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8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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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91년, 베흔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복수는 이 해의 초여름으로 계획되었다. 모든 것은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자존심만 센 황제 역시 아이도 낳지 못하고, 황권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이 '너무도 잘난 황후'에 진절머리치고 있었다. 그런 멍청한 황제의 협조 따위를 얻는 건 베흔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인 레곤 대공주가 수장으로 있는 황실 종친회에서 들썩일것이 뻔했지만 그들은 적당히 무시해버려도 큰 문제 없다고 판단되었다.
도리어 문제는 막강한 카파키 가 제후군 10만과 그 동맹을 이루는 소위 '폭풍의 군대' 북부 제후군 연맹, 내각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황후 수하의 측근들과 남극성당출신 중도파 혹은 개혁파 유학자들이었다.
세네피스 황후의 즉위 이후 추진된 강력한 실용주의 정책으로 광공업과 상업을 주된 사업영역으로 하는 북부는 남-서부 연합군에 패전하여 거의 몰락의 지경까지 갔던 2차 혼란기의 피해를 이미 완벽히 복구해낸 후였고. 그리고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증강된 군사력은 북부의 5개 상급제후가만 합쳐도 무려 30만에 육박해서 21만여 황실근위대를 거느린 베흔의 등골을 오싹하고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베흔의 골칫거리는 황실 소속이면서도 베흔의 통제 밖에 있는 유일한 부대인 제국 최강의 중장기병대 슈로 기사단 1만 2천이 황후의 맏언니 오르마즈의 손에 사실상 쥐여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오르마즈는 명목상으로는 기사단 고문에 불과했고, 단장은 표면상 카파키 가 사람이 아닌 토로 로버넬 경이 맡고 있었지만 카파키 가 가신 출신의 이 무식할정도로 충직한 무장이 주군 가문의 종장 후계자이며 사실상 상전인 오르마즈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30만에 육박하는 제후군은 원칙적으로 황제령에 진입할 수는 없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 망할 기사단은 말하자면 황제령 내의 황후의 전위부대인 셈이었다.
모든 것은 황제령 안에서, 최대한 빨리 결정나야만 했다. 어물거리다가 30만여 북부제후군이 자칫 황제령 안으로 진입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시 제후들 사이의 전면전으로 번질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기껏 안정을 찾아놓은 황제령은 물론이고 제국 전체가 또다시 대대적인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그에게 가장 큰 힘은 다름아닌 실리페 베로 시녀장이었다.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그는 위증을 해 줄 시녀들을 제공해주었고, 베흔에 관해 그동안 황후가 쥐고있던 '증거'를 수하 시녀들을 동원해 모두 없애주기로 약속했다.
또하나, 베흔이 걱정하는 것은 시로 녀석이었다. 4차 혼란기 직후 황후의 손에 목숨을 건진 시로는 그 이후로 황후에게 남다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이기회에 녀석을 없애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멀리 서부지역에 보내놓고 관찰만 하기로 했다. 그가 자칭 '황실의 수호자'라면서 황제의 뜻에 거스를지는 두고볼 노릇이었다. 어쨌든 이제 베흔에게는 '실행'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호락호락 당할 세네피스 황후는 결코 아니었다. 근위대 내의 이상동향을 감지한 세네피스 황후는 거사일 바로 4일 전, 베흔의 오른팔이던 베로 시녀장을 전격 해임해버렸다. 그리고는 충복인 토로 경이 이끄는 슈로 기사단을 원 주둔지인 2번 도시 부근 '13선지자의 묘지'에서 불러내 황궁 주변에 배치하는 초강수를 놓아 베흔을 기겁하게 만들고 말았다.
슈로 기사단을 베흔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것은 제국 최강의 중장기병단으로서 그들의 전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슈로 기사단에는 카파키 가의 적장자 오르마즈는 물론이었고 중앙귀족 최고명문가인 쉐너 가의 자녀들과 델루지 가 적장자 제롬 경, 동부 최고제후 슈트란 가 적장자인 아르군 경 등등 가히 쟁쟁한 가문의 자제들이 '귀족으로서의 가장 명예로운 군 경험'을 위해 몸담고 있었다. 이런 그들을 함부로 공격하는 것은 베흔으로서도 목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베흔의 '선수'를 차단했다고 생각한 세네피스 황후는 여유로움을 과시라도 하듯 이전부터 예정되어있던 동부지역 방문을 홀홀히 떠나버렸다.
하지만 베흔이 입수한 정보 중에는 황후의 동부방문이 동부를 북부의 군사동맹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만일을 대비해 중요자료들을 미리 빼돌리려는 것'이라는 믿을 수 있는것인지 아닌건지 알쏭달쏭한 내용도 포함되어있었다. 베로 시녀장을 해임한 것으로 보아 세네피스 황후가 측근 시녀들을 더이상 믿지 않는 것은 확실했으니 따져보면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사실 황후는 근 몇십년간 한때 적이었던 동부지역에 대한 회유를 꽤나 열심히 해오고 있었다. 2차 혼란기 당시 북부와 손잡고 연합군을 조직하기도 했던 동부지역은 로노 장태자의 몰락으로 서먹해졌던 북부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황후를 낸 반대급부로 엄청난 부의 축적을 이룬 북부와 달리 동부는 2차 혼란기의 패전과 뒤이은 4차 혼란기 로노 태자의 실패에서 온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국이었고 결국 '전통우방'인 북부출신 황후와 손잡지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동지가 간절히 필요한 이 시점에서 황후가 '자기마당' 인 북부를 방문한다면 베흔에게 '황후가 친정으로 도주했다'는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할수도 있다는 것을 똑똑한 황후가 몰랐을리가 없었다. 결국 황후가 이 시점에서 정말로 정보를 빼돌리려 한다면 전통적으로 북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서부나 남부보다는 동부가 최적의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황후를 선공하려던 베흔으로서는 도리어 자신이 궁지에 몰리는 황당한 결과로 돌아온 셈이었다.
베흔으로서는 자신이 로노 태자를 배신했을때와 마찬가지로 또한번 결단의 순간이 왔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준비를 포기하고 다시 이전같은 생활로 돌아가느냐, 되던 안되던 일단 터뜨리고 보느냐의 문제였다. 결국 베흔은 후자를 택했고 이 계획은 정확히 적중했다.
슈로 기사단의 재배치로 베흔이 당연히 한발 물러나리라 믿었을 세네피스 황후에게 근위대의 자신에 대한 탄핵, 아니 황제의 배신 소식은 청천벽력임에 틀림없었다. 애초 약속된대로 행해진 시녀들의 위증은 물론이었고 황후의 숙소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과 최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까지, 황제의 협조하에 단 1시간 반이라는 눈깜짝할 시간동안 벌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동부에서 황제령을 향해 돌아오기 시작한 황후의 워프비행개시시각---기수를 돌릴래야 돌릴수가 없는---에 맞춰서 행해졌다.
그 모든 '증거'를 종합한 황제는 자신의 아내였던 세네피스 카파키와 그 동조세력들을 체포할 것을 명하는 칙서를 즉석에서 발부했다. 이제 황후는 워프비행이 끝나는 10시간 후, 황제령측 워프게이트를 지키고있을 근위대에 체포되어 꼼짝없이 처형되고 말 운명이었다.
결국 가장 난처한 입장에 처한 이는 다름아닌 토로 경이었다. 무려 만 명이 넘는 최정예 병력으로 황궁 바로 옆에 주둔하고 있었으면서도 황제의 배신으로 손한번 써볼 새 없이 당하고 만 그에게도 다른 황후의 측근들처럼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만이천여 슈로 기사단의 무시무시한 군세에 눌린 근위대들은 아직 섣불리 그에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휘하 가디언들을 대규모로 동원한다면 그들을 토벌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커져서는 곤란함을 잘 알고있던 베흔으로서는 싸움으로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베흔은 측근인 쿠베를 보내 토로 경과의 '모종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무식하기까지 한 충성으로 똘똘 뭉친 이 기사단장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베흔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어온 건 그 앞뒤 꽉 막힌 기사단장을 만나러갔던 쿠베를 통해서였다. 다름아닌 토로 경의 부장이 '차기 기사단장직'을 조건으로 쓸만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온 것이었다. 물론 베흔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제공한 정보는 충분히 그 값을 하고도 남음이었다.
토로 경이 겨우 4백에 불과한 가장 믿을만한 북부와 동부출신 최정예 기병들만으로 황궁을 기습한 것은 물론 그들만으로 황궁을 점령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말도안되는 믿음 때문은 아니었다. 각 지역출신의 유력가 귀족자제들로 이루어진 슈로 기사단 만이천의 특이한 구성이 당장은 근위대의 공격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조만간 정치적 이해에 따라 분열하는 빌미가 되리라는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조만간 붕괴될 기사단을 포기하고 결사대를 출발시키기 직전, 자신의 아내와 두 자녀를 영내에 불러들인 그는 자신을 따를 결사대 4백명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들 셋의 목을 베고 그 피로 자신의 손을 씻어 마지막 다짐까지 마쳤다.
직접 결사대를 이끌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오르마즈를 강제로 포박해 비밀리에 북부로 돌려보낸 그는 30분 후 워프게이트에서 체포될 운명인 황후를 구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였다.
똑똑한 황후가 근위대에 곧바로 체포되지 않고 북부로 살아 도망칠수만 있다면 지난 2차 혼란기처럼 북-동부 연합군을 구성해 근위대에 대적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크게 확대시켜 일단 한 번의 기회를 더 노려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오르마즈 정도의 탁월한 지휘관이 북부에 있다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도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어쩔수 없이 자기 스스로의 계획을 위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것을 위해서는 세네피스 황후와 오르마즈만은 반드시 살아서 북부로 피할 수 있어야 했다.
토로 경의 계획은 간단했다. 스페이스상에서 셔틀을 나포할 때 쓸 수 있는 특수 프리깃은 근위대 중앙본부에서는 황궁 별관 옆의 근위대 주기장에 있는 5대가 전부였다. 근위대측 소식통으로부터 황후의 워프게이트 도착 30분 전 이 프리깃을 출발시킬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토로 경은 주기장을 기습해 이 5대의 프리깃을 못쓰게, 아니 그것까지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당장 이륙이라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자리에서 전사다운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할 예정이었다.
그 5대만 못쓰게 만든다면 설사 베흔이 멀리 나가있는 근위대 파견군 프리깃을 불러들이더라도 황후는 그 전에 북부로 몸을 피할 수 있을 것이 확실했다.
다짐을 마친 이 충성스러운 기사단장과, 그와 함께 죽는 운명을 지원한 4백여명의 결사대원은 황궁 본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한 별관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해들어갔다.
이 돌진이 죽음이 길이 되리라는 것은 이미 그것을 각오하고 있던 기병들에게는 어차피 별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주기장 주변이 이미 장애물로 꽉 막혀 있다는 것과, 천여명이 넘는 근위대 가디언들이 미리 길목을 막고 매복중이었다는, 믿고싶지않은 사실이었다. 토로 경은 측근의 누군가가 배신을 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그들에게 어차피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다. 이미 가망없음을 절감했지만 자신들의 단장이 스스로의 아내와 자녀들의 목을 베어 죽이는, 그 끔찍하리만큼 비장한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했던 4백여 기병들은 누구하나 전열을 이탈하지 않았다.
그들은 토로 경의 진격명령과 함께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무서운 가디언들을 향한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다. 일부는 장애물에 말과함께 통째로 꿰어, 일부는 가디언들의 무서운 칼놀림에 온몸이 산산조각나며 기병들은 그 한순간 무참하게 죽어갔다. 첫 돌진에서 4백여 결사대 중 절반인 2백여명이 그자리에서 전사했고 나머지 2백여명은 가디언들과의 가망없는 싸움끝에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쿠베의 칼에 가슴을 찔린 채 낙마한 토로 경은 황후의 체포를 위해 이륙하는 프리깃의 절망적인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참담한 피눈물을 흘릴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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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시 슬럼가 초입의 광장에 임시로 세워진 제후군 막사 앞에 아무 무늬도 없는 셔틀 한 대가 내려섰다. 저녁시간에 벌어진 평소같지않은 소란에 놀란 이곳 주민들 수천명이 제후군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 밖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간에는 이곳에 온 이래 두번째로 '정탐'이라는 것을 나온 조종사 베네루스가 섞여 있었다.
남쪽에서 날아온 이 평범한 셔틀의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검은 무명포를 입은 사람 둘이 걸어나와 문 양옆에 허리를 굽히고 섰다. 유학자들의 출현에 절을 올리려 했던 이곳 시민들은 그들의 심상치않은 행동에 그곳에서 다른 거물이 나올 것을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검은 무명포에 용이 새겨진 옅은 보랏빛 비단 머플러를 두른 키큰 남자가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셔틀에서 천천히 내려서고 있었다.
"리쿠 학장님이시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주변에 모여든 수천명의 시민들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일제히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서부인들의 이 황당한 태도에 놀란 베네루스 역시 허겁지겁 그들을 따라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황제라도 이런 정도의 자발적인 환호를 받으면 기분이 으쓱 해질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코리온은 자신에게 이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한 번 돌아보고는 막사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막사 안에 있던 제후군들도 이 뜻밖의 인물의 출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제히 좌우로 갈라져서 도열해 섰다.
"두겐 공은?"
코리온이 이곳을 수색을 담당한 3군단 소속 중랑장에게 평소처럼 아무런 표정없이 물었다.
"지금 오시는 길이라 합니다."
중랑장이 벌벌 떨며 코리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라호르는 남쪽 고위도에 위치해있으니 북극 부근에 있던 두겐이 남극 부근의 아카데미에서 급히 달려온 자신보다 늦으리라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물론 코리온은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서둘러 달려온 터였다.
"그럼 기다려야겠군.....샤드니 플레렌 경이 부상을 입었다 들었는데."
코리온은 여전히 무표정함을 유지한 채 중랑장에게 태연히 물었다.
"예. 지금 막 응급처치를 끝낸 것으로 압니다. 시내 큰 병원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이곳 야전막사에서 치료받으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셔서......"
"쯔쯔,"
코리온이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코리온이 화가 났다고 넘겨짚은 중랑장이 머리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시면......강제로라도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됐네. 두겐 공도 아직 안왔다니......기다리는 새 내 잠시 만나보겠네."
중랑장의 인도를 받으며 앞장서 걷는 코리온의 뒤를 제후군 간부들과 두 명의 교수들이 따랐다. 막사 한쪽의 쪽문을 병사들이 열어주자 코리온이 성큼 그 안에 들어섰다. 코리온을 따라 들어가려는 제후군 지휘관들의 앞을 예킨터스 교수를 비롯한 두 명의 교수들이 급히 막아섰다.
"학장님께서 혼자 만나뵙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병실에 들어선 코리온은 병상에 누워있는 샤드니를 짐짓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웃옷을 벗은 채 희고 아름다운 상체를 모두 드러낸 샤드니는 의식이 조금 오락가락하는지 혼탁해진 눈으로 코리온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연인을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시울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샤드니의 탄탄한 복부 왼쪽으로는 꽤 많은 피가 번진 채 두터운 드레싱이 되어있었다. 그의 옆을 지키던 군의관이 코리온에게 그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단검을 바쳐보였다.
"페스카즈입니다."
쟁반에 올려진 페스카즈에는 나무로 만든 투박한 손잡이가 달려 있었지만 S자로 휘어진 날은 떨어지는 머리카락이라도 벨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날에 아직 그대로 묻어있는 붉은 혈흔을 바라본 코리온의 턱에 핏줄이 불끈 일어서고 있었다.
"날 형태때문에 대단히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간이 있는 오른쪽을 찔렀거나 칼을 다시 뽑았다면 그대로 즉사하셨을 겁니다. 해적들이 자주 쓰는 무기로 알고 있습니다."
코리온은 제후군 중랑장을 별로 곱지않은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어떤 자의 짓인가?"
"자이나브 카메네이라고 1군단에서 낙타병 분대장으로 있던 녀석입니다. 검문망을 뚫고 달아나던 녀석을 샤드니 경께서 직접 붙잡으셨으나......녀석이 갑자기 반격을 개시해서....."
"샤드니 경은 칼을 잘 쓰는 사람이다. 사병인 분대장 따위에게 당했다니? 너희놈들이 방심한 것이 아닌가!"
코리온의 호통에 중랑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게......저희도 그정도일줄은 예상도 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병사들 보고에 따르자면 거의 가디언 정도로 빠른 녀석이라고......"
"시끄럽다."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변명에 코리온이 눈살을 찌푸리자 당황한 중랑장은 얼른 고개를 숙여붙였다.
"잠깐 자리를 비워주겠나?"
"아, 예, 알겠습니다."
중랑장은 군의관을 데리고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는 광경을 확인한 코리온은 누워있는 샤드니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샤드니가 황실에서 요직에 오를 수 있었던 기회도 모두 때려치고 남극성당과는 원수지간에 가까운 파예드 아카데미에, 그것도 원래 전공인 병법학과는 거의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사장지학을 공부하겠다며 밑바닥 학부생도로 입학했을 때 종장이던 네페티 부인은 물론이고 모든 가문의 원로들이 거의 필사적으로 말리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종가에서 있었던 코리온과의 첫 만남 이후로 샤드니가 그 아름답고 똑똑한 교수를 얼마나 그리워해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명예와 가능성을 버리고 찾아온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그리도 원하던 사람을 차지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샤드니가 쉰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코리온은 그의 창백해진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얼굴이 차가와졌구나."
샤드니는 자신의 뺨을 따뜻하게 감싼 코리온의 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코리온은 그의 얇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어루만졌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드니의 눈꼬리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코리온은 그의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자신의 넓은 가슴에 꼭 품어안았다.
"널 찌른 무리들은......이제 내가 직접 잡아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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