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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34화 (134/1,132)

< -- 134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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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2500골드를 가지고 북적대는 터미널에 들어선 우베는 화물 집하장 입구에 서서 만나기로 약속한 운송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를 대비해 품 속에 쿠크리를 가져온 우베는 멀찍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시로를 생각하며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행성 남반구 최대의 물류중심지인 이곳은 폐쇄조치 덕택에 예전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휘황한 빛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캬, 이런데서 사업 제대로 하면 돈 좀 벌텐데."

터미널 안쪽에 끝도없이 착륙하고 있는 화물셔틀들을 바라보며 장사꾼 기질이 발동한 우베가 혀를 내둘렀다. 오늘 들어올 대규모의 생필품들을 미리 선점하기 위한 유통업자들의 행렬임에 틀림없었다. 쌀쌀한 밤공기에 우베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에 입김을 불었다.

2천 5백만에 달하는 플레렌 가의 영지민 중에서 이곳 4번 행성의 총 인구는 그중 대다수인 2천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나머지 5백만여명은 가문의 또다른 영지이며 초원지대인 수베르에 거주하는 많지않는 농민들과 목축민들 뿐이었다.

어쨌든 2천만을 다 먹여살리는 물자들이 다 들어오려니 이정도 북새통은 어찌보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4제후지역 중 문예와 첨단기술이 가장 발전한 서부는 원래부터 외지과의 활발한 교역이 있어온 활기찬 곳이기도 했다.

"이새끼 왜이리 안와."

우베가 투덜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머리 위로 콘테이너를 매단 큰 화물선 한대가 요란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조만간 선단이 출발할 모양이었다. 우베의 얼굴이 급한 마음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터미널 안쪽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의 남자가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이제야 나오다니. 셔틀 언제 들여보내줄거야?"

우베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신경질을 부렸다. 검은 구렛나룻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 남자는 우베의 손에 들린 가방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돈부터 보여줘."

"닥쳐. 시간부터 말해."

우베가 돈가방을 끌어안으며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한시간만 기다려. 선단은 2시간 후에 출발해."

고개를 끄덕인 우베는 그제서야 들고온 가방 안을 보여주었다.

"깨끗한 현금이야. 됐지? 어떤 콘테이너야?"

"저어기, 오른쪽에 391호 화물선에 실린 빨간거."

구렛나룻이 화물터미널 안쪽에 늘어선 큰 화물선 한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럼 돈 절반은 셔틀 실리거든 주지. 나머지 절반은 빠져나가면 사출장치로 던져줄테니까 네 화물선이 줏어가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

우베가 가방을 쾅 닫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그 구렛나룻 녀석이 갑자기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뭐야, 그걸 어떻게 믿고?"

"그럼 난 네놈이 제후군에 우리 팔아먹지 않으리란 걸 어떻게 믿어?"

우베가 갑자기 험악해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썅, 썩을놈, 사람을 그렇게 못믿냐? 그럼 한시간 이따가 연락할테니까 그때 와."

"좋아."

우베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남자는 급히 터미널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자리에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우베는 멀찍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시로에게 할룩스로 말했다.

"저녀석 뭔가 수상합니다. 돈을 나눠서 주는 건 이바닥 상식인데 녀석이 저렇게 엉뚱한 소리 하는게 영 찜찜하네요. 녀석 잔뜩 겁먹은 태도도 이상하고.....낮에 한 번 당해서 그런지 몽땅 다 의심이 드네요.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알았다. 내가 뒤를 쫓아보지."

고개를 끄덕인 시로는 사람 키의 두배는 족히 되는 터미널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공터미널이라 그런지 바깥쪽 경비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안쪽의 콘테이너가 있는 부분에는 제후군 치안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서 주변을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우베와 헤어진 구렛나룻 녀석은 터미널 운송업자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시로는 녀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의 뒤를 조심스레 쫓았다.

시로가 녀석의 뒤를 쫓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 녀석이 사무실에 거의 도착한 때였다. 시로는 잽싸게 사무실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어휴, 깜짝이야."

구렛나룻이 자신의 뒤를 따라온 그 정체불명의 사람을 돌아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다 보고 있었던거요?"

"네놈이 딴소리하지 않나 해서."

어둠 속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가 낮은 톤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쳤수, 나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긴장한 게 얼굴에 보이더군."

"뭐, 떳떳한 짓도 아니니 긴장한 얼굴 하는 건 당연한거겠지. 아이씨, 믿으라니까요. 녀석들 콘테이너에 쑤셔넣으면 잘 밀봉해서 당신네 원하는 데 보내줄테니."

우베의 예상대로였다. 고개를 조금 내민 시로는 구렛나룻과 대화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제길할, 보안국 녀석이군.'

시로가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근위대에서도 궂은일만 도맡던 시로는 핵심부서인 보안국 녀석들과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놈들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베흔과 코리온이 카렐을 잡기 위해 이번에 제대로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지나간 옛일들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없는 둘간의 궁합에 시로도 잠시 쓴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좋아. 녀석들 셔틀을 콘테이너에 실을 때까지 절대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라. 그리고 셔틀 안의 사람들은 털끝하나 다쳐선 안된다. 알았나?"

"알았다구요, 알았다니까요."

그들의 대화를 모두 엿들은 시로는 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콘테이너를 이용한 탈출도 결국 불가능한 기대에 불과했다.

시로와 우베의 보고를 들은 카렐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오늘 밤에는 이 지긋지긋한 행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일행들의 얼굴에 순간 절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에기랄,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린다 했네."

자이납이 거울을 보며 상처난 입 안에 연고를 바르다말고 투덜거렸다.

"아주 나쁘지만은 않군."

누워있던 카렐이 천장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우린 녀석들의 계획을 알고있고, 녀석들은 자기들 계획이 들통났다는 걸 아직 모르니......베네루스!"

"옛!"

"여기 온 첫날에 렌트했던 셔틀이 지금 파예드 아카데미 부근에 있을거야. 그동안 쫓겨다니느라 아직 반납을 못했거든. 그거 좀 무인비행으로 이리 불러오겠나? 싸구려 저속 셔틀이니까 삼십분쯤 걸릴거야. 키는 여ㅤㄱㅣㅆ네."

카렐이 주머니에 가지고있던 작은 카드를 던지자 그것을 허둥지둥 받아든 베네루스가 물었다.

"뭐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셔틀을 원하니 하나쯤 줘야지."

카렐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키를 집어넣은 베네루스는 이쪽 셔틀의 컴퓨터로 렌트한 셔틀에 원격으로 좌표를 입력하고 있었다.

"됐습니다. 이 옆에 곧 올 겁니다."

"그럼 그걸로 놈들 놀려준다고 치고.....여길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지?"

카렐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어, 저같은 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닌지는 알지만......"

이곳에 온 이래 내내 뒤에서 시키는 명령만을 묵묵히 따르던 조종사 베네루스가 모두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조금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만......"

눈이 휘둥그레진 카렐이 베네루스를 손짓해 가까이 불러들였다. 카렐의 바로 옆에 선 베네루스는 들고있던 물컵을 들이키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도 1급 면허가 있으시니 잘 아시겠지만......이 아르다가 셔틀은 스피드광 셰니 펠머슨 경이 레이스용으로 거금을 들여 초고속으로 튜닝한 겁니다."

"그래, 50만골드가 넘게 들었다고 자랑했다더군."

"부스터를 사용하면 대기권에서는 속도가 989까지 나오고 스페이스 워프성능은 105나 되죠."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이 베네루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정도 크기의 초대형화물선이 에너지장벽을 통과하면 그 후부에 장벽이 완전복원될때까지의 시간간격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됩니다. 물론 그것때문에 그 일대에 접근금지구역이 선포되기는 합니다만....."

베네루스의 말뜻을 일찌감치 깨달은 카렐이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이 레이서출신 조종사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화물선이 나갈때 반경 10000스타디아에 접근금지구역이 선포되고 장벽강도가 800이상으로 회복되는 때 자동해제됩니다. 보통의 셔틀이라면 그때부터 제아무리 달려도 장벽강도가 1600이 이미 넘어가게 되죠. 들이받으면 그대로 공중폭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최고속도로 도착시에 장벽의 추정강도는?"

카렐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묻자 약간 머뭇거리던 베네루스가 대답했다.

"제 계산결과 1052정도 됩니다. 그 속도에서 이 기체가 돌파할 수 있는 매뉴얼상 한계치인 1000을 조금 상회합니다. 하지만 튜닝이란 게 사람 손으로 하는거다보니......실제로는 그보다 더될수도, 아닐수도 있습니다."

일행의 표정이 일시에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한마디로 모험이라 이거군."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하면.......기체는 폭발하고 탑승자들은 버블에 실려 떨어지겠지만......그정도 고도라면 부상은 각오해야 하겠군. 물론 곧 제후군 밥이 되겠지만."

"그렇습니다."

베네루스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젠 카렐의 최종결정을 기다리는 일만 남아있었다. 부하들을 한 번 둘러본 카렐은 마지막으로 옆에 앉은 네페티 부인과 레곤 대공주를 바라보았다.

"오호, 내 일생에 이런 짜릿한 경험을 할 줄이야."

레곤 대공주가 기름기가 통통하게 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리자 카렐도 잠시나마 웃음을 터뜨릴수밖에 없었다. 실패해도 최소한 처형당할 일은 없는 대공주로서는 충분히 나올만한 태도였지만 실패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전사단 사람들의 표정은 카렐만을 바라보며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다. 결국 제네르가 앞장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카렐은 마지막으로 베네루스를 돌아보았다.

"가만히있어 당할 바에야....."

"망할놈, 이제오면 어쩌겠단거야."

구렛나룻녀석이 늦게 도착한 우베에게 대뜸 신경질을 부렸다. 자이납과 함께 온 우베가 넉살좋게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그에게 돈가방을 쓰윽 내밀었다.

"미안, 미안, 어쩌다 그렇게 됐어. 콘테이너는?"

"이 옆에 안보여?"

녀석이 문이 열려있는 빨간색의 대형 콘테이너를 가리켜보였다. 이런저런 탱크들로 가득 차있는 콘테이너박스 꼭대기에 셔틀 한 대 딱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빈 공간이 있었다.

"스페이스로 나가면 문은 어떻게 열어?"

구렛나룻이 작은 리모컨을 내밀었다. 녀석이 리모컨을 작동시키자 컨테이너 문에 달린 작은 쪽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거 참 신기하네,"

우베가 짐짓 웃음을 지어보이며 녀석이 내민 리모컨을 받아들었다.

"저 구멍은 단속반이 불심검문할때 쓰는 구멍이야. 셔틀 한 대 딱 지나갈만 해. 이건 셔틀 출입증이야. 터미널 들어올때 앞에 붙이고 들어와."

"지금 셔틀 타고올께. 여기 불 좀 꺼놔, 동네방네 셔틀 싣는다고 광고할꺼야?"

"알았어, 알았어."

구렛나룻 녀석의 손짓에 이쪽 하역장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우베는 자이납과 함께 얼른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븅신."

우베가 뒤에 대고 혀를 쑥 내밀어보였다. 자이납이 이해가 안되는지 고개를 조금 갸우뚱 하며 궁시렁거렸다.

"그런데 어차피 그냥 도망칠거면 뭐하러 저딴녀석한테 피같은 돈을 줘요? 차라리 나나 주지."

"생각해보라구. 우리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지네들도 음모가 들통난걸 눈치챌테고, 그러면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길수도 있단 말이야. 녀석들을 안심시켜서 모든걸 계획대로 하게 해야할것 아냐."

"아, 그렇구나."

우베가 우쭐해하며 대답하자 자이납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않은 곳에서 대기하던 아르다가 셔틀에 도착한 우베는 대기하던 베네루스에게 출입증을 내밀었다. 앞에 출입증을 붙인 카렐의 싸구려 렌트셔틀은 베네루스의 무선조종으로 터미널 안에 당당하게 들어서서는 콘테이너의 '비밀공간' 속에 조심스럽게 들어앉았다.

“닫아!”

구렛나룻 녀석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하역장 인부들이 콘테이너 외부를 밀봉하고 있었다.

"얼라리요? 저새끼 출입구 용접하고 있구만. 지독한 놈."

스코프로 터미널 안을 지켜보던 우베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저 안에 그대로 들어갔었다면 산 채로 통조림이 된 채 베흔에게 고이 배달되고 말았을 터였다.

"우리도 준비하자."

선단이 출발준비하는 모습에 카렐이 발리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부조종석에 앉았다.

"부스터로 고속기동할때는 부조종사가 필요하지? 1급 면허는 자네하고 나뿐이니.....천상 내가 해야겠군."

"부탁드리겠습니다."

중앙에 앉은 베네루스가 숨을 고르며 몸을 한 번 가볍게 풀어주었다. 좌석에 몸을 고정시킨 카렐은 긴장한 표정으로 좌석에 자리잡고 앉은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 공중으로 박차고 오른 셔틀은 터미널에서 막 이륙하고 있는 선단을 따라 공중으로 수직으로 솟구쳐올랐다. 문득 돌아본 뒷편에서는 카렐의 싸구려 렌트셔틀을 실은 붉은 콘테이너를 단 화물선이 선단과 떨어져서 혼자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다신 이 지긋지긋한 곳에 오나 봐라."

우베가 밑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누런 사막과 반건조지대가 대부분을 이루는 이 4번 행성의 대륙적인 풍경이 멀리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다시 와서 리쿠 학장과 논쟁을 벌이고싶은걸."

제네르가 웃으며 우베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구름을 뚫고 지나온 셔틀의 멀리 앞쪽으로 붉은색 빛을 희미하게 뿜는 에너지장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접근금지구역 경계입니다."

계기를 확인한 베네루스가 셔틀을 그자리에 정지시켰다.

"헤게보스 터미널에서 연락입니다. 녀석 셔틀을 성공적으로 포획했다고 합니다. 30분 후에 적도 통제구역에 도착합니다."

학장실에 코리온과 마주보고 앉아있던 베흔에게 쿠베가 달려와 알렸다. 낮에 거의 물에 빠져 죽을뻔했던 그도 많이 지친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베흔이 기다렸다는듯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코리온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베흔을 한 번 흘겨보았다.

"하던 얘기는 마저 하고가야 하지 않겠나? 근위대장?"

베흔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무려 한시간 동안 코리온과 '취조'에 가까운 대화를 나눈것만해도 그에게는 충분히 고생스런 일이었다. 똑똑한 베흔은 여지껏 누구와의 말싸움에서도 밀려본적이 없었지만 이 사이코 천재유학자의 청산유수같은 논조와 소름끼칠만큼 맑고 청아한, 최면을 거는듯한 목소리는 다른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주장하듯 머리를 맑게 하는 천상의 울림이기는 커녕 머리통을 통째로 쥐어짜는 고문 그 이상이었다.

머리를 깨부수는 지독한 두통에 한시간째 시달린 베흔으로서는 220년 전, 저녀석이 바로 자신에게 당했던 그 참혹한 고문의 복수라도 하고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베흔은 할 수만 있다면 이번엔 저녀석의 혀를 확 뽑아내버리고 싶은 생각에 온몸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코리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렐이 장태자라는 사실을 자네는 일찌감치 알았겠지?"

"......"

"그래.....천하의 근위대장에게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겠더군. 지금까지 녀석 손에 놀아난 플레렌 가 녀석들 바보취급했더니만......그럴 것만도 아니었군. 후훗......그 똑똑한 제네르 하크로딘 녀석이 어쩌다 그런 녀석 밑으로 들어갔나 했더니만......"

코리온이 마지막 남은 차를 들이키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녀석을 다시 잡았으니 이번엔 이런저런 궁리할것 없이 그냥 제가 목을 베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나머지 녀석들은?"

코리온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제네르 하크로딘 그년은 누구처럼 황궁 앞에서 산채로 껍질을 벗겨 죽일 예정이고......시로 녀석은 거열형에 처할 예정입니다. 우베 녀석은......죽이기는 좀 아까우니.....조용해질때까지 감방에 가둬놨다가 잘 설득해 제가 밑에 둘 예정입니다. 뭐, 싫다면 화형에 처하던가 하면 되겠죠."

"지난번 그 흉악스런 처형을 당했던 사람도 남극성당 교수였건만......이번에도 또 그 학교 교수가 수놓겠군."

코리온이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며 빈 잔에 차를 조금 더 부었다.

베흔은 도무지 성격을 알 길 없는 이 유학자의 얼굴을 힐끗 올려보았다.

그의 소년같이 깨끗한 얼굴과 길고 여린 속눈썹, 얇고 붉은 입술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크지않고 약간 째진 매서운 눈매는 조금 위로 치켜올라가 있었다. 당당하게 펴진 그의 어깨와 가슴은 어떤 여자든 안기고 싶어할 정도로 넓고 탄탄하게 벌어져 있었고 군살없이 날렵한 긴 팔다리는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훌륭한 전사가문의 골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 남자의 굳은살 하나 없는 솜털같은 손은 싸움은 고사하고 험한 일 한번 해보지 않은 귀공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처음 세네피스를 대했을때와 마찬가지로 또한번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녀석은 세네피스와는 달리 자신의 속내를 전혀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다는 것이기도 했고, 어느 면으로는 놀랄만큼 정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베흔은 앞에 앉은 이 빈틈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결론은 있었다. 그는 칼 대신 붓을 든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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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피너스 : 한해살이 화초로 마치 솔방울처럼 아래에서 위로 피어오르는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음. 더운 날씨에만 자라며 노란색, 빨간색, 흰색 등이 있음. 라틴어의 Lupus(이리)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꽃말은 탐욕, 모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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