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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47화 (147/1,132)

< -- 147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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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크로딘 가에서요?"

카렐에게서 뜻밖의 말을 전해들은 제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계와는 한참 먼 방계일족인 제네르는 애시당초 태어났을 때부터 이름만 본가인 하크로딘 가와는 일면식도 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본가하고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돼?"

카렐의 질문에 제네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요, 제 고조부 되시는 분이 지금 종장님 조부 되시는 분하고 평민 사이에서 난 사생자시라니까......뭐, 말할것도 없는 곁가지 귀족이죠."

제네르가 스스로도 조금 멋적은지 그답지않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첩실에서 난 서자도 아니고 사생자 후손이라면 족보에도 제대로 올랐을리가 없었다. 하급 혹은 중간신분을 기준으로 지위가 세습되는 제국의 신분제하에서 '하급'이나마 귀족신분을 유지해온것이 다행일 정도로 한심한 혈통이었다.

"그나저나 저하고 아메스 자이센 부장이 함께 자리를 비우면......"

"괜찮아. 슈벨 수반이 그동안 지원조직을 많이 확충했으니까 괜찮을거야. 어차피 나중에 다 알고지내야 할 사람들이니까 얼굴도장이나 찍고 오도록 해."

제네르와 대화를 마친 카렐은 그와 나란히 자신의 초라한 움막을 나섰다. ㅤㅋㅞㄹ크 북부밀림의 험한 산지 한중간에 자리잡은 전사단 본부마을에는 여느때처럼 풀벌레소리를 배경으로 꽤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사복 차림으로 위장한 원주민 정예 산악병들이 군데군데의 감시초소에서 눈을 번득이고있는 것만 제외하면 누가보아도 너무나 평화로운 산골 마을의 모습 그대로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카렐과 제네르의 귀에 마을 한쪽의 행정소건물 옆에서 들리는 딱딱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봐봐, 그렇게 눈을 감으면 안된다구. 날 똑바로 봐. 공격은 순간이야. 순간에 모든 게 결정된다고! 시민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고 막고 반격하지만 가디언은 본능으로 공격과 방어가 나와야 돼. 그러니까 오감을 다 곤두세우고 있으라고."

"예. 알았어요."

한손에 목검을 든 자이납이 영 어설픈 자세로 목검을 들고있는 솔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었다.

"넌 보통사람보다 순발력이나 근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그걸 잊지 마. 자신감만 가지면 시민은 엔간하면 다 꺾을 수 있어. 자, 내가 이 자세로 하체는 움직이지 않을테니까 날 쳐봐. 에에, 손목 좀 봐, 손목 옆으로 비틀지 말랬지! 스냅은 나중에 익숙해지면 배우는거고, 당장은 배운대로만 하란 말이야!"

솔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고 있는 자이납의 모습에 카렐이 입가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어깨에 힘들어가지 말고, 손목힘으로 끊어치랬지! 자자, 계속 쳐!

한손을 등에 붙인 채 자리에 똑바로 서서 솔이 어설프게 휘둘러대는 목검을 한손으로 막아내던 자이납은 어느순간 손목에 큰 충격을 느꼈는지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다. 얼굴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솔은 어느순간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한 번 힘있게 목검을 휘둘렀다.

"엑,"

자이납이 혀를 쑥 내밀었다. 솔의 손에 들려있던 목검의 중간 부분이 뎅강 부러져 날아가버리고 있었다. 멀찍이 서 있던 카렐이 날아가던 그 조각을 한손으로 냉큼 받아들었다.

"힘조절이 잘못됐군."

카렐이 씽긋 웃으며 솔에게 다가섰다. 솔은 카렐이 지금껏 자신을 지켜보고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히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카렐을 따라온 제네르가 솔의 손에 들려있는 부러진 목검을 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래도 강화 흑단 목검을 한방으로 부러뜨릴 정도라니 손목힘은 대단한데요. 역시 가디언 혈통은 뭐가 다르네요."

카렐은 땀을 닦을 손수건과 함께 새 목검을 솔에게 내주었다. 직접 땀을 닦아주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릴 카렐이 어딘지 솔과의 접촉을 피하는듯한 그 모습에 제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봐. 똑같은 흑단 목검인데 자이납 건 멀쩡한데 네껀 왜 부러졌을까?"

솔이 머리를 긁적거리자 카렐이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짧게 말했다.

"그게 경륜이야."

무슨 이유엔지 무척이나 어색한 표정을 짓고있는 솔의 어깨에서 급히 손을 떼며 카렐은 이번엔 자이납 쪽을 돌아보았다.

"내일부터는 아예 날 없는 가검으로 하도록 해. 수련장에서도 12살만 넘어가면 목검은 쓰지 않거든. 그리고 기왕 할바엔 누구 시켜서 말 타는법도 가르쳐주면 좋겠는데."

"예. 알겠습니다."

자이납에게 다시 자세를 교정받고있는 솔을 뒤에서 보고있던 카렐에게 우베가 갑자기 다가왔다.

"저어, 9지대에 이상한 녀석이 잡혀와 있다고 합니다."

"이상한 녀석?"

"읍내에서 뜬금없이 하크로딘 단장님을 찾고 있었다던데.....누구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그냥 남극성당에서 왔다고만 합니다."

"남극성당?"

눈이 휘둥그레진 제네르가 카렐을 잠시 돌아보았다.

"시온 교리?"

취조실에 들어선 제네르가 풀죽은 채 앉아있던 한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그 남자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네르에게 큰 절을 올렸다.

"하크로딘 직제학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정교수인 교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앳된 얼굴의 그 남자는 자신을 다정하게 껴안아주는 제네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무사히 살아돌아오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래, 그래, 난 잘 있어. 그런데, 자넨 웬일인가? 지금 학기중일텐데?"

"그게....."

시온 교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어두운 얼굴에서 불길함을 느낀 제네르가 얼굴을 조금 바싹 들이대며 다시 물었다.

"혹시.....자이센 대제학이 또 못되게 굴었나?"

"사르곤이 강제해체되었습니다."

제네르가 순간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을 감은 채 잠시 아무 말도 없던 제네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회원들은?"

"저를 포함해서 교수 21명은 1년간 강의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생도들은 경고조치됐습니다. 헤데론 자이센 대제학이 단단히 맘먹고 덤빈 모양입니다."

"미치겠군."

제네르가 이를 악물었다. 그 대책없는 매파 중도학자는 같은 유학자라는 사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길이 통하지 않는 천하의 벽창호였다. 오죽하면 동료 중도파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저 또라이하고 토론하느니 벽을보고 떠들겠다.'는 자조섞인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40대에 박사과정까지 수석으로 조기졸업했던 똑똑한 장조카 페로와는 이래저래 비교되는 인물이었다.

어찌보면 지도자였던 자신이 학교를 떠나고 나서도 그 조직이 몇년동안 유지해온것이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런데......이상한 건......"

시온 교리가 제네르를 힐끗 돌아보며 더듬거렸다.

"이상하다니?"

"오늘 아침에 갑자기 파예드 아카데미쪽에서 저희에게 전갈이 왔습니다."

"뭐라구?"

갑자기 커진 제네르의 목소리에 시온 교리가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이번에 그쪽에서 개혁파와 원리주의간에 제정 정치철학에 관한 공동연구를 위한 기관을 만든다면서......저희 모두를 스카웃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망할,"

코리온의 의도를 눈치챈 제네르는 눈앞이 순간적으로 캄캄해져왔다.

고위급 귀족들이 중심이 된 중도파 유학자들이 주로 이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원리주의와 개혁파 학자들은 대개 순수한 학문적 열정으로 정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개혁파의 학문적 뿌리는 친정격인 원리주의에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극과 극은 통한다는 옛말대로 '원칙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개혁파와 원리주의는 묘하게 유사점이 많았다. 유명한 개혁파 추종자였던 오르마즈 경과 원리주의 지도자였던 주페 태자가 유난한 친분을 과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어쩌죠?"

시온 교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남극성당에서 밀려난 개혁파 유학자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은 그들을 원리주의화시키겠다는 코리온의 속셈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코리온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것이 불가능한것도 아니었다. 이미 40명의 동료들을 코리온 손에 무참하게 잃은 제네르 입장에서 이들까지 잃는 건 개혁파의 사실상 몰락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말도 안돼."

제네르가 딱 잘라 말했다.

"겨우 두달 반 전에 우리 동지 40명을 넘게 죽인 인물이야. 그런 녀석을 어떻게 믿고 거길 가겠다는 건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서부쪽에서 워낙 유학자들을 우대하는 걸 잘 알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어쨌든 절대 안된다고 내 뜻을 전하게. 내가 자네들 있을곳은 알아볼테니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

"유학 연구기관이라......"

제네르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카렐이 어깨를 으쓱 했다. 궁여지책으로 개혁파들을 먹여살릴 전사단 직속의 연구소라도 하나 만들자는 제네르의 의견에 카렐이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어보였다.

"그게 돈만 있다고 만들어지는것도 아니고......이런 ㅤㅋㅞㄹ크 촌구석탱이에 그런 연구소 만든다고 어떤 정신나간 유학자나 유생이 오고 싶겠나?......그보다는 아예 남극성당을 장악해버리는게 어떻겠나?"

"예에?"

'군주'의 황당한 말에 제네르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까짓거 헤데론 자이센 대제학 쫓아내면 되지."

카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얼핏 신중한 성격같아 보이는 카렐이 가끔씩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황당한 배포를 보이는 것은 제네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감히 제국 최고의 교육 학술기관인 남극성당의 대제학을 쫓아내버리겠다는 말이 저렇게 쉽게 나올 수 있다는 건 제네르로서도 뜻밖이었다.

"음......어머님을 새 대제학으로 앉혀드리면 제격이겠군. 학문적인 포용력이 큰 분이셨으니."

잠시나마 카렐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네르는 그제서야 카렐의 속내을 깨달았다.

카렐은 밤낮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황후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돌리는 것과, 남극성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일석이조를 노리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죠. 포용력 하나는 대단한 분이셨죠."

제네르가 피식 웃음지으며 대답했다. 세네피스 황후는 비록 스스로는 중도파였지만 '다양성'이라는 남극성당만의 강점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고, 다른 중도파 유학자들이 원리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계급제 도입 당시에도 그 문제점 22가지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혼자 이를 반대해 개혁파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던, 존경받는 진정한 '중도파' 유학자였다.

"그렇다면....."

"페로 경하고 상의해서 어머님을 수석 부제학에 복직시켜드리는 방안을 생각해봐야겠어. 물론 부제학이라고 완전히 상전이라서 좀 껄떡지근하겠지만 내 본 바로는 헤데론 그새끼 미녀라면 정신못차리거든."

카렐의 막말에 제네르가 웃음을 터뜨릴수밖에 없었다. 페로 관에서 40년을 있었던 카렐은 헤데론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남극성당 대제학으로 있을만한 유학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머리회전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네피스 황후의 상대가 감히 될 바도 아니었다.

"어머님 정도면 내가 신경 안써도 또라이 헤데론 경 정도는 알아서 짐싸게 만들어놓으실게야. 안그래도 페로도 사고뭉치 작은아버지때문에 두통 꽤나 심하던데 잘됐지 뭔가. 황실에서 적당한 감투하나 던져주면 좋다고 만족할걸세. 그 21명 친구들은 시간도 생겼으니 책이나 쓰고있으라고 해. 당장 머물 집하고 자금은 내가 지원할테니. 어머님이 남극성당에서 자리잡으시는대로 그네들도 다시 복직할 수 있을테니."

카렐의 판단에 또한번 탄복한 제네르는 자기도모르게 카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렐의 말을 들은 페로가 무릎을 치며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 성격에 딱 맞는 감투 하나 줄테니까 네 작은아버지 해꼬지한다고 화내지 말고."

카렐이 사과를 심지째로 씹으며 중얼거렸다.

"화? 나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야. 저 안어울리는 양반이 대제학이라고 앉아서 사고만 치고 있으니 말릴수도 없고, 말린다고 들을 양반도 아니고, 조카가 삼촌 자를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메스도 짐 하나 더는거라구."

카렐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페로가 계속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그래, 알아. 세네피스 황후폐하라.....왜 진작 그생각을 못했을까? 헤데론 작은아버지는 코리온 그새끼 백날 상대해도 못당하지. 남극성당하고 파예드하고 이제 제대로 웬수지간 되겠군."

페로가 손바닥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황후폐하는 뭐라시는데? 가시겠대?"

"밤낮 옛날 영광만 그리고 계신 분인데 싫다하실리가 있나. 뭐, 내 속을 꿰고는 계시겠지만 이 지저분한 정글에 죽치고앉아계시는것보다는 남극성당의 그 고상한 분위기가 그립지 않으시겠어? 근위대도 못들어가는 성역이니 그만한데가 어딨어."

카렐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페로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에 있던 파일을 열었다.

"아참, 남부쪽에서 새 정보가 들어왔는데......플라칼 가문 쪽 새소식이야."

"새끼 델루지 가문?"

카렐이 나머지 사과를 통째로 삼키며 페로가 내민 파일을 받아들었다.

"델루지 가 제후군 5군단이 플라칼 가 영지에 진입했나봐."

"플라칼 가문이 드디어 움직이려나 보군."

굳은 표정의 카렐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7년간 남부 파견군 사령관이었던 카렐은 두 가문의 특이한 협력방법에 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파일을 끝까지 꼼꼼히 살펴본 카렐은 페로를 한 번 돌아보았다.

"아다시피 플라칼 가 제후군하고 델루지 가 제후군하고는 서로서로 영지를 제땅처럼 드나들잖아. 델루지 가 5군단 3만명은 플라칼 가가 빠져나갈 때 칼릴에 대신 주둔하기로 예정되어있는 부대거든."

"칼릴?"

페로가 눈을 부릅떴다. 서부제후지역인 테나토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칼릴은 남부와 서부가 매번 영토분쟁으로 으르렁거릴때마다 항상 전쟁터가 되곤 하는, 그다지 조용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델루지 가의 '사냥개' 플라칼 가의 영지였고, 플라칼 가의 정규군 10만의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는 요충지였다.

"5군단 3만병력 전부가 들어갔다면 칼릴에 있는 플라칼 가 병력을 다 끄집어내겠다는 건데......플라칼 가 병력이 중장보병 6만에 경보병 2만, 중장기병 만오천 정도에 경기병 5천정도 될거야. 이 많은 병력을 다 끌어낸다면......꽤 큰 목표를 노리고있다는건데?"

"지난번에 제롬 녀석이 플레렌 가 요절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더니......서부쪽 공격하려는 건가?"

"글쎄,"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플라칼 가문이 서부를 공격해서 남-서부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쪽으로서는 더 바랄나위없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셈이겠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 제롬 공도 어머니의 원한 정도로 그렇게 섣불리 서부를 공격할지는 카렐도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카렐이 낮게 중얼거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동부를 치는 거겠지."

페로가 아무렇지않게 중얼거렸다.

"결국 제위싸움이 제후전쟁으로 확전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페로가 갑자기 큰 소리로 바깥에 있을 보벤 슈트란 경을 불러들였다. 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보벤 경은 페로의 앞에 공손하게 꿇어앉았다.

"내 지난번 지시했던 유목민 포섭은 어떻게 되어가나?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중입니다. 슈트란 가에 만 오천, 트라티누스 가에 만, 하크로딘 가에 오천이 배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그중 절반정도가 동원가능할겁니다."

페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카렐을 힐끗 돌아보았다.

"나쁘지않군, 말을 좀 안들을지 모른다는 거 빼고는."

카렐이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어디야. 합법적으로 평민 기병을 가질 수 있다는 건데. 그것도 제국에서 제일 거친 놈들로 말이야."

"글쎄, 녀석들이 얼마나 쓸만할까?"

카렐 역시 그다지 확신이 가지는 않는지 고개만 연신 갸웃거리고 있었다.

요동 행성계를 수도로 하는 동부지역은 북부와 더불어 비교적 초기에 정착이 시작된 곳이었던 덕에 이주 초기만해도 제법 인기있는 지역이었다. 기후나 환경만으로 보아서는 인근의 북부보다 훨씬 살만했고, 지평선 몇개를 넘나들도록 언덕배기 하나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평탄한 지형은 목축이나 농업을 기반으로 한 이주민들이 뿌리박기에 더할나위없이 좋은 지역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동부의 행성들은 대개 연교차와 일교차가 큰 대륙적 기후를 가지고 있었고, 수도인 요동과, 두번째 중심지인 샤레이의 행성들은 외적의 침입에는 속수무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뻥 뚫린 초원지대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남부의 채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해양은 행성 전체의 강우량을 남부의 1/3수준으로 만들어놓은 주범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농업 이주민들이 남부로 옮겨가면서 심각한 인구부족에 시달리게 된 동부는 궁여지책으로 이런 기후에 익숙한 거친 유목민들을 강제이주시키기 시작했고, 그들과 얼마 남지 않았던 초기 농업 이주민들이 바로 현재 동부인들의 조상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동부인들의 유목민적 전통도 많이 엷어졌지만 아직 상당수의 사람들은 옛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고, 제국 최고수준의 기마술과 호방한 대륙적 기질은 동부인들의 특징으로 유명해진 터였다.

그러다보니 윰 포고령의 2차 추가령에 포함되어있던 '귀족 외 승마금지'조항을 거의 통제불가능한 거친 유목민에게 일률적으로 적용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국 4천만에 달하던 동부의 유목민족들에게는 그 적용을 배제시킬 수밖에 없었다. 워낙 외부문제에 무관심하고, 지금껏 정규군 기병으로도 거의 활용되지 않아온 그들이었기에 근위대나 황제도 그 예외조항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는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었다.

"그 거칠고 제멋대로인 녀석들을 다루는게 문제지."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자 페로도 동의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냥 용병으로 생각하면 돼."

"지도자없는 늑대무리보다는 지도자있는 양떼가 낫지."

"걱정 마, 그녀석들을 조만간 다 충성파 기마전사로 만들어놓을테니."

그다운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꾸한 페로는 보벤 경이 내민 동부 유목민에 관한 길지않은 자료들을 뚫어지게 살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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