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2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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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책을 덮고는 침대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굳은 표정의 베흔은 황후가 보고있던 책 표지를 힐끗 살펴보았다.
"'왕도제언'이군요. 이 책이 금서라는 건 아십니까?"
"물론 알지......금서소지죄로 날 잡아넣기라도 할 건가?"
황후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중도파이신 황후폐하께서 왜 실천적 원리주의학파의 최고봉이라는 이 어려운 책을 보고계신지 궁금하군요. 그것도......역모로 친히 처형하신 주페 태자의 유작을 말씀이죠."
"황권을 교리 아래 두자는 미치광이들이 어떤 잡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일 뿐이야."
"포용력있으신 황후폐하께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어휘구사시군요. 그리고 이 책은 그정도로 극단적인 건 아닐텐데요."
베흔의 말에 보이지않게 숨겨져있는 경멸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세네피스 황후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가?"
한손에 넥타잔을 든 세네피스 황후가 베흔에게 갑자기 바싹 다가서고 있었다. 그 살기어린 회색빛 눈동자에 기세가 눌린 베흔이 자기도모르게 조금 뒤로 물러났다.
"아직까지 너무나 궁금한 게 있어."
베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황후를 뚫어지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난 항상 모든 걸 의심하지. 보통사람 보기에 근위대장하고 네페티 부인의 관계가 유난히 친한 사이 정도로 보이겠지만 난 어쩌면 그이상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어. 근거따윈 없어. 그냥 근위대장의 악마적인 이미지엔 저 순하고 착한 여인의 친오빠같은 다정한 존재보다는 밤마다 노리개로 삼아 괴롭히는 기둥서방이 더 어울리겠다 싶었던 것 뿐이지."
"고상하신 황후폐하답지않은 상상이시군요."
베흔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꾸했다. 세네피스 황후가 그의 말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동감이야. 나도 이따위 상상 좀 집어쳤으면 좋겠어. 그래서 부탁인데, 내가 이런 망상을 떨궈버릴 수 있게 좀 도와주겠나?"
"어떻게 말씀이시죠?"
베흔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감추려 목소리에 이유없이 힘을 주었다.
"자네 옷 좀 모두 벗어보겠나? 자네의 '완벽한 가디언으로서의' 몸을 확인하고 나면 나도 더이상 이따위 상상은 안할 것 같아. 뭐, 하긴 완벽한 가디언이라고 기둥서방이 못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눈앞의 이 여자는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베흔은 아찔 해오는 정신을 애써 다잡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황후폐하께서 근위대장에게 내리시긴 부적절한 명령이시군요."
"따르겠나? 안따르겠나?"
베흔은 당장이라도 황후를 쳐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그는 황후를 위협적으로 노려보며 대답했다.
"곤란합니다."
"오호......날 치기라도 하겠다는 눈빛이군. 지금보니 꽤 매력있는걸......그 순해터진 여자가 홀딱 빠져버릴만 하겠어."
세네피스 황후는 태연한 표정으로 넥타 한모금을 더 들이켰다.
베흔에게 어느새 더 가까이 다가선 황후는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직접 벗겨볼까?"
긴장한 베흔의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물론 손 한번만 뻗으면 이 마녀같은 여자의 가는 목을 그대로 으스러뜨려버릴 수도 있었다. 황후가 베흔의 벨트를 붙들자 베흔이 그의 가는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황후의 신음소리섞인 거친 숨결이 순간적으로 베흔의 목에 와 닿았다. 하지만 황후의 놀랄만큼 태연한 목소리가 뒤이어 그의 귓가를 울렸다.
"설마 서툰 짓은 안하겠지? 자기 여자가 눈앞에서 강간당하는 꼴을 보면서도 자제할 수 있었던 그런 사나이가 이따위에 흔들리겠어?"
"그 말에 제가 놀라길 바라셨나요?"
베흔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창백해진 얼굴은 지금의 말이 그저 '헛된 큰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안놀라주니 영 재미가 없군."
세네피스 황후가 뒤로 조금 물러났다. 이 여자가 자신과 네페티 부인의 관계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면 모든것은 확실해지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 여자 손에 놀아나고 있었던 셈이었다. 순간적으로 자괴감에 빠져버린 베흔이 자기도모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네페티 부인을 왜그리 미워하십니까?"
"미워한다고? 그 약한척 착한척 다해가면서 애인을 휘어잡는 그 여자를? 천만에, 난 그런 여자를 경멸하지만 미워할 가치는 못느끼겠는걸. 난 그냥 이용해먹고있는 것 뿐이야. 다른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부인이 카파키 가 며느리가 될 수도 있었다는 걸 아실텐데요?"
"자네가 그걸 망쳐놓지 않았나? 그여자 인생을 망쳐놓은 일에는 자네도 공범 아니었던가?"
황후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흥분한 베흔의 이마와 턱에 어느새 핏줄이 바싹 곤두서고 있었다. 이 여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카파키 가와 혼인할 뻔 했던 네페티 부인이 남부 델루지 가 그 노인네와 강제결혼한 것도 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베흔 자신의 수작이었다는 것까지도. 그렇다면 자신과 네페티 부인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것 정도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약점은 모조리 다 알고있다는 사실에 베흔이 순간 치를 떨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또다른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오르고 있었다.
"그 강간 사건이 있었을 때, 네페티 부인 방의 문이 왜 열려있었죠? 부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던데, 장태자가 그 방에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부인 수행원들은 다 어딨던겁니까?"
따져드는 베흔의 목소리가 어느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잠시 멈칫 했던 세네피스 황후는 짐짓 관심도 없는 듯 다시 탁자로 돌아가고 있었다.
"괜한 운을 띄워서 절 겁줘 돌려보낸 직후에, 인사차 그 방에 들어오셨었다죠? 그리고 문을 열어둔 채로 돌아가셨고. 미리 기다리던 불쌍한 꼭둑각시 로노 태자가 들어왔겠죠?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것도 모르고? 오르마즈 경이 그 흉계를 눈치챘다면 아마 난리가 났겠죠? 그래서 아버님이 미리 데리고 나가주신 겁니까?"
황후는 아무 대답없이 베흔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책장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자리에서 제가 로노 녀석을 베어버리길 고대하셨겠군요. 그럼 당신은 저와 골치아픈 장태자 둘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었을테니......"
세네피스 황후는 얼굴이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베흔을 문득 돌아보았다. 베흔이 눈을 부릅뜨며 세네피스 황후에게 바싹 다가섰다.
"당신, 아니 당신 가문이 선대 황제폐하를 죽였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이군. 근위대장."
세네피스 황후가 눈을 치켜뜨며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부들부들 떨리던 베흔의 두 손이 세네피스 황후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 위로 베흔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대답해, 이 마녀같은 년아."
베흔이 빠드득 하며 이를 갈고 있었다.
"황제를 찌른 칼에는 독이 묻어있었지만 두번째로 휘두른 단검엔 독이 없었어. 넌 배만 살짝 스친 채로 교묘하게 의혹에서 빠져나갔지. 그리고 나로서도 그놈을 죽일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오르마즈가 눈치없이 황제를 보호하려 했을 땐 질겁했었겠지? 덕택에 팔을 잘라낸 언니를 보고 좀 미안하긴 하던가? 아니면 의혹에서 더 벗어난 데 안심했나?"
베흔에게 멱살을 잡힌 세네피스 황후는 여전히 베흔을 똑바로 올려보고 있었다. 이를 악문 베흔의 계속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그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장태자를 베었다면 아마 황제를 당장 죽이지는 않았겠지? 똑똑한 주페 태자까지 제거할 시간이 필요했을테니. 하지만 내가 장태자를 죽이지 않았으니.....네년은 차선책으로 바로 다음날로 황제를 제거해서 내 선택의 폭을 최대한 좁게 만들어버렸어. 그래서 태자들간에 개싸움을 벌이게 만들었지? 내가 장태자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걸 미리 예상했나?"
"다시 말하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군. 근위대장."
세네피스 황후가 눈을 약간 내리깔았다. 어리석은 질문임은 베흔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여자를 추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오넬론 태자는 황제가 되었고 이 여자는 황후의 지위에 있었다. 태자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와서 지나간 일을 거론해서 이득이 될 일은 전혀 없었다. 베흔은 자신이 장태자에게 칼을 겨누려 했던 그때의 상황과 동일한 입장에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흥분해 날뛰어서 이득이 될 일이 없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베흔은 황후의 멱살을 쥔 손을 스르르 놓았다.
"맞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베흔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세네피스 황후는 늘어나버린 옷깃을 어루만지며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방금전의 무례는 용서하도록 하지. 졸리니 이제 자야겠어."
베흔은 땅이 꺼져버리는 듯한 허탈함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딴에는 머리를 썼다고 생각했던 장태자에 대한 배신과, 세째 태자에 대한 지원까지 결국은 모두 이 여자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었다. 강간사건의 실제 주범은 바로 이여자였고, 파멸한 로노 장태자는 이 여자의 손에 놀아난 꼭둑각시였을 뿐이었다.
이순간 저 망할 여자에 대한 지독한 증오보다 그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은 자신의 멍청함에 대한 원망이 더 격렬하게 그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침대머리에 앉은 세네피스 황후는 옷 한구석이 찢어진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황후는 망가진 옷을 스스럼없이 벗어던지고는 불을 껐다. 이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여자의 하얗고 매혹적인 몸매가 황후 침실의 침침한 불빛 아래 드러나고 있었다.
"남편이 불구자라는 건 나로서도 충격이었어. 형편없는 놈이란 건 알았지만 그정도일줄은 몰랐지. 넌 미리 알고 있었겠지?"
베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평소 침소를 지킬때처럼 침대 옆에 똑바로 섰다. 황후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베흔은 대답할 기분이 절대 아니었다.
"내 또하나의 즐거움을 망가뜨려놓은 책임을 져 주어야겠어."
똑바로 서 있던 베흔이 이를 악물었다. 어둠 속에서 세네피스 황후의 엷은 회색빛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베흔은 자신을 유혹하는 이 여자의 속셈을 모를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 '가디언'으로서 음탕한 짓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발각되면 자신은 당연히 죽음을 당할 테지만 황후인 이 여자---고상하고 정숙하기로 너무나 잘 알려진---는 '강제로 당했다', 또는 '협박을 당했다'는 말 한마디면 고스란히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 여자는 그 흔적을 어딘가에 틀림없이 남겨놓을테고, 그리고 앞으로 두고두고 자신의 목을 죄는 카드로 활용할 것이 분명했다.
베흔이 떨리는 목소리로 둘러댔다.
"쓸만한 미소년들이 있으니 불러드리죠."
세네피스 황후가 씨익 웃으며 베흔을 돌아보았다.
"난 고상하고 인자하기 짝이없는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황후일세. 그럴거면 멍청이 황제가 자기 앞에서 다른 남자와 섹스하라고 했을 때 이미 수십번은 했어. 결혼 후로 4년 동안이나 수도승처럼 참고 관리해온 내 이미지를 손상시키고싶지는 않은걸."
"가디언이 주인의 명령을 유일하게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란 사실을 모르시나보죠?"
"까탈스럽긴."
세네피스 황후가 침대 위에 드러누우며 가벼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내가 방금 얘기하지 않았나? 네페티 부인이 혼자있다고."
"그런데요?"
"지금 누군가와 담소중일거야."
베흔이 아무 말도 않은 채 황후를 노려보았다.
"황제가 시종장녀석 시켜서 네페티 부인을 150층 침소에 불러들이라고 한 모양이더군. 뭐 그인간 불구자니 물론 부인을 직접 건드리지는 못할거야."
침대 뒤에 반쯤 기대누운 황후가 깃털이불을 끌어당겨 덮으며 중얼거렸다. 베흔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래서요?"
"잘생기고 몸 좋은 시종녀석들 몇놈 대기시켜놨겠지. 오늘밤 벌어질 구경거리에 잔뜩 기대하면서 말이야. 그인간은 한놈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거든. 불쌍하기 짝이 없지. 얼마나 만만해 보였으면 근위대장에 장태자도 모자라서 이젠 저 못난 황제까지 한번씩 눈독을 다 들일까나....쯧쯧. 저런 여자가 우리 집안에 안들어온 게 천만다행이지."
베흔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방 불이 완전히 꺼져 어두컴컴해졌다. 어둠 속에서 황후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통제특권'을 발휘할까말까 고민중이야."
머릿속이 아찔해진 베흔으로서는 더 이상 저항할수가 없었다. 베흔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칼을 옆에 끌러놓은 베흔은 입고있던 근위대 정복의 단추를 하나 둘씩 끌러내렸다. 그를 힐끗 바라본 황후가 옆의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시종장. 폐하께 내가 반대한다고 말씀드리게."
베흔은 옷을 벗은 채 이 저주스러운 여자의 옆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이 여자의 혐오스러운 회색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 치욕은 반드시 열 배로 되갚아줄것을, 그리고 이 여자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에게도 대대로 이 끔찍한 경험을 되돌려줄 것을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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