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0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
.
.
"힘들겠어."
눈에 낀 스코프의 필터를 작동시킨 카렐이 공중에 무수히 보이는 자기 와이어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엔 제대로 대비했군. 셔틀로 달아나는 걸 막는 게 아니라 통째로 잡아내겠다는 심산이야."
"그럼 빠져나갈 수 없는 겁니까?"
제네르가 자신의 스코프를 조절하며 물었다.
"도심지니 추락시키지는 못할테고.....와이어가 발산하는 자장 때문에 셔틀의 고속기동이 불가능해지니.....엉금엉금 기는 셔틀을 물고기 낚듯이 나포하면 끝이지."
제네르가 눈을 감으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휴, 도대체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군요."
"베네루스에게서 연락입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이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할룩스를 쥐고 무언가 대화를 나눈 우베가 큰 소리로 카렐에게 알렸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다시 바깥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엔 우리가 손님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건가?"
제네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을수는 없지않나."
"하지만 셔틀은......"
"우리만 타고있지 않으면 셔틀은 의심받을 리가 없지. 우베. 베네루스보고 돌아오라고 하게."
"그럼....."
제네르가 자리에 모여선 모두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카렐은 빤히 아는 부하들의 머릿수를 새삼스레 다시 세어보고 있었다.
"슬럼에서 우리들을 못찾으면 조만간 여기까지 놈들이 들어닥칠거다. 그 전에 우린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이곳 라호르의 지도를 확인한 카렐은 일단 구석에 힘없이 서 있는 네페티 부인을 바라보았다.
"발리 힐거 장군. 자넨 이제부터 네페티 부인의 남편이네."
"예에?"
발리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역시 놀란 표정을 짓고있는 네페티 부인 쪽을 바라보았다.
"시로, 자넨 발리의 개인가디언이야. 셋은 남쪽 고급주택가를 도보로 가로질러 도시 남쪽 사막으로 가게. 시민중에선 발리 힐거 장군이 체격도 제일 크고 힘도 세니까 시로와 짝이 되면 부인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거야. 부인은 체구가 작으시니 발리가 다른 서부의 부인들처럼 남편의 클록으로 가리고 다니면 충분히 신분을 감출 수 있을걸세."
"알겠습니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시로는 자신과 떨어지게 된 제네르 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침착한 표정의 제네르는 그런 시로에게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든든한 두 명의 호위를 받게 된 네페티 부인은 단호한 태도로 명령을 내리는 카렐을 애타는 얼굴로 올려보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렐, 넌......"
부인의 말을 못들은 척 무시해버린 카렐은 이번엔 반대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베. 푸아킨 경께선 이곳 분위기에 많이 낯설으시니 자네가 모시고가게. 동남쪽 공업단지를 지나면 꽤 큰 목초지가 있으니 그곳 부근에 숨게."
카렐의 굳은 얼굴은 이번엔 유시프 장군 쪽을 향했다.
"장군, 자이납은 부상을 입은데다가 이번에 녀석들의 타겟이 되었으니 자네와 오난 장군이 잘 돌봐주게. 남서쪽 노동자단지를 지나면 노예시장이 있고, 거길 지나서 황무지를 가로질러 꽤 가면 옛 집단 처형장으로 쓰였던 광장이 있을게야. 그곳에 숨게."
아직까지 이름이 불려지지 않은 제네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셔틀을 조종할 베네루스를 빼면 남은 건 제네르와 카렐 단 둘이었다.
"전하께선......"
카렐이 입고있던 검은 망토를 벗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네르 경 자넨 키가 커서 덩치 큰 남자 시켜서 감춰줄수도 없는데다가 서부에서 엔간히 공부한 사람이면 자네 얼굴을 다 알고있을 가능성이 높아.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현명하지 않아."
제네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카렐의 말뜻을 멋대로 해석한 제네르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제가 이곳에서 녀석들의 주의를......시간을 끌어드리겠습니다."
카렐이 제네르를 희생시킬 의도라고 생각한 시로가 입을 떡 벌린 채 카렐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에 카렐이 제네르에게 방금 벗은 검은 클록을 내밀었다.
"보기는 단순해보여도 페로가 특별제작해준 걸세. 어느정도 광도 이하만 되면 밖으로 나가는 빛하고 진동을 모두 흡수해. 셔틀의 열감지기나 스캐너도 피할 수 있고, 후드만 쓰고 있으면 밖에선 자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거야. 일단 호텔만 빠져나가면 이걸 입고 서쪽의 운하변 공원을 통해 내려가도록 해. 아마 내일 아침쯤이면 그 끝에 있는 저수지에 도착할테니 그곳에서 기다리게."
"전하께선 어떡하시려고......"
카렐의 망토를 머뭇거리며 받아든 제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앞길은 내가 찾아갈테니 걱정 말게나."
카렐의 엷은 웃음을 바라보던 제네르가 갑자기 멍 해진 표정을 지었다. 카렐이 직접 부하들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려는 의도가 확실했다.
"설마....."
무어라 말하려는 제네르의 입을 서둘러 틀어막은 카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모두를 재촉했다.
"자. 빨리들 나가. 제후군들이 언제 몰려올지 모르니. 내일까지만 안전하게 숨어있도록 해. 셔틀은 그 전에 뜰 수 있을게야. 그리고......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는 내게 어떤 연락도 하지 말고."
발리의 겨드랑이에 안겨 제일 먼저 나가던 네페티 부인이 카렐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카렐이 부인에게 다가서서 웃음을 지었다.
"오늘밤에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일밤이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테니.....그 후엔 꼭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카렐은 떨고있는 부인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주었다.
"약속 안지키면 화낼거야."
부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준 카렐은 그를 다시 발리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부인은 멈칫멈칫 뒤를 돌아보며 마지못해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카렐은 뒤에 기다리던 우베에게도 눈짓을 보냈다. 푸아킨 경을 데리고 나가던 우베는 카렐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여보였다.
"이번엔 절대 사고치지 마."
"알겠습니다."
우베가 약간 무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간의 간격으로 차례대로 부하들을 내보낸 카렐은 마지막으로 제네르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전하, 이러시면......"
제네르가 약간은 애타는 표정으로 카렐의 큰 손을 꼭 붙들었다.
"누군가 해야한다면 제일 잘 빠져나갈 놈이 하는 게 좋겠지."
한숨을 내쉰 제네르는 거실에 앉아 손을 흔드는 카렐을 뒤로하고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저 고집불통 장태자는 한번 결정한 것을 번복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아끼는 클록과, 가진 돈을 모두 맡긴 이유도 잘 알고있었다. 제네르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저 제멋대로의 고집불통은 뿔뿔이 흩어진 4개의 팀 중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도피책을 준 것이었다.
"아메스만 아니었다면 내가 황후가 되고싶었을지도 모르겠군."
엘리베이터에 오른 제네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동부의 찢어지게 가난한 하급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젊은시절 우여곡절을 겪은 그에게 있어 학업은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부유한 귀족출신들이 대부분이던 동기들에게 '구정물통'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면서 갖은 더러운 일들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그런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피나는 정진의 결과는 개혁파 유학자의 거두이며 남극성당 직제학이라는 꽤 근사한 간판을 선사해주었지만 현실은 '불온세력'출신의 이 행동파 유학자가 제대로 뜻을 펼 만큼 녹녹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지은 책들은 내용을 불문하고 족족이 금서로 묶였고 중도파의 헤데론 자이센 남극성당 대제학과의 끊임없는 불화는 별 이유도 없이 자신을 모든 강좌에서 해제시켜버리는, 사실상의 해고로 돌아와버렸던 터였다.
그 이후로 목적없이 떠돌던 자신을 거두어주고, 철저하게 믿어준 건 바로 저 '고집불통 장태자'였다.
그는 저 고집불통 태자가 자신의 일생에서 유일한 군주가 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결정한 자신의 군주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돈이 잔뜩 든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1층 로비로 서둘러 내려온 제네르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얼른 복도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도시내의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로비로 내려와있던 수백명의 투숙객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오십여명의 제후군 병사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있을 따름이었다.
"제길,"
제네르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라호르 시의 최고급 호텔인 이곳까지 녀석들이 이렇게 빨리 들이닥치리라는 건 정말로 예상못한 일이었다.
제네르는 틈새로 눈을 내놓고 그들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호텔의 출구를 일단 모두 봉쇄한 그들은 출입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고, 지휘관인 듯한 비장은 호텔 지배인에게 서류를 내보이며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물론 그 파일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제네르는 할룩스를 집어들고 카렐에게 일단 이 사실을 알렸다. 제네르의 보고를 들은 카렐은 생각외로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 건넸다.
"당당하게. 여긴 서부고, 자넨 유학자 아닌가."
제네르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멍 하니 서 있었다. 그는 화면속의 카렐에게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아.....알겠습니다."
카렐의 황당한 탈출책이 정말로 효과를 발휘할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입고있던 평범한 외투와 셔츠를 벗어놓은 제네르는 들고있던 가방에서 흰 무명포와 머플러를 꺼냈다.
지배인을 채근하던 제후군 비장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로비 안을 한 번 빙 돌아보았다. 로비에 모여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뭐야?"
로비 안쪽에서 흰 무명포에 무려 다섯개의 줄이 그려진 남극성당 머플러를 두른 키큰 금발여자가 한손에 가방을 든 채 걸어나오고 있었다. 비장 역시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려 했지만 그 여자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헉,"
자신의 손에 들고있던 파일을 살펴본 비장이 순간 창백해진 얼굴로 제네르를 쏘아보았다. 로비에 모여있던 서부인들은---그들의 평소 습관대로---직제학급의 거물 유학자를 만나게 된 데 너무나 놀라며 그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고 있었다. 비장이 부하들에게 눈짓을 해 제네르의 앞을 가로막게 했다. 제네르가 태연한 표정으로 비장을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그......그게......수배자를 찾는 중입니다. 상급교수님."
"그런데?"
제네르가 불쾌하다는 듯 입가를 씰룩거리며 되묻자 비장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가까스로 대답을 내놓았다.
"신분을 밝혀 주시면......"
"서부에서 명색이 비장이라는 자가, 남극성당 직제학인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제네르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비장 스스로도 이정도 수준의 유학자를 감히 검문하려 드는 것이 얼마나 오만불손한 행동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로비에 모여선 사람들이 유학자를 붙들고 따져드는 비장을 손가락질하며 무어라 웅성대고 있었다. 현행범이 아니라면, 유학자에게는 절대 손끝하나 대서는 안되는 것이 서부의 불문율이었다.
그때 호텔 문에서 검은 무명포를 입은 낯익은 사람 하나가 급히 뛰쳐들어오고 있었다. 제네르는 내심 기겁을 하고 놀랐지만 지금은 최대한 '유학자답게' 굴어야 할 때였다.
"하심 예킨터스 교수. 품위있어야 할 유학자가 그리 방정맞게 굴어서야 될 말인가?"
코리온의 지시로 이곳으로 달려왔던 하심은 너무나 뜻밖의 얼굴에 잠시 할 말도 잊은 채 멍 하니 서 있었다.
"방정맞게 구는 것으로 모자라서 상급자에 대한 예의도 잊다니.....쯧쯧."
수백명의 눈이 그들 둘을 향하고 있었다. 하심은 그제서야 자신의 머플러의 줄이 단 세개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부아를 애써 억누르며 자신의 파예드 아카데미 후배이기도 한 제네르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화, 황공하옵니다.......제네르 하크로딘 교수님."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탄성이 올랐다. 유학을 필수과정으로 공부하는 이들 서부인들에게 개혁파 지도자 중 한명인 하크로딘 교수의 이름은 이미 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제네르가 비장을 문득 돌아보았다.
"이제 내 신분은 확실해졌으니 나가도 되겠나?"
"그......그게......"
제네르를 체포할수도, 안할수도 없는 궁지에 몰린 비장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보다못한 하심이 잽싸게 끼어들어 제네르에게 말을 건넸다.
"리쿠 학장님께서 교수님을 꼭 만나뵙고 싶어하십니다."
"그건 나도 알고있네."
제네르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찾아뵈었을 때 워낙 대접을 요란스럽게 해주셔서.....내 당장은 그분 찾아뵙기가 영 부담스럽구만. 내 주변이 안정되거든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게나."
"이......익,"
예킨터스 교수가 이를 악물었다. 제네르는 앞을 가로막은 두 명의 병사들을 밀치며 태연하게 호텔 밖으로 나섰다.
"당장 따라가, 밖에서 체포해."
하심이 비장에게 급히 눈짓을 해 보였다.
110층 옥상에 서서 밑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던 카렐은 무명포 차림의 제네르가 호텔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할룩스에 대고 말했다.
"잘했다. 지금 병사 십여명이 40보쯤 뒤에서 자네 뒤를 따라가고 있어. 남쪽으로 100보쯤 내려가면 오른쪽에 어두운 골목이 있으니 그리로 들어가. 들어가자마자 내 클록 뒤집어쓰고 무조건 달려. 골목이 꽤 길고 분기점도 대단히 많다. 오른쪽부터 시작해서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달려라. 그러면 꽤 소란스런 식당골목에 도착할테니 거기서 사람들 틈새에 섞여. 거기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운하변이다."
"감사합니다."
제네르의 약간은 목멘 소리였다. 그는 카렐이 시킨대로 골목으로 쓰윽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카렐은 이번엔 베네루스를 찾았다.
"셔틀은 옮겨놨지?"
"예. 저 혼자 타고있어서 그냥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도시 남쪽의 사설 정비소에 있습니다. 지금 충전중입니다."
"알았다."
할룩스를 끈 카렐은 입고있던 수트의 버클을 단단히 조이고 간단한 배낭과 자신의 대도를 등에 짊어졌다. 제네르가 사라진 골목 쪽에서는 수십여명의 병사들과 셔틀이 주변을 샅샅히 수색하고 있었다.
"슬슬 내가 나서야겠군."
수색하는 놈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제네르가 묵었다는 객실을 수색하러 올 것이 뻔했다. 카렐은 빠른 걸음으로 자신들이 묵었던 105층 객실로 뛰어내려갔다. 달아난 네페티 부인과 부하들의 안전을 위해, 이제 자신이 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였다.
105층으로 뛰어내려온 카렐은 객실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아니나다를까 객실 쪽을 향해 다가오던 이십여명의 제후군 병사들과 가디언들이 계단에서 막 뛰어나온 카렐 바로 코앞에 떡하니 모습을 나타냈다.
"뭐야!"
그들이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보란 듯 방향을 홱 돌린 카렐은 다시 계단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제후군 지휘관이 큰 소리로 보고를 올리는 것이 들려왔다.
"녀석들의 수괴를 찾았다! 지금 계단을 통해서 104층으로 내려간다!"
계단실에 뛰어든 카렐은 계단 난간을 넘어 아랫층으로 그대로 뛰어내렸다. 병사들이 아무리 발이 빨라도 한 층씩을 뛰어내려가는 카렐을 쫓을수는 없었다.
"계단실 차단해! 아랫층에서 대기하란 말이야!"
카렐은 계단실에서 빠져나가는 문들이 일제히 잠기는 소리를 들었다. 녀석들이 이미 건물의 통제실을 점거한 모양이었다.
"바보같은 놈들,"
순식간에 90층까지 내려온 카렐은 밑에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미 밑을 차단한 모양이었다. 주의를 끌려면 최대한 요란스럽게 달아날 필요가 있었다. 카렐은 이번엔 90층 계단실 문을 향해 돌진했다. 합성수지와 얇은 금속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문은 단 두번의 타격만으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맥없이 부서져 버렸다.
"이건 네피녀석 스타일인데,"
90층은 스위트룸들이 있는 초고층부와는 달리 작은 객실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는 곳이었다. 객실들 사이를 엄청난 속도로 달려 중앙부로 빠져나간 카렐은 이 원형 호텔건물 중앙의 엘리베이터가 지나가는 큰 보이드로 다시 몸을 날렸다. 110층 꼭대기까지 뻥 뚫려있는 이 보이드를 '날아오른' 카렐의 까마득히 밑으로 1층의 로비의 실내정원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5층을 떨어진 카렐은 다시 반대편의 85층 난간을 한 번 박차며 몸을 한바퀴 올려 바닥에 사뿐이 내려앉았다. 그 충격을 받아낸 난간의 금속제 프레임 한쪽이 요란스런 충격음을 내뱉으며 잔뜩 우그러져 있었다. 뒤늦게 90층까지 카렐을 따라 달려나온 플레렌 가 가디언들이 난간 너머에서 머리를 내밀고 당혹스런 얼굴로 카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할, 저놈 사람이야?"
허리의 주머니에서 두꺼운 금속장갑을 꺼내 오른손에 낀 카렐은 난간을 박차고 다시 뛰어올라 이번엔 엘리베이터 샤프트를 붙들고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갑과 샤프트의 금속 사이에서 소름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노란 불꽃이 일었다.
멀리 아래 1층 로비에 새카맣게 모여들고 있는 제후군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샤프트에 긁힌 카렐의 겨드랑이에서 피가 솟았다.
"이익,"
다시 밑을 내려다본 카렐은 새카맣게 모인 제후군 병사들 중간에 서서 매서운 시선으로 위를 올려보고 있는 코리온의 얼굴을 똑똑히 분간해낼 수 있었다. 카렐이 손아귀에 힘을 꽉 주자 제동이 걸리며 귀를 찢는 마찰음과 함께 노란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내려간다면 로비에서 대기하는 저 수백의 병사들 한중간에 내팽개쳐지는 셈이었다.
밑에서 카렐을 올려보던 코리온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카렐의 생각을 눈치챈 듯 함께온 제후군 지휘관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바깥을 지켜라. 빨리. 5, 6층 아래에서 유리창으로 통하는 복도를 모두 차단해라."
5층에 멈춰선 카렐은 새카맣게 그을린 장갑을 벗어던지고 다시 복도로 뛰어들어 달리기 시작했다. 코리온의 명령에 이곳으로 달려올라오던 병사들 십여명이 카렐의 앞을 가로막으려 어깨를 맞대며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은 놀리듯 벽을 박차고올라 그들의 머리 위를 그대로 뛰어넘어 지나가버렸다. 병사들은 너무도 황당한 상황에 잠시 ㅤㅉㅗㅈ아갈 생각도 잊은 채 카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됐다!"
멀리 대형 유리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낭에서 작은 금속 말렛을 꺼내든 카렐은 창을 향해 있는힘껏 집어던졌다. 꽤 두꺼운 보안유리의 중간에 말렛이 박히면서 사방으로 크랙이 가기 시작했다. 카렐은 왼팔로 눈을 가리며 금이 간 5층의 큰 창을 향해 힘껏 몸을 던졌다.
운하를 향해 정신없이 달아나던 제네르는 뒤로 보이는 109층 호텔에서 요란스런 경보음이 울리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 고집불통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문득 자리에 멈춰선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호텔건물을 올려보았다.
"제발......무사하셔야 할텐데......"
그는 이미 시끄러운 식당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크지않은 길을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식료품점과 식당들에서는 사방에 호객꾼이 넘쳐나고 있었고 저녁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뱃속을 해결하러 나온 사람들로 발디딜틈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펠라펠 샌드위치 하나 주세요."
호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네 명의 경비병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눈치챈 제네르가 급히 길가 노점 쪽으로 몸을 돌리며 동전을 내밀었다. 제네르의 등뒤를 지나 달려간 그들은 호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이곳의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모두 저곳으로 집결하라는 말 같았다. 노점상 주인은 반쪽짜리 피타에 튀김과 야채 약간을 끼운 싸구려 샌드위치를 제네르에게 내밀었다. 제네르는 카렐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채 큰 샌드위치를 우걱거리고 씹으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먹고있는 사람들 중간에 섞여 짐짓 태연하게 북쪽을 향해 걸었다.
"제길!"
호텔을 포위한 병사들의 위를 뛰어넘어 바닥에 '굴러 떨어진' 카렐이 왼쪽 팔꿈치와 머리를 감싸쥐었다. 유리는 생각외로 꽤 단단했다. 말렛으로 이미 절반 부순 상태였지만 그곳을 뚫고지나가던 카렐의 팔꿈치를 망가뜨리고 머리를 찢어놓을 정도의 강도가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심한 부상을 입은 채 5층에서 떨어진 카렐은 제대로 착지하지도 못한 채 바닥에 꼴사납게 딩굴고 말았다.
반뼘이 넘게 찢어진 이마에서 살점이 덜렁거리고 피가 흘러내려 눈앞이 분간조차 되지를 않았다. 손으로 대강 피를 털어낸 카렐은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쫓아오는 병사들과 가디언들의 모습에 서둘러 북동쪽을 향해 비틀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도시 동남쪽의 불꺼진 공업단지를 지나던 우베는 텅 빈 공장들의 음침함에 치를 떨며 푸아킨 경의 팔을 붙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혹시나를 대비해 그의 한손은 허리에 찬 쿠크리의 자루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물론 싸움 따위에 그다지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보따리장사 시절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배운 간단한 공격동작 몇개정도는 할 수 있었고, 별볼일없는 깡패 하나 정도는 잡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한번도 그 믿음을 실전에서 확인해본적은 없지만.
"왜 하필 우리한테만 싸움꾼을 안붙여준거야. 이건 정말 사람차별이야."
우베가 혼자 투덜거렸다. 처음엔 자이납이라도 붙여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카렐의 태도로 보아선 자이납이 찌른 유학자는 보통 거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시한폭탄을 데리고 다니며 목숨을 재촉하는 것도 어쨌든 달가운일은 아니었다. 제네르 경이야 제 앞가림 혼자 잘 할 사람이고 시로와 발리가 따라붙은 네페티 부인은 뭐 수십명이 달라붙어도 끄떡없을 것이 확실했다.
"사람이 정말 없군. 싸움꾼을 붙여줄 필요가 없으리라는 걸 예상하셨을게야. 이런 곳을 한밤중에 귀족 부부가 지나가는것도 웃기지 않겠나. 고급주택가를 걷는것이 어울리지."
우베의 끝도없는 불평에 푸아킨 경이 웃음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압니다. 그냥 해 본 소리라구요. 뭐, 네페티 부인이 부러워서 그런 게 아니고......"
우베가 입을 삐죽거렸다.
공업지역을 지나 낮은 야산 두 개를 힘들게 넘어간 그들의 눈에 카렐이 말한대로 약간 비탈진 목장인 듯 한 초지가 나타났다. 결국 새벽이 가까와오는 이제서야 라호르 시를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우베가 목장의 난간에 기대앉으며 퍽퍽해진 다리를 두들겼다. 그의 옆에서 숨을 고르며 물을 마시던 푸아킨 경의 허리에 달린 할룩스가 갑자기 반짝거리고 있었다.
"응? 뭐지?....."
"전하이신가봅니다."
우베가 불안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건성 중얼거렸다. 생각없이 할룩스를 작동시킨 푸아킨은 갑자기 나타난 레곤 대공주의 형상에 기겁을 하고 놀라며 바닥에 엎드렸다.
"대공주저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쉿! 조용히하게, 지금 경비병 한놈이 이걸 깜박 놓고가서 그걸로 통화하는거야, 나 지금 쿤샨이라는 곳에 있네, 북극해 중간의 무슨 섬 같아.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어. 여긴 섬 남쪽 조그만 만 안쪽에 흰색 오두막일세."
"알겠습니다, 대공주저하, 소인이 꼭 모시러 가겠습니다. 지금 카렐......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오늘중으로 꼭 모시러 가겠습니다."
푸아킨이 맨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기쁨에 넘쳐 대답하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는지 대공주가 급히 통신을 끊어버리고 있었다.
"이제야 됐군!"
푸아킨 경이 새벽하늘을 올려보며 간만에 큰 웃음을 지었다.
카렐의 지시대로 네페티 부인과 발리를 호위하고 도시를 빠져나온 시로는 서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밤새 한숨도 못잔 데다가 장시간 쉬지않고 걷느라 많이 지친 네페티 부인은 발리의 건장한 등에 업혀 깜박깜박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할룩스가 울리고 있음을 깨달은 시로는 급히 작동 스위치를 눌렀다.
"잘 도착했군."
할룩스에서 나타난 제네르의 밝은 모습에 시로와 발리가 동시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동시에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카렐의 명령대로 이미 저수지에 도착한 듯 인적이 드문 물가에 서 있었다.
"우베하고 유시프 장군도 잘 도착한 모양이야. 유시프 장군은 처형장에 널려있는 시체들 덕택에 밤새 사색이 다됐더군."
"전하께는 연락 없습니까?"
"걱정스럽게도 아직 없네. 우리들을 위해서 제후군들을 북서쪽으로 유도하신 것 같던데.......지금 숨어계실 가능성이 높으니 연락 못하시는 것도 이상한일은 아니지. 어쨌든 전하 지시대로 그 위치에서 꼼짝말고 잘 숨어들 있게나."
"알겠습니다."
어느새 입이 귀에 걸린 발리를 한 번 흘겨본 시로가 별로 안어울리는 미소를 띠어보이며 힘있게 대답했다.
++++++++++++++++++++++++++++++++++++++++++++++++++++++++++++++++++++++++++++++++++++++++++++
오늘 올린 건 모두 좀 많이 기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