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46화 (146/1,132)

< -- 146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Stand Alone on the Oak Hill)

56.

ㅤㅋㅞㄹ크의 푹푹 빠지는 정글 속을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차림새를 한 십여명의 사람들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크지않은 칼이나 투박한 도끼를 집어든 그들의 상처투성이 얼굴은 이미 공포로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 여기!"

제일 앞장서서 달리던 거구의 사나이가 뒤를 따르던 동료들에게 약간 떨어진 곳에 보이는 개울을 가리키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르려던 남자 중 한명이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도끼에 뒷덜미를 찍히며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버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덤불 속에서 경갑주를 차려입은 네 명 정도의 병사들이 피묻은 검과 방패를 쥐고 뛰쳐나왔다.

"제길할! 빨리!"

정규군 병사들의 출현에 그들은 숫적인 우세에도 감히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개울 쪽으로 결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막 개울물 중간쯤에 도착한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반대편 밀림에 숨어있던 이십여명의 병사들의 번쩍이는 칼날이었다.

"으익!"

막 뒤로 돌아서려는 그들의 귀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라는 사실이었다.

"제기랄! 이새끼들 지긋지긋하네!"

큰 고무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기마무사 한 명이 거대한 화극을 움켜쥐고 요란스레 시냇물을 튀기며 그들 불쌍한 표적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벼운 캡에 스코프, 라멜라 갑옷만 입은 그 무사는 들고있던 화극을 휘둘러 선두에 있던 거구의 덥수룩한 남자의 머리를 그대로 두토막내어 버렸다. 맑은 시냇물은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뇌수와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놀라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 역시 온전히 달아날 운명은 아니었다. 먹이를 발견한 개미떼처럼 그들 주변에 몰려든 삼십여명의 정규군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는 나머지 여덟 명의 거렁뱅이 무리들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작작 좀 해둬라, 이새끼들아."

뒤로 물러난 기마무사가 철천지 원수라도 만난 듯 적들을 무자비하게 토막내는 부하 병사들에게 투덜거렸다.

"이새끼들이 포비브마을 습격해서 주민들 강간살해하고 도망친 그 무리입니다. 비장님."

보궁수가 기마무사 앞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피묻은 화극 날을 냇물에 헹구던 그 기마무사는 '강간'이라는 말에 혀를 쑥 내밀며 자신이 죽인 적들을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됐어! 이새끼들아! 모가지는 갖다가 걸어야 할 것 아냐! 고깃덩어리 갖다가 걸래?"

기마무사가 다시한번 소리를 꽥 지르자 흥분한 병사들은 그제서야 씩씩대며 시체 주변에서 한발씩 물러났다. 한 녀석은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다시한번 사정없이 걷어찼다.

"모가지나 챙겨. 제기랄, 밥값 했다고 보고는 해야 할 것 아냐. 근데 이 물 아랫마을에서 식수로 쓰는데 이지경을 해놨으니 어쩔거야."

"제가 가서 알리죠."

보궁수가 어깨를 으쓱 하며 두 명의 병사를 데리고 냇물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제길, 이게 뭐야."

기마무사가 투구를 벗어 그 위에 엉겨붙은 잎사귀들과 덩쿨들을 털어냈다. 부하들 앞에서 망신당할까봐 애써 태연한 척 하긴 했지만 방금 전 덤불 속에서 달려나올 때 하마터면 덩쿨에 투구가 걸려 볼쌍사납게 뒤로 나동그라질 뻔 했던 터였다. 코아 전사단 소속의 자이나브 카메네이 비장은 평소의 그다운 태연한 얼굴로 투구를 툭툭 털고는 다시 머리에 눌러썼다.

"돌아가자!"

부하들이 수급을 다 챙기자 자이납은 삼십여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정글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황제령이 제위다툼을 둘러싼 혼란사태에 빠지고 난 후 근위대가 치안보다는 정적들을 상대하는 데 주력하면서 도적떼의 준동이 심상치않아지고 있었다. 특히 원래부터가 거의 무정부지역에 가까왔던 이곳 ㅤㅋㅞㄹ크에서는 떠돌이 화전민들이 도적화되면서 많은 정주부락들이 도적떼들의 기습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 문제로 고심하던 슈벨 수반이 결국 카렐에게 이 문제에 전사단이 직접 나서줄 것을 요청하면서 카렐은 전사단에서 새로 정규군 비장으로 임명된 자이납에게 백 명의 ㅤㅋㅞㄹ크 출신의 정선된 정규군 경보병들을 맡기면서 이들을 토벌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민간인과 백지한장밖에 차이가 없는 이들 정글도적들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자이납은 그들을 직접 찾아다니는 생고생 토벌전을 벌이는 대신, 각 정주부락에 전담 정보원들을 심고 떠돌이 장사꾼들과 업자들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해가며 몇몇 큰 무리들만을 본보기로 박살내는 방법으로 그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해들어가고 있었다.

'카메네이 기동대'로 꽤나 유치하게 명명된 이 크지않은 부대는 한달이 채 되지않는 기간동안에 20개가 넘는 도적떼를 박살내면서 자칫 극심해질 뻔 했던 ㅤㅋㅞㄹ크의 도적떼 준동은 조기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이납도 잠잘 여유조차도 거의 없던 타이트한 생활에서 이젠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엑,"

피묻은 갑주 차림으로 본부마을에 돌아온 자이납을 보고 한참 식사중이던 네피가 얼굴을 찌푸렸다. 식탁 위에 즐비한 먹을것을 본 자이납은 갑주를 벗을 생각도 않고 냉큼 네피의 옆에 비비고들어가 앉았다.

"헤헤, 배고픈데 잘됐네."

"이씨, 옷 더러워졌잖아."

네피가 자기의 새 옷에 피가 묻자 투덜거리기 시작했지만 자이납은 듣는둥 마는둥 그 피묻은 손으로 큰 빵을 덥석 집어 입에 우겨넣었다. 그 모습에 네피 반대편에 앉아있던 솔이 웃음을 겨우 참으며 자기 앞에 있던 비둘기구이를 자이납 앞에 내주었다.

"부녀지간에 어쩜 이렇게 하는 행실이 정반대인지 몰라. 고마워, 솔."

자이납이 솔이 내민 비둘기 다리를 떼어 입에 넣으며 네피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솔은 먹는데 정신이 팔린 자이납이 벗어서 옆에 '내던진' 갑옷을 직접 챙겨주고 있었다.

"이렇게 두시면 상하잖아요."

솔이 갑옷의 먼지를 털어내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이납이 자신과 같은 가디언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 솔은 그를 친언니처럼 잘 따르고 있었다. 차갑고 엄격한 엘리트 유학자 제네르나 그 신분에서부터 어딘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씨다른언니 아메스보다 자이납이 솔 입장에서는 훨씬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상대인 것이 사실이었다.

자이납의 갑옷을 직접 닦아주던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네피가 다시 투덜거렸다.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곤......난 칼쓰는 여자들이 제일 싫어."

네피가 자신의 혀를 잘못 놀렸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채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이납은 물론이고 맞은편에 있던 제네르, 라손과 아메스까지 무려 네 여자의 곱지않은 시선이 일제히 네피를 향했다. 함께 식사하던 시로와 조페, 카토, 우베는 행여나 그 화살이 엉뚱하게 자신들에게 튕길까 괜히 엉뚱한곳을 바라보며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전하까지 계셨으면 정말 재밌는 분위기가 연출됐을텐데."

제네르가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망고를 깎으며 중얼거렸다. 무안해진 네피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먹다만 양고기를 입에 다시 우겨넣었다. 자이납이 다시 네피를 겨낭한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기서 사는게 재미있긴 한데.....왜 여긴 잘생긴 미남이라고는 전멸한걸까."

네피의 일그러든 얼굴에 제네르가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들이 모두 동감한다는 듯 깔깔대며 컵으로 나무식탁을 일제히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허, 전하 따라가지 못해서 가슴아프겠네. 지금쯤 페로 경하고 함께 계실텐데."

우베가 중얼거리자 한참 비둘기고기를 뜯던 자이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아씨, 미리 말 좀 해주지!"

자이납은 자신을 째려보는 라손의 곱지않은 시선을 넌즈시 무시하며 먹던 비둘기고기까지 내던지고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아메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두고 벌이는 두 여자의 '덧없는' 신경전이 꽤나 재밌는지 웃음띤 얼굴로 과일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라손은 자이납이 의자 옆에 소중하게 기대놓은, 한때 페로의 손에서 있었던 화극을 힐끔힐끔보며 부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남자 얼굴만 보고 판단하는거 아냐. 그리고 솔직히 이자리에도 추남은 없잖아."

우베가 입을 삐죽거렸다. 네피도 그을린 피부와 그 건장한 골격 때문에 좀 우락부락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남자답고 호방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시로 역시도 크고 빛나는 검은 눈매에 흑인종 특유의 매끄럽고 윤기흐르는 피부와 약간 곱슬진 머리칼, 시원시원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한 나름대로 괜찮은 얼굴을 한 남자였다.

평범한 동네 아저씨같은 선한 인상의 조페는 접어두고라도 카토같은 경우도 가디언답게 큰 키에 날카로운 눈매와 인상을 지닌, '이동네에서는' 그나마 제일 잘생겼다는 평을 듣고있던 차였다.

하지만 자이납은 포크를 두손에 꽉 쥔 채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페로 자이센 총리각하 정도면 더 말할나위가 없긴 하겠지만......캬아......지난번에 찔렀던 그 금발머리 유학자는 정말 너무 아까워......아냐아냐, 리쿠 학장님 정도 되시는 분이 날 안아주시면 정말......심장마비로 까무라쳐 죽을지도 몰라."

"손에 피나 덕지덕지 묻히고다니는 여자 퍽이나 안아주고 싶것다."

네피가 또 안해도 될 말을 내뱉었다. 또다시 네 여자의 무서운 눈초리를 받게 된 네피는 먹던 양고기덩어리를 쥐고 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음달이면 실전배치된 정규군이 총 5만을 넘어설거야. 북부에서 들어온 자금으로 새로 훈련시킨 병력 첫 배치가 시작되거든."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누운 카렐이 찻잔을 내미는 페로에게 말했다. 카렐의 전용공간처럼 되어버린 페로 관의 서쪽 안채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외부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통제된 채 페로와 카렐 단둘이 모처럼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괜찮군."

"그리고오.....지난번 루쿠스탄 전투 때 절감했지만 전사단에도 경기병이 필요할 것 같아."

카렐의 말에 페로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경기병이라.....차라리 어디나 다 있는 중장기병대가 만들기 쉽지 경기병단은 정말 편성하기 어려울걸. 북부 창기병대는 이미 절단났고, 남은건 동부 경기병들 뿐인데 제후들이 어디 쉽사리 내놓겠어? 처음부터 가르치려면 몇년은 걸려야 할 걸. 그래, 기병들은 어쩌다가 구한다 치고, 지휘관은 어쩌게? 경기병 지휘관이 어디 구하기 쉬운 줄 알아? 동부에서도 중장기병보다 더 비싼몸이 그네들이라구."

"그거 생각하면 지금 나도 골아퍼."

차 한모금을 들이킨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북부길드 쪽에 옛 북부 창기병 출신들이나 다른데 용병으로 가 있는 기병들을 찾으라고 지시는 내려놨어. 이젠 동부쪽에서 찾아봐야지. 뭐 어마어마한 대군을 편성하자는것도 아니니까. 동부에서 한 2천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어?"

"글쎄,"

페로가 카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며 몸을 바닥에 쭉 뻗었다. 카렐은 그의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비단포 입고 누우면 구겨져."

"알게뭐야. 갈아입으면 되지."

페로가 벨트를 끌르고 푸른 비단포와 셔츠를 벗어 내던지고는 카렐의 손을 웃통을 벗어던진 자신의 탄탄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몸매 자랑하냐?"

"응."

"하여간......"

가슴을 쓰다듬는 카렐의 가벼운 손장난을 즐기며 지그시 눈을 감은 페로가 무언가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참, 나 22일에 동부로 가야 돼."

"22일? 20일 남았네? 무슨 일 있어?"

"너 내 집 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 까먹었냐? 1월 23일이 무슨 날이야?"

페로의 핀잔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렐이 이마를 탁 쳤다.

"아하, 미안미안, 동부 대제례있는 날이지?"

"똑똑하십니다. 태자전하, S혈통 맞으십니까?"

페로가 카렐의 배를 대뜸 꼬집었다.

"근데 아메스하고 제네르 경 좀 빌려줘."

"그 둘이 무슨 물건이냐?"

카렐이 짖ㅤㄱㅜㅊ게 웃음지으며 이번엔 페로의 가슴을 살짝 꼬집었다.

"최고제후 샤자한 공이 아메스를 보고싶다고 그러시네."

"제네르 경은?"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크로딘 가에서 부른 모양이던데."

하크로딘 가에서 불렀다는 말에 카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진짜......포로수용소에서 그 고생할때는 몸값한푼 안내주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방계친척 따위한테 갑자기 웬 관심이 생기셨대?"

"세상사가 다 그렇지 뭐. 잘나갈 법 해보이니까 관심 좀 생겼나보지."

페로가 어깨를 으쓱 하며 카렐에게 더 바싹 붙어누웠다.

"뭐 보내주는거야 힘들거 있나. 22일 아침에 이리 보내줄께."

"날 찾은 이유는?"

평소처럼 싸늘한 표정을 한 코리온 리쿠 학장의 형상이 갑자기 자신을 찾은 베흔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모습에 베흔이 자리에 공손하게 꿇어앉으며 그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지만 베흔 뒤에 서 있던 제롬 공과 수우는 부아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그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해 보였을 뿐이었다.

저 망할 사이코 유학자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 네페티 부인이 서부에서 축출된 사실을 잘 아는 그들은 저런 녀석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베흔을 도리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베흔이 머리를 다시한번 보아리며 말했다.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고자 함입니다."

"좋은 소식?"

코리온의 눈동자가 그제서야 약간의 빛을 뿜기 시작했다.

"남극성당의 헤데론 자이센이 제네르 하크로딘 교수가 재직시에 조직했던 교내 개혁파 모임 '사르곤'을 강제 해산했다고 합니다."

코리온이 갑자기 기이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 좀스런 놈이 남극성당 대제학이라니.....차라리 불쌍하게 죽은 개혁파 란조 경이 나았지......"

"지난번 파예드 아카데미에서의 사태로 세가 떨어진 개혁파를 이기회에 완전히 축출해 내려는 수작 같습니다."

코리온의 경멸섞인 웃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학문적 다양성'은 파에드 아카데미의 학장으로서 코리온이 가장 두려워하는, 남극성당만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 하지만 개혁파 원로 수장이었던 전 대제학 란조 경이 상소를 잘못 올린 죄로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후 새로이 남극성당 대제학에 오른 중도파의 헤데론 자이센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교내에서 개혁파를 몰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직제학이던 제네르가 남극성당에서 사실상 쫓겨나게 된 것도 결국 대제학이던 헤데론 경과의 계속된 충돌 때문이었다. 코리온이 보기에 그의 이런 '좀스런' 행적은 남극성당의 목을 스스로 죄는 바보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내게 이런 얘기를 왜 하는가?"

코리온이 다시 웃음을 띤 얼굴로 물었다.

"그 결과로 이십여명의 개혁파 성향 교수들이 남극성당을 떠나기로 했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학장님께서......그들을 '관리'해 주심이 좋을 듯 합니다만......"

코리온이 베흔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녀석의 속셈은 말을 하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그 이십여명이 제네르의 문하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같은 유학자인 자신의 손을 빌리려 하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일에 있어서 베흔과 자신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애매한 대답을 남긴 코리온의 형상이 사라져갔다.

"하여간, 건방지기는....."

제롬 공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베흔은 얼굴에 웃음까지 띠며 그를 돌아보았다.

"저자가 생각해본다는 말은 긍정의 대답이나 마찬가지니 괘념치 마십시오. 저희로서는 어떤 식으로건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일이니......그건 그렇고, 동부의 대제례가 23일로 확정되었더군요."

"미친놈들, 아직도 그짓거리나 하고 있으니......"

제롬이 입을 삐죽거렸다.

동부에서 1년 중 가장 큰 행사로 치부되는 '대제례'는 세나우스 2세 치세 초반에 있던 40년간의 2차 혼란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개혁주의 노선을 견지하던 세나우스 2세 황제는 아버지의 죽음에 북-동부 제후들과 개혁파 유학자들이 연관되었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정보에 현혹되면서 개혁파들과 갈라서기 시작했고, 기원 119년, 남-서부 제후들에게 그 응징을 명하면서 제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잔혹했던 제후들끼리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인구와 경제력를 기반으로 한 남부와, 하이테크 기술을 앞세운 서부에 나름대로 선전하던 북-동부 연합군은 근위대의 개입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결국 동부의 수도인 요동 행성계에서 벌어졌던 최후의 결전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동부와 북부에서 최고제후부터 10제후까지 100명이 넘는 제후가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남기고서야 그 오랜 참혹한 전쟁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세네피스 황후의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 죽음을 당한 것도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그 긴 전쟁은 개혁파의 몰락과 함께 제국을 계급국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북, 동부가 남-서부의 세력에 밀리게 된 분수령이기도 했다.

패전 이후, 동부에서는 매년 1월 말을 기해 당시에 전사한 제후들과 도합 3천만이 넘는 동부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인 '대제례'를 벌이고 있었다. 물론 세나우스 2세 황제는 동부의 이런 '괘씸한 짓거리'를 탐탁치않게 여겨 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지만 상급제후가문을 중심으로 알게모르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고, 세나우스 2세의 죽음 이후로는 아예 동부의 전 제후들을 모아 단결력을 과시하는 범지역적인 행사로 공공연히 벌려오고 있었다.

"플라칼 가 준비상태는 어떻습니까?"

베흔의 질문에 제롬 공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네들이야 뭐, 허구헛날 싸움박질에 이골난 놈들이니. 출동명령만 내리면 내일이라도 튕겨나갈걸."

"타겟이 어딘지에 관해 적들을 최대한 혼란시켜야 합니다."

"알아, 알아."

여유만만하게 대답한 제롬이 수우나 앉을 옥좌에 다리를 쫙 벌리고 앉으며 큰 금술잔을 집어들었다. 지난 1달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동부 공략은 이제 그 실행만 앞에 두고 있었다.

황제령에서의 ㅤㅋㅞㄹ크 토벌작전과 페로 축출이 생각외의 난관에 부딪히고, 서부까지 새로운 독립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제 베흔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귀신같이 도망만 다니는 ㅤㅋㅞㄹ크의 전사단 게릴라 무리들이나 막강한 페로의 1만 가디언부대를 상대하느니 그의 배후 지원세력인 동부부터 차근차근 무너뜨리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도 확실한 방법이었다.

술 한모금을 벌컥 들이킨 제롬이 그 특유의 큰 목소리로 계속 떠들어댔다.

"어쨌든 명분은 확실하잖아? '대제례' 어쩌구저쩌구야 이미 세나우스 2세때 칙령으로 금지시킨거고, 지들이 아무리 백년해왔네 이백년해왔네 떠들어봐야 금지된 건 금지된거지. 플라칼 가문 정도만 동원해도 녀석들 상급 3개 가문정도 박살내는 건 일도 아니야. 지금이 2차 혼란기 때처럼 지들이 위세등등한것도 아니고."

제롬의 자신만만함은 허풍은 결코 아니었다.

2차 혼란기 이전까지만 해도 동부는  빠른 경기병과 중장기병의 적절한 조합으로 4제후군중 가장 속도감있는 공격을 그 특징으로 하는, '바람의 군대'라고까지 불리던 가히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패전 이후 '기마'가 귀족계급 이상으로만 제한되면서---물론 기병전력을 중요시하던 동부와 북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동부의 그런 군사적 전통은 완전히 붕괴될수밖에 없었고 덧붙여 291년 이후의 북부만큼은 아니어도 엄격한 군비통제가 가해지면서 그들의 병력은 남부에 비하면 정말로 보잘것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2제후 플라칼 가문이라....."

베흔이 턱을 고이며 새삼스레 전력비교를 다시 해 보고 있었다. 현재 4제후지역 중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남부는 최고제후인 델루지 가문만해도 15만이 넘는 정규군 병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델루지 가문은 그 직계 구성원만도 7백 명이 넘었고 방계까지 합치면 이천명을 훨씬 넘는 가히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그 비대해진 규모 때문에 비효율성의 문제가 지적되면서 가문의 가장 큰 일족 8백여명을 '플라칼' 가문으로 반독립시켜 본가에 이은 제2제후로 내세우는 독특한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이번 동부공략에 앞장세울 이 플라칼 가문은 거의 10만에 달하는 정규군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본가가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일들마다 대신 나서서 해결하는, 사실상 델루지 가의 사냥개 역할을 하는 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호전성과 포악성은 이미 제국 전역에 그 악명이 자자하게 번져나가 있었다.

"페로 새끼도 바보가 아니라면 플라칼 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챘을테고."

"그렇겠죠. 문제는 타겟이 어디냐겠죠."

베흔이 히죽거리며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담았다.

"최고제후의 어머니인 네페티 부인을 죽이려 든 사이코 유학자놈의 서부냐, 아니면 자신의 배후인 동부냐. 지금쯤 저울질하느라 정신이 없겠죠."

"후훗,"

피식 웃음지은 베흔은 마주선 제롬과 가볍게 건배를 하고는 창밖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벌어질 싸움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는 그 둘을 바라보며 방 한구석에 앉아있던 수우는 꺼질 듯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