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7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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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일찍 일어나 테라스에서 아침공기를 쐬고 있던 카렐은 뒤에서 다가오는 네페티 부인의 발소리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일찍일어나셨군요."
뒤로 돌아선 카렐은 부인을 품에 스스럼없이 껴안았다. 부인이 카렐의 가슴을 더듬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혼자 자려니 무서웠어."
"......죄송합니다."
"제발......오늘밤부터는 곁에 같이 있어줘. 응?"
낮게 한숨을 내쉰 카렐은 고개를 끄덕여줄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의 이상했던 태도 이후로 부인이 조금 틀려진것은 사실이었다. 남부에서 7년간 함께했을때조차도 카렐 앞에서도 항상 품위를 잃지않기 위해 애쓰던 부인이 요즘 부쩍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부인은 둘만 있을때마다 실리페 황후 못지않게 적극적이고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부인은 카렐의 몸을 자극적으로 어루만지며 먼저 발돋움을 해 카렐의 입술을 파고들고 있었다. 기댈 곳을 모두 잃어버린 부인의 허전함 때문이라 생각한 카렐은 약간의 측은함을 느끼며 그런 부인을 더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문을 열고 나오던 우베의 존재를 느낀 카렐이 부인을 안은 손을 풀었지만 부인은 여전히 카렐의 옷 속에 손을 밀어넣은 채 그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거실에서 물을 마시던 우베가 그 뜻밖의 광경에 화들짝 놀라며 머쓱한 얼굴로 시야 밖으로 비켜주었다.
우베가 사라진것을 확인한 부인은 그제서야 카렐의 품에서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아랫사람들에게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한 부인의 의도된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네페티 부인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우베가 혼자 서 있던 카렐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솔직히 부인을 봐도 그렇고, 역시 미녀는 서부미녀가 최고라니까요. 캬아,"
"왜? 언제는 케스난이 최고라더니? 케스난은 북부출신인데?"
카렐이 짖ㅤㄱㅜㅊ게 웃으며 물었다. 잠시 머리를 긁적거린 우베가 아니나다를까 다시 말을 바꿨다.
"후, 그러고보니까 북부하고 서부가 역시 최고라니까요. 세네피스 황후폐하나 케스난 그여자를 보면 북부미녀도 끝내주고, 오리지날 서부사람 네페티 부인이나 서부 피 섞인 솔도 그렇고.....캬, 세상엔 미녀도 많고많은데 정작 내껀없네."
"그딴소리 또하면 네 약혼자한테 다 말해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여자론'에 취한 우베는 카렐의 옆에 궁둥이를 들이대고 앉으며 정신없이 수다를 이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남부여자는 거칠고 멋대가리없기로 유명하고. 뭐, 테번 공이 네페티 부인하고 결혼한거 같은 남자로서 백번도 넘게 이해하겠다니까요. 동부여자들이야 생활력 강하고 억척스런 건 유명하지만 솔직히 키도 작고 생긴것도 그렇고. 물론 예외도 있지만....그래서그런가 동부 피 섞인 아메스 아씨도 나름대로 야무지고 매력있는 건 사실인데 솔하고 비교하면......"
생각없이 신나게 떠들던 우베가 재빨리 카렐의 눈치를 보았다. 언니인 아메스가 동생인 솔에 비해 확실히 똑똑하고 야무진데다가 기품도 넘치기는 했지만 워낙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씨다른 동생 솔 덕에 외모에서는 괜히 비교가 되는것이 사실이었다.
외모만 따지자면 어머니인 마리안 덕택에 둘 다 어느정도 본바탕은 갖춰졌다고 쳐도 절세미남 페로와 우락부락한 네피의 외모를 생각해보면 어쨌든 참이나 희한한 결과였다. 우베도 차마 이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꾸 떠들면 네 약혼녀까지 갈 것도 없이 제네르 경한테 그냥 말할수도 있어."
"익,"
제네르라면 기도 못펴는 우베가 그제서야 기겁을 하고 놀랐다. 한마디 제대로 들을뻔한 우베는 카렐의 손목에서 갑자기 울린 할룩스 덕택에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할룩스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그 '짜리몽땅에 못생긴 동부 피'가 섞인 키크고 잘생긴 페로였다. 기회를 잡은 우베가 잽싸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카렐이 할룩스 안에서 나타난 페로의 형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레렌 가에서 볼일 끝난거야? 지금 어딨는거야? 눈에 좀 익은데?"
"메디스 시야."
어깨에 털가죽 케이프를 뒤집어쓴 채 어두컴컴해진 사막 구조물 위에 서 있던 페로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거 난리도 아니군."
한숨을 내쉰 페로는 주변을 빙 둘러보고 있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메디스 시 주변은 아직 시체정리도 다 끝나지 않았는지 사람 크기의 큰 봉투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페로로부터 플레렌 가 방문결과를 차근차근 듣던 카렐은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코리온 그녀석 무슨 딴꿍꿍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녀석 속을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발 가를 공격 하겠다는건지, 안하겠다는건지."
페로는 있는곳이 무척 추운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언제......떠날거야?"
카렐이 약간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발 가 쪽에 가보려면......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페로가 돌아간다는 말에 카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깐이나마 한 공간을 공유하던 페로는 적들 한복판에 팽개쳐진 카렐 일행을 놔둔 채 다시 멀리 저편으로 가버려야 할 터였다. 그런 카렐의 기분을 눈치챈 페로가 영상속의 카렐에게 바싹 다가섰다. 카렐이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조금만 이따가 가면 안될까? 한 반나절 정도만......"
"......"
"파예드 아카데미에 다녀오려고 해. 시차로 봐서 거긴 지금 한밤중일테니까.....그쪽 분위기파악 좀 하면 코리온녀석 무슨생각하는지 힌트라도 나올 지 모르지."
파예드 아카데미에 간다는 말에 페로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위험한짓 하지 마. 내가 발 가하고 상의해서 최대한 빨리 폐쇄를 풀어볼께. 그냥 거기서 꼼짝말고 있어."
"기분이 찜찜해서 그래."
카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페로는 갑자기 마음약해진듯한 모습을 보이는 카렐에게 힘이라도 주려는 듯 호탕하게 한 번 웃어보이고는 손뼉을 탁탁 쳤다.
"괜찮어, 괜찮어. 최악의 경우라도 서부놈들 지들끼리 치고받고 쌈박질밖에 더하겠어. 조만간 다시 여기에 올께. 그땐 너 데려갈 수 있게 미리 준비 챙겨올께."
페로를 더 말릴 수 없는 것을 아는 카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페로가 팔을 활짝 벌려보였다.
"몸조심해. 조금 이따가 나갈거야."
"그래. 혹시 모르니까 너도 항상 조심해."
페로의 영상이 사라지자 카렐은 허탈해진 기분에 자리에 멍 하니 앉아있었다. 이제 다시 외부세계와는 단절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그는 생존을 위해 다시 싸워야 할 시간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베네루스!"
카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침실에서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나오던 베네루스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카렐 앞으로 달려왔다.
"파예드 아카데미와의 시차는?"
"이곳에서 -10시간입니다."
"좋아. 아침 먹고 8시 정도에 그곳에 갈 테니 준비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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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우스 2세 시해사건 직후에 베흔에게 쏟아졌던 근원도 모를 갖은 소문들은 그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암살범은 평소에 황궁행사에 자주 참석하곤 하던 중앙의 상급귀족이었고, 미리 준비한 독을 바른 단검으로 귀족들을 사열하던 황제의 오른쪽 옆구리를 눈 깜짝할새 찔렀던 것이었다.
황제의 바로 뒤에 서 있다가 공격을 제일먼저 인식한 오르마즈 카파키 경이 황제를 몸으로라도 덮쳐 막으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옆구리에 치명상을 입은 황제는 역시 팔을 깊이 베인 오르마즈의 품에 안긴 채 바닥에 쓰러졌고, 오넬론 태자의 결혼식장은 일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겠지만, 황제 알현시에도 상급귀족의 무기소지를 특별히 금하지 않던 그때까지의 관례상 황제와 조금 떨어져 있던 베흔으로서는 손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그 뒤로는 장관급까지의 인물들 외에는 혈통을 불문하고 무기소지를 금지시켰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베흔이 녀석을 그자리에서 죽인 것을 놓고 베흔의 자작극이니 아니니 하는 억측 역시 베흔으로서는 분통터질 노릇이었다. 베흔은 쓰러지는 세나우스 2세 황제 뒤에서 즉시 칼을 뽑아들고 녀석의 손목을 잘랐고, 잘만하면 녀석을 생포해서 배후를 밝혀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지독한 녀석은 나머지 손에도 또다른 단검을 들고 있었고, 그 타겟은 다름아닌 세네피스 태자빈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그곳에서 그 큰 플람베르쥬를 마구 휘둘러대다가는 옆에서 혼비백산 달아나는 엉뚱한 귀족들의 머리를 함께 토막낼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베흔은 잘 알고있었다. 결국 그는 베기 대신 찌르기를 택했고 그 생각은 제대로 적중해서 녀석은 태자빈의 명치 부근만 조금 베어놓은 상태에서 베흔의 무서운 힘에 밀려 벽으로 나동그라졌던 것이었다.
잘만하면 그 망할 녀석이 어금니에 물고 있던 자살용 독약캡슐을 깨물어볼 시간도 없이 잡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녀석은 그자리에서 그 캡슐이 아닌, 자신의 칼에 맞은 충격으로 즉사해 버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일로 베흔이 괜한 오해에 휩싸이게 된 건 뒷수습을 해야 하는 그로서도 더럽게 운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베흔으로서 가장 억울한 일은 세나우스 2세 황제의 시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 ---물론 죽은 당사자를 제외하고--- 바로 베흔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99년간 제국을 철권통치한 세나우스 2세 황제는 여러모로 베흔과 손발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세나우스 1세의 첫번째 소실의 몸에서 태어난 서녀 출신인 그는 당시만해도 적서의 구별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던 황실 분위기 덕택에 1차 혼란기 와중에 모두 죽어버린 정식 태자들을 대신해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일찌기 남극성당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유평옹주 시절부터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에 유난히 큰 배포로 '황손 중 제일 리더쉽이 강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아버지 세나우스 1세가 황궁을 북부제후들에게 빼앗기고 어처구니없이 살해당한 그 와중에---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은 이제 끝이라고 믿고 있었다.--- 계모였던 테나스 이그나토 태후에 의해 전격적으로 후계자에 지명되었던 터였다.
결국 타르서스 망명정부 시절 40세의 젊은 나이로 1차 혼란기 와중의 거의 붕괴직전의 제국을 물려받은 그는 제위 초기 정치적으로는 남-서부와 북-동부의 대립을 이끌어내 제후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교묘하게 역이용했고, 사상적으로는 개혁파 유학자들을 등에업고 황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황제 경호부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황실 근위대를 대대적으로 강화시켰고, '블러드' 투모카프 자이센을 총리로 전격 등용해 실시한 7여년간의 공포정치를 통해 말안듣는 귀족들을 실질적으로 힘에서도 압도해내며 '제국다운 제국'을 확립시켜 놓은 것은 99년의 제위기간동안 황제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이었다.
어쨌든 베흔과 사소한 의견대립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베흔과 세나우스 2세는 더할나위없는 정치적 동반자였다.
물론 서부제후들에게 굴복해 어쩔 수 없이 도입했던 계급제 덕택에 전국이 노예폭동의 혼란에 시달린 것이나, 수백명이 넘는 무분별한 남자관계, 자신을 친딸처럼 키워준 테나스 태후를 암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의혹이나 부실한 후계구도 등은 오점으로 지적될만 했지만 어쨌든 통치 전반을 보았을 때 세나우스 2세 황제의 서거는 제국 전체는 물론이고 그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반자이며 허물없는 친구이기도 했던 베흔에게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많은 남편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이 '철의 대제'는 그 남편들이 아닌, 함께 칼에 찔려 신음하던 오르마즈와, 근위대장 베흔---바로 그가 황제다운 황제가 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의 품 안에서 그들의 절망스런 표정을 바라보며 139년의 길지않은 생을 마치고 있었다.
죽어가던 그가 베흔에게 가까스로 남긴 건 함께 중상을 입은 오르마즈와, 홀로 남겨진 주페 태자를 지켜달라는, 그 두 가지 뿐이었다. 그리도 아끼던 둘째 아들을 결국은 후계자로 책봉하지 못하고 죽음과 맞닥뜨린 이 위대한 황제는 더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굳어가는 입술을 움직이려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결국 그 이상의 유언은 남기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그 한맺힌 마지막 호흡을 내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황실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된 4차 혼란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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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렌 가로부터 이탈허가를 얻은 베흔은 황궁에서 처음 데려왔던 5명의 가디언들을 이끌고 전용셔틀에 올랐다. 메디스 시에서의 부상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루토가 셔틀 상석에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베흔에게 물었다.
"황제령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직 좀 두고봐야겠다. 발 가하고 플레렌 가하고 꼬여가는 게 어떤 양상으로 나갈지 알 수가 없거든. 일단 3번 행성에 파견군 사령부로 가자."
며칠간의 갖은 고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아켐 4번 행성의 온통 누런빛의 대륙을 박차고 오르며 베흔이 시무룩하게 밑을 내려다보았다. 저곳 어딘가에 네페티 부인과 카렐이 있을 터였다. 그의 눈에는 참으로 희한하게만 보이는 관계의 그 두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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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연재를 시작하면서 잠시 접었던 트릴로지 2부의 집필작업을 어제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부를 손대다가 갑자기 2부를 다시보니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군요..... ^^;;;
완전히 다른 관계와 정세와 낯선(!) 인물들과......휴~~ 남이 쓴 것도 아니고 제가 지은 2부를 처음부터 다시 보는데 왜이리 낯선지......원래 그 상황에 완전히 몰두해야 그 글이 술술 잘 풀려나가는데 전혀 다른 상황의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려니......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한번에 두 개의 소설을 쓰는지 존경만.....
오늘도 3연참을 해버릴까 하는 쓸데없는 욕심으로 궁싯거려가면서, 다음회에 나올 '문제의 설정'에서 사람들이 뭐라하면 어쩌나 하고 또 쓸데없는 고민도 해가면서......흐음~
엑셀시트 11개에 300k가 넘는 어마어마한 설정파일을 앞에 켜놓고, 좋아하는 기타로의 실크로드 주제음악을 틀어놓고 먼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