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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42화 (142/1,132)

< -- 142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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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도 돼."

어린 카렐이 낮은 나무에서 따낸 빨갛고 동그란 무언가를 내밀었다. 어린 페로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였다.

"아빠가 바깥에서 나는거 먹으면 죽는댔어."

"니 아빠 거짓말장이라니까."

카렐이 입을 삐죽거리며 그 요상스런 빨간 열매를 입 안에 아무렇지않게 집어넣었다.

"긴잎나무딸기야. 새콤달콤해. 말려서 차로 끓어먹으면 더 좋아."

카렐이 신기한 것 구경시켜준다는 말에 집에서 꽤 떨어진 숲까지 따라나온 페로는 몰래 도망쳐나온 것이 계속 걱정되는지 집 쪽만 연신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뒤를 쫓아다니는 하인들이나 집사녀석의 눈을 피해 이렇게 몰래 빠져나온 이 정도도 그가 태어난 이래 해본 가장 큰 '탈선'이었다.

"저 뒤에는 포플러나무야, 흑양나무라고도 해. 어? 저건 말오줌나무네? 보통 산에 자라는데 왜 여기있지?"

카렐은 '신기한 것'이라며 처음보는 나무들과 꽃들의 이름들을 줄줄이 읊어댔지만 시시한 나무나 꽃 따위에는 애시당초 관심조차 없는 페로에게 카렐이 신이나서 떠드는 말은 유학 공부만큼이나 지겨운 것이었다.

그런 페로에게 정말로 신기한 건 자기가 보기엔 다 그놈이 그놈같아보이는 수백가지의 꽃과 나무이름들은 물론이고 그 세부분류에 특성, 심지어 잘 자라는 환경까지 귀신같이 다 기억하고 가려내는 저 조그만 계집아이의 머리였다.

페로는 저 기가막힌 기억력으로 차라리 무기 이름이나 특성들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훨씬 더 대화할게 많았을것이라며 말도안되는 생각도 해보고 있었지만 저 가디언같지않아보이는 가디언 계집아이는 정작 무기 쪽에는 도무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나무딸기는 장미하고 친척이거든. 그래서 가시가 있어. 딸 때 조심하지 않으면 다쳐."

카렐이 그 길지않은 팔을 뻗어 산딸기 몇 알을 더 따내 손에 들고있던 누런 종이봉투에 담았다. 산딸기를 먹은 카렐이 여전히 '죽지않고' 있자 페로는 조심스런 손길로 봉투 안에서 산딸기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엑,"

지독한 신맛에 페로가 입에 넣었던 산딸기를 급히 뱉어냈다.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카렐은 봉지 안을 손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려서 차 할려고 따낸거 먹었나보다. 차 만들땐 신게 더 좋거든."

"신지 안신지 안먹어보고 어떻게 알아?"

페로가 눈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카렐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카렐은 봉투 안에서 아까보다 조금 엷은빛의 산딸기 한 개를 끄집어내 페로에게 내밀었다.

"이건 안실거야."

"싫어. 이제 안먹어."

"정말 안시다니까."

"어떻게 알아?"

"난 알아."

카렐이 손끝으로 산딸기 껍질을 천천히 어루만지고는 다시 말했다.

"참말이야. 달아."

잔뜩 의심어린 눈초리로 산딸기를 받아든 페로는 아까보다 훨씬 조심조심 입에넣고 깨물어 터뜨렸다.

"엉?"

페로가 카렐을 힐끗 바라보았다.

"정말이네."

"믿으라니까."

카렐이 봉투 안에서 몇 개의 산딸기를 더 꺼내 페로의 손에 쥐여주었다.

"신기하네."

페로가 산딸기를 신나게 먹으며 다시 새 나무를 찾아나선 카렐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어느새 한줌의 산딸기를 다 먹어치운 페로는 지나가는 나무마다 그 열매를 한번씩 더듬고 지나가는 카렐의 손끝을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거야?"

"맛봐."

"맛? 넌 맛을 손으로 보냐?"

"응."

페로는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저 여자아이는 무언가 괴상한데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손으로 맛을 본다니 황당하기 짝이없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난 만지면 맛을 알아. 노예 아저씨들이 거짓말이라고 놀리던데 내가 진짜로 보여주니까 나보고 괴물같대. 웃기지?"

페로는 '너 정말로 괴물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쳐올라왔지만 차마 입밖으로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 제멋대로에 천방지축이던 '못말리는 도련님' 페로가 이만큼이나 자제력을 갖추게 된 것도 따지고보면 이 괴상한 여자아이 덕분이었다.

또래친구 하나 없이 집안에서 외토리로 지내는 페로나, 동기 한 명 없이 다른 가디언 소년들에게서 완전히 따돌림당하고 있는 카렐이나 어찌보면 거의 비슷한 신세였다. 그래서인지 이 둘은 페로가 가정교사와 공부하는 길지않은 시간을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붙어있었고, 어떤날은 잠자리에서도 함께 붙어자는 때도 있었다.

조금은 희한하나마 친구가 하나 생기면서 놀랄만큼 어른스러워진 아들의 모습 때문인지 아버지 슈막도 이 특별한 가디언 여자아이와 종일 어울려다니는 아들을 굳이 말리지는 않고 있었다.

"집에 가자."

페로의 말에 카렐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하늘을 올려보았다. 해가 뉘엇뉘엇 져가는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 두 명의 여덟살배기 꼬마들은 나란히 서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론 동갑이라기보다는 서너살정도 차이나는 오누이같은 모습이었지만 밝은 표정 밑으로 흐르는 총명함은 전혀 안어울리는듯한 이 둘 사이에 공통분모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보네?"

불이 휘황찬란하게 켜진 수련장을 가리키며 카렐이 중얼거렸다. 페로는 행여 도망쳐나온 자신을 찾는것이 아닌지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수련장 문 안에서 급한 표정으로 달려나온 가디언 다룬이 거칠게 나꿔챈 건 자신이 아니고 바로 카렐의 손이었다.

"도대체 뭐하고 오는거야? 오늘 일찍 오랬잖아!"

신경질을 버럭 낸 다룬이 카렐을 질질 끌고 수련장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카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페로는 카렐이 떨어뜨린 산딸기 봉투를 집어들고 그들을 따라 수련장에 들어섰다. 카렐을 끌고간 다룬이 도착한 곳은 수련장 한쪽의 의무실이었다. 산딸기봉투를 들고 따라온 페로는 의무실 앞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 서 있는 아버지 슈막의 모습에 지레 깜짝 놀라고 있었지만 슈막은 오늘 무슨 일인지 아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거 꼭 해야되는거야?"

"규정은 규정이니까요."

슈막의 질문에 황실에서 나온 듯한 관리 한 명이 카렐의 피를 뽑아 분석기에 넣으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맞군요. X-11-1 카렐. 합성자는 자그룰라 모렌, 8살이 되었으니 오늘부로 가디언 명부에 공식 등록됩니다."

"얜 어차피 수련도 못할 약골......"

"규정이라 말씀드렸죠? 오늘 공식 등록하고 난소와 자궁을 제거하고 그자리에 새 기관을 이식하겠습니다. 외부생식기와 분비선은 조금 더 성장한 10세에서 11세가 되면 제거합니다."

슈막이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페로는 물론이고 다룬의 손에 붙들려있는 카렐 역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아직 이해할 나이는 되지 못했다. 관리는 이미 수술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의사에게 금속 캡슐 한 개를 내밀었다.

“이식할 분비샘이야. 잘 다뤄.”

쌀쌀맞게 지시한 관리는 가져온 서류에 무언가 바쁘게 적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실패라고 판정은 했지만, 아직 근위대에서 특별관찰하고 있는 아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훗, 여자아이라 수술은 꽤 크겠군요."

의사가 영문도 모른 채 벌벌 떨고있는 카렐을 수술실에 데려들어갔다. 큰 유리창이 붙은 수술실 밖에 선 슈막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저 가디언 꼬마아이가 수술대에 묶이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룬, 저게 뭐하는거야? 응?"

페로가 옆에 선 다룬의 팔을 연신 잡아당기며 물었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다룬은 별다른 대답을 해 주지 않은 채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도련님께선 나가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다룬이 슈막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입을 열었다.

"됐어, 어차피 나중에 수련장은 이놈이 맡아야 할 테니까 지금부터 봐두는것도 나쁠 것 없지."

"하지만.....주인님......"

수술대에 손발이 묶인 카렐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한 얼굴로 한손에 산딸기봉투를 든 채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어린 페로를 벌벌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페로는 카렐의 옆에 놓여지고 있는 파란색 새 가디언 팔찌와 수술도구들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연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마취합니다."

본능적인 불안함에 카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항하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이미 묶여있는 그의 손목에 연결된 관을 타고 약물이 서서히 그의 감각을 죽여가고 있었다. 맑게 반짝이던 아이의 회색빛 눈동자가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의식을 잃은 그의 탁해진 시선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페로에게도 공포와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전까지도 그에게 웃으며 산딸기를 따주던 그 아이의 고개가 맥없이 옆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뭐하는거야? 뭐하는거냐고? 다룬?"

다룬도, 아버지 슈막도, 그 누구도 페로에게 지금 벌어지는 일에 관해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누런 종이봉투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채 안에 들어있던 그 붉은빛 열매 몇 개를 밖으로 토해놓고 있었다. 페로의 검고 큰 눈에 이유없는 공포와 함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페로도 자신이 왜 울고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취가 되었음을 확인한 의사들이 수술도구들에 손을 가져갔다.

"카렐......카렐......."

바닥을 딩굴던 달콤한, 혹은 시큼한 산딸기 열매들은 놀라 뒷걸음치는 페로의 작은 발에 밟혀 짓이겨지며 의무실 바닥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세로로 길게 갈려진 카렐의 작은 아랫배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와 그 속에서 끄집어내어진 정체모를 살점들, 요란스런 드릴 소리를 내며 뼈에 구멍이 뚫리고 가디언 팔찌의 센서가 끼워지던 카렐의 그 작은 손목에서 철철 흘러내리던 선혈만큼 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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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알려드리겠소. 우리가 가진 자료에 따르면 그쪽 전사자는 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것 같소. 우리가 보호중인 그쪽 부상병은 4879명, 일반포로는 7622명이고. 부상포로 중엔 경의 조카인 사파르 샤디와 아쉬드 플레렌 하지즈 장군도 있소."

포로로 잡혀온 알리 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결과를 설명하는 페로 앞에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의무실에서 입던 흰 가운 그대로 어깨에 푸른 망토만을 걸친 채 협상실에 들어온 페로는 머리와 어깨의 큰 상처에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협상석에 앉아있었다.

이 협상에서는 명목상 참관자 역할에 불과한 카렐은 약간 뒤쪽의 안락의자에 앉아 팔찌만을 만지작거리며 이 광경을 말없이 바라만보고 있었다.

"이미 밝힌 교리정치 지지문제 외에 침공의 정당한 이유를 밝혀주시오."

페로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지만 알리 경 입장에서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자리에서 코리온을 팔아먹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페로도 침공이유를 모를리가 없었지만 아까부터 알리 경을 계속 다그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정당한 손해배상금 요구를 할 수밖에 없겠군."

몇십분 동안 같은 말로 알리 경을 들들 볶아댔던 페로가 결국 대기시켜둔 말을 내놓았다.

"아군 전사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및 위로비 2억 골드, 장비손실과 치료비 1억 골드, 컴플렉스 가동중단에 따른 직간접 손실 6억 골드, 도합 9억 골드 외에 그쪽 포로들에 대한 구호비 및 치료비, 뭐 간단하게 몸값이라 하는 게 낫겠군. 1억 골드까지 해서 총 10억 골드 정도면 적당하겠소."

알리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액수도 액수려니와 상급제후인 제4제후로서 11제후에게 참패한것도 모자라 거액의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한다는 건 이만저만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리 경이 또한번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페로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앞에 문서 한 장을 내놓았다. 생각없이 문서를 들쳐본 알리 경이 페로를 휙 올려보았다.

"제4제후 샤디 가와 제11제후 자이센 가와 불가침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하지만......"

"조약의 댓가는 경에게 구미가 당길거요."

알리 경이 페로의 얼굴을 문득 올려보았다. 페로가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낮게 속삭였다.

"이번 전투를 간단한 경계선분쟁 정도로 조용히 묻어줄 테니."

페로가 히죽거리며 알리 경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페로가 침공에 대해 배상금만으로 만족하고 공식적으로 문제삼지 않겠다는, 얼핏 들으면 꽤나 관대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알리 경 입장에서는 샤디 가가 제후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고 페로로서는 이제 기틀을 잡아가는 서부 컴플렉스의 안전을 보장받는 수단이었다.

페로의 속내를 모를 턱이 없었지만 패전하고 포로 신세까지 된 알리 경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면목없습니다."

페로가 연 승전축하파티에 나온 발리가 얼굴이 엉망이 된 제네르 앞에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제네르 옆에 있던 시로가 괜히 으쓱한 폼을 잡고 있었다. 정규군 우군을 진두지휘했던 그는 라손과 공동으로 알리 경을 생포해내는 큰 공훈을 세워 제네르의 코앞에서 카렐과 페로에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들었던 터였다.

하지만 제네르는 기운빠진 발리의 넓은 어깨를 힘있게 껴안아주며 그의 뺨에 가볍게 키스까지 해 주고 있었다.

"자네가 하지즈 장군 힘을 빼놓지 않았다면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었을게야."

패한 부하의 기운을 북돋워주려는 행동이라는 것은 시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자기도모르게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제네르는 그런 시로의 행동을 힐끗 돌아보며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페로 자이센 총리각하와 카렐 님 드십니다."

대형 실내연병장을 개조한 연회장에 엉망이 된 페로와 역시 똑같은 몰골의 카렐이 나란히 들어섰다. 여전히 밝은 표정의 카렐은 옆에 앉은 페로의 손등을 툭툭 두들겨주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지도자전하와 총리각하 만세!"

연병장에 모인 기병들과 보병 지휘관들, 가디언들이 큰 함성을 올리며 승리를 연호했다. 일어서서 술병을 치켜든 페로가 오늘의 1등공신인 제네르에게 술 한잔을 직접 하사해 주었다.

"그만, 그만,"

허리를 붙든 제네르가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며 단장을 행가래치는 휘하 기병들의 속에 파묻혀버리고 있었다. 거친 군인들의 함성소리와 노랫소리로 실내 연병장 안이 떠들썩해지며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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