외하면 상대되는 개혁파나 중도파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고 실질적인 문제에의 적용에 있어서 '옛말에~ 타령'만 해서 논쟁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하기가 일쑤였다.

그것이 --- 무정부주의부터 극단원리주의까지 갖은 학풍의 잡탕이라고 할 수 있는 남극성당과 비교해서 --- 이곳에서 배출한 그 많은 원리주의 사상가들이 무색할 정도로 정작 정치가는 거의 배출해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의 두겐도 '옛말 타령'으로 논쟁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는 슬쩍 빠져나가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두겐은 페로가 남극성당에서 육서과정을 조기졸업하고 박사과정을 단 17년만에 마스터한 개혁적 중도파 유학자라는 사실을 깜빡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실수를 절감했다. 그는 천박한 일개 정치가라고 생각했던 페로가 대담하게 '교리정치' 자체를 공격해들어오자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제국법률은 각 제후지역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최소한의 규율만을 정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니 유학자들의 의견이 통일가능한 서부에서는 교리정치가 가당한지 모르겠으나 제국의 통치권 전체를 좌우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교리정치는 그 무도한 국제연합과 '침묵의 자매들'이 망가뜨려놓은 제국의 도덕률을 근본부터 되살릴 유일한 안입니다. 북부의 그 천박함을 보십시오. 그것이 다양성이라는 핑계로 용납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이십니까?"

둘간의 길지않은 논쟁은 하인이 차를 가지고들어오는 소리에 잠시 중단되었다. 페로로서는 마음만 먹으면 예습이 부족했던 두겐을 더 난처하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두겐 정도를 상대로 말장난이나 하고있을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로서는 두겐 녀석의 기를 죽여놓으면 그것으로 일단은 충분했다.

하인이 부어주고 간 차를 들이키며 페로가 한결 풀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행성의 출입통제는 언제 해제하실 예정이십니까?"

두겐은 페로가 계속 밀어붙이지 않자 내심 안도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 행성내에 불순분자들이 존재하니 그들을 색출해내 처단할때까지 일단은 폐쇄상태를 유지할 예정입니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태우시는군요."

페로가 저으기 경멸섞인 말투로 들릴듯말듯 중얼거렸다.

"발 가에서 재산권 침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고 들었는데,"

"그 문제에 관해서는 추후에 충분한 물질적 보상을 할 계획입니다."

두겐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음, 그렇군요, 그럼 실태조사 차원에서 오늘 저녁에 문제가 된 메디스 시를 직접 방문하겠습니다. 발 가로부터의 요구도 있고 했으니 그곳 시장을 직접 만나보아야겠군요."

두겐의 이마에 순간 핏발이 서고 있었다. 페로의 진짜 방문목적이 드러난 셈이었다. 메디스 시 공격사건을 이용해 플레렌 가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교활한 발 가와 페로 사이의 합작품임에 틀림없었다. 이번 사건을 기화로 페로가 발 가와 제대로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발 가 종장 사우드 부인의 부탁으로 오신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페로가 태연한 표정으로 사실 그대로 털어놓았다. 페로는 이미 자신들이 메디스 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음을 눈치채고 있음이 확실했다. 두겐은 눈앞의 페로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수족에 불과한 자신이 아닌, 코리온의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 순간, 다행히도 두겐의 탁자에 오찬준비가 끝났다는 메시지가 나오고 있었다. 두겐으로서는 가까스로 살 길을 찾은 셈이었다.

"오찬준비가 끝났다고 하니.....이십분정도쯤 후에 식당에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머지 얘기는 오찬후에 갖도록 하죠."

두겐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로도 이녀석에게 결정적인 결단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안하고 온 터였다. 결국 모든것은 사실상 자신과 코리온 사이에 결정될 문제였다.

접견실을 나서던 두겐은 막 정원에서 돌아오던 코리온의 모습에 백만군이라도 얻은 듯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산책하고 돌아오십니까."

"여기 정원은 언제 돌아봐도 천하에 비할바가 없군."

코리온이 평소같은 희미한 미소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의 어깨와 등에 자그만 나뭇잎 몇 개가 붙어있었다. 그의 옷차림과 몸가짐은 여전히 소박하고도 단정했고 대제학급을 상징하는 용이 새겨진 머플러도 균형이 정확히 맞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치장에 관해서라면 그 눈썰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페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접견실에 들어갈 때 코리온의 옷차림은 지금보다 도리어 약간 흐뜨러져 있었다. 물론 당장은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겠지만.

페로는 속내를 최대한 감추며 코리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십분 후에 식당에서 뵙겠습니다."

코리온에게 무어라 귀엣말로 보고하는 두겐을 뒤로하고 접견실을 나선 페로는 뒤를 따르는 비서에게 작은 목소리로 일렀다.

"아까 그 금발머리녀석......누군지 당장 파악해서 알려다오."

플레렌 가의 종가 정원인 헤네라리페는 코리온 말마따나 제국내에서도 최고로 손꼽힐 정도로 크고 잘 가꾸어진 대정원이었다. 페로는 정원 입구인 장미꽃 아치를 지나 그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카렐을 우리집 정원사로 삼으면 이정도 해놓을까?'

페로는 작업복을 입은 카렐이 큰 가위를 들고 나무를 깎고있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하며 물결 형상으로 꼼꼼하게 깎인 정원수 옆을 지나 걷고 있었다. 이 잘 가꾸어진 정원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가 무색할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 이곳은 페로 관처럼 가신들과 무장가디언들이 모두 함께 사는 곳이 아닌, 소수의 플레렌 가 사람들만을 위한 철저히 성역화된 공간이었다.

이 텅 빈 곳에서 페로에게 느껴진 단 하나의 인기척은 아까 본 바 있던 그 금발의 귀공자였다. 샤드니는 멀리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페로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앉아있던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또만나는군."

페로가 이번엔 먼저 말을 걸었다.

"두겐 첸 플레렌 공의 보좌관이며 상급귀족인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이라 하옵니다."

"역시 플레렌 가 사람이었군, 여기서 혼자 뭐하나?"

페로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시 유유자적하고 있었을 뿐이옵니다.

샤드니는 페로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깨까지 오는 약간 긴 금발머리에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 남자인 페로조차도 넋을 빼앗길 정도로 눈부실정도로 희고 잘생긴 얼굴이 두드러졌다. 검은머리와 검은눈 혹은 초록눈, 가무잡잡한 피부가 특징인 일반적인 서부인들과는 조금 다른, 꽤나 특이한 외모였다. 그러다보니 페로 역시도 샤드니가 네페티 부인과 꽤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이곳 사람으로는 특이하게 흰색 무명포를 입은 그의 목에는 네개의 줄과 파예드 아카데미 학표가 그려진 머플러가 드리워져 있었다.

'헷갈리게 입었군, 이놈 남극성당이야? 파예드 아카데미야?'

그의 경계하는 듯한 빈틈없는 태도에 페로는 더 이상 묻는것을 포기하고 뒤로 돌아섰다. 그의 등뒤로 샤드니의 매서운 눈길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정원 구경을 마치고 돌아나오는 페로에게 방금전 지시를 내렸던 비서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누가 없는지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고는 보고를 시작했다.

"검색되었습니다.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 268살이고 남극성당에서 경세지학 박사까지 공부했고 이곳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사장지학으로 다시 박사까지 공부해서 3달 전까지 응교로 있던 녀석입니다. 교내에서도 리쿠 학장이 가장 총애하는 녀석이라고 하는데 경력이 좀 특이합니다. 남극성당 졸업 직후에 황궁에서 내무부 소속으로 25년간 일했었고 타르서스에서 직할군 지휘관으로 근무해서 사령관까지 올랐던 경력이 있습니다."

페로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럼 저녀석이 무장이라고?"

"예. 남부와 경계분쟁에도 여러번 참전했었고 일기투로도 4명이나 꺾은 바 있는 대단한 녀석입니다. 현역으로 돌아간다면 하지즈 장군과 함께 플레렌 가에서 최고의 무장이 됨직한 인물입니다."

페로가 조금 놀란 듯 자신이 돌아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생긴거하고는 정말 딴판이군.....혈통은?"

"두겐 공의 사촌동생으로 적생자에 상급귀족이고 최고제후 바로 뒷서열입니다,"

"그럼......저녀석도 네페티 부인 사촌동생이군?"

"예. 가문 원로회 의장인 칼림 아유브 플레렌의 외아들입니다. 뒷배경만으로 치면 아버지가 이미 죽은 두겐 공보다 훨씬 더 막강한 놈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페로의 질문에 보좌관이 또한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198년에 네페티 부인을 축출하고 최고제후가 되려던 쿠데타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 실패해서 가문에서 제명당하고 서부에서 추방당했던 자인데 타르서스 직할군 사령관이 되면서 특별사면을 받았다 합니다. 보통 녀석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페로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 녀석이 아니었군.....생긴것만 보고 하마터면 얕볼 뻔 했는데......"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페로는 두겐과 코리온이 기다리고있을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총리께서는 황제령의 중앙귀족이시나 특이하게 동부사람의 풍모를 많이 풍기시는군요."

코리온이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세 명의 미녀 노예들이 레몬즙을 섞은 물로 오찬에 참석한 셋의 손을 조심스럽게 씻어주고 있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포크 등을 잘 쓰지 않는 이곳 서부 전통의 식사시간 전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였다. 페로는 사촌지간인 카렐과 코리온이 목소리를 바꿔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제 어머님이 동부 최고제후 슈트란 가 출신이십니다. 그리고 젊은시절에 외가에서 오랜동안 지냈었죠."

페로가 짐짓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식당 너머로 식사를 내가는 노예와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두겐 공의 2명의 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서부에서는 손님접대자리에 부인이 함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상대가 남자들 뿐이라면 더더욱 그런 경우가 많았다.

부인들을 바라보는 페로의 시선을 눈치챈 코리온이 여전히 미소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시에 외가로 도망치신 이유가 조금 특이하더군요. 하기야, 저도 그래보았지만 젊은 나이에 한번쯤 그런 방황을 경험해보는것도 그리 나쁜 것이 아니긴 하죠."

코리온의 한마디에 순간 페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집안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동부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그 시기는 페로의 일생에서 머릿속에 떠올리기 가장 싫어하는 수치스러운 한때였다. 그 잘난 자존심을 정면으로 공격당한 페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저 망할 학장은 엔간한 사람은 알지 못할 이런 사항들까지 미리 뒷조사를 치밀하게 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코리온은 얼떨떨해진 페로가 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시 말을 꺼냈다.

"세호 가 혈통이 섞였던 총리의 전 부인이 퍼더에 의해 주살되었다구요?"

"퍼더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리온의 의도를 눈치챈 페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황제령에서는 퍼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호, 그랬던가요?"

코리온이 눈을 반짝이며 페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말이 앞뒤가 안맞음은 페로 스스로가 더 잘 알고있었다. 페로가 마리안을 뻔뻔스럽게 죽일 수 있었던 것도 '퍼더'에 묶인 세호 가가 별 반발을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저지른 짓이었다. 그런 페로를 비웃듯 코리온이 입가에 웃음을 띤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 재밌군요, 원인도 똑같고, 행동도 똑같고, 결과도 똑같은데 퍼더는 아니었다.....페로 경께서는 중도파의 노선을 따르신다 들었는데, 그런다면 이즈마를 인정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교리논쟁의 2라운드는 두겐이 그리 고대하던 페로와 코리온의 대결이었다. 시작부터 약점을 2개나 잡힌 페로는 내심 당혹스러워하는 속내를 애써 감추며 레몬즙으로 닦은 손을 노예가 내민 수건 위에 얹었다. 그로서는 사실 코리온의 토끼몰이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하지만 저런 녀석에게 계속 두들겨맞으며 버티느니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버리는 편이 상책이었다.

페로가 갑자기 다 보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학장님 앞에서 무얼 감추겠습니까. 학장님이시라면 비밀을 지켜주실 것으로 믿고 드리는 말씀이오나, 제 정실부인이 죽은 것은 가문을 욕되게 하여서가 아니고 자살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제 권유를 스스로 거부하였으니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가슴아픈 옛 기억이군요."

페로가 짐짓 눈물까지 글썽이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자 그 뻔뻔스러움에 너무나 기가막혀진 두겐이 할 말을 잃은 채 코리온을 돌아보았다. 코리온 역시 얼굴을 보일듯말듯 찌푸리고 있었다. 천하에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페로의 뜻밖의 눈물작전이 페로를 한참 몰아붙이던 분위기에 완전히 찬물을 뿌려버린 셈이었다.

헤네라리페에서 돌아온 샤드니가 셋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두겐의 뒤에 선 건 그때였다. 식탁 위에는 세 사람을 위한 식사가 차려지고 있었다. 물론 채식주의자로 알려진 코리온의 앞에는 피타 몇조각과 삶은 콩, 채소, 과일, 약간의 요구르트와 치즈, 과일쥬스가 전부였다. 페로는 먹는 것에서도 역시나 정반대인 이 학장의 사촌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페로가 찬물을 뿌려버리면서 다시 대화가 냉랭하게 식어버린 이 세 사람은 별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페로는 쥬스를 맛보는 코리온의 아름답고 단아한 자태를 바라보며 저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힘이 넘치고 박력있는 글을 쓸 수가 있을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는 여자들과는 또 다른 이 '적'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오후에 메디스를 방문하실 예정이시라구요?"

코리온의 맑은 목소리가 또한번 방 안을 울렸다.

"그렇습니다."

"가셔도 별 보실 것이 없으실텐데......"

"관광차 온것도 아니니 볼것이 없다고 문제될건 없겠죠."

"메디스 시는 이미 절반 이상 파괴되었습니다."

페로가 두겐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코리온이 페로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자 두겐도 약간 놀라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코리온은 그런 두겐의 눈치를 무시한 채 태연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교리정치를 거부하고 플레렌 가에서 퍼더에 의해 주살되기로 예정되었던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을 감싸고 돈 그 죄가 큰 고로 정의를 세우기 위해 플레렌 가에서 부득이하게 응징할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페로는 짐짓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겐과 코리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발 가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오늘중으로 통보할 것으로 압니다."

코리온이 이번에도 두겐을 대신해 대답했다. 이쪽에서 발 가에 대한 적극공세로 전환키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네페티 부인을 잡아내지 못한 이마당에 그것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는것도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 '정도'였다. 사우드 발 부인의 예상은 어느정도 플레렌 가와의 관계악화는 각오하고 몇달정도의 냉전기간을 가지면서 '분위기파악' 내지는 자신들에 대한 회유에 따라올 떡고물을 챙기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리온이 사우드 부인의 예상대로 움직여줄지는 사실 페로로서도 약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들이 네페티 부인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페로의 질문에 코리온이 뻔뻔스러울정도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믿을만한 정보통이 있었고, 분석결과는 틀림없습니다."

"증거도 없이......"

"이번의 소규모 응징에 그들로부터의 만족할만한 답변이 없을시는 두겐 공으로서도 좀 더 큰 규모의 응징으로 나갈 수밖에 없겠죠."

페로의 '증거' 타령에 쐐기를 박듯 코리온이 더 단호해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증거'라는 단어 따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듯 자기 할 말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듣다못한 페로가 조금 방향을 틀어 다시 물었다.

"그럼 발 가를 전면공격하실 예정이신지요?"

페로가 이번에는 두겐 공을 향해 물었다. 두겐도 지금 이순간까지도 '가진것도 없이 큰소리만 치는' 학장의 의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겐은 난감한 표정으로 또다시 코리온을 돌아보았다. 결국 코리온이 입가에 웃음까지 띤 채 아주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글쎄요, 굳이 직접공격만이 그들을 압박하는 수단은 아니겠지만....."

페로의 어리둥절해진 표정을 바라본 두겐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하고 말았다. '토박이 서부사람'이 아닌 페로에 대한 공격은 다른 서부제후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그와 손잡은 발 가에 대한 협박으로도 주효한 일거양득이었다. 루쿠스탄에서 페로를 몰아낸다면 배짱을 부리고 있는 발 가 녀석들도 메디스 시에서 있었던 일이건 뭐건 결국은 코리온에게 무릎을 꿇을 것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정작 페로 자신은 그 '공격'의 대상이 다름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직 까맣게 모른 채 엉뚱한 발 가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심 통쾌해진 두겐의 조금은 실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오찬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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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등장하는 수나, 하디스, 이즈마, 퀴야스는 이슬람교의 종교법과 교리 형식에서 그 용어를 빌어왔습니다.>

* 수나(Su-na) : 원래는 관습, 관행을 뜻하는 단어로, 실질적으로는 선지자의 직접적인 언행 등을 뜻합니다. 제 글에서는 마호메트가 아닌, 선지자 리 리쿠가 되겠지요. ^^

* 하디스(Hadith) : 수나의 전승을 종교학자나 법학자들이 1차로 해석한 내용입니다. ‘육서’로 총집결되며,이 하디스의 해석론을 놓고 이슬람의 교파들의 분열이 있었습니다.

*이즈마(Ijma) : 위의 둘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에 관해 법학자 및 종교학자들의 합의로 도출해낸 교리를 뜻합니다.

*퀴야스(Qiyas) : 위의 3가지를 이용한 교리의 유추적용을 뜻합니다.

=> 이 4가지가 모여 흔히 샤리아법이라 불리는 이슬람법체계의 4대 법원이 완성됩니다.

* 헤네랄리페(El Generalife)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옛 술탄의 궁전인 알함브라 궁에 있는 유명한 대정원의 실제이름입니다.

아랍어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의 뜰'이라는 뜻입니다.

<코멘트와 추천은 아마추어 작가에겐 유일한 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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