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1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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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 앞에 서 있던 페다이가 이상한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페다이는 갑자기 뒤쪽을 홱 돌아보았다.
"각하! 피하십시오!"
페다이가 자신의 칼을 뽑아들며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뒤를 돌아본 페로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뭐야! 저놈들은!"
이쪽을 향해 갑주도 입지않은 맨몸으로 돌진해오는 기병은 무려 30여명, 4명 정도가 말에 올라 있었고 나머지는 낙타병이었다. 제네르와 라손이 큰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아섰다.
"각하! 물러나십시오!"
제네르가 창을 꼰아잡고 먼저 뛰쳐나갔다. 흉갑이 없으니 한번만 타격을 입으면 그대로 즉사였지만 그는 그 사실도 잊은 듯 창을 똑바로 세우고 적에게 돌진했다. 라손 역시 적에게 돌진하고 나머지 다섯 명의 기병은 페로의 옆을 지켰다.
"기사단 6중대! 페로 경을 지켜라!"
제네르가 돌진하는 와중에도 가장 가까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이 페로를 습격하기 전에 아군 기병이 페로에게 도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몰려오는 제네르 일행을 알아본 적들이 2열로 넓게 산개하며 돌진하는 세 사람의 눈을 흐리고 있었다. 셋을 잃는 것을 각오하고 페로만을 노리겠다는 뜻이었다. 라손이 비상버클을 풀어 말에 달린 다른 무장과 장갑, 자신의 갑옷을 벗어던졌다. 제네르 역시 말의 무장을 떨궈내며 최대한 속도를 가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페다이가 몸을 날리며 나란히 오던 두 마리의 낙타 다리를 동시에 잘라냈다.
"무조건 계속 가!"
낙타와 함께 바닥에 거칠게 나동그라진 그들 2명의 낙타병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버리며 사파르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외쳤다.
"어딜 와!"
그의 앞으로 돌진하던 라손이 사파르 바로 옆을 달려오던 기병과 굉음을 내며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충격에 목이 창에 꿰인 그 기병는 비명도 못지른 채 그대로 말 뒤로 붕 날아 나동그라졌다. 뒤이어 달려온 제네르의 묵직한 창에 또한명의 기병이 쓰러졌지만 그들은 거의 개의치않고 페로만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 망할!"
창을 다시 꼰아든 제네르와 라손이 그들의 뒤를 쫓았지만 이미 속력이 붙은 그들을 따라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페다이 역시 전속력으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총리각하! 제발 달아나십시오!"
하지만 제네르의 걱정대로 자존심강한 페로는 돌진해오는 적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길---사실 이것도 갑주를 벗고 돌격해오는 저들을 생각하면 최고의 방책일지도 의문이겠지만---을 택하지는 않았다. 화극을 치켜든 페로가 앞을 막아선 기사들을 뿌리치며 창을 겨누었다.
"저새끼들이 감히 어딜!"
무서운 기세로 휘두른 페로의 화극에 제일 선두에서 한 명의 낙타병과 기병의 가슴이 두동강나며 공중에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쓰러지는 그들의 뒤로 누군가가 창을 쥐고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페로 이놈!"
뒤이어 뛰쳐나온 사파르의 창이 페로의 넓은 가슴을 굉음을 울리며 그대로 직격했다. 말과 사람, 속도가 덧붙여져 돌격해오던 그 거센 충격을 그대로 받아내며 산산조각난 페로의 흉갑과 사파르의 부서진 창이 동시에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아악!"
거친 비명을 내지른 페로 역시 흉갑과 견갑이 부서진 채 말 뒤로 한바퀴 구르며 흙먼지와 함께 바닥에 나딩굴렀다.
"썅! 저 여우같은 개새끼!"
가슴을 움켜쥔 페로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화극을 다시 치켜들었다. 충격을 심하게 받았는지 그의 입에서 가늘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아있던 5 명의 페로 호위기병들이 나머지 낙타병들을 상대하고 시간을 끌며 가망없는 분전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단 6중대 기병들은 아직 한참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페로를 스쳐 한참을 더 달려갔던 사파르는 부러진 창 대신 칼을 뽑아들며 말을 돌려 페로에게 다시 돌진했다. 그리고 이미 쓰러진 녀석들을 대신해 2차로 4명의 적 기병이 또다시 페로를 목표삼아 달려들고 있었다. 낙마한 페로를 향해 동시에 돌진해오는 적은 사파르와, 그리고 조금 뒤에서 새로 돌격을 시작한 낙타병 4명까지 사방에서 무려 5기였다. 페로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방금전 자신을 낙마시킨 '괘씸한' 사파르를 향해 화극을 겨누었다.
"씨발, 네놈만이라도 죽여주마."
화극을 움켜쥔 페로가 이를 단단히 악물었다.
"하여간에, 내 팔자야,"
전사단 보병분대장의 갑주를 입은 채 낙타에 오른 웬 녀석이 페로에게 돌진해오는 4명의 낙타병 측면에서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어디서났는지 그 큰 낙타를---적 낙타병에게서 빼앗은 것임이 거의 확실한--- 능수능란하게 제어하며 괴성과 함께 돌진해온 녀석은 페로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가는 낙타병의 뒤통수를 검은 시미터로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아, 씨! 이제 낙타타기 싫은데!"
낙타병 한 명을 쓰러뜨린 자이납은 곧바로 그 옆의 낙타병을 향해 낙타 등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그의 거침없는 육탄돌격에 허리를 받힌 그 낙타병은 자이납과 함께 그대로 낙타 밑으로 나동그라지더니 목이 꺾이며 숨이 끊어져버렸다. 2명의 낙타병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자이납은 얼른 페로 쪽을 돌아보았다.
그새 페로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사파르의 말 목을 향해 길이를 최대한 늘린 화극을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자리에 바위처럼 우뚝 서서 도끼눈을 치켜뜨고 있던 페로는 무서운 기세로 돌격해오는 말을 향해 화극을 거침없이 힘껏 내질렀다.
"으아악!"
목이 찔린 말이 공중을 한바퀴 빙 돌아 바닥에 나동그라지자 사파르는 넘어지는 말의 체중에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자 큰 소리로 비명을 올렸다. 사파르를 일단 쓰러뜨린 페로는 바로 등뒤에서 울려오는 발굽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2기나 되는 낙타병들이 어느새 그의 등뒤까지 도착해 있었다.
"죽어!"
앞서 달려온 낙타병의 창이 페로의 머리를 겨누었다가 투구와 견갑에 미끄러지면서 어깨를 대신 꿰뚫었다.
"악!"
쇄골 윗쪽을 정통으로 관통당한 페로가 비명을 지르며 사파르의 말 위로 쓰러지자 바로 뒤에 달려온 다른 낙타병의 시미터가 이번엔 페로의 투구마저 산산조각내버렸다. 다행히도 쓰러지던 와중에 칼을 맞은 덕에 그 충격이 감소되면서 투구만 반토막이 났을 뿐 머리는 그럭저럭 온전했다.
칼에 맞은 충격에 밀려난 페로는 다시 말 위에서 튕겨나가며 흙바닥에 맥없이 딩굴렀다. 첫번째 녀석의 부러진 창이 아직 그의 어깨에 그대로 박혀있었다.
창에 어깨를 찍힌 채 쓰러진 페로를 향해 다시 4기의 팀을 짠 낙타병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신들끼리 엉키는 것을 막기 위해 4명씩 조를 짜서 공격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부상을 입은 페로가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총리각하! 각하! 괜찮으세요?"
흙투성이가 되어 허둥지둥 달려온 자이납이 쓰러진 말의 목에 박혀있던 페로의 화극을 급하나마 집어들었다.
"씨발! 이거 이떻게 쓰는거야?"
페로를 공격하고 스쳐지나간 2기의 낙타병이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시미터의 짧은 리치로는 높은 낙타 위에서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페로를 공격할수가 없었다.
"네놈 잘걸렸다!"
페로의 화극을 치켜들고 무작정 돌진한 자이납이 되는대로 힘껏 휘둘렀다. 그다지 정확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은 공격이었지만 그 가디언 특유의 힘과 속도와 어우러져 어물대는 낙타의 다리를 베어버리기는 충분했다. 자이납은 바닥에 떨어진 그 낙타병의 목을 힘껏 내리찍었다. 쓰러져있던 페로는 어깨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가까스로 의식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너도!"
자이납이 다시 휘두른 화극에 페로를 공격하던 또한명의 낙타병이 바닥에 나딩굴렀다.
"우와! 이거 쓸만하네! 무게도 딱 적당하고!"
낙마하는 낙타병을 그대로 공중에서 힘껏 내리찍으며 자이납이 소리쳤다.
"저놈 조심해! 보통이 아니다!"
3차로 달려오던 4기의 낙타병들이 자이납을 가리키며 외쳤다. 4명의 페로 호위기병들은 사방에서 7명이 넘는 낙타병들의 협공을 받으며 쩔쩔매고 있었고 제네르와 라손은 아직 도착하려면 몇초 더 기다려야 했다. 갑주도 부서진 채 이미 중상을 입은 페로에게 단 한번의 공격이라도 명중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자이납이 쓰러진 페로의 앞을 급히 몸으로 막아섰다.
"저놈들 막으면 저 이 창 주세요!"
자이납이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걸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그러마....."
페로가 낮게 중얼거렸다. 흙바닥 위로 페로의 피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힘이 빠져버린 고개를 천천히 뒤로 꺾은 페로는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웬 시커먼 물체를 느낄 수 있었다. 시야가 희미해져가는 페로가 눈에 힘을 잔뜩 주어 그쪽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카렐이 달리는 말에서 곡예하듯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4기의 적 낙타병은 어느새 쓰러진 페로의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페로를 혼자 지키고 선 자이납은 큰 기합소리와 함께 페로의 화극을 치켜들었다. 그순간 4기의 낙타병이 동시에 자이납의 옆을 스쳤다.
"으악!"
무작정 휘둘러댄 자이납의 화극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두 기의 낙타병들이 쓰러지는 낙타와 함께 바닥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맥없이 동댕이쳐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깨와 오른쪽 가슴에 두 개의 창이 동시에 찔린 자이납 역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페로!"
말 옆구리에서 팔을 최대한 뻗은 카렐이 쓰러져있던 페로의 뒷덜미를 한팔로 힘껏 나꿔채 번쩍 들어올렸다. 페로는 카렐의 목을 거의 본능적으로 덥석 껴안고 말았다. 고통스러워하는 페로를 마주보고 앞에 앉힌 카렐은 그 어깨에 박혀있던 창을 손아귀 힘으로 부러뜨려 옆에 내던져 버렸다. 그대로 놔두면 말 위의 진동 때문에 창이 흔들거리며 상처를 더 크게 만들 것이 뻔했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
카렐이 의식을 잃어가는 페로를 품에 꽉 껴안았다. 페로는 카렐의 옷자락을 손톱자국이 나도록 힘껏 움켜쥐며 그의 목에 얼굴을 부볐다. 두 기의 나머지 낙타병들이 카렐을 향해 정면에서 돌진해왔지만 의식이 희미한 페로를 앞에 껴안은 카렐은 허리의 칼을 도저히 뽑아들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창을 몸을 낮춰 피한 카렐이 그 낙타병의 얼굴을 급한대로 주먹으로 힘껏 후려쳤다. 웬만한 둔기를 능가하는 충격에 쓰고있던 캡과 함께 낙타병의 두개골이 산산조각나며 맥없이 낙타 위에 늘어져버렸다. 나머지 한 명의 낙타병이 카렐의 등뒤에서 시미터를 휘두르며 쫓아왔다.
"귀찮은 놈!"
말을 뒤로 돌리려던 카렐은 멈칫 했다. 낙타병의 등뒤를 최고속도로 쫓아온 제네르의 창이 적병의 몸을 그대로 꿰뚫었다.
"자이납을 구해! 이제 전투는 자네가 지휘하게!"
큰 소리로 지시한 카렐은 페로를 데리고 컴플렉스 건물 쪽을 향해 말에 최대한 박차를 가했다. 카렐의 옷자락을 붙들었던 페로가 숨을 헐떡이며 목에 입을 맞추었다. 카렐의 목은 페로가 흘린 피로 이미 붉게 범벅이 되어있었다.
"기분 좋은데.......환상적이야.......이렇게 공개적으로 너하고 스킨쉽해보기는.......정말 짜릿해."
"하이고, 피 흘리더니 아주 정신이 나갔네."
카렐이 고통스러워하는 페로를 위해 일부러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지난번에 푸엘 숲에서 너 다쳤을때 네 느낌이 이런거였을까?"
"너 메조키스트지?"
카렐이 페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페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지만 입에서 터져나온 피 때문에 다시 카렐의 품 안에 쓰러져버렸다. 카렐은 페로의 몸이 식지 않도록 품에 더 꼭 껴안았다. 컴플렉스가 가까와지고 있었다. 페로가 카렐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속삭였다.
"이 말에서 내리기 싫은데 어쩌지?"
페로가 카렐에게 몸을 더 바싹 붙이며 중얼거렸다. 거의 기운을 잃어가는 이 와중에도 그의 가슴을 부둥켜안은 페로의 손에서는 굳은 힘이 느껴져오고 있었다.
"나하고 영원히 말 안탈려면 그렇게 해."
카렐의 퉁명스런 대꾸에 페로가 키득거리며 카렐의 목과 가슴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각하! 이게 어떻게 되신 겁니까!"
컴플렉스 앞에서 부상자들을 처리하던 의사들이 피를 흘리며 실려온 주인 페로를 보고는 기겁을 하며 카렐 주변에 모여들었다. 카렐은 흐느적거리는 페로를 말 아래로 내려주었다.
"가지 마......제발,"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려는 카렐을 보며 페로가 중얼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은 전장을 빙 둘러보았다.
제네르의 총 지휘로 이쪽의 보병과 기사단, 가디언 연합군은 이미 적 좌군을 거의 붕괴시켜가고 있었고 이젠 사방팔방 흩어진 적 도주병들을 쫓는, 전투의 마무리단계가 벌어지고 있었다. 더이상 자신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카렐은 말에서 뛰어내려 페로의 머리맡에 조용히 자리잡고 앉았다.
의사들의 응급처치를 받던 페로는 피묻은 손으로 가디언 팔찌가 끼워져있는 카렐의 큰 손을 꽉 움켜쥐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페로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조금 뒤쪽으로 역시 중상을 입은 자이납이 기병 한명의 말에 실려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씨, 내 창 어딨냐구요, 그 창 이제 내꺼라니까, 누가 집어가면 어떡해요?"
자이납은 피를 흘리는 그 와중에도 여전히 쉴새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녀석도 가디언의 혈통이 섞여서인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절명했을 큰 상처에도 오락가락하나마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기도모르게 웃음지은 카렐이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페다이? 총리각하 화극 자네가 잘 보관하고 있어. 아무도 손 못대게 하고. 새 임자가 많이 걱정한다."
한시간이 넘는 보병대와 기사단, 가디언의 거센 협공 끝에 결국 대오가 완전히 무너진 적 좌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페로 기습사건에 악이 잔뜩 받힌 라손은 갑주를 벗긴 열 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시로와 함께 적진으로 돌진해 도주하던 알리 경을 단 십여분만에 생포해 잡아오는 큰 전공을 세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네 이름이 뭐냐?"
제네르가 죽은 말 밑에 깔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파르에게 칼을 겨누며 물었다.
"사파르 샤디......빨리 죽여. 제길,"
"샤디 가 녀석이군? 상급귀족인가?"
사파르의 귀 밑에 새겨져있는 상급귀족문을 발견한 제네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반신과 팔뼈가 산산조각난 사파르는 움직일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제네르는 칼을 거두며 부하들에게 일렀다.
"이녀석 빨리 의무실로 데려가."
"썅! 죽이라니까!"
사파르가 이를 드러내며 악을 썼지만 제네르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을 따름이었다.
"애석하게도 죽고싶다고 죽을 수 있는 게 아냐. 지금부터 협상을 시작해야 할텐데 괜히 서로 악감정 만들필요 없지."
쌀쌀맞게 대답한 제네르는 4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엉망이 되어있는 1번 컴플렉스 정면의 넓은 분지를 한 번 빙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흩어진 시체들은 거의 적군들의 것이었다. 여느 전투나 대체로 마찬가지지만 패자의 경우는 진형이 무너진 뒤 어수선하게 우왕좌왕하다가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병사들과 노예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얼마 되지 않는 부상자와 아군의 시신을 수습하러다니고 있었고 이 일이 끝나는대로 적군의 시신까지 수습해야하는 내키지않는 일이 남아있었다.
제네르는 이제서야 슬슬 쑤셔오기 시작한 얼굴과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목숨에 직결되는 일이 아니니 지금 한참 바쁠 의무실에 가봤자 신경도 써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카렐은 컴플렉스로 끌려간 알리 경과 담판짓느라 정신없을테고 후송된 페로는 지금쯤 의식을 차렸는지 아닐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페로 걱정에 전전긍긍해하고 있는 라손 녀석을 보니 한번쯤 확인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친구를 향해 씨익 웃어보인 그는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우베? 총리각하 어떻게 됐어?"
"의식 찾으셨습니다. 지금 전하와 함께 알리 경 담판에 들어가셨습니다."
제네르가 옆에 선 라손에게 웃으며 눈을 쫑긋거려 보였다.
"니 서방님 무사하시대."
입이 귀에 걸린 라손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이 노란머리 친구와 어거지로 어깨동무를 하며 한쪽에 세워놓은 말로 향했다.
"이제 오늘의 영웅 하크로딘 단장 축하하는 일만 남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