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32화 (132/1,132)

< -- 132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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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카렐 일행이 묵었던 호텔방 거실에 앉아 멀리 서쪽하늘을 바라보던 코리온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하심 예킨터스 교수와 함께 들어온 두겐 공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어쨌든 특이한 녀석들이네 그려. 돈이 없어 팔찌를 팔 정도의 녀석들이 하룻밤에 100골드나 되는 이런 방에 묵고있었다니."

코리온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또다시 카렐을 놓친 두겐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녀석 뚫고나간 창을 보니 부상이 이만저만 아니었겠더군. 녀석 착지했던 곳 바닥도 피가 번져있고......쯧쯧......천박한 가디언 녀석이지만 그 초인적인 능력엔 감탄할수밖에 없겠어."

엉뚱한 소리만 해대는 것을 보아 학장이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님이 확실했다. 듣다못한 두겐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제 불찰이옵니다......오늘이라도 도시를 이잡듯이 뒤져서......"

"됐네."

코리온이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막 떠오르려는 서쪽의 아침해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 도당들이 사방팔방 흩어졌을테니 그들 중 한둘을 잡은들 무슨 소용이겠나. 이곳의 수색은 중단하고 모두 철수하게나."

"하, 하지만......제 가문 사람인 샤드니가 다쳤으니 당연히 응징을......"

코리온이 문득 두겐을 흘겨보았다. 그의 꿈틀대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한 두겐이 얼굴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고개를 숙여붙였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샤드니 경 상태는?"

코리온이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물었다.

"방금 전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칼날이 희한해서 내장기관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합니다. 며칠은 요양해야 할 듯 합니다."

"루쿠스탄 공략에 지휘관으로 삼으려 했더니.....후."

코리온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는 떨고있는 두겐의 옆을 지나 객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두겐이 그의 등뒤에 대고 변명같이 말을 늘어놓았다.

"저희 제후군 최고의 명장인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지휘관으로 참가하니 큰 염려 없을것이옵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코리온이 자리에 우뚝 멈춰서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내가 잡을테니 자넨 이제 손을 떼게."

밤새 제후군들과 슬럼가를 넘나들며 숨바꼭질을 하던 카렐은 밀주 제조공장인 듯 싶은 한 낡은 건물의 천장에 숨어있었다. 바로 이틀 전에 이어 또다시 피를 많이 흘린 카렐은 과다출혈로 거의 탈진해가는 상태였다. 먼지가 가득히 앉은 낮은 천장 틈새를 엉금엉금 기어간 카렐은 작은 환기창으로 머리를 삐끔히 내밀었다.

"어디들 갔지?"

밤새 병사들이 오가던 길가가 무슨 일인지 썰렁했다. 수색셔틀이 돌아다니던 공중에도 가끔 민간셔틀이 날아다닐 뿐 특별한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벌써 물러났나?"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대한 정신을 추스린 그는 할룩스를 집어들고 베네루스를 찾았다.

"아직 거기있나?"

"예! 무사하셨군요! 방금 통제가 풀렸습니다. 모두 물러난 듯 합니다."

"벌써? 이상하군, 너무 이른데....."

카렐이 숨을 고르며 더러운 천장에 맥없이 드러누웠다.

"어쨌든 이쪽으로 좀 와주겠나? 내가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어."

베네루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겨우 셔틀에 올라탄 카렐은 얼굴의 피도 닦을 새 없이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우며 뻗어버렸다. 그는 도시 남쪽 사막에서 기다리던 네페티 부인이 셔틀에 올라탈때도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도로 감아버렸을 따름이었다. 얼굴부터 목까지 완전히 피로 범벅이 된 카렐의 모습에 경악한 네페티 부인은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다가 그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

"이마가 많이 찢어지셨군요. 이분께 큰 상처는 아니지만 출혈이 문젭니다. 이틀 전에도 피를 ㅤㅁㅣㄶ이 흘리셨는데......요즘 몸도 많이 상하신 분이......"

시로가 거의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카렐을 바닥에 똑바로 눕혀주고는 따뜻한 모포로 몸을 감싸주었다. 다시 출발한 셔틀은 도시 외곽 곳곳에 흩어진 일행들을 차례대로 모두 태웠다.

마지막으로 올라탄 제네르는 또다시 다친 카렐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검은 망토를 내밀며 밝게 웃어보이던 그 '장태자'는 이제 의식조차 희미해져있는 상태였다. 제네르로서는 이제 위험한 시기는 다 넘어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디 약품상이라도 덮쳐서 혈액앰플을 훔쳐올까요?"

시로의 제안에 제네르가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미쳤어? 전하는 보통 피로는 수혈 못받으신다구."

"보통 피요? 그럼 특별한 피는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우베의 당연한 질문에 제네르가 그의 담요를 여미어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리쿠 학장한테 가서 피 얻어올 수 있으면 좀 얻어와."

제네르의 말도안되는 대답에 자이납이 그다지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큭 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좋아. 이제 다 끝났어. 헤게보스 터미널 부근으로 가서 화물선 출발할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이곳만 빠져나가면 곧바로 루쿠스탄의 페로 경 영지로 갈 수 있을테니까 거기서 제대로 치료받으실 수 있을거야."

"저, 어,"

푸아킨 경이 약간 쭈삣거리며 제네르에게 말을 걸었다.

"북극해의 쿤샨이라는 섬에 잠깐 들르면 안될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렐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제네르가 명령권자였다. 그동안 단 하루도 제대로 지나갔던 일이 없었던지라 가뜩이나 신경이 잔뜩 곤두선 제네르가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

"레곤 대공주저하께서 그곳에 계시답니다."

새파랗게 젊은 제네르의 눈치를 연신 살피는 푸아킨의 모습을 보다못한 우베가 끼어들었다.

"새벽에 대공주저하께 연락이 왔습니다. 그곳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제네르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대공주를 돕는것은 고사하고 지금 있는 일행을 하루동안 건사하는것도 이만저만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카렐을 돌아보며 저으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들인 리쿠 학장이 잘 모시고 있을텐데 무슨 걱정이랍니까. 학장이 어머니를 해칠 인물도 아니고.....일단은 떠나는 게 낫겠습니다."

"병사들에게 억류되어 계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하고 계십니다. 제발 한번만 청을 들어주십시오."

푸아킨 경이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 제네르에게 고개까지 숙이며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네르는 사뭇 냉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이라 하셨습니까?"

"예."

"새벽에 갑자기 녀석들이 빠져나간 게 수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리쿠 학장이 이곳에 직접 오기까지 했는데?"

우베가 그제서야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제네르가 푸아킨 경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함정일지 모릅니다."

"대공주저하께서 그러실 분으로 보이십니까?"

푸아킨 경이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제네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방금전과 다름없는 톤으로 대꾸했다.

"대공주저하는 리쿠 학장의 친어머니이십니다, 공모하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공모하지 않으셨더라도 아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셨을수도 있는 겁니다."

"코리온 도련님은 그렇게까지 치졸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코리온을 변호하려는 푸아킨의 태도에 발끈 한 제네르가 그에게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

"치졸한 양반이 아니시라구요? 그래서 손님이랍시고 유학자들을 불러다놓고 40명이 넘게 학살했습니까! 네페티 부인을 사막으로 쫓아낸 배후가 누군지는 아시죠? 메디스 시에서 수백을 학살한 건 그럼 누구죠? 그리고, 경께선 아시겠군요, 따지고보면 주페 태자를 죽게 만든데도......"

"그건......"

푸아킨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만하지 못하나."

셔틀 안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둘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카렐이 둘을 한번씩 노려보자 그들이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카렐은 머리가 어지러운 듯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아직도 멎지 않았는지 새로 감은 붕대도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푸아킨 경, 말씀해보십시오. 대공주저하께서 직접 연락하셨습니까?"

"예. 해안가의 구체적인 위치와 집 색깔까지 알려주셨습니다. 경비병들 때문에 지금까지 연락을 못했다고 하십니다. 제게 일반통화가 아닌 코드통화로 보내셨고 무척 겁에 질려계신 모습이셨습니다. 경비병이 온다고 서둘러 끊으셨습니다."

"전하. 함정에 틀림없습니다. 가시면 안됩니다."

제네르가 힘을 주어 말하자 카렐이 힘든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확률은 반반이야."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리쿠 학장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어머니를 이용해서 그런 수작을 벌일 인물이 아니란 데는 어느정도 동감이네. 도움을 청하는 대공주저하를 놓고가는것도 조카로서 할 도리가 아니지."

카렐이 아직 정신이 온전치않은지 눈을 한 번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카렐의 말에 푸아킨 경이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네르가 약간 답답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반반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함정일 가능성도 꽤 높아. 나도 아네. 영문을 모르실 대공주저하께 할룩스를 일부러 흘려놓고 연극을 벌였을수도 있고, 일부러 그 후에 그분을 다른데로 옮겨놓고 정작 그 집에는 병사들을 매복시켜놓고 기다릴수도 있어."

카렐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푸아킨 경과 제네르 경 둘 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건 양자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렐 역시도 판단에 확신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문제는 푸아킨 경이었다. 그는 옛 북부 출신이지만 지금 이순간은 틀림없는 대공주 사람이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대공주가 억류되어있는 장소까지 알면서도 카렐 일행이 방치했다는 사실이 나중에라도 대공주에게 알려진다면 종친회를 장악하고있는 대공주가 나중에 그에게 좋은 감정을 보일 턱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카렐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일단 그곳에 가긴 해야겠지. 대신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거야. 시로, 자네가 이번엔 내 대신 움직여줘야겠군."

"알겠습니다."

대공주가 말한 흰색 오두막은 쿤샨 섬 남쪽의 좁은 만을 둘러싼 모래사장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습 전 미리 3시간이나 주변을 세세하게 정찰한 시로는 이 행성의 건조한 사막만 보아와서인지 조용하고 온화한 날씨의 이곳 해안가가 도리어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만을 빙 둘러 푸른 활엽수림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고 오두막 앞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조잡한 선착장과 작은 보트 한대도 매여 있었다. 코리온이 자기 어머니 모실 곳이라고 나름대로 꽤 신경써서 찾아낸 해안 휴양지인 모양이었다. 맑고 푸른 하늘에는 군데군데 새털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셔틀에 대기중인 제네르로부터 진입하라는 지시를 받은 시로는 빠른 걸음으로 흰색빛의 흙벽 오두막 뒷켠으로 잽싸게 접근했다. 양쪽 날개를 맡은 자이납과 발리가 오두막 양옆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거려보였다. 그들에게는 집 밖을 지키는 6명의 경비병들을 상대하는 임무가 맡겨져 있었다.

집 안에 보이는 정규군 보병 4명 정도 잡는 일은 특급 중에서도 최고수준에 속하는 시로에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창 안으로 힐끗 돌여다보니 방 한쪽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레곤 대공주의 유난히 비둔한 몸이 그대로 들여다보였고 병사 2명은 방문 양옆에, 2명은 등받이의자에 기대앉아 자고 있었다.

뒤로 몇걸음 물러난 시로는 그대로 좁은 창을 부수며 그 안으로 몸을 날렸다.

"뭐야!"

깜짝 놀란 경비병들이 대뜸 칼을 휘두르며 시로에게 달려들어왔다. 하지만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시로의 짧은 도끼가 도리어 빛을 발하기는 유리했다. 첫번째로 달려들던 녀석을 단검을 던져 그자리에 꼬꾸라뜨린 시로는 두번째로 달려든 녀석의 이마를 도끼로 내리찍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나 허겁지겁 칼을 집어들려던 녀석은 제대로 공격한번 못해보고 시로의 손에 목이 비틀려 죽어버렸고 네번째 녀석 역시 시로가 한손으로 휘두른 도끼에 목이 잘려 날아가버렸다.

"대공주저하, 무사하셨습니까?"

시로가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레곤 대공주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는 급히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공주는 오랫만에 보는 아는 얼굴에 감격했는지 시로의 손을 꼭 붙들었다.

"정말로 와줬군!"

"카렐 님의 분부로 왔습니다. 빨리 이곳을 떠야겠습니다."

대공주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오두막에서 빠져나온 시로는 할룩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 와 주십시오! 대공주저하를 구했습니다!"

대공주와 함께 셔틀을 기다리던 시로에게 양익을 맡았던 발리와 자이납이 허탈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새끼들 미쳤나봐요, 시로 님 나오시는 거 보더니 덤빌 생각도 안하고 정신없이 도망치던걸요. 덩치들도 꽤 괜찮던데."

숲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이납이 자기 시미터를 공중에 대고 괜히 한 번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멀리 전사단 셔틀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 식은죽먹기였네요. 헤헤."

자이납이 킬킬거리며 자기의 시미터에 침을 퉤 뱉고는 옷소매로 쓱쓱 닦았다.

"괜한걱정 했었나본데, 매복한 놈들도 없고. 자기무기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시로가 눈에 낀 스코프의 필터를 조절하며 오두막을 빙 둘러싼 숲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엔 매복한듯한 적병들도, 다른 집들도, 특별이 신경쓰이는 지형지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섬 반대편에 숨어있던 셔틀이 해안가 고운 모래사장에 내려서고 있었다. 시로가 대공주의 손을 잡고 착륙하는 셔틀에 다가갔다. 셔틀의 랜딩보드가 무게에 눌렸는지 고운 모래 속에 적어도 무릎 깊이로 움푹 파묻혔다.

"헉!"

시로가 기겁을 하고 놀라며 대공주를 껴안고 뒤로 물러섰다. 귓청을 때리는 충격음과 동시에 함께 모래 속 부비트랩에서 튀어나온 와이어가 셔틀의 앞쪽 랜딩보드를 순식간에 얽어버렸다.

"제기랄! 함정이다!"

대공주를 자이납과 발리에게 맡긴 시로가 급히 달려가 와이어를 있는 힘껏 도끼로 내리찍었지만 그 위력에도 불구하고 바깥쪽의 몇 가닥이 잘려나갔을 뿐이었다. 당황한 시로가 조종석에 대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베네루스! 절단기 가져와 ! 빨리! 빨리!"

"삼일만이군, 시로."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시로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플레렌 가 제후군 복장의 초록색 눈동자의 건장한 병사 하나가 갑주를 벗어던지며 시로에게 빙긋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베흔을 뒤따라운 나머지 녀석들 역시 대장을 따라 입고있던 갑주를 벗어던졌다. 모두 황금색 팔찌를 한, 근위대소속 고급가디언들이었다.

"저놈들.......방금 달아난 병사들이었는데....."

자이납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칼을 치켜들었다.

"이런 망할,"

시로가 이를 악물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미 이곳을 떠난 줄로 생각했던 근위대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건 카렐조차도 생각못한 뜻밖의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셔틀을 잡기위한 제후군의 자기무기나 제후군들의 매복 정도를 생각했던 일행은 모래속에 셔틀을 잡는 부비트랩을 묻어놓는다는 저들의 황당한 발상에 순간 당혹해하고 있었다.

왼쪽의 베흔과 오른쪽의 쿠베, 그리고 나머지 4명의 녀석들도 모두 최하 3등급 이상의, 낯익은 얼굴들이었고 그들 중 하나는 지난번에 카렐이 목숨을 걸고 구해냈던 루토였다. 셔틀이 못움직이는 이상 달아날 구멍은 없었다. 시로의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제네르와 유시프 장군, 힐거 장군, 오난 장군까지 모두 칼을 뽑아들고 셔틀 입구를 막아섰다.

"남쪽에서 다른 셔틀이 접근합니다!"

절단기를 들고 달려나오던 우베가 큰 소리로 외쳤다. 베흔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쩌나, 자네가 와이어를 끊으려고 몸을 돌리면 우리 부하들이 네 똘마니들을 때려잡을텐데."

중간에 낀 대공주와 푸아킨 경이 뜻밖의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베흔이 여유만만하게 두 팔을 활짝 벌려보였다.

"어때? 날 잡으러 덤벼보게나. 나머지 가디언 다섯이면 똘마니들 모가지 다 떨어뜨리는 건 5초도 안걸려. 카렐 녀석은 어디갔지? 셔틀 안에서 깨진 대갈통 붙들고 낑낑대고 계시려나? 리쿠 학장님께서 놈이 많이 다쳤을거라 하시더니, 정말이었군."

시로가 움찔 하고 놀랐다. 베흔과 리쿠 학장이 손을 잡은 것 같다는 황당한 예상, 아니 사실이 일행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이들이 머뭇거리는 새 남쪽에서 날아온 작은 셔틀이 오두막 옆에 착륙하고 있었다. 아무 표시도 없는 그 작은 셔틀의 조종석에서 내려서는 사람은 다름아닌 검은 무명포 차림의 코리온이었다. 유시프 장군을 비롯한 서부출신 사람들의 표정이 그의 등장에 창백하게 얼어붙어버렸다. 베흔에게 다가간 코리온이 손뼉을 짝짝 치며 웃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사냥도 해본 녀석이 잘하는군."

너무도 청아한 그의 목소리가 일행에게 오늘처럼 소름끼치게 들려본 일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학장님께서 도와주신 덕이죠."

베흔이 키득거리며 냉큼 대꾸했다.

"문안인사 늦어 죄송하옵니다. 어머님."

코리온이 모래바닥 위에 엎드리며 전사단 일행중에 함께 서 있던 어머니 레곤 대공주에게 절을 올렸다. 대공주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 대책없는 맏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때? 항복하는 게 현명할걸."

베흔이 모두를 죽 돌아보며 놀리듯 중얼거리자 시로가 침을 퉤 뱉었다.

"항복 좋아하시네."

"저 쓸데없는 큰소리하고는. 훗, 다 사로잡아다가 황궁 앞에서 껍질을 벗겨 죽여버려야겠다."

베흔이 시로를 향해 자신의 플람베르쥬를 거칠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근위대원들이 일제히 이쪽 일행에게 돌진해 들어왔다. 쿠베는 바로 앞에 있던 자이납의 칼을 힘껏 후려쳤다. 그의 거센 공격을 막아보려던 자이납의 낙타병 시미터가 쿠베의 공격 한번에 그대로 산산조각나며 부서져 버렸다.

"으익,"

칼이 부서진 자이납은 쿠베의 발길질에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으며 한참을 날아가 얕은 물 속에 나딩굴렀다. 유시프 장군을 비롯한 제후군 지휘관들도 무기를 들고 거칠게 저항했지만 역시 가디언의 상대는 아니었다. 급소를 한대씩 얻어맞은 그들은 맥없이 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베흔에게 거칠게 저항하던 시로는 뒤에서 들린 제네르의 신음소리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쿠베의 칼자루에 아직 상처가 덜 낫은 배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제네르가 그대로 자리에 무릎꿇고 있었다.

"신경을 어디다 팔고!"

베흔이 시로의 도끼날을 자신의 칼날에 끼워넣고는 손목을 확 비틀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 시로가 손목에 힘을 주어 도끼를 반대로 비틀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시로의 손에서 미끄러져나간 도끼가 바닥에 맥없이 떨어져버렸다. 베흔의 파란색 칼날이 시로의 목을 똑바로 겨누자 나머지 근위대 가디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꽁꽁 묶어버렸다.

"쿠베, 따라들어와라."

베흔은 곧바로 셔틀 안으로 뛰쳐들어가 입구에서 어물대던 우베를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셔틀 안쪽에는 아직까지 카렐을 돌보아주던 네페티 부인이 겁에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제발......제발,"

부인이 억지로라도 일어나려 버둥대고 있던 카렐을 몸으로 감싸며 베흔을 막아섰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황제령에 돌아가시죠."

베흔이 부인의 팔를 거칠게 나꿔채자 쿠베가 누워있던 카렐의 멱살을 붙들고 땅에 질질 끌며 셔틀 밖으로 나섰다.

"훌륭하군. 정말 훌륭해."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코리온이 또다시 가볍게 박수를 쳤다. 베흔의 손에 강제로 끌려나온 네페티 부인은 처참한 몰골로 늘어져있는 전사단 사람들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자신의 손을 붙들고있는 베흔을 원망스런 표정으로 올려보았다. 굵은 쇠사슬로 카렐의 손발을 묶은 쿠베가 그를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그대로 내팽개쳤다.

"다 묶어서 이리 끌고와. 저어기, 물에 처박힌 년은 뒈진거야?"

베흔의 명령에 쓰러진 자이납에게 다가가 발로 뒤집어본 가디언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말았다. 자이납의 입 안에 가득히 고였던 덩어리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시민'이라면 가디언에게 당연히 느껴져올 그 특유의 생체자극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쿠베 대장님 시민한테 좀 심하셨군요. 내장이 터져버린 모양입니다. 완전히 갔네요."

피를 줄줄 쏟는 자이납을 도로 물 속에 내던진 가디언이 피묻은 손과 신발을 물에 대강 닦고는 베흔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전사단 사람들에게 쏠린 그 때, 입에 물고있던 부서진 칼날을 뱉어낸 자이납이 바닷물 속으로 조심스레 기어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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