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3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
.
.
카렐이 눈을 조금 치켜뜨며 코리온 앞에 서 있는 레곤 대공주쪽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아들이 해 놓은 짓의 결과물을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대공주의 표정이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으로 일그러들어 있었다.
"망할 자식!"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코리온의 뺨이 한쪽으로 홱 돌아가 버렸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뺨을 얻어맞은 그의 왼쪽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네놈이 감히 어미를 미끼로 삼아서 이런 망할 짓을 저지르다니! 네놈이 도리를 공부한 유학자 맞느냐! 이 망할 놈!"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레곤 대공주가 아들의 뺨을 다시한번 거칠게 후려쳤다. 하지만 코리온은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 똑바로 서서 어머니의 매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소자를 때려서 속이 시원해지신다면 백대 천대라도 못맞겠사옵니까."
아들의 황당한 대꾸에 기가막혀진 대공주는 더 때리고싶은 마음까지 싹 사라져버렸는지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대공주의 옆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던 푸아킨이 결국 쓰러진 카렐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두 제 탓입니다, 제가 쓸데없이 고집을 피워서......제 잘못입니다."
카렐은 고운 모래 위에 몸을 뻗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에게 다가온 코리온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진짜 얼굴이 이랬던가? 훗.....명성하고는 별로 안어울리게 생겼군."
"약속사항은 알고 계시겠죠? 리쿠 학장님?"
베흔이 자꾸만 자신에게서 떨어지려는 네페티 부인을 거칠게 잡아끌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코리온은 여전히 카렐을 내려다보며 별로 성의없이 대답했다.
"자이나브 카메네이를 비롯한 서부 출신들은 내가 데려가고 황제령에서 온 녀석들은 자네가 데려간다?"
"잘 아시는군요. 하나가 빠졌지만."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역시 자네가 데려간댔지?"
그제서야 빙긋 웃음을 지은 코리온이 발밑의 카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녀석은 너무 위험하니 이자리에서 죽인다지 않았나?"
"어려운 일은 아니죠."
베흔이 칼자루를 움켜쥐자 카렐이 모든 것을 각오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온 푸아킨이 코리온의 검은 무명포자락을 급히 붙들었다.
"대군마마, 이분을 죽이시면 절대 아니됩니다! 어찌 혈육의 피를 보려 하십니까!"
"푸아킨 경, 내가 죽이려는 건 내 혈육이 아니고 천박한 가디언일세."
베흔은 엉뚱한 소리를 하는 푸아킨을 협박하려는 듯 한 번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함께온 다른 근위대 가디언들을 멀찍이 가라고 손짓하고는 이번엔 푸아킨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입닥쳐, 이 늙은이야."
하지만 푸아킨은 당장이라도 때려죽일듯한 그의 매서운 눈초리를 무릅쓰고 말을 이었다.
"이분은 선대폐하의 적장자이신 카렐 카파키 리쿠 장태자 전하이십니다! 바로 대군마마의 사촌동생이십니다!"
순간 눈을 부릅뜬 코리온이 칼을 뽑으려는 베흔을 손으로 막아섰다.
"뭐?"
"맞습니다! 이분은 세나우스 3세 황제폐하와 세네피스 황후폐하 사이에서 태어난 장태자이십니다!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계셨을 뿐입니다!"
듣고있던 코리온보다 더 놀란 건 뒤에 서 있던 레곤 대공주였다. 대공주는 쓰러져있던 카렐을 급히 품에 껴안았다.
"세상에, 사실인가? 푸아킨 경?"
"위험한 줄 알면서도 대공주저하를 모시러 오신 것도 조카로서의 도리 때문이셨습니다. 제발, 대군마마, 어찌 혈육이신 이분을 해치려 하십니까?"
"푸하하!"
잠시 멍 한 표정을 지었던 코리온이 갑자기 그답지않게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이런 즐거운 일이 있나......이것이 그 악녀 세네피스의 핏줄이란 말인가?"
"감히 네 큰어머니께 무슨 말버릇이냐! 악녀라니!"
카렐을 안고있던 레곤 대공주가 아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코리온의 눈가에서는 여지껏 단 한번도 보인 적이 없는 묘한 광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어머님, 태자들을 모두 죽게 만든 천하의 악녀가 바로 그여자입니다."
"또 그소리냐!"
코리온은 카렐을 가로막고있던 대공주를 거칠게 옆으로 밀어내고는 카렐의 멱살을 확 움켜쥐었다. 부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오른팔에서는 글을 쓸 때나 드러나던 그 굵은 힘줄이 불끈 일어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카렐이 코리온을 올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코리온 오라버니를 고문하고 애인까지 죽인 원수는 지금 등뒤에 있는걸로 압니다만."
"드러난 사실 따위에는 관심없다네. 내 소중한 카렐 동생."
코리온이 빙긋이 웃음지었다. 애타하는 표정의 대공주가 다시 아들의 팔을 결사적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네 목숨을 살려주는 은사를 베푸신 게 바로 세네피스 황후시란 걸 모른단 말이냐!"
"절 살려주신 건 그 악녀가 아니고 주페 태자저하셨습니다. 어머님,"
대공주를 거칠게 떠밀며 자리에서 일어선 코리온이 카렐의 상처입은 이마를 발로 꾹 밟아 거칠게 문대자 고통을 느낀 카렐이 몸을 비틀었다. 시로가 엉터리로 꿰매준 실밥이 후두둑 튿어지며 이미 길게 찢어져있던 이마의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살이 찢기며 카렐의 흰 뼈가 드러나자 보다못한 대공주가 아들을 거칠게 떠밀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정의와 의리의 상징으로 여겨왔던 자신들의 학장이 보이는 뜻밖의 잔혹한 모습에 유시프 장군을 비롯한 서부출신들이 턱까지 파르르 떨며 경악하고 있었다.
"편하게 죽여줘서는 부족하겠군. 내 귀한 동생. 카렐 장태자."
"남을 설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은 더 강하다 했으니......오라버니는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셨구려......"
고통에 겨운 카렐이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코리온이 베흔을 향해 감정없는 밋밋한 투로 말했다.
"근위대장 마음대로 처형방법을 정하시구려. 가능하면 최대한 괴롭게 죽여주면 고맙겠는걸."
"기꺼이."
칼을 뽑아들고 카렐의 목을 겨누고있던 베흔이 갑자기 바닷물 쪽을 바라보았다. 파도하나 없는 잔잔하고 푸른 바다가 끝도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군.. 그 큰 상처들에 짠 소금물이 닿으면 나름대로 꽤 짜릿할거야. 수장시켜서 퉁퉁 불어오른 네놈 시체를 황궁 앞에 전시하는것도 재미있겠군."
베흔이 쇠사슬이 감긴 채 쓰러져있는 카렐의 멱살을 붙들고 선착장을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카렐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피의 흔적이 그려졌다. 꿇어앉은 네페티 부인이 옆에서 베흔의 다리를 결사적으로 붙들었지만 끄떡할 베흔이 아니었다.
"제발, 제발 근위대장님, 그동안 충분히 들볶지 않았나요? 이젠 제발 이애를 놔주세요, 제발, 그 어미의 죄가 아무리 크다고......"
"지금 놔주려 합니다. 부인."
베흔이 부인을 돌아보며 건성 말했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루토가 많이 심난한지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은 바로 사흘 전 메디스 시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적들 중간에 기꺼이 뛰어들었던, 그리고 보안국 시절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주었던 직속상관이기도 했다.
"잘가게. 카렐. 죽고나면 다시 건져주지. 그동안 미운정도 꽤 많이 들었는데."
선착장 끝에 선 베흔이 손발이 묶인 카렐을 물 안으로 힘껏 차 넣었다. 베흔을 끝까지 따라온 네페티 부인이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들을 말리지 못한 레곤 대공주가 울음을 터뜨리며 모래사장에 꿇어앉았다.
"황후폐하 얼굴을 앞으로 어찌 바라본단 말인가!"
바닷물 위로 카렐의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버둥거리던 카렐은 깊지않은 물 속으로 맥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은 선착장 끝에 꿇어앉아 질식해 죽어가는 카렐의 모습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져 있었다.
"시체는 적당히 불어오르고 나면 건져야겠군요."
밝은 얼굴로 코리온에게 돌아온 베흔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나머지 녀석들은....."
잠시 카렐의 일행들을 둘러보던 베흔의 귀에 갑자기 풍덩 하고 무언가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고개를 번쩍 든 베흔이 소리가 들려온 선착장 쪽을 급히 돌아보았다.
"부인!"
새파랗게 질린 베흔이 카렐을 빠뜨렸던 선착장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방금전까지 멍 한 얼굴로 물 속을 바라보고 있던 네페티 부인의 모습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부인! 부인!"
베흔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베흔은 그제서야 물 속에서 하늘거리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제기랄!"
네페티 부인이 물 속에 가라앉아있는 카렐의 목을 껴안고 입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사람 키를 조금 넘길 정도의, 그다지 깊지 않은 바닷물 속에 손을 뻗은 베흔은 물 속의 부인을 향해 팔을 최대한 멀리 뻗었다. 부인에게까지 손이 닿지 않자 또한번 짜증을 낸 베흔은 몸을 앞으로 더 기울으며 팔을 조금 더 내밀었다.
"아욱!"
선착장 및에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웬 손이 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베흔의 멱살을 힘껏 나꿔채 물 속으로 잡아채자 베흔이 그만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중심을 잃으며 물 속에 풍덩 빠져버린 베흔이 잠시 몸을 추스리는 새 선착장 기둥 밑 물 속에 숨어있던 웬 시커먼 녀석이 그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었다. 단검을 뽑아 반격을 하려던 베흔은 그제서야 자신의 단검집이 비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썅, 이놈 뭐야!"
베흔이 물 밖으로 가까스로 얼굴을 드러내고 숨을 들이쉬며 거의 비명 가까운 욕을 내질렀다. 베흔도 수영을 못하는편은 아니었지만 지상에서와 같이 몸이 자유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버둥대는 베흔의 앞뒤를 마치 물개처럼 능숙하게 오가며 단검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당황한 베흔은 급소로 날아오는 치명적인 공격만을 가까스로 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물 속으로 잠수해들어간 녀석이 베흔의 발목을 거칠게 움켜잡고는 물 밑으로 잡아당겼다.
"으, 으아악!"
물 속으로 끌려들어가던 베흔이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뒤늦게 달려온 쿠베가 물에 뛰어들었지만 베흔은 발목이 어딘가에 끼었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물 속으로 고개를 들이민 베흔은 피빛 바닷물 속에서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발목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카렐의 처절한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죽음과의 경계에 서 있는 소름끼치는 시선과 마주한 베흔의 가슴이 털컥 하고 내려앉았다.
"30년 경력의 해적맛좀 봐라!"
그제서야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자이납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코와 입이 물에 잠긴 베흔이 계속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자신의 뒤를 덮쳐오는 쿠베의 존재를 느낀 자이납이 잽싸게 물 속으로 잠수해들어갔다.
"뭐, 뭐야!"
자이납이 자신의 다리를 움켜잡자 당황한 쿠베 역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두 명의 특급가디언이 물 속에서 해적 출신의 절반 가디언 한명과 가라앉아 죽어가는 사람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 이 광경에 놀란 나머지 4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선착장에 몰려서서 당혹스런 얼굴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물을 잔뜩 먹고 버둥거리는 쿠베의 목에 단검을 들이댄 자이납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흥정 좀 할까? 아니면 누가 다음 차례로 또 물에 들어올래?"
"그, 그건....."
남은 가디언들 중 가장 상급자인 루토가 물을 많이 먹고 거의 질식해 죽어가는 베흔을 힐끗 바라보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판단이 늦으면 숨이 막힌 베흔이 그대로 익사해버릴 수도 있었다.
"너희 대장 발목은 지금 물밑에서 카렐 전하가 붙들고 있어. 아무리 버둥거려도 자기힘으로는 못뺄걸. 킥킥."
"이런, 망할,"
루토가 짐짓 어쩔 수 없는 척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조건은?"
"당장 셔틀을 놔줘. 잡은 사람들도. 그러면 네 대장님 발목을 놔주지."
이미 완전히 눈이 뒤집어져버린 베흔의 호흡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카렐 다음의 고수라 여겼던 자신들의 대장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건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루토가 옆의 하급자에게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빨리 시키는대로 안하고 뭐해!"
근위대 가디언들이 사로잡았던 전사단 사람들을 셔틀 안에 던져넣고는 개중에 가장 약해보이는 우베와 베네루스만 일단 풀어줬다.
"셔틀도 풀란 말이야!"
자이납이 째지는 소리로 재촉했다.
"대장님 발목부터 놔줘!"
루토가 핏대를 올리자 자이납은 베흔의 허리에 단검을 도로 꽂아주고는 이미 까무라친 그를 해안가 쪽으로 힘껏 차내버렸다.
"단검은 가져가, 플레렌 가 문장은 영 재수없어."
"대공주저하! 빨리 타십시오!"
갑자기 머리를 굴린 우베가 셔틀 문을 닫다 말고 큰 소리로 외쳤다. 대공주를 함께 태우고 간다면 저 정신나간 학장도 함부로 셔틀을 추락시키는 식의 미친짓은 못할 것이 확실했다. 레곤 대공주는 옆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아들의 얼굴을 문득 돌아보았다.
"내 황후폐하께 잘못을 빌고 돌아오마."
씩씩거린 대공주가 푸아킨 경을 동반하고 우베를 따라 셔틀에 올랐다. 해안가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있던 코리온이 눈을 매섭게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이곳을 절대 나갈 수 없으실 것이옵니다. 어머님."
대공주를 태우고 급히 이륙한 셔틀은 물 속에 가라앉은 카렐을 추스리고 있던 자이납 위에 일단 호버링상태로 멈춰섰다.
"부인! 부인!"
와이어를 타고 내려온 우베가 네페티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번이나 물 안팎을 오가느라 완전히 탈진해 흐느적거리는 네페티 부인을 자이납이 밀어올려주자 우베가 부인을 품에 꽉 껴안고 셔틀 위로 기어올라갔다. 물 속에 다시 뛰어든 자이납은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카렐을 어깨에 짊어지고 물 밖으로 뛰쳐나와 와이어 손잡이를 붙들었다. 물을 잔뜩 먹은 카렐도 이미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어휴, 무거워! 이러니 가라앉지,"
물 밖으로 빠져나온 카렐의 엄청난 체중에 자이납이 기겁을 하며 끄응 하고 힘을 주었다. 근위대 가디언들도 물을 먹고 의식을 잃은 베흔과 쿠베에게 물을 토하게 하고 인공호흡을 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카렐을 셔틀 위로 끌어올린 자이납 역시 거의 탈진했는지 그대로 셔틀 바닥에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제기랄, 오랫만에 하려니 이짓도 힘드네."
시로가 엎드린 카렐의 배를 몇번이나 힘껏 추켜올리자 거의 의식이 없던 카렐의 입에서 꽤 많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피를 많이 흘린데다가 물까지 잔뜩 먹은 카렐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변해있었다.
우베는 일단 묶여있던 사람들의 포박을 모두 풀어주고는 누워있던 자이납을 확 껴안았다.
"푸하하! 정말 대단해! 대단해! 세상에, 네가 베흔을 거의 잡았잖아!"
포박에서 풀려난 제네르도 활짝 웃으며 자이납의 지친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이녀석 기사단 들어오면 기수로 써줘야겠는걸."
"안돼요, 이앤 가디언부대 수색요원으로 쓸거라구요,"
시로가 자이납을 자기 쪽으로 잡아끌며 키득거렸다. 일행 모두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한번씩 축하인사를 받은 자이납은 시로의 가슴에 기댄 채 축 늘어져있는 카렐을 걱정스럽게 돌아보았다.
"정말 수고했다. 자이납."
조금이나마 의식을 되찾은 카렐이 자이납에게 힘없이 팔을 뻗었다. 그런 카렐의 손등에 이마를 가져간 자이납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카렐의 얼굴색을 다시 살피고 있었다. 그런 자이납에게 건재를 보이듯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인 카렐은 그의 텅 비어있는 칼집을 문득 돌아보았다. 쿠베에게 산산조각난 낙타병 제식 시미터가 들어있던 자리였다.
카렐이 지친 눈동자를 조금 움직였다.
"우베."
"예."
"뒤에 무기장 열면 왼쪽에 검은 상자 있다. 가져와봐."
"예? 그건 아무도......"
우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렐의 전용셔틀에 보관되어있는 이 검은 상자는 무슨 이유엔지 아랫사람들에게는 절대 손대서는 안되는 물건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머뭇거리며 가방을 들고온 우베가 카렐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처음으로 상자 '내용물'을 본 우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흑단과 백금, 가죽으로 만들어진 꽤 긴 그립 끝에는 사자머리가 섬세하게 조각된 폼멜이 있었고, S자 형패의 짤막한 너클보우를 겸한 가드는 훌륭하게 조각된 상아로 만들어져 있었다.
"네 낙타병 제식 시미터는 크기만 했지 쓸만한 물건은 아니더군. 이제 이걸 쓰도록 해."
자리에 꿇어앉아있던 자이납이 두손으로 칼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는 날을 뽑아보았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검은색 다마스커스 날 중간으로 는 긴 혈조가 패여 있었고 끝에는 짤막한 의사도가 붙어서 찌르기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누가보기에도 귀티를 풍기는 최고의 시미터였다. 한눈에 대단한 물건임을 깨달은 자이납이 할말도 잊은 채 잠시 멍 해져 있었다.
"대단하군요. 누가 쓰던거죠?"
칼을 본 시로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원래 주인은 황실 보건장관이었던 아센 경이었고, 그 뒤에 내가 빼앗았다가 내 첫 수제자녀석한테 줬던거다.....녀석이 어처구니없이 죽어서.....이젠 네가 쓰도록 해라."
전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깨달은 제네르가 조금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포프가 썼던 것이군요."
카렐이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자이납은 자신의 왼팔을 즉시 걷어 새 칼로 한 번 그었다. 윗사람으로부터 칼을 수여받는 사람이 복종의 뜻을 나타내는 일상적인 예법이었다. 자이납은 자신의 왼팔에 흐르는 피를 혀로 핥으며 활짝 웃어보였다.
"푸헤헤, 저도 언제 좋은 칼 얻어서 왼팔에 흉터 한 번 내보나 했는데, 역시 이쪽에 오길 잘했네요. 근데 이 흉터는 평생 안 지우는게 맞죠?"
입이 거의 귀에 걸린 자이납은 칼을 이리뒤집어보고 저리뒤집어보고 하며 난생 처음 가지게 된 명검에 잔뜩 들떠있었다.
"칼 부서지길 잘했어. 헤헤, 칼날도 씹을 수 있었고......"
"칼날을 씹었다고?"
우베가 소름이 끼치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되묻자 자이납이 아무렇지않게 입을 한 번 짝 벌려보였다.
"봐요, 열 군데도 넘게 나갔다구요. 옛날에 해적질할때 밑에놈이 가르쳐주더라구요. 이런 식으로 한 번 도망친 적 있다고. 피가 왕창 나서 속아넘어갈거라구요. 지난번에 시로 대장님도 그랬구요, 가디언은 숨을 멈추고 몸에 힘만 빼고 있으면 다른 가디언이 기척을 잡아내지 못할거라구요."
정말로 심하게 베인 상처가 널린 자이납의 입 안에서는 아직까지도 적지않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베가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쑥 내밀었다.
"엑, 됐어, 생기기는 이쁘장해갖고 도대체가 하는짓거리는......"
"헤헤, 이쁘다는 말이죠? 고마워요. 어휴, 근데 아프긴 되게 아프네."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자이납은 셔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감을 익히기 시작했다.
"하는짓만 고상하면 괜찮은 남자 소개시켜주려고 했더니만."
우베의 농담인지 진담인지에 자이납의 눈에서 반짝 하고 빛이 뿜어나왔다.
"누군데요? 지난번 제가 찌른 그 유학자만큼만 생겼으면 대환영인데? 음음, 아니면......리쿠 학장님 정도면 무지 미남이시잖아요? 뭐, 우리하고 관계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큰 키에, 쫙 빠지신 몸매에,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에 그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는.....캬아~세상에 그리 섹시하실수가."
자신이 찌른 사람이 코리온과 무슨 관계인지 알 턱이 없는 자이납은 난생처음 실제로 본 그 대단한 리쿠 학장의 모습에 그가 적이었다는것도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피아도 구별못하는 자이납의 황당한 '밝힘증'에 너무나 기가막혀진 우베가 등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꿈도 크셔, 대공주저하한테 가서 큰며느리 삼아달라고 부탁해봐. 또 혹시 알아?"
우베는 카렐의 손을 꼭 붙들고 간곡하게 말하고 있는 레곤 대공주를 힐끗 돌아보았다. 아들의 잘못을 제발 용서해달라 부탁하고 있는 대공주의 모습은 도망쳐버린 6명의 며느리들을 붙들 때와 마찬가지로 안되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세네피스 황후의 가장 친한 친구로 알려진 그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이 황후 귀에 들어가면 꽤나 난처해질것은 뻔한 일이었다. 카렐은 그런 대공주에게 계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었다.
"하아.....솔직히 내가 어쩔수없이 찌르긴 했지만 그 금발남자도 정말 미남이었는데.....아까워라.....앞으로 평생 그런 남자 한번이나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을거야."
제네르가 여전히 딴생각에 빠져있는 자이납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내밀며 웃어보였다.
"여기만 나가면 이번엔 페로 경을 만날테니. 후훗, 미남파티가 따로없군."
"엑, 정말요? 그분을 정말 볼 수 있는건가요? 정말로요?"
우베가 자이납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드디어 네페티 부인 한 번 껴안아봤네. 푸헤, 이렇게 좋을수가. 세상에, 그 환상적인 감촉이라니,"
담요를 뒤집어쓰고 덜덜 떨던 네페티 부인은 제네르가 건네주고 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카렐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셔틀 맨바닥에 얇은 담요 한장을 깔고 맥없이 누워있던 카렐의 큰 손이 부인의 여린 손을 꼭 붙들어주었다.
"전하! 헤게보스 터미널 부근입니다!"
베네루스의 목소리에 카렐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베. 준비하게. 이제부터 자네 책임이야."
++++++++++++++++++++++++++++++++++++++++++++++++++++++++++++++++++++++++++++++++++++++++++++
<파트6 후기>
조금은 끔찍했던 파트 6이 이걸로 끝이군요. 이 부분의 옛 이야기는 앞으로의 이야기전개에 꽤 중요한 틀이 되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은 제위경쟁을 위한 3개 세력권의 형성을 나타낸 부분이라고 보아야겠군요. 이제 파트 7부터는 그들이 진검승부에 들어갑니다.
파트 7. A Paradox of Lupinus (루피너스의 모순)
제위경쟁에서 벌어지는 첫번째 ‘정규전’인 루쿠스탄 공략전이 벌어지는, 비교적 짧은 파트입니다. 영지를 지키기 위해 지휘관으로 나선 페로가 주연급(?)으로 컴백합니다.
옛 이야기에서는 카렐과 함께지내던 페로의 어린시절이 등장하게 됩니다.
약 100페이지 정도 되는 부분으로 총 14회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파트8. Stand Alone on the Oak Hill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수우를 지지하는 남부연합군과 카렐-페로 세력의 근거지인 동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제국 전역이 본격적인 전시상황에 들어갑니다. 동부를 사실상 이끄는 페로가 역시 핵심으로 등장합니다.
한편으로 서부의 코리온을 설득하기 위한 카렐의 찰거머리작전(?)과 남부, 베흔의 공작도 이어집니다. 4명의 비빈 간택 문제도 드디어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갑니다.
옛 이야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의 종권을 장악하기 위한 페로의 청년시절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약 23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부분으로 30여회 이상 되지 않을까 합니다.
혈맥-The Iron Vein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개인지 출판본 판매게시판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