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7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
.
.
서부제후지역 외곽 한귀퉁이에 위치한 루쿠스탄은 다른 곳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 크기의 개척행성계였다. 하지만 교통이나 환경이 썩 좋은 곳은 못되는 덕에 제후들의 영토다툼의 와중에서도 두세번 정착을 시도한 개척민이 있었을 뿐 페로가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된 개발의 손길은 한번도 닿은 적이 없었다.
그나마 5번 행성의 경우는 황제령과 그나마 가장 비슷한 환경을 가진 덕에 페로의 1번 컴플렉스의 입지로 선정되었고, 40년간의 환경개조작업끝에 지금같이 바깥에서 마음놓고 호흡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했지만 아직 그 풍경의 대부분은 차가운 얼음바다와 건조한 바위언덕, 살인적인 일교차로 삭막하기 짝이 없는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페로가 거액의 초기투자를 감수하고도 이곳 컴플렉스를 운영하는 이유는 돈이라기보다는 '서부제후'로서의 간판을 얻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루쿠스탄 외곽에 먼저 도착한 샤디 가 제후군은 서부 제4제후인 알리 이븐 샤디 경이 직접 이끌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의 정찰결과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7백여명으로 추정되는 페로의 가디언들이 목표지점인 1번 컴플렉스에 주둔하고 있었고 3백여명이 2번 컴플렉스에 있는 듯 했다.
단순 계산법으로는 평균 수준으로 치는 35등급 가디언 1명을 기병 3명 정도의 전력으로 보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의 보병전력과 순수한 가디언부대와의 전면전은 몇백년 전에 있었던 '성전'이후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난전이라는 상황이 어느쪽에 더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그로서도 확신이 없었다.
당시 천 명의 X들과 12만명의 민병대로 이루어졌던 TSG-제니안 연합군은 오르마즈 카파키 사령관의 지휘하에 25만명에 육박하던 정예 코메트부대를 상대로 단 반년만에 당시 수도였던 현재의 황제령 절반 이상을 점령하는 대 전과를 거둔바가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전력의 최적의 조합을 통해 전력의 극대화를 이룬다는 용병술의 원칙상 순수한 가디언들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개개는 강하겠지만 어딘가 취약점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절대적인 수적인 우위를 지니고는 있었음에도 알리 경은 어딘지 '꺼림찍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샤디 가보다 뒤늦게 도착한 플레렌 가 제후군 제4군단 2만명의 병력은 역시 최고제후의 군대답게 샤디 가 제후군보다 훨씬 우수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훈련상태 역시 한수 위였다. 늦게 도착했다며 한바탕 쏟아내려고 맘먹고 있던 알리 경은 결국 그들의 어마어마한 위용에 눌려 찍소리 한마디 못한 채 잘 도착했다는 형식적인 인사말 정도로 한발 물러서야 했다.
"대단하긴 대단하군."
수송선에서 내려 도열해서는 2천여기의 플레렌 가 낙타병부대를 보고는 알리 경이 애써 부러움을 감추며 침을 꿀꺽 삼켰다.
"샤디 가 낙타병부대와 저희 낙타병부대와 통합운영하는것이 좋겠습니다."
플레렌 가 제4군단장이며 서부의 전설적인 명장인 아쉬드 플레렌 하지즈 장군이 알리 경에게 말했다. 알리 경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 필요성은 스스로도 절감하고 있었다.
알리 경이 데려온 샤디 가의 2만명의 병력 중에서 낙타병은 1천 기가 고작이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비싼 낙타병은 가능하면 플레렌 가 쪽에서 맡아줬으면 한 알리 경의 속셈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 명 무장시키는데 3천골드가 넘게 드는 비용이나, 상등보병의 2배에 맞먹는 연간 6천 골드의 봉급은 접어두고라도 어마어마한 훈련비, 유지비에 그외로 들어가는 이런저런 비용까지 따지면 엔간한 하급제후는 천여기 정도 운용하는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최고제후인 플레렌 가는 이런 낙타병을 무려 1만여기나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열 내한기능이 모두 갖춰진 최신형 갑주로 무장하고 개인용 스코프에 작전통제장치까지 각개의 병사들이 모두 가지고있는 플레렌 가와는 대조적으로 샤디 가 병사들의 갑주는 이미 제조된지 20년이 넘는것이 수두룩했고, 스코프도 분대장급 이상이나 가지고있을 뿐이었다. 물론 장교급이나 스코프를 쓰는 하급제후들에 비하면 나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이번 공격의 주체는 우리 샤디 가니.......보병은 내가 총지휘할테니 낙타병은 하지즈 장군이 맡아주게나."
알리 경이 잽싸게 선공을 하고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작전의 총사령관을 맡았을 샤드니 플레렌 경이 자이납에게 입은 상처로 참전이 불가능해지면서 지휘권의 향방이 조금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어쨌든 하지즈 장군은 그 명성이야 어쨌든 제후군의 '일개 장군'이었고 자신은 '제후'였다. 아무리 상대방이 최고제후 수하라지만 서열은 지켜져야 했다.
하지즈 장군은 뜻밖에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낙타병을 맡죠."
"종장님! 5번 행성에 있는 정찰대 보고입니다."
임시 지휘소에 뛰쳐들어온 알리 경의 보좌관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1시간쯤 전에 중형 프리깃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확인결과 아켐 3번 행성의 발 가 종가에 머무르던 페로 경도 5시간 전 셔틀을 이용해 루쿠스탄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럼 프리깃은 뭐야?"
"황제령 부근의 페로 경 3번 컴플렉스에 대기중이던 프리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예드 아카데미쪽에서 방금 들어온 연락에 따르면 4번 행성에서 4시간 전 가디언 카렐과 그 일행이 문제의 프리깃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뭐야? 그럼 지금 그 컴플렉스에 페로 그놈하고 가디언 카렐이 다 있다는거야?"
알리 경과 하지즈 장군이 일제히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즈 장군도 지난번 메디스 시를 공격했던 1군단이 카렐 일행 덕택에 꽤나 곤욕을 치렀었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엔 문무가 고루 출충하기로 유명한 페로까지 함께 있다니 호락호락한 싸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리쿠 학장님 말씀으로는 가디언 카렐이 현재 부상을 입은 상태니 회복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알리 경이 하지즈 장군에게 중얼거렸다.
"학장님께선 4차 혼란기때 주페 태자저하 보좌관까지 지내셨던 분이니 그분 지시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플레렌 가 부대가 좀 더 서둘러주면 좋겠구만."
알리 경이 하지즈 장군을 닥달하기 시작했다. 사실 늦게 도착한 플레렌 가 녀석들의 얼을 쏙 빼놓고 싶은 것이 솔직한 본심이었지만 그는 쓸데없는 자존심세우기로 부대 전체에 불협화음을 일으킬 정도로 생각없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즈 장군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공격개시시각은 8시간 후로 잡죠. 수송선이 12대 있으니 녀석들의 컴플렉스를 일시에 포위해버릴 수 있을겁니다."
"두분 모두 일단 타르서스 별궁에서 쉬고계십시오. 저는 이쪽 일이 끝나는대로 찾아뵙겠습니다."
네페티 부인과 레곤 대공주를 페로의 셔틀에 태워 황제령으로 돌려보내며 카렐이 그 둘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네페티 부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카렐의 손을 꼭 붙든 채 떨어질줄을 몰랐다. 그런 네페티 부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카렐이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타르서스는 서부와 분위기가 비슷하니까 부인께서 그동안의 피로를 푸시기에 제일 좋을 겁니다."
"지금 더 지친 건 너일텐데......"
"곧 돌아갈 수 있겠죠."
카렐이 네페티 부인을 한 번 품에 꼭 안아주었다.
"지난 며칠동안 한번도 멀리 떨어진적이 없었는데......이제 떨어지려니까......"
부인이 카렐을 안은 팔에 힘을 꼭 주었다. 자신의 아들 때문에 네페티 부인이 몰락하게 되었음을 잘 아는 레곤 대공주는 부인에게도 영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인 채 별 말이 없었다. 부인을 셔틀 안쪽의 자리에 앉혀준 카렐은 지팡이를 짚고 밖으로 걸어나와 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유시프 장군을 비롯한 3명의 서부 지휘관들과 자이납이 나름대로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로서도 이곳까지 부인을 따라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셔틀이 멀어져가는 광경을 페로와 함께 끝까지 바라보던 카렐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아섰다.
"이제 새 손님맞을 준비를 해야겠군."
슈로 기사단의 문장이 붙은 흰색 갑주를 새로 지급받은 발리의 표정이 약간의 긴장과 기대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기마전용의 중갑옷을 이미 다 챙겨입은 제네르는 한쪽 구석에 벽을 보고 끓어앉아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생과 사는 한가닥 끈이라 생각하며, 가(可)와 불가(不可), 시비·선악은 같은 것이니, 이런 사람에게 인생을 속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리니......"
눈을 번쩍 뜬 제네르는 손에 쥐고있던 긴 창에 입을 맞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서 대기하던 제네르의 시종이 그의 어깨에 단장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용이 새겨진 붉은색의 화려한 망토를 덮어주었다.
한쪽 구석에서 부단장의 푸른 망토를 걸친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손은 항상 전투에 나가기 직전마다 무슨 의식처럼 치르는 친구의 저 '웃기는' 모습에서 고개를 돌려 이번엔 발리 쪽을 돌아보았다.
"아참, 자네가 제네르 새 부장이 된 친구야? 내 참 덩치한번....."
라손이 입을 삐죽거렸다. 발리의 채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라손은 괜히 비교되는것이 싫은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서고 있었다. 이번엔 준비를 모두 마친 제네르가 발리 옆에 섰지만 키가 꽤 크다는 제네르 역시 거구의 발리에게는 귀높이 정도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알 어울린다. 제네르. 총리각하 말고 네키에 딱 맞는 남자 어딨나 했더니 여ㅤㄱㅣㅆ었네. 푸헷."
제네르가 뒤에 선 발리를 힐끗 돌아보았다. 발리 역시 화려한 갑주에 위엄있는 전포와 망토를 두른 제네르의 처음보는 당당한 모습을 위아래로 재빨리 훑어보았다.
"얼씨구, 너 정말 제네르한테 흑심품고있는 거 아냐? 바라보는 눈길이 장난 아닌데."
라손이 눈을 가늘게 뜨며 ㅤㅈㅣㅊ궂은 말을 던지자 발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라손은 도리어 킬킬거리고 웃으며 친구를 억지로 잡아당겨 발리 바로 옆에 몰아세웠다.
"잘됐네, 잘됐어. 저 노처녀 제네르 제발 좀 데려가. 이기회에 총리 각하 노리는 경쟁자 한놈 좀 떨궈내보자."
라손이 지난번 페로 관에 갔을 때 훔쳐냈던 페로의 손수건을 꺼내 냄새를 한 번 들이키고는 왼쪽 손목에 정성들여 묶었다.
"하여간 저 주책 하고는......난 총리 각하한테 아무생각 없으니까 너혼자 짝사랑하든 첩실이라도 되든 니 맘대로 해."
제네르가 라손의 머리를 툭툭 두들기고는 대기실 문을 열었다.
컴플렉스 한쪽의 거대한 실내연병장에 대기하던 천여명의 슈로 기사단원들이 단장의 등장에 일제히 자신의 말 옆에 도열해 섰다.
카렐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ㅤㅋㅞㄹ크에서 불러들인 이들 기병들은 첫번째 회전을 앞두고 약간씩은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번 북부에서 '뜯어낸' 군자금과 군수품으로 새롭게 무장한 이들은 거의 폐품 수준의 궁색한 무장을 갖추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옛 슈로 기사단의 그 위풍당당하던 모습을 그대로 되찾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젠 이들이 겉모습 뿐만이 아닌, 그 무용에서도 옛 기사단의 명예를 회복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들의 정연한 위용을 한번 죽 둘러본 제네르는 앞에 세워져있던 자신의 얼룩무늬 애마 '아타르'에 훌쩍 뛰어올랐다.
"아는가! 이번이 재건된 우리 기사단의 사실상 첫번째 전투다!"
제네르의 물음에 천여명의 이들 중장기병들이 떠나갈듯한 함성으로 답례하고 있었다. 페로를 지지하는 동부기병 출신 지원자들과, 옛 명예를 그리는 북부 창기병출신들이 주축을 이룬 이들은 이순간만을 기다리며 지난 몇달간 ㅤㅋㅞㄹ크의 덥고 짜증나는 정글에서 피땀으로 그 칼날을 갈아온 터였다.
"다시한번 제국을 이끌 우리 기사단의 앞으로의 용명이 지금 이곳에서 결정날 것이다! 이제 너희의 임무를 알겠는가!"
제네르가 앞을 향해 창을 번쩍 치켜들자 또한번의 떠나갈듯한 함성이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라손은 함께 선 이 옛 친구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번 전투는 제네르의 말마따나 전사단의 첫번째 회전이면서, 제네르가 기사단장으로서 맞이하는 첫번째 전투이기도 했다. 전 단장이던 토로 경에 비해 내세울만한 별다른 용명도 없는 제네르는 천여명이나 되는 저들 콧대높은 중장기병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어딘지 미덥지않다는 시선을 이미 잘 알고있었다. 이 모든 것을 떨쳐내야 할 임무가 제네르의 양 어깨에 무겁게 지워져 있었다.
제네르는 자신의 다짐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 창을 치켜들며 거의 필사적이라고밖에 들리지 않는 거친 함성을 몇번이나 토해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