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50화 (150/1,132)

< -- 150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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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2번 행성 수도 북쪽에 위치한 슈트란 가의 종가는 무려 4천만의 영지민를 거느린 동부 최고제후의 종가답게 그 화려함과 위용이 주변을 둘러싼 드넓은 초원을 압도하고 있었다.

우진각지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남문을 입구삼아 긴 장방형으로 음양오행에 따라 배치된 이 저택은 내부만 1000칸이 넘었고, 곳곳의 인공연못과 자연미를 강조한 정원들은 자칫 복잡하고 미로같은 무미건조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거대한 저택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페로와 전사단 일행이 탄 파란색의 리쿠르고스 셔틀은 슈트란 가 무장셔틀들의 호위를 받으며 종가 사랑채 앞 대청에 사뿐하게 내려섰다.

평소처럼 당당한 태도로 셔틀 문을 나선 페로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샤자한 슈트란 공과 조심스런 맞절을 나누었다.

유목민계 가문인 동부 최고제후 슈트란 가의 종장이며 페로의 외종조부, 아니 외조부랄수도 있는 샤자한 공은 테번 공이 죽은 이후로 이제 4명의 최고제후 중 가장 연장자였다. 수명개조 당대세대이기도 한 그는 검은 눈과 백발이 희끗희끗 섞인 반백의 머리카락에 크지않은 체구의 전형적인 동부인이었고 품위넘치는 40세 정도 중년의 외모를 지닌 남자였다. 하지만 이제 제국의 총리대신이 된 이 까마득한 종손자에게 그는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중장기병 지휘관 출신의 이 세련된 귀족은 2차 혼란기의 패전으로 처형당한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동부 최고제후의 지위에 오른 이후로 4차 혼란기에 로노 장태자를 지지했다가 낭패를 치른 일을 제외하고는 특유의 신중함으로 260년동안 이 동부를 그럭저럭 무난하게 잘 이끌어오고 있다는 평을 들어오고 있었다.

"올해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로 슈트란 자이센 총리 각하."

"초청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샤자한 눌레딘 슈트란 공."

페로와의 인사를 마친 샤자한 공은 아버지를 뒤따라나온 아메스에게 팔을 벌려보이며 큰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메스, 이게 얼마만이냐. 이제 정말 다컸구나."

"1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아메스가 증조부뻘인 샤자한 공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아메스를 가볍게 껴안은 샤자한 공은 그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네가 황후가 된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다음번에 볼 때는 내가 존대를 해야겠구나."

아메스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시한번 고개를 숙였다. 샤자한 공이 페로를 따라온 일행들에게 안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 만찬이 준비중이니 모두 들어갑시다. 상급 5제후 가문에 총리까지 오셨으니 모이실 분들은 다 모이셨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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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의 어머니였던 네베드 슈트란 부인은 혈통만으로 놓고보면 2차 혼란기 직후에 처형당해 죽은 할아버지 암바카이 공의 뒤를 이어 동부 최고제후에 올랐어야 할 인물이었다. 아니, 최소한 '적장자는 종장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잔혹한 룰만 없었더라면 최고제후의 딸로서 그 후대를 기약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고제후인 할아버지와, 그 장남이었던 아버지 쿠툴라가 함께 형장에서 죽음을 맞으면서 그의 운명은 엇나가기 시작했다. 7명의 오빠들과 언니들까지 모두 '비공식적으로 제거'되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1살에 불과했고, 윰 포고령에 따라 미성년인 조카를 대신해 작은아버지였던 샤자한이 새 동부 최고제후에 오른 것이었다.

샤자한 공은 혼자 남은 이 불쌍한 조카를 양녀로 거두어 친자식처럼, 아니 친자식보다 더 정성들여 키웠지만 그런 조카에 대한 죄책감만은 내내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두둑한 배짱과 탁월한 판단력으로 슈트란 가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낸 네베드는 노예폭동이 제국을 휩쓸던 3차 혼란기 당시 3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로 삼백여명의 기병대를 직접 진두지휘해 깜짝놀랄 전공을 올렸을만큼 적극적이고 활달한 '호걸'이었다.

하지만 이 조카, 아니 양녀에게 양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좋은 집안과 혼인시켜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은 샤자한 공은 당시 제국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며 공포정치의 정점에 서 있던 신흥권력자이며 총리대신 '블러드' 투모카프 자이센에게서 들어온 가문간 혼인제의를 혼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친딸을 이 최고 명문가의 큰며느리로 보낼 수도 있었음에도 네베드를 우선 혼인시킨 것은 샤자한 공의 나름대로 최선의 배려였다. 하지만 이 '배려'가 뜻밖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샤자한 공으로서도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감히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듯 했던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의 주역 '블러드' 자이센이 장남의 혼인 후 겨우 2년만에 노예폭동세력에게 납치되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되면서 그 며느리인 조카의 앞날에도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좋게만 본다면 조카딸, 아니 양녀가 자이센 가문의 명실상부한 종부가 된 것을 기뻐할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아버지만 못한 남편이었다.

비록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가족만은 끔찍히도 아꼈고, 탁월한 리더쉽과 두뇌, 빼어난 외모까지 갖추고 있던 아버지 투모카프에게서 아들 슈막이 물려받은 건 잔혹함과 여색, 주색, 등등 좋지않은 것들 뿐이었다. 조부 제수스 자이센에게서 시작되어 2대에 걸쳐 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무시무시한 가문의 몰락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사설 가디언 수련장'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건 죽은 시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이 '호걸' 며느리였다. 그리고 지방제후들과 달리 별도의 사병조직을 가지는 것이 제한적인 중앙귀족으로서의 어려움을 설파하며 세나우스 2세 황제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최초의 사설 가디언 수련장인 '자이센 수련장'을 개설하게 만든 주역 역시 네베드였다.

한때 황제 수련장의 부책임자였던 로카까지 거액을 들여 영입해가며 수련장에 가문의 사활을 건 듯 동분서주하는 부인의 모습에 가장 못마땅해한 건 다름아닌 남편 슈막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초기투자비용 때문에 슈막은 꽤 많은 재신을 팔아치워야 했고, 처가인 슈트란 가에 손을 벌리는 낯뜨거운 일도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슈막은 사업포기를 몇번이나 부인에게 종용했지만 억척스럽기로 소문난 동부 출신 부인 네베드의 지독한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3번 도시의 중심가에 가지고있던 근사한 집까지 팔아치우고 도시 남쪽의 흉흉한 벌판으로 이사오면서 남편인 슈막은 가문의 한심해진 꼴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부인 네베드는 '넓어서 가디언 키우기는 제격이겠다'며 좋아하면서 남편을 펄쩍 뛰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네베드 부인의 억척스러움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건 최초의 성년 가디언이 탄생한 20년 후였고, 슈막은 그때는 이미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네베드 부인의 피땀으로 자라나 성년을 맞은 이들 동기가디언 45명은 모두 황실 가디언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전사들로 키워져 있었다. 당장의 빚을 갚는 데 급급했던 슈막은 이들 45명을 모두 돈많은 귀족들에게 거액으로 팔아치우려 들었지만 그것을 또 막아서고 나선 건 이들과 숙식까지 함께해가며 정성을 기울여온 그 고집장이 부인이었다.

부인은 이들 45명 중 네피와 다룬을 비롯한 20여명의 '특히 우수한' 녀석들은 제외하고 팔 것을 요구했고, 결국 부인에게 굴복한 슈막은 빚을 탕감할때까지 무려 20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부인이 남편과의 불화를 각오하며 끝까지 지켜낸 이들 초기가디언---네피, 다룬, 킵, 판을 비롯한----들이 속칭 '페로 가디언'으로 제국을 뒤흔들 무서운 가디언부대의 핵심멤버가 되는 감격적인 광경을 당사자인 네베드 부인은 끝내 살아서 보지 못했지만 그 아들이 당당히 제국의 일인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결국 그 억척스런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슈막이 적장자인 페로를 그다지 탐탁치않아한 건 바로 그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일단 슈막은 정실이었던 네베드 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네베드 부인은 요동계 유목민 후손답지않은 우람하고 큰 체구에 다정다감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모 또한 슈막이 거느린 첩들에 비하면 '추하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지경이었고 목소리도 큰 데다가 말술을 들이키고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인하기까지 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큰 배포와 머리회전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지인들 사이에서는 '네베드 부인이 종장을 하는 편이 낫겠다'는 비웃음섞인 말까지 오가고 있었으니 슈막으로서는 이런 감당하기 어려운 부인을 좋아했을 리가 없었다.

몽골리안 유목민 후손 어머니와 검은 피부의 할아버지 투모카프, 흰 피부의 아리안족 출신 할머니까지, 여러 인종의 피를 골고루 물려받아 태어난 페로는 어머니의 명석한 머리, 고집스러움을 물려받았고 할아버지의 매력, 리더쉽을 물려받은 훌륭한 소년이었지만 아버지 슈막은 어딘지모르게 죽은 부인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이 아들을 부담스럽게 여기곤 했다. 그리고 이 부담스러움은 종종 '무관심'의 형태로 표현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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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자한 공과 함께 만찬장에 들어선 페로의 앞에는 동부 2제후부터 5제후까지의 상급제후들과 그 가문 직계들이 일렬로 늘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실상 동부인이나 마찬가지인 페로에 대한 그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지금까지 동부가 낸 유일하게 '힘있는' 인물이었다. 4차 혼란기 당시 로노 장태자를 지지했다가 낭패를 치렀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의 페로는 당시 문란한 사생활에 거친 성격으로 그 자질이 의심스러웠던 로노 장태자와는 비교할 필요도 없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각 가문의 종장들은 자신들이 이 빼어난 총리와 새 장태자의 연합세력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알고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성공만 할 수 있다면 그 장태자의 모계인 북부를 대신해 자신들이 제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291년을 기점으로 몰락하다시피 한 북부는 당장 자신들의 피가 섞인 새 황제가 나온다고해도 아직 제국을 주도할만큼의 힘을 갖추고있지를 못했다. 결국 북부 피가 섞인 '새 황제'는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동지인 페로를 통해 동부에 기댈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었고, 황후가 될 아메스는 이들의 지위를 더욱더 굳건히 해 줄것이 확실했다.

페로는 만찬장에 도열해 선 각 가문 종장들과 한번씩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여느 다른 행사나 마찬가지로---곱게 단장시킨 각 가문 종장의 직계 딸들이 행여나 올지도 모르는 페로의 눈길을 받기 위해 잘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단 한 가문만은 예외였다.

"오랫만입니다. 나람 부인."

페로가 4제후 눌레딘 가 종장 나람 칼리 눌레딘 부인에게 형식적인 포옹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포옹을 받는 부인은 물론이고 그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남편들과 십여명의 직계 자녀들 역시 페로를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약간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던 샤자한 공이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자, 5제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람 부인에게서 바로 시선을 끊어버린 페로가 무표정하게 뒤로 홱 돌아섰다. 제국의 총리대신이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페로의 당당하고 수려한 모습을 새삼스럽게 다시 바라보며 나람 부인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를 따라 만찬장에 들어선 제네르는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자신의 부모님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5개 상급제후가문의 핵심 상급귀족들만이 모이는 이 자리에 방계 하급귀족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하는 자신의 가족들이 와 있다는 것은 그로서도 너무나 뜻밖이었다. 총리와 나란히 들어오는 딸의 '자랑스런 모습'에 그의 부모님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손을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제네르는 그런 부모님 앞에 다가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못찾아뵈어 너무나 송구스럽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송구스럽긴, 네가 우리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었는데 무슨 상관이냐."

제네르의 아버지인 카타르 하크로딘이 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큰 웃음을 지었다. 한때 잘나갔던 남극성당에서도 쫓겨나 칩거하던 딸이 한참 제위싸움으로 시끄럽던 황제령에 돌아가 큰 뜻을 펼쳐보겠다며 훌쩍 가출해버린 이후로 속 꽤나 썩었을 이 아버지는 그 딸 덕택에 이런 대단한 자리에 함께하게 된 것이 너무나 흥분되는지 만면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두 달 전부터 종가에서 우리집에 연금까지 주고 있단다. 이런 대단한 일이 어딨겠냐."

"연금이요?"

제네르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그의 집안에서 뭐 대단한 업적을 이룬 조상도 없었으니 연금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네가 이번에 돌아오는대로 우리 일족도 방계 족보에 올려주겠다 했으니 더 바랄 게 없구나."

계속되는 이상한 말들에 제네르는 그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서자들이 등재되는 방계 족보에는 '부끄러운' 사생자 후손들은 귀족이라도 올려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시로를 힐끗 돌아보았다. 반대편으로 가버렸던 페로와 아메스는 각지역 제후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들이 없어보였다.

"종가에서 무슨 요구라고 있었습니까?"

제네르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버지가 저으기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의 등뒤로 하크로딘 가의 종장인 플로브 트라티누스 하크로딘 경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네르는 오른손을 가슴에 붙이며 깊이 허리를 굽혀보였다. 물론 이름만 하크로딘 가 사람인 제네르는 자신의 종장이라는 이 사람과 지금껏 단 한번도 개인적으로 만나 본 일이 없었다.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플로브 하크로딘 종장님."

플로브 경은 자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제네르의 위아래를 갑자기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었다. 순검이라도 하는 듯한 그의 매서운 시선에 제네르가 저으기 당황하고 있었다.

"자네가 제네르 하크로딘 직제학? 역시 탈라스 출신답게 키가 꽤 크군.....금발에 파란 눈동자는 어머니쪽 형질인가?......외모는 그럭저럭 중간은 가는데.....그런데 좀 웃어볼 수 없겠나? 인상이 좀 차가와보이는걸?"

종장의 황당한 말들에 제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네르도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외모 평'을 들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복장이 좀 그렇군......무슨 군복같은데......이런 자리에 좀 우아하고 세련된 걸 입어야지 그게 뭔가."

그의 말도안되는 '평가'를 여자를 밝히는 종장의 별난 취향 때문이라고 혼자 단정지어버린 제네르는 적당한 선에서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죄송하오나......저는 전사단 지도자전하의 최고보좌관 겸 슈로 기사단장의 직위로 페로 경을 보좌해 와 있는 것이옵니다. 이 복장은 기사단장의 정복이오니......"

플로브 경이 얼굴을 찡그리며 제네르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직 얘기 안했나?"

"그.....그게....."

식은땀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네르는 그제서야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카타르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달 전부터 네 혼담이 오갔단다. 너도 과년했으니 이제 훌륭한 남자를 찾아 짝을 맺어줘야......"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제네르가 옆에 선 시로를 급히 돌아보았다. 시로 역시 부들부들 떨려오는 얼굴 근육을 애써 진정시키며 넋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죄송하오나 전 아직 할일이 많아......"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들어온 상대가 정말 대단하단다. 어떻게 감히 우리같은 사람한테 이런 기회가 다시오겠냐. 누군고하니....."

자꾸 더듬거리기만 하는 제네르의 아버지를 성큼 막아선 종장 플로브 경이 대신 입을 열었다.

"자네같은 사생아 출신 하급귀족에게 상급귀족가에서 먼저 청혼이 들어오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지. 자네가 무슨 기사단장이라고는 하나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직함도 아니고......한때 직제학이었다지만 이제 남극성당을 떠났으니 아무 의미없는 것 아니겠나? 그런 자네가 고사할만한 혼담은 아닐걸게. 그것도 종장인 내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면."

플로브 경의 말은 그 협박에 가까운 어조를 뛰어넘어 제네르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깎아내리고 있었다. 카렐이 장태자임을 이미 알고있는 플로브 경의 이런 태도는 이 혼담을 통한 무언가 거래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듯한 제네르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멍 하니 서 있었다.

플로브 경이 뒤쪽에 대고 가볍게 손짓을 해 보이자 슈트란 가 사람들 한쪽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당당한 태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약간 어두운 피부색에 자그만 체구는 요동계 유목민 후예인 슈트란 가문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단정하고 품위있는 태도의 그 남자는 자신과 대조적인 외모를 지닌 제네르를 한 번 힐끗 돌아보았다.

"슈트란 가 직계이며 상급귀족인 네자드 카나 슈트란이요."

바싹 밀어올린 남자의 짧은 머리카락 밑으로 귀 밑에 드러난 상급귀족문이 선명했다. 최고제후 슈트란 가를 부계로, 5제후 카나 가를 모계로 둔 두말할나위없는 최고혈통의 상급귀족이었다.

제네르의 아버지가 아직까지 멍 하니 있는 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크로딘 가......방계이며 하급귀족인.....제네르 딜라코프.....하크로딘입니다."

제네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머리를 굴리려 애쓰고 있었다. 동부 최고제후인 슈트란 가에서 자신을 며느리로 삼으려 한다면 그 저의는 뻔했다. 자신이 카렐에게 이만큼이나 총애를 받고 있다면 즉위후에 황실에서 꽤나 큰 감투와 함께 상급귀족으로 특진할 것은 보나마나한 일이었고, '몸값이 올라가기 전에' 자신을 미리 묶어두는 것이 이래저래 손쉬운 선택이었다.

그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러지 못한다면 일상적인 귀족간 가문혼담의 단계에 따라 제네르는 오늘밤 못 볼 꼴을 보아야 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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