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6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베흔은 이 자그만 계집아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눈꺼풀은 피 때문에 완전히 달라붙어 뜨지를 못하고 있었지만 왼쪽 눈은 가늘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맞아서인지 흰자위만 잔뜩 드러난 그 눈은 이미 의식이 거의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큰일날뻔했군요. 근위대장님. 황후가 이걸 먼저 알았으면 어찌됐겠어요."
"그럼 우리 계획은 다 물건너가는거지 뭐,"
베흔은 가만히있는 이 꼬마의 머리를 괜히 발로 툭툭 걷어차며 대꾸했다.
"그새끼 맨날 자식타령, 권위타령하면서 궁시렁대는 거 옆에서 보면 눈물날 지경이라니까. 마누라 문제가 아니고 지문제라는것도 모르나. 참, 나."
"그래도 그게 어디 쉽게 결심할 문제겠어요?"
실리페의 질문에 베흔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내가 살짝 운을 띄워봤더니 별 거부반응도 없던걸. 도리어 '쫓아낼 좋은 방법이라도 있냐'고 먼저 묻던데?"
카렐이 의식이 돌아오는지 몸을 움찔거리자 그 둘은 얼른 대화를 멈추었다.
베흔은 아직 알몸인 이 여자아이의 몸 위에 반바지를 집어던졌다.
"조금 있으면 귀하신 분들이 널 보러 오실거다. 벌거벗고 있으면 꼴사나우니까 이거라도 말고 있어."
"집에......집에 보내주세요......"
"이 미친년 또시작이네!"
베흔이 아이를 사정없이 몇번이나 걷어찼다. 코와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성 따위는 거의 내던진듯한 듯한 베흔의 그 모습에 실리페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작작 좀 하시죠. 근위대장님. 애 잡겠네요. 알고보면 불쌍하잖아요?"
보다못한 실리페가 몸을 바싹 낮추고 바닥에 쓰러진 어린 카렐을 들여다보았다. 카파키 가문의 상징같은 옅은 무지개톤 회색 눈동자와 고운 적갈색머리, 가늘고 오똑한 콧날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아서 그런건지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보니 베흔 말마따나 세네피스 황후, 그리고 그 맏언니 오르마즈와 똑같은 복사판이었다.
실리페는 아이에게 직접 반바지를 입혀주고는 그의 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들이켰다.
"흙냄새하고 풀냄새가 나는군요......시골아이같이.....눈이 아주 맑은데요. 늑대 두마리를 손으로 때려잡았다고는 도저히 안믿기는데요."
"페로한테 보내줘요......제발요....."
자신에게 그나마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 여자에게 어린 카렐이 다시 빌기 시작했다.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처절하게 애원하는 이 모습을 보아서 이 꼬마녀석도 자신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육감으로 깨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페로가 누구죠?"
실리페가 베흔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이센 가 장남새끼. 소꿉친구인가보더군. 꽤 똘똘해보이던데 크면 애비보다 훨씬 낫겠던걸."
"가디언 주제에......명문가 아들하고 소꿉친구였다니, 꽤 세게 놀았군요."
실리페가 아이를 도로 바닥에 눕혀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렐의 코와 입, 찢겨진 눈두덩이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이 꽤 더러워져 있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폐하 드십니다."
베흔과 실리페가 얼른 방 양옆으로 비켜섰다. 문이 열리더니 조금은 피곤한 모습의 세나우스 3세 황제와 세네피스 황후가 이 방 안에 나란히 들어섰다. 둘은 눈앞에 처참한 몰골로 늘어져있는 피투성이 계집아이의 존재에 깜짝 놀랐는지 베흔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 계집아이?"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예. 지난번 프로젝트때 단 하나 살아남은 수정란이었습니다. 보고드린대로 늑대 두마리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무서운 놈으로 자랐습니다."
"전혀 안그래보이는데? 쬐끄만 게......왜이렇게 삐쩍 말랐어?"
황제가 바닥에 초죽음상태로 늘어져있는 카렐의 모습에 낯을 잔뜩 찡그린 채 중얼거리자 세네피스 황후 역시 표정을 가볍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난 또 어른만해갖고 괴물같이 무서운 얼굴 한 아이일줄 알았더니만......"
그 목소리에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어린 카렐이 황제와 황후, 그리고 베흔을 돌아보았다. 황후는 자신과 같은 회색빛, 아니 희귀한 그레이오팔의 번득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흠칫 놀라고 있었다.
어린 카렐은 그 무시무시하던 베흔이 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둘은 이 무서운 남자보다 더 높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카렐은 자신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갑자기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간 카렐은 앞에 선 이 네 사람---황제, 황후, 베흔과 실리페---중에서 얼핏 가장 착해 보이는, 가장 따뜻한 온기를 풍기는, 게다가 어디서인가 본 듯한 한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집에 보내주세요."
카렐이 울먹이며 세네피스 황후의 치맛자락을 결사적으로 움켜쥐었다. 피딱지 투성이의 지저분한 가디언 꼬마아이가 겁도없이 자신에게 매달리는 황당한 모습에 황후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당혹스러움은 채 일초도 지나지않아 분노로 바뀌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세네피스 황후는 이 지저분한 아이의 피묻은 얼굴을 날카로운 구두 뒤축으로 사정없이 짓밟아버리고 말았다.
황후의 화려한 원피스와 비단포에 카렐의 얼굴과 손에서 묻어난 피가 덕지덕지 얼룩져 있었다. 더러워진 옷 때문에 머리끝까지 성이 난 황후의 얼굴이 어느새 잔뜩 일그러들어 있었다.
어린 카렐의 아직 유순한 얼굴은 이 언뜻 착해보이는 여자의 뜻밖의 냉랭한 반응에 너무나 놀랐는지 잠시 얼어붙어 있었다. 세네피스 황후의 구둣발에 밟힌 카렐의 왼쪽 눈꺼풀이 찢어져 뺨을 타고 피가 흘렀지만 그는 더이상 아픔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버린 어린 카렐의 얼굴이 조금씩 절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민한 귀는 황후의 입에서 조그맣게 들려온 뜻밖의 말소리를 똑똑히 알아듣고 있었다.
"이 더러운 짐승새끼 같으니....."
베흔은 입밖으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틀어막고 있었다. 너무나 감격적인 모녀상봉이었다.
"어쨌든 프로젝트가 실패가 아니라니까 다행이네."
황제가 베흔에게 중얼거렸다.
"처음에 프로젝트 세울 때 계획했던 것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어린 것을 최강의 가디언으로 키워놔. 최대한 잔혹하게 다루고, 쓸데없는 감정같은 것도 모두 거세시켜버리도록 해. 어떤 괴물같은 놈이 나올까 기대되는군."
황제의 입가에 조금은 변태적이기까지 해 보이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황제의 말에 실리페가 폭소가 터져나오려는 입을 애써 가리느라 고개를 돌리고는 쩔쩔 매고 있었다. 그새 조금 안정을 찾은 세네피스 황후는 평소처럼 선하고 품위있는 황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 여자아이를 조금 찌푸린 얼굴로 다시 내려다보았다.
"조금......심하신 듯 하군요......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
또다시 선한 척하기 시작한 황후의 모습에 베흔은 역겨워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황후의 말에 황제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가디언은 가디언답게 키워야 제격이요. 황후."
"이 아이는......이상하게 가디언같은 느낌이 별로 안드는군요."
세네피스 황후가 그제야 어린 카렐에게 얼굴을 조금 가까이 들이댔다. 베흔은 황족문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나 있는 그의 어깨를 재빨리 발로 밟아 가리고 있었다.
"제대로 배운바가 없으니 방금전처럼 황후폐하께 덤빌지도 모릅니다."
"공격할 눈빛은 아닌데......훗, 가디언치곤 눈색깔이 정말 특이하군."
세네피스 황후가 어린 카렐의 유난히 맑은 회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베흔은 황후가 자신과 똑같은 카렐의 저 회색빛 그레이오팔 눈색깔을 고작 '특이하다' 정도로 표현한 이유를 잘 알고있었다. 황후로서는 천박스런 가디언 따위에서 그 고귀한 눈빛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음이 확실했다.
황후의 구둣굽에 찢긴 꼬마의 왼쪽 눈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카렐의 회색빛 눈에 어느새 피어린 눈물이 가득히 맺혀 있었다.
"희한하게 낯이 익은걸."
황후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자 뒤늦게 드러난 그의 뜻밖의 눈썰미에 베흔과 실리페가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어린 카렐이 감긴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전혀 어린아이같지않은 목소리로 반 쯤 울먹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총명하고 생각이 뛰어나도 어리석은 듯함으로 지켜야 하고, 공덕이 천하를 덮더라도 겸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하고, 용맹이 세상을 진동하더라도 겁내는 듯함으로 지켜 나가며, 부유함이 사해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겸손함으로써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격언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하는 이 꼬마의 모습에 세네피스 황후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네가 그런 걸......"
황후가 아이에게 무언가 말을 걸려는 듯 입을 열었다.
"폐하. 회의장에 가실 시각입니다."
비서관의 목소리에 세네피스 황후가 어린 꼬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카렐을 다시 돌아본 세네피스 황후가 베흔에게 물었다.
"이것을 이제 어쩔거지?"
"옛 GOE병영에서 100년간 격리교육됩니다."
"100년?"
황후가 얼굴을 찌푸렸다.
"최강의 가디언을 길러내는 데 그정도라면 짧은 기간이지요."
카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본 세네피스 황후는 뒤로 휙 돌아 황제와 함께 방을 빠져나가버렸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어린 카렐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저 야속한 여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올 잔혹한 운명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꺼져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딸 둘 모두에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