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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25화 (125/1,132)

< -- 125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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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일찍 샤드니와 함께 차후계획을 논의하던 두겐에게 비서 한 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샤드니가 대신 물었다. 비서가 대답 대신 한 장의 사진을 내밀자 그것을 유심히 살펴본 샤드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비서에게 물었다.

"어디서 발견했지?"

"라호르 시 치안부대 정보원에게서 구했습니다. 타르서스인으로 보이는 키작은 남자가 암시장에서 3000골드에 그 팔찌를 팔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워낙 고가품이어서 치안부대 귀에 곧바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타르서스인이라......"

샤드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사진을 어깨너머로 본 두겐 공이 긴장된 얼굴로 샤드니를 바라보았다.

"누님의 팔찌로군."

"하는 행동이나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곳에 꽤 익숙한 자로 보였다고 합니다."

비서의 말에 샤드니가 두겐을 돌아보았다.

"가디언 카렐이 누님을 데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메디스 시 포로들 말에 따르면 녀석의 무리중에 키작은 타르서스인이 하나 있다고 했으니......그놈이 틀림없습니다. 베흔의 셔틀을 검문할 때 누님이 안나온 게 우연이 아니었군요."

"그랬군,"

드디어 꼬리를 잡은 두겐 공이 오랫만에 웃음을 지었다.

"누님이 아끼던 팔찌까지 파는 걸 보니 돈이 많이 궁한 모양인걸."

샤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호르 시 지금 시각은?"

"늦은 저녁일겁니다. 녀석들이 돈이 없으니 뒷골목 싼 숙소 중 어딘가에 은거해 있을겁니다. 눈치채기 전에 당장 병사들을 풀어서 대대적으로 수색해야 할 겁니다."

샤드니 녀석이 오랫만에 알아서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두겐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페데레스 사령관에게 일러서 녀석을 이번엔 반드시 잡아내라고 해. 아니, 녀석은 못잡아도 좋으니 누님만이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라. 샤드니, 페데레스 그놈은 도무지 미덥지를 않으니까......네가 같이 가서 옆에서 살피도록 해라."

"돈생각해서 오늘저녁부터는 외출금지다."

카렐의 잔소리섞인 한마디에 우베의 입이 대뜸 댓발은 튀어나왔다.

"이제 돈도 넉넉한데......"

"부인의 피같은 팔찌를 판 돈을 술쳐먹는데 낭비하려고?"

카렐의 고함소리에 마땅히 할 말이 없어진 우베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제네르가 즉시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밖에서 술 사다가 마시도록 하죠. 좀 아낄 수 있을테니."

"근데 술은 그저 예쁜 아가씨 끼고......"

뭐라 더 말하려던 우베는 제네르의 사정없는 꿀밤 한 대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네르가 그답지않게 이까지 드러내며 무서운 얼굴로 우베를 노려보았다.

"다신 그런데 갔다간 목을 비틀어버릴 줄 알아."

"어딜 갔길래?"

카렐 옆에서 차를 마시던 네페티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우베가 급히 제네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우베를 거칠게 밀어낸 제네르가 대뜸 부인에게 일러바쳤다.

"어딘 어디겠어요. 유곽에 갔다왔죠."

순간 놀란 토끼눈이 된 네페티 부인이 우베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부사람 앞에서 '유곽에 다녀왔다'는 말은 '강도질하고 왔다'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엄청난 치욕에 속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이상형'이라며 매번 넋두리를 늘어놓던 바로 그 네페티 부인에게 어마어마한 망신을 당하고 만 우베가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씨, 단장님, 그런 얘기를 하시면,,,,,,"

"우베 넌 뻔할 뻔자 여자하고 놀아났을테고, 페나페하고 베네루스는?"

유학자인 제네르의 추궁에 그 둘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엉뚱한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베네루스야 총각이니 그래도 넘어간다고 치고, 약혼자도 있는 우베 네놈하고 명색이 유부남인 페나페 너흰 도대체 뭐야?"

언성을 높이던 '규율부장' 제네르의 무서운 시선이 결국 최종목적지인 시로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시로는 제네르가 묻기도 전에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전 술이 떡이 되어서.....정말입니다. 깨보니까 여자가 다가오고 있길래 얼른 도망쳤다구요, 정말이예요."

"도망치긴 무슨......"

성난 얼굴로 시로를 막 몰아붙이려는 제네르를 카렐이 웃으며 가로막았다.

"됐어, 시로 말이 맞아. 시로한테서 여자 체취는 안나고 있었으니까."

카렐의 말에 그제서야 안심한 제네르가 씩씩거리며 조금 옆으로 돌아앉았다.

여하간에 영 면목이 없어진 시로가 전혀 안어울리는 애교를 떨며 제네르에게 바싹 붙어앉았다.

"손금봐드릴까요?"

"됐어."

제네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으.....페나페가 그러는데 단장님같이 귀가 큰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따른다고......"

"많이 안따라도 좋으니까 결정적인 한명이나 속 안썩였으면 좋겠어."

시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어수선함에는 관심도 없는 듯 자신의 수첩만 계속 뒤적거리고 있던 발리가 갑자기 '교수님' 제네르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주치론에서 말입니다. 다른 문장은 다 이해하겠지만.....이 부분에서 남화진경*을 인용하고 계신데 전반적인 주치론 자체의 법가적인 분위기와 남화진경은 어딘지 부조화스런 느낌이 듭니다."

"그건 말이야....법가 사상은 특이하게도 가장 대조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남화진경과 변증적이고 사변적인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아......"

표정이 확 풀어진 제네르가 종이 한 장을 집어들고는 그 악필로 한자한자 써가며 발리에게 무언가 어려운 말을 해대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지도 못할 대화가 제네르와 발리 사이에서 오가자 뾰로통해진 시로가 우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남화진경이 뭐야?"

"몰라요, 내가 알게 뭐예요. 남화진이란 놈이 썼나보지."

머리를 어루만지며 투덜거리던 우베가 애꿎은 사람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이납!"

"예?"

"네가 막내니까 나가서 술 좀 사와."

아직 몸조리를 하고 있는 자이납에게 심부름을 시키자 시로가 돈을 내미는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뭐해. 쟤 아직 환자인데."

"걸어갔다오는데는 괜찮잖아요. 어제 종일 잠만 잤으니 좀 움직여줘야죠."

돈을 받아든 자이납은 아무 생각없이 호텔 밖으로 나섰다. 북부만은 못해도 환락도시인지라 밤거리의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가디언 피가 섞였다는 데 나름대로 으쓱해하며 자신만만하게 길을 걷고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제일 고급호텔인 지금 숙소 주변에는 변변한 싸구려 술집이 없는 탓에 자이납은 북쪽 슬럼가의 뒷골목까지 들어가야 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그는 2층에 위치한 한 허름한 술집에 들어섰다.

"양젖술 중간거 1통하고 꿀술 작은거 1통이요."

"큰 술통 채우는 중이니까 잠깐만 기다려."

술통에 술을 채우는 동안 꽤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문제될건 없었다. 술집 주인이 통에 술을 담고 있는 동안 자이납은 시끌벅적한 유흥가 바깥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서부에서도 제일 바닥을 전전한 그에게 이런 뒷골목 풍경은 별로 낯선것도 아니었다.

자이납은 어머니와 힘겹게 꾸려가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해적질로 양심을 괴롭히며 살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앞으로 올 지도 모를 '괜찮은 날'들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가 네페티 부인의 일행을 따르기로 한 건 처음에는 나름대로 '정의감'의 발로이기는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선택이 자신같은 인간들과는 완전히 격이 다르다고 믿어왔던 '장태자 전하'와 한배를 타게 되는, 꽤 대박이었다는 데 지금은 그도 꽤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당장은 어려워도 일단 이곳만 나가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어쨌든 남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것을 하려면 일생에 최소한 한번의 도박은 필요하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괜찮은 남자 하나만 잡으면 더 바랄 게 없겠네.'

주인이 빈 통에 술을 담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이납이 이번엔 남자 공상에 빠져있었다. 그동안 '고상' 따위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그에게 많은 남자경험이 있는 건 별로 이상한일도 아니었지만 일생을 함께할 '괜찮은 남자'는 여지껏 단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다. 어쩌면 저 '장태자 전하'가 괜찮은 남자를 엮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그는 이미 별의별 상상에 다 잠겨있었다.

술집 반대편 문이 열리며 다섯명의 무장한 제후군들이 불쑥 들어닥친 건 그때였다.

"신분조사하겠다."

"이크,"

소스라치게 놀란 자이납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어쨌든 '탈영병' 신분이었고 잡히면 무조건 처형이었다. 혈액 스캐너를 든 병사들이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신분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었다. 자이납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주인이 내민 두 통의 술을 받아들었다.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진 자이납의 얼굴에 조금은 어리둥절해진 주인이 병사들을 힐끗 돌아보고 있었다.

자이납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최대한 애교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어......살려주실래요?"

자이납의 안어울리는 말투에 술집 주인이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매춘부로 살아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구요."

짐짓 울먹이는 자이납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서부에서 매춘은 꽤 중죄에 속했고, 상습범의 경우에는 처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게다가 지난번 코리온의 '교시'에 의해 매춘부는 그 횟수를 불문하고 무조건 처형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 라호르 시에서 신분증으로 하는 형식적인 조사가 아닌 정밀한 혈액 스캐너 조사를 한다면 수배된 중범죄자나 상습 매춘부를 잡아내는 일제단속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버지한테 쫓겨나서 엄마하고 단둘이 살다가......어머니도 돌아가시고......또한번 잡히면 이번엔 거세당할지도 몰라요......어쩌면 처형당할지도 모르고......."

자이납이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연신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자이납의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본 뚱뚱한 남자 술집주인이 그 말을 믿었는지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꼼짝말고 기다려. 움직이면 신고해버릴테니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인 자이납은 재빨리 3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기다리라는 말에서 어느정도 짐작을 했지만 아니나다를까 주인이 기거하는 자그만 침실이었다. 살려주는 댓가로 하룻밤 공짜로 벗겨먹을 심산이었던 모양이었다.

"미친놈,"

자이납은 재빨리 창문을 열어젖혔다. 창밖을 내다본 자이납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할수밖에 없었다. 방금전까지 건달들과 취객들로 어수선하던 길에 제후군 병사들이 구석구석 차지하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내고 있었고 공중에는 달아나는 셔틀을 잡아내기 위한 자기 와이어와 수색용 셔틀이 곳곳에서 희미한 불빛을 뿜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검문 같은 데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자이납으로서도 이것이 단순한 '매춘부 일제검거' 정도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술을 내려놓고 일단 무조건 창밖으로 기어나온 자이납은 3층 벽에 매달려 옆 건물 옥상에 뛰어내렸다. 사막기후인 이곳은 거의가 평지붕인데다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제대로 방향만 잡으면 뒷골목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심산이었다. 물론 저 망할 수색셔틀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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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화진경'은 '장자'의 다른 제목입니다. 호접몽으로 잘 알려진 장자의 이름은 '장주'이며 '남화진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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