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43화 (143/1,132)

< -- 143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정교사와의 공부시간에 지각한 벌로 격몽요결 열 페이지를 베껴적는 숙제를 떠안은 어린 페로는 바닥에 웅크려앉아 까탈스러운 가정교사에게 계속 투덜투덜거리며 서투른 붓놀림으로 그 재미없는 문장들을 옮기고 있었다. 9살 정도 나이면 글씨를 어느정도 알아볼 정도로는 써야 당연했지만 유난히 악필인 페로의 글씨체는 본인과 가정교사, 그리고 카렐 외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페로의 옆에 같이 뒹굴며 사과를 씹던 어린 카렐은 친구의 삐뚤삐뚤하고 형편없는 글씨체를 킬킬대며 구경하고 있었다.

"一身收拾重千全 頃刻安危在處心 일신수습중천전 경각안위재처심?.....바보야, 잘못썼잖아. '金'자에 점을 안찍으니까 '全' 자가 되잖아. 뜻이 엉망이잖아. 자기 한 몸 수습하기를 천금같이 무겁게 하라. 한 순간의 편안함과 위태로움도 마음가짐에 있다. 이게 맞는 뜻인데 그게 뭐야."

"됐어. 어차피 그영감 다 읽지도 않아."

가정교사보다도 한술 더 뜨는 카렐의 잔소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뜻은 생각도 안하고 막 베껴쓰니까 그렇지."

"내가 뜻을 모르긴 왜몰라. 빨랑 베끼려니까 그렇지."

짐짓 태연하게 대꾸한 페로는 점 두 개를 빼먹은 全자에 카렐 몰래 점을 재빨리 집어넣어 金자로 만들고 있었다.

멋지게 속여넘겼다고 내심 안도하던 페로는 그제서야 저 '괴상한 여자아이'가 자신도 가까스로 해석하고 있는 '격몽요결'을 다 읽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디언들 역시 공용어까지는 당연히 배웠지만 총 오만자에 달하는 이 고대어는 귀족들만이 배우는 일종의 특권적인 문자였다. 게다가 격몽요결은 10대 정도의 소년들이 배우는, 수재로 꼽히던 페로 정도나 되어야 9살의 어린 나이에 읽어낼 책이었다.

페로가 짐짓 아무렇지않게 물었다.

"너 이거 읽을 줄 알아?"

"응. 근데 격몽요결은 별로 재미없어."

카렐이 새 사과를 집어들며 건성 대답했다.

"뭘 봤길래?"

"니 책장에 있는 책들 다 봤어."

"어떤거?"

"대학, 논어, 맹자, 중용, 기자실기, 경연일기, 만언봉사, 동호문답, 역학계몽, 주자어류, 사단칠정분이기왕복서, 왕문성공전서, 남화진경....."

끝도없이 늘어대는 황당한 소리에 페로가 글을 쓰다말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카렐이 늘어놓는 저 책 목록들은 9살배기 꼬마들이 볼 책이 결코 아니었다. 아니, 일부는 유학자들도 어렵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책들이라고 알고있었다. 물론 저런 책들이 페로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이유는 그냥 '장식품'으로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니가 보기야 다 봤지."

페로가 비웃듯 쏘아붙이며 베껴쓰기를 이어갔다. 별로 할일도 없을 때 저 괴상한 계집아이가 책꽂이에 꽂혀있던 '장식용' 책을 뽑아들고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며 보고있는건지 뭐하는건지 궁싯거리는 광경은 페로도 꽤 자주 본 일이 있었다. 물론 아직 저런 책들에서 검은 건 글씨고 허연 건 종이라는 정도밖에는 구별할 수 없는 페로는 기껏해야 저녀석이 베고 낮잠 잘 베갯감을 구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저 책에서 꽃그림이라도 찾는 바보짓을 하고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상은 가져본일이 없었다.

어쨌든 저 괴상한 가디언 꼬마아이가 또 미친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페로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카렐이 재미들렸는지 천장을 올려보며 무어라 웅얼거리고 있었다.

"어젠 사단칠정론을 봤는데 純善(순선)인 四端(사단)은 理發(이발)의 결과고, 有善惡(유선악)인 七情(칠정)은 氣發(기발)의 결과니까, 결국 사단하고 칠정을 별개로 취급한다는 견해가 있고, 칠정은 情의 전부고,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거라서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가 있더라고."

황당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페로의 표정을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카렐은 자기 말에 스스로 넋이 빠져 있었다.

"이런 건 원리주의나 중도파 쪽에서 주로 오가는 논쟁인데 개혁파 쪽에서는 이런 논쟁 자체를 배격한다더라구. 언제 틈날땐 현대유학 책도 한번 보고싶어. 듣자하니까 원리주의쪽에서는 주페 리쿠 응교나 코리온 리쿠 교리 책이 볼만하다더라구. 중도파 카파키 부제학하고 개혁파 란조 대제학 책도 괜찮다던데. 근데 난 왜 원리주의쪽 의견에 손이 더 많이가더라. 혹시 주페 리쿠 응교 책 좀 구할 수 없니? 페로?"

"너 지금 도대체 뭔소리하는거냐?"

격몽요결 베껴쓰는것만으로도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해져있던 페로는 저 괴상한 여자아이가 내뱉는 어느나라 말인지도 모를 황당한 소리에 더 골치가 아파오고 있었다. 마음만같아서는 페로 역시 어디서 저런 '외국어'를 배워왔는지 계속 따져묻고싶었지만 괜한 자존심 때문에 여기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자기 딴에는 신나게 말하는 것에 페로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카렐 역시 다른데로 주제를 돌리고 말았다.

"너 내일부터 학교간다며?"

"응."

"나도 학교가고싶다."

카렐이 페로의 책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족이나 부유한 귀족자제들이 들어가는 황실학교는 말할것도 없었고 평민들이 들어가는 공립학교나 자선학교에도 가디언인 카렐은 들어갈 자격이 되지 못했다. 1년 새 완전히 자리를 잡은 카렐의 파란색 가디언팔찌는 이 괴상한 아이의 도무지 어울리지않는 신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페로 도련님, 간식입니다."

방문이 열리더니 하녀가 작은 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페로가 제일 좋아하는, 하얀 설탕을 잔뜩 뿌린 찹쌀과자였다. 과자를 힐끗 돌아본 페로의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페로는 아무리 좋아하는 먹을것이 있어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덤비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페로는 이제 얼마 안남은 베껴쓰기를 다 끝내야 과자에 손을 댈 것이 확실했다. 네 개나 되는 사과를 혼자서 몽땅 다 먹어치운 카렐은 그래도 배가 고픈지 페로의 과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저 먹보."

페로가 놀리기 시작했다. 저 계집아이가 안먹어서 비쩍 마른 줄 알았던 페로의 당초 생각은 어마어마한 오산이었다. 사실 먹고나서 토해내는 일이 워낙 많아서 탈이었지만 항상 배고프다며 먼저 투덜대는 건 카렐 쪽이었고 항상 무언가 먹을것을 손에 들고있지 않으면 거의 정신나간 사람처럼 불안해하는 게 저 아이의 본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저 여자아이는 밥통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게 확실했다.

"두 개만 먹어."

페로가 페이지를 넘기며 카렐에게 말했다. 4개밖에 안되는 찹쌀과자 중에 반을 주는 셈이었으니 페로로서는 나름대로 인심 쓴 셈이었다. 하지만 저 먹보 여자아이는 도무지 사양하는 법도 없었다. 페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먹만한 둥근 찹쌀과자를 냉큼 집어든 카렐은 그 쫄깃거리는 갈색 껍데기를 맛있게 씹어삼키기 시작했다.

페로는 군침을 꿀꺽 삼키며 옮겨쓰는 손아귀에 더 속도를 붙였다. 글씨가 그나마 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새 한개를 다 먹어치운 카렐은 또 한개를 집어들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정말 맛있네. 페로 넌 좋겠다. 노예들이 이런것도 다 만들어주고."

또 한개를 신나게 먹던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찌푸린 건 베껴쓰기를 다 끝낸 페로가 책을 덮고 막 간식상에 다가오던 순간이었다.

"근데, 배아퍼."

"쳇, 돼지같이 처먹어대니까 그렇지. 입맛떨어지니까 밖에 나가 토해."

워낙 일상적인 카렐의 행동에 페로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남아있던 찹쌀과자를 냉큼 집어들었다.

"아냐, 토하는 게 아니고 배아퍼......손도 이상해......"

눈을 감은 채 엎드려 끄응 소리를 내던 어린 카렐은 들고있던 먹다 만 찹쌀과자를 떨어뜨리며 바닥을 갑자기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친구가 장난하는줄로 알고 잠시 멍 하니 있던 페로는 바닥에서 버둥대던 카렐의 입에서 갑자기 피와 거품이 흘러내리는 모습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은 페로는 막 먹으려던 찹쌀과자를 집어던지고는 쓰러진 카렐을 부둥켜안았다.

"야! 누구 좀 와봐! 빨리! 빨리!"

"맹수를 잡을 때나 쓰는 맹독이라고 합니다."

로카가 벌벌 떨며 서 있는 슈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문을 모르는 어린 페로는 병실 안에 웅크려앉아 아직까지 배를 붙들고 끙끙대는 카렐의 머리맡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과자 한 개에 묻어있던 독만으로 100명은 즉사시킬 분량이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도련님 손끝이 검게 변해있잖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슈막이 카렐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럼 저년은 뭐야? 한개 반이나 처먹었다며?"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저년의 피에선 독이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먹던 과자하고 입에는 틀림없이 독이 범벅이 되어있었는데......어쨌든 페로 도련님을 노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로카는 더 이상은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지 말을 멈추었다.

단 한명 남은 슈막의 적장자 페로의 목숨을 노릴만한 사람은 사실 이 집안에 넘쳐나고 있었다. 물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11명이나 되는 슈막의 첩들이었지만 굳이 그들 말고서도 이미 어른이 되어있는 페로의 이복형과 누나들도 있었다.

"주인님께서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보이셔야 비슷한 사건이 재발을....."

로카는 다시한번 주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다물었다. 첩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주인 슈막에게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는 건 자기 목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첩들이나 이복형들은 어린나이에 혼자가 된 꼬마 페로를 나름대로 이뻐해주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슈막의 첫째 소실 페노이와 그의 아들이고 서자 중 장남인 우제크였지만, 지금 슈막에게 가장 많은 총애를 받고 있고 황제령에서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기도 하는 아홉번째 소실 가비도 이런 짓을 저지르고 남을 인물이었다.

"일단 묻어 둬."

슈막이 낮게 중얼거렸다.

"예? 하지만......페로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세번째인데 이번만은 제대로 조사를 하셔야......."

"됐어. 집안 어수선하게 만들 것 없어."

창백해진 아들을 한 번 돌아본 슈막은 매정하게 휙 돌아 밖으로 나가버렸다.

슈막이라고 누구 짓인지 짐작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지만 그 뒤를 들쑤셨다가 첩들의 원성을 사고싶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 2번의 사건들을 그냥저냥 넘기면서 가졌던 똑같은 착각에 또한번 빠져들고 있었다. 이번에 들켰으니 다시는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어설픈 기대가 그것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두겐으로부터 루쿠스탄 공략 실패를 보고받은 코리온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을 뿐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 들릴듯말듯 작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샤드니 경만 있었더라면......"

"황공하옵니다."

두겐이 머리를 조아렸다. 남극성당에서 병법학을 공부하고 황실 내무부와 타르서스에서 뛰어난 전공으로 순식간에 타르서스 직할군 사령관까지 올랐던 샤드니는 플레렌 가문에서도 손꼽히는 '군사통'이었다. 그 아름다운 생김새나 평소의 조용하기 짝이없는 태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돌적이며 속전속결의 병력운영은 모든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그것이었다. 그런 샤드니가 총사령관이었다면 충분히 바뀔 수도 있었을 전과였다.

학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코리온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지팡이를 짚은 샤드니가 아직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코리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 있었다. 코리온은 조금씩 떨리고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떤가? 플레렌 응교?"

코리온이 눈을 가볍게 내리깔며 물었다.

"많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샤드니가 코리온을 다시 돌아보았다.

"패전소식은.......들었사옵니다."

"그곳은 언제든 다시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앞으로....."

코리온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샤드니가 두겐 공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코리온은 샤드니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단은 약간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네. 에너지장벽도 내일부로 풀 것이야. 이 혼란사태는 얼마간 더 지속될 것이니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네."

"하지만......근위대 세력이......"

"어차피 녀석들이 쉽게 제위를 차지하진 못할게야......우리에게 정말로 무서운 건 백만군이 아니라 제네르 하크로딘같은 천박한 개혁파 무리들일세."

코리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샤드니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차피 지난번의 집단주살로 자칭 개혁파는 사실상 몰락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중도파 지도자 헤데론 자이센이 남아있고......콜에서 풀려난 옛 중도파 지도파 세네피스 카파키 부제학도 남아있지만 중도파 녀석들은 어차피 잇속에 따라 움직이니....."

"하크로딘 그녀석을 따르는 철없는 젊은 유학자들이 너무 많아. 당장 우리 학교에도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꽤 될걸세. 그리고.....세네피스 카파키 그년이 나온 이상 지금껏 중도파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던 헤데론 자이센 대제학도 이제 자리를 내줄수밖에 없을게야. 그여자 정도면 틀림없이 중도파를 재장악할 수 있을테니 결국은 중도파와 개혁파가 손잡는 상황이 벌어질수도 있다는거지."

잠시 말을 멈춘 코리온은 샤드니의 어깨를 스치며 그의 희미한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샤드니 역시 가볍게 눈을 감은 채 옆에 나란히 선 연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중요한 건 카렐 녀석은 유학자들에 힘으로 대항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것이 확실하다는 점이지. 녀석은 틀림없이 세네피스 그년을 앞세워 남극성당을 장악하려 들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남극성당에 있는 우리 동지들의 뜻을 모아들임이 좋을것이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