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9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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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실의 불은 꺼져 있었지만 밤에도 낮에 맞먹는 시야를 자랑하는 가디언 카렐에게는 별 상관도 없었다. 제법 큰 학장실은 낡은 옛 가구로 만들어진 몇 개의 서가들과 책상 하나, 바닥에 깔린 낡은 모직 카펫과 기본적인 살림살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유학자의 방답게 특별히 호화스럽거나 값비싸보이는 물건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는, 꽤나 소박한 모습이었다.
안을 둘러보던 카렐은 정탐의 원칙 그대로 쓰레기통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안에서 버려진 종이뭉치를 찾아낸 카렐은 급히 그것을 펼쳐보았다. 무슨 편지인 듯 싶었지만 앞쪽인 오른쪽은 이미 타버렸고 왼쪽의 뒷부분만이 남아있었다. 힘이 넘치는, 코리온의 그 전형적인 글씨체 그대로였다.
- 어머님께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사옵니다. 대업이 완수되는대로 어머님을 찾아뵙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사옵니다. 그동안 불편하시더라도 이 아들을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바둑판과 책을 함께 보내드리오니 소일거리로 삼으십시오. -
카렐은 종이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직 신선한 먹 냄새와 코리온의 체취로 보아 방금 쓰다 만 글임이 확실했다. 종이를 다시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카렐은 책상과 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코리온의 탁자 밑에서 나온 약간 큰 상자에는 방금전 편지에도 적혀있던 바둑판과 몇권의 책들이 들어있었다.
'감격해서 눈물나겠네,'
카렐이 내심 조소하며 상자 뚜껑을 도로 닫았다. 이럴 때 추적장치 모듈이라도 가져왔었다면 공주를 찾을 수 있었겠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어차피 글러버린 일이었다.
그의 책장을 뒤지던 카렐은 그 꼭대기에 얹힌 옛 홀로그램장치 한 개를 발견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그 홀로그램 기계는 카렐이 태어나기도 전에나 쓰이던 '골동품'에 가까운 놈이었다. 이 방의 주인은 어쨌든 취향도 별난 모양이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동한 카렐은 조심스럽게 기계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난 형상은 검은 무명포 차림의 두 사람이었다. 둘 중 하나는 틀림없는 코리온이었지만 나머지 하나도 어딘지 낯이 익었다. 코리온이 걸고 있는 머플러의 금색 줄이 겨우 2개 뿐인 것을 보아 꽤나 옛날 화면인 듯 했다.
그리고 코리온 옆에 선 사람은 보통 키에 꽤 야무진 인상을 한 남자였고 그의 머플러에는 줄 4개가 그려져 있었다.
밝은 표정의 두 사람은 귀엣말로 무언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이곳 파예드 아카데미 교정을 걷고 있었다. 얼굴에 아직 앳티가 채 가시지 않은, 젊은 코리온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그 남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표정은 방금전 카렐이 그리도 떠올리려 했지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던, 활짝 웃는 표정 그것이었다. 코리온의 한쪽 귀에는 지난번 카렐이 본 바 있던, 연두색의 페리도트 귀걸이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주페 태자."
그제서야 옛 파일에서 본 적 있던 기억을 쥐어짜낸 카렐이 작게 중얼거렸다. 코리온의 앞에서 걷고 있는 응교 복장의 이 남자는 어머니 세네피스 황후의 남편이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었다.
조카 코리온---물론 코리온의 어머니 레곤 대공주와 주페 태자와는 이종남매지간이니 사실 완전한 조카는 아닌, 핏줄로는 4촌 정도의 친척과 마찬가지였다---과 시선이 마주친 주페 태자는 눈가에 꽤 따뜻해보이는 미소를 품은 채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날씬하고 큰 키에 긴 장발, 밝은 피부를 한 코리온은 앞을 걸어가는 주페 태자의 크지않은 키와 붉은빛이 감도는 다갈색 반곱슬머리, 약간 어두운 피부색, 다부져보이는 체격의 근육질 외모와 꽤나 극단적으로 비교가 되고 있었다.
"도대체 뭐라는거야?"
카렐이 기계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둘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 싶기는 했지만 기계가 낡아서인지, 녹화를 잘못해서인지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었다. 변화없는 화면에 지겨워지기 시작한 카렐은 홀로그램을 막 끄려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네 말이 맞다. 무서운 여자야."
"할머님과 장태자전하가 걱정됩니다."
단 두마디를 한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서운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진 카렐은 홀로그램을 빨리 돌렸지만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 다만 계속 반복되는 둘 간의 서로를 향한 이유없는 웃음과 다정한 눈빛이 고작이었다. 내용도없는 이런 재미없는 홀로그램을 무슨 추억거리라고 이런 중요한 곳에 보관하고있는 놈도 어쨌든 이상한 놈임에 틀림없었다.
'별 싱거운놈 다보겠네.'
끝까지 다 보지도 않은 채 홀로그램을 끈 카렐은 그것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다시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코리온의 책상 위를 살피던 카렐은 그 위에서 가장 손이 닿기 좋은 곳에 있는 책을 먼저 펼쳐보았다.
"416년판 북서상부 지리보고?"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장에 눈을 바싹 들아댄 카렐은 가장 최근에 펼쳐놓았던 부분을 쉽사리 찾아냈다. 아무 생각없이 그곳을 펼쳐본 카렐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셔버렸다.
"루쿠스탄......"
비스듬하게 본 그 부분들의 책장에는 이미 무수한 지문과 자잘한 메모가 보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직감한 카렐은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른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이자가 페로의 서부 영지인 루쿠스탄에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엇,"
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깜짝 놀란 카렐이 급히 창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학장실 문이 열리더니 하심 예킨터스 교수를 동반한 코리온이 지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을 제대로 닫은 하심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학장에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페로 자이센 총리와 근위대장 베흔이 45분 전에 이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디로들 갔지?"
몇십분이나 열변을 토했다더니 코리온의 목은 정말로 약간 쉬어있었다.
"둘 다 3번 행성으로 갔다는 보고입니다."
하심의 대답에 코리온이 가벼운 코웃음을 쳤다.
"다른 내용은?"
"이번 공략에 투입될 플레렌 가 제후군 2만 중 선발대 3천이 푸스타트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모레까지면 집결이 완료될것이라 합니다."
"느려터지긴......"
코리온이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샤디 가가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겠군."
"두겐 공께서도 조만간 샤드니 경으로 사령관 교체를 고려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알았다."
하심 예킨터스 교수를 내보낸 코리온은 잠시 자리에 멍 하니 서 있었다.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사막의 밤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카렐은 창밖에서 눈만 조금 디민 채 이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훨씬 성숙하고 날카로와진 얼굴과 당당해진 체구, 발목까지 오는 긴 무명포나 무릎까지 오는 용무늬 비단머플러는 조금전 카렐이 보았던 그 옛날의 밝고 여려보이던 그의 하급교수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위엄이 넘치면서도 어딘가 어두워보이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책장에서 방금전의 그 낡은 홀로그램을 집어든 코리온은 꽤 조심스런 손길로 작동스위치를 눌렀다. 엿보고 있는 카렐은 코리온이 '정말로 재미없는 인간'임을 다시한번 절감하며 혀를 차고 있었지만 정작 코리온의 시선은 진지함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했다.
카렐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얼음같던 학장의 눈시울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왜저러지?'
주페 태자와의 다정했던 한때가 어느새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코리온의 갈색 눈동자 안에서 한참동안 흘러가고 있었다. 이곳을 뜰까 생각했던 카렐은 코리온의 저 슬픔에 잠긴 모습에 사지가 묶이기라도 했는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카렐이 이미 보았던, 그 재미없는 화면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홀로그램 후반부를 보고 만 카렐은 너무도 놀라 자기도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카렐의 온몸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양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있었다..
"당신이 못다한 뜻은.......제가 꼭 이루겠습니다......"
주페 태자와 서로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는 자신의 옛 모습 앞에서 이미 눈물에 젖어있는 코리온이 들릴듯말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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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98년, 라마단을 코앞에 둔 2월 말에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황궁 북쪽 별관에서 열린 로노 장태자와 주페 태자와의 연합을 위한 회담은 제위경쟁에서 중립을 선언했던 2만명에 달하는 근위대의 갑작스런 기습으로 처참한 살육장으로 변해버렸다. 두 명의 태자는 물론이고 참관인으로 와 있던 다섯째 타니토 태자, 이들을 호위하던 시로까지, 예상치 못했던 근위대의 배신으로 일시에 포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주페 태자와 함께 이곳에 있던 파예드 아카데미 생도 제네르 하크로딘도 머리가 깨지고 한쪽 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은 채 근위대에 포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회담을 끝까지 반대하고 서부에 머물던 코리온 역시 쿠베가 이끌던 근위대 특수부대에 다른 동료 교수들과 함께 전격 체포되었다. 토로 경이 이끄는 북부연합군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령으로 곧바로 진격했고, 지도자를 잃은 로노 태자군은 제대로된 저항한번 못해보고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황제령에 입성한 세째 오넬론 태자는 바로 그날 오후, 역사상 가장 날림으로 기록된 대관식을 올려버렸다. 참석자는 증인으로 참석한 레곤 공주와 십여명의 황족들, 근위대 간부들과 강제로 끌려온 남극성당 대제학 란조 경, 제후군을 이끌던 북부제후들 이십여명이 전부였고 아버지, 동생과의 불화설이 떠돌던 오르마즈 경은 이자리에도 역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워낙 급하게 치르다보니 마땅한 홀과 관조차 없어 세나우스 2세 때의 것을 다시 가져다가 썼을 지경이었으니 사실 즉위식이라기도 민망한 지경이었다. 게다가 안전을 우려해 일반인 참관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고, 즉위 직후에 응당 있어야 할 퍼레이드나 행사들도 모두 생략되었다.
바로 세나우스 3세 오넬론 황제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즉위 직후에 예정되었던 나머지 태자들에 대한 재판과 처형은 예상외의 암초를 만나면서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새 황후로 즉위한 세네피스가 '황제가 되려 했다는 제대로된 증거 없이는 태자들을 절대 죽이지 못한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한 그들에 대한 처벌은 이래저래 베흔을 골치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첫째 로노 장태자와 다섯째 타니토 태자는 스스로 적장자를 칭했던 일이 있었으니 반역죄로 주살할 명분이 충분했지만, 문제는 주페 태자였다.
그는 칭제는 고사하고, 황제가 되고 싶다는 뜻조차 단 한번도 밝힌적이 없었다. 3년여간의 혼란기를 통틀어 그의 행적이래야 수십만의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그를 '지도자'로 떠받들었던것이 고작이었고 몇몇 광기어린 유학자들이 그가 황제가 되면 '왕도정치'가 실현될 것이라 목소리를 높인 것이 전부였다. 자칫하면 주페 태자를 그대로 풀어줘야 할지도 모르는 형국이었다.
결국 그 '역모의 증거'를 찾기 위한, 아니 만들기 위한 베흔의 노력은 그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보좌관 코리온 대군에게 맞춰졌다. 황실의 체면상 태자를 직접 심문할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보다는 격이 하나 낮은 최측근 코리온 대군이 어떤 수단으로든 입만 연다면 주페 태자를 역모로 처형하는 명분 정도는 쉽게 얻어낼 수 있을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황궁 지하의 악명높은 고문실로 끌려간 코리온은 7일이 넘는기간동안 베흔이 직접 가한 최악의 잔혹한 고문에도 전혀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인 레곤 대공주나 가족들을 동원한 회유는 물론이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 갖은 협박에도 이 나약해보이는 서생은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아 베흔과 세나우스 3세, 그리고 어머니인 레곤 대공주의 속을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주페 태자를 처형하는 것을 포기한 새 황제는 그를 풀어주고 대신 '역모를 주사한' 코리온을 황궁 앞 광장에서 나무판에 못박아죽이기로 방침을 수정할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끔찍한 책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레곤 대공주가 비정한 오빠에게 사정도 하고 빌기도 했지만 어차피 죄를 뒤집어쓸 한 명은 반드시 필요했다. 아들이 당하게 될 잔혹한 운명에 절망한 레곤 대공주는 결국 혼절해 병원에 실려가고 말았다.
"말씀하신대로 서부로 떠날 셔틀이 대기중입니다."
쿠베가 주페 태자를 억류중이던 황궁의 별실 문을 열며 쌀쌀맞게 말했다. 열흘동안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채 죄수와 다름없이 지내온 주페 태자는 참으로 오랫만에 마주한 뻥 뚫린 황궁의 복도를 앞뒤의 근위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힘없이 걷고있었다.
"형님과 타니토 동생은 어찌됐나?"
주페 태자가 작은 목소리로 쿠베에게 물었다.
"반역자 로노와 타니토는 모레 참수될 예정입니다."
쿠베의 대답에 움찔 한 주페 태자가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앞서 걷던 쿠베가 그에게 빨리 오라 눈짓을 보냈지만 주페 태자는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럼......나만 풀려나는건가?"
"그렇습니다. 역모를 주사한 간악한 코리온이 나쁜 녀석이지 태자저하께서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쿠베가 잔뜩 가시돋힌 투로 비웃듯 쏘아ㅤㅂㅡㅌ였다.
"지금......주사......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쿠베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주페 태자를 반 강제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억지로 뿌리친 주페 태자가 쿠베를 한 번 쏘아보았다.
"코리온 대군을......한 번 만나봐야 하겠다."
주페의 느닷없는 요구에 쿠베가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테니."
주페 태자가 눈을 부릅뜨며 쿠베를 쏘아보았다.
주페의 느닷없는 고집에 어쩔 수 없이 베흔에게 연락해 별도의 허락을 받은 쿠베는 '10분간'이라는 단서를 붙이고서야 주페 태자를 데리고 황궁 지하 11층의 근위대 감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대역죄인과 대화는 하지 마십시오. 하긴, 하고 싶어도 못하시겠군요."
주페 태자는 쿠베의 거듭된 주의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101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주페 태자는 침침한 계단을 몇번이나 거쳐 지하 11층의 '특별감방'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쿠베가 감방 철문을 열며 옆으로 비켜섰다. 작은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있는 투명한 유리문 안에서는 역한 피비린내가 확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주페 태자의 눈썹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에 누워있던 산 사람인지 송장인지 알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의 큰 키의 남자는 밖에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신선한 공기에 숨을 조금 크게 들이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날씬하던 그의 몸은 이제 거의 뼈만 남아있었다.
"코리온......"
주페 태자가 낮게 말을 건넸지만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한 채찍질로 갈갈이 찢겨지고 불에 그을린 그의 넓은 어깨에는 이미 헝클어진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피와 흙으로 엉겨붙은 채 드리워져 있었다. 손가락은 모두 잘려나간 후였고 양쪽 발목 아래는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살이 모두 발려나간 채 뼈만 드러나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귀 안에는 검붉은 피딱지가 잔뜩 앉아있는 상태였다.
"저게 도대체......"
심한 충격을 받은 주페 태자가 갑자기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부러진 뼈가 튀어나와있는 팔을 조금 꾸물거리던 코리온은 고개도 가누지 못한 채 거친 흙바닥 위에 침이 섞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짚은 채 온몸을 떨고있던 주페 태자가 거의 울먹이는듯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코리온......대답 좀 해봐. 제발......"
"소용없는 짓입니다."
쿠베가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저애한테 무슨 짓을 한거냐? 엉? 무슨 짓을 한 거야!"
순간 발끈 한 주페 태자가 쿠베의 멱살을 움켜쥐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목이 째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을 거칠게 떨궈내며 쿠베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내이가 파괴되었으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겁니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는데 저녀석 비명지르느라 그 곱던 목소리 다 망가졌죠."
다시 감방 쪽으로 돌아선 주페가 유리문을 거칠게 두들기자 진동을 느낀 코리온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떴다. 하지만 그 순간 주페는 그대로 숨까지 멎은 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열린 눈꺼풀 속에는 아름답게 반짝이던 코리온의 갈색 눈동자가 더이상 들어있지 않았다.
"눈은 오늘 아침에 뽑아냈습니다. 뭐, 황궁 앞에서 목판에 못박혀서 구경거리 된 꼴 차라리 안보는게 나을거라고 대장이 특별히 내린 은사였죠."
주페가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은 채 헐떡거리며 물었다.
"저애를......그럼......책형에 처한다고?"
"예. 반역자들과 함께 처형될 겁니다."
잠시 맥없이 앉아있던 주페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안에 들어가서 만나도 아무 문제될건 없겠군......어차피 대화도 못하고.....보지도 못하고......"
"뭐 그렇죠. 옷이 더러워지실겁니다. 조심하시죠."
쿠베가 유리문을 열어주며 또다시 빈정거렸다.
비틀거리며 안에 들어선 주페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조카를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냄새를 맡았는지 코리온이 그를 향해 고개를 조금 들고 있었다. 주페는 이 처참하게 망가진 조카의 앞에 꿇어앉으며 그의 거칠어진 뺨을 어루만졌다.
"여긴.....왜 오셨어요......"
숙부의 체취와 손길을 느낀 코리온이 텅 빈 눈을 가늘게 뜨며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 얘기 안 했어요......앞으로도 안 할거구요......이젠.....숙부님을 어찌하지 못할테니......학교로 돌아가세요......언젠간 뜻을 세우실 날이 올 테니."
"넌 이제 어쩌라고......"
조카를 껴안은 주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별로 안 힘들었어요......정말이에요......그냥 이런저런 생각 하면서......"
"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내가 바보같이....."
"녀석들......당혹스러워하는게......재미있는때도 있더군요. 그래서......."
귀가 먹은 채로 혼자 떠들던 코리온은 주페 태자의 뺨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말을 딱 멈추었다. 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코리온이 주페 태자의 뺨에 얼굴을 가볍게 부비며 중얼거렸다.
"......돌아가세요. 빨리요......"
주페는 거의 죽어가는 코리온을 껴안은 채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친 코리온 역시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는지 고개를 뒤로 늘어뜨린 채 숙부의 품에서 전해져오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잘있어라."
주페 태자가 코리온을 도로 바닥에 눕혀놓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꽉 악물고있는 코리온의 턱과 입술, 목젖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쓰러져있던 그가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세요......제발......뒤돌아보지 마시고......"
힘없이 감방문을 나선 주페는 이젠 반송장이 되어있는 그 아름답던 조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가기 전에......"
감방을 나선 주페 태자가 쿠베를 다시한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새 황제......아니......새 황후폐하께 인사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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