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51화 (151/1,132)

< -- 151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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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자드 경은 최고제후 샤자한 공의 차남 다히르 경의 3남이니 페로 경의 6촌 외재종형이 되겠군. 상처한지 10년 되었고 3명의 자녀들도 모두 장성해 독립했으니 더할나위없는 훌륭한 배우자감이네. 콜로니 아카데미를 졸업해 지금 가문 개발부 토지국장을 맡고 있고…..나이가.....255세이니 자네보다 조금 많군."

최고제후의 직계 손자에 저정도 직책을 가진 남자라면 슈트란 가에서도 나름대로 최고의 신랑감을 내세운 셈이었다. 물론 차후에 황실에서의 한자리를 노리고 하는 혼인이니만큼 어중이떠중이를 내보냈을 리는 없었다. 생각없는 제3자가 본다면 제네르에게 너무나 과분하기까지 한 신랑감임에 틀림없었다.

네자드 경이 다시 제네르를 돌아보았다. 그의 무표정함은 낮은 신분에 그다지 미모가 빼어난것도 아니고 인상까지 차가운 제네르를 썩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단정한 비단포에 노란색 머플러, 두건까지 완벽한 성장을 한 네자드 경과 대조적으로 제네르는 딱딱해보이는 기사단 정복차림에 허리에는 긴 장검까지 차고 있었다. 그의 눈치를 살핀 플로브 경이 네자드 경에게 말했다.

"남극성당 직제학이며 명망높은 개혁파 유학자인 제네르 하크로딘 교수요. 현명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그대의 배우자감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요."

제네르는 카렐이 이자리에 없다는 사실에 가슴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자리에서 명백하게 거절의사를 표하는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다면 종장의 손아귀에 쥐여있는 자신의 가족들이 무사할리가 없었다.

'제기랄, 저희들이 뭐 해준 게 있다고,'

플로브 경을 살짝 노려본 제네르가 자기도모르게 이를 빠드득 갈고 있었다. 근위대에 잡혀가 10년간 참혹한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많지않은 몸값 지불도 '사생자 후손은 더이상 가문 사람이 아니다'며 거절했던 저들이었고, 남극성당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그가 그토록 애타게 애원했던 얼마 안되는 학비보조조차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던 가문이었다. 하지만 제국 법도에 따라 종원에 대한 재판권까지 가진 상급귀족 종장의 뜻을 마음대로 거스를수도 없었다.

제네르는 안그래도 시큰둥한 표정의 네자드 경이 제발 자신을 '딱지놓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제네르의 뒤쪽으로 페로와 샤자한 공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하, 이쪽은 벌써 상견례 시작됐군."

샤자한 공이 웃음띤 얼굴로 제네르와 네자드 경을 돌아보았다. 페로는 거의 벌벌 떨며 서 있는 제네르의 모습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상견례요?"

"제네르 하크로딘 직제학을 제 손자며느리로 맞을까 하고 플로브 하크로딘 종장과 상의를 했습니다."

제네르와 시로와의 관계를 이미 카렐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있던 페로는 당혹스러움을 가까스로 감추며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네르가 애타는 얼굴로 페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무언가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페로 역시도 달리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저리 애타게 바라보는 제네르의 눈치를 완전히 무시할수도 없었다.

"제네르 경은 전사단에서 중요직책을 맡고 있으니 제위문제가 마무리된 후에 혼사를 올려도 늦지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만."

"물론, 동감입니다. 당장 식을 올리자는 게 아니고 일단 약혼만 하자는 거죠."

샤자한 공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제네르를 돌아보았다. 당사자인 네자드 경과는 달리 종장인 샤자한 공은 야무진 인상의 제네르를 꽤 맘에 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페로 역시 새 황실의 국구가 될 자신에 이어 카렐의 오른팔 제네르까지도 '선점'하려는 외가의 계획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자신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네르의 신랑감으로 나온 자신의 6촌 재종형 네자드 경 역시 샤자한 공의 직계 손자로 크게 흠잡을데없는 남자였으니 슈트란 가 쪽에서도 이번 혼담에 나름대로 성의를 다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페로 역시 귀족인 제네르가 가디언인 시로와 맺어지는 나쁜 선례가 생기는 것은 원치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제네르에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 페로는 여기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샤자한 공이 손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떠냐? 네자드. 내가보긴 총기가 넘지는 훌륭한 신부감 같구나."

"할아버님과 동감이옵니다."

네자드 경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네르와 마찬가지로 네자드 경 역시 가문에서 정략적으로 추진하는 혼담을 함부로 퇴짜놓을 수 없는 입장일 것이 확실했다. 제네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있을 그에게 황당하기 짝이없는 연민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저, 전......"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제네르의 앞을 대뜸 막아선 플로브 경이 술잔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더 이상 볼것도 없군요. 관례에 따라 오늘 합방을 시키도록 하고 둘의 최종의사만 확인되면 대제례가 끝나는대로 양가 종장이 만나 약혼서에 서명하도록 합시다."

순간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격을 받은 시로가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지면서 의자 몇 개가 넘어져 흩어져 있었다. 그에게 달려들려는 제네르의 팔을 거칠게 붙든 플로브 경이 그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가족을 생각하면 행여나 쓸데없는 생각은 않는 게 좋을거다. 명심해. 네가 원하든, 원하지않든, 네 성은 '하크로딘' 이라는 걸."

태연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플로브 경의 뒷모습을 잠시 이를 갈며 바라보던 제네르는 눈이 뒤집어진 채 바닥에 쓰러진 시로를 급히 부축해주었다.

"시로! 시로!"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지만 바닥에 쓰러진 가디언 따위에게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가와진 그의 손발을 필사적으로 주물러주는 제네르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로가 묘한 착찹함을 감추며 뒤로 돌아섰다. 물론, 그 착찹함은 '천박한 가디언 따위'가 감히 귀족에게 눈독을 들였다가 결국 그 댓가를 치렀다는, 그 나름대로의 '정의의 실현'에 대한 만족감에 곧 가리워지고 있었지만.

물론 그의 머리에서는 자신과 카렐 사이의 감정은 그럼 무엇이냐는 당연한 의문은 이미 사라져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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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페로가 '괴상한 여자아이'와 함께했던 4년여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건이 걸리지 않았다. 카렐이 떠난 직후, 그의 남은 물건들을 울면서 직접 챙겼던 페로는 그것들을 큰 상자에 담아 자신이 묵는 별당 한쪽의 다락에 숨겨두고 틈날때마다 들쳐보곤 했지만 옛일은 말 그대로 옛일으로 묻혀가기 마련인 보통 아이들의 성장기와 마찬가지로 그 아이와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들도 그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페로가 상자를 들쳐보는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면서, 몇년 후에는 말 그대로 다락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천덕꾸러기 쓰레기상자가 되어 있었다.

13살인가 되던 해, 좀 더 큰 별당으로 숙소를 옮기면서 참으로 오랫만에 그 상자를 다시 들쳐본 페로는 그것을 버려야하나 말아야하나를 두고 한참동안 고민한일도 있었다. 결국 상자를 들고 쓰레기 처리장까지 갔던 페로는 아직 피얼룩이 남아있는 카렐의 마지막 옷을 붙들고 이런저런 생각들과 씨름한끝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이제 어느정도 머리도 굵어지고,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그는 그 여자아이가 100년 후에나 돌아온다는, 그 까마득하고 황당한 말을 더 이상 붙들고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물건들까지 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이런 페로에게 수우가 항상 자신의 가방에 넣고다니던 그 '파란색 꽃잎병'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천하의 바람둥이 수우 녀석도 그런 면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페로는 상자를 내버릴 뻔 했던 자신의 행동에 새삼스레 또한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또다시 페로의 벽장 속에 갇혀버린 카렐의 먼지앉은 옛 물건들은 페로가 다른 물건들을 꺼내려 다락을 열 때를 빼고는 점점 커가는 페로의 그 잘생긴 얼굴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페로의 청소년기는 다른 또래의 귀족가문 소년들과 별다를건 없었다. 다만 조금 더 '악동스러운' 짖ㅤㄱㅜㅊ은 행동의 비율이 조금 더 높았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결혼식을 올리던 평민의 민가를 수우와 함께 습격해 신부를 훔쳐온적도 있었고---물론 납치해온 신부를 어떻게 처리할까 수우의 말다툼하다가 어처구니없이 놓치고 말았지만---, 길도 제대로 들지 않은 말에 겁없이 타겠다고 덤볐다가 다리와 어깨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친구와 여자친구를 놓고 수영내기를 하다가 탈진해 물에 빠져죽을뻔한---수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황당한 짓을 저지르기도 해가며 조금씩 철이 들어간 이 소년도 16살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참 왕성한 나이니만큼 성에 대한 호기심도 대단했던 페로는 수우가 소개해준 동갑내기 귀족집안 여자아이와 난생처음 섹스라는 것도 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별로 신통치않았다. 둘 다 처음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페로는 내내 허둥대기만 했고 여자는 뻣뻣하게 굳어있기만 했다. 어쨌든 2번의 참담한 실패끝에 3번째에 짧으나마 가까스로 성공은 했지만 기대했던 즐거움은 고사하고 여자아이는 페로의 '크기' 탓만 하며 너무 아프다고 투덜대기만 했다. 그 뒤로 자기의 것이 정말로 너무 크다고 믿어버린 페로는 한동안 섹스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느때처럼 하녀가 펴 주고 나간 잠자리에 몸을 눕혔던 소년 페로는 문득 벽장을 돌아보았다. 시계는 저녁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본 페로는 벽장 문을 조금 열었다. 어두컴컴한, 하녀들도 엔간해서는 손을 대지않는 그 정신없는 벽장 한쪽에는 언젠가 수우 녀석이 '공부 좀 하라' 며 주머니에 찔러주었던 야한 영상카드가 몇 장 감춰져 있었다. 아버지나 집사 로카 녀석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질 노릇이겠지만 그런 위험도 한참 기운이 솟구치는 16살 소년의 호기심을 막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에 방음 설정을 하고는 벽장에 기대 카드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쪽으로는 대가급인 수우 녀석이 준 것 답게 페로의 기대치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카드를 다시 잘 숨긴 후 벽장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려던 페로는 한구석에 여전히 놓여있는 카렐의 소지품 상자를 문득 돌아보았다. 문득 뚜껑을 열어본 페로는 이젠 자신의 한 손 안에도 다 들어올만한 카렐의 옛날 신발을 집어들었다.

"녀석......지금은 내 어깨나 올까......."

페로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짐을 마지막으로 뒤져본 것이 이미 1년도 지난 옛날의 일이었다. 평소에는 눈길한번 주지 않던 이 상자에 오늘따라 묘하게 눈이 가고 있었다.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페로는 헛소리를 종종 늘어놓는것만 빼면 말도 잘 듣고 순해터진 카렐과 첫 섹스를 했었다면 훨씬 더 잘되지 않았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하며 안쪽을 조심스럽게 뒤져들어갔다. 마른 꽃이 들어있는 병들과 오래된 옷들, 자질구레한 식물 관련 책들과 모종삽, 가지치기용 가위, 쓸모도 없는 꽃씨 등등 페로에겐 그다지 관심사 밖인 물건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엉?"

상자를 뒤지던 페로가 문득 방문 밖을 돌아보았다. 반투명설정된 방문 밖으로 누군가 문에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걷는 자세로 보아 그냥 지나가는 자는 틀림없이 아니었다. 긴장된 얼굴의 페로는 이불 속에 잽싸게 파고들어갔다. 그의 턱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무려 다섯번이나 되는 죽을뻔한 위험을 넘겼던 페로는 이번에도 무언가 심상치않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니나다를까 그 검은 그림자는 페로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페로는 자신의 방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망할 가디언 녀석이 도대체 어딜 가 있는지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온 그 검은 그림자는 품 속에서 무언가 반찍이는 것을 꺼내들었다.

"헉......"

이불 속의 페로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녀석의 손에는 예리한 단검, 아니 단검이라고 하긴 조금 긴 칼이 굳게 쥐여 있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는 페로의 이불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칼을 치켜들었다. 이불을 뚫고 그대로 페로의 급소를 내리찍으려는 모양이었다. 벌벌 떨던 페로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으익!"

우당탕 하고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칼을 내리찍으려던 거구의 자객이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자객의 발목을 잡아채 넘어뜨린 페로는 허둥지둥 이불을 박차고 뛰어나가 문 쪽으로 내달리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바닥에 넘어진 자객 녀석이 밖으로 달아나려는 소년의 발을 덥석 움켜잡았다.

"살려줘요!"

앞으로 자빠지던 페로가 바깥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그 소리는 방 안에서 전혀 공명되지 않았다. 페로는 그제서야 자신이 방문에 방음 설정을 했음을 깨달았다. 발이 잡힌 페로는 중심을 잃고 큰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가만히있어, 꼬마야."

낮고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오자 페로는 급히 몸을 옆으로 날렸다. 순간 묘한 서늘함과 함께 시퍼런 칼날이 페로의 귀를 스쳐 방바닥에 내리꽂혔다. 기회를 잡은 페로가 몸을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체구가 족히 두 배는 됨직한, 다 큰 어른이었다. 엄청나게 큰 손이 바닥에 박혀버린 칼을 대신해 페로의 목을 거칠게 내리눌렀다. 목이 졸린 페로가 버둥거리며 자객의 팔을 움켜쥐었지만 상대는 또래중에서 크고 힘이 세다고 자부하던 페로로서도 도저히 감당할수가 없었다. 페로의 눈동자가 조금씩 뒤집어지고 있었다.

"아, 아윽......"

다리를 버둥거리며 마지막 필사의 저항을 하던 페로는 자신의 머리 옆에 있던, 카렐의 물건이 들어있는 큰 상자를 반사적으로 움켜쥐고는 상대의 머리를 향해 무작정 휘둘렀다.

"아욱!"

단단한 나무상자 모서리에 정수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자객이 움찔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상자 안에 들어있던 잡동사니들이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방바닥에 나딩굴렀다.

몸을 일으키며 흰색의 마른 꽂잎이 들어있던 병을 움켜쥔 페로는 휘청거리는 상대의 이마를 있는힘을 다해 병을 내리쳤다.

"에잇!"

산산조각난 병의 유리가 조각조각 흩어지며 수정빛 광택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은 향기를 풍기는 수천개의 흰 꽃잎들도 하늘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썅! 이게 뭐야!"

찢겨진 자객의 이마와 눈가에도 피로 물든 꽃잎들이 엉겨붙어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꽃잎들을 급히 털어낸 거구의 자객은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소년의 모습에 당황하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죽어!"

도저히 소년의 그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힘있고 굵은 목소리가 자객의 귀 옆을 메아리쳤다. 얼굴에 흰 꽃잎을 뒤집어쓴 자객은 잠시동안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에는 카렐이 정원수 가지치기를 할 때 쓰던 큰 가위가 절반쯤 박혀 있었다.

"날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가위를 다시 힘껏 뽑아든 페로는 이번엔 그의 뒷덜미를 내리찍었다. 아직 앳티가 그대로인 페로의 얼굴에 자객의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며 피얼룩을 그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경험한, 사람의 몸을 파고드는 날의 그 묘한 감촉에 소년 페로는 이미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한손에 카렐의 가위를 움켜쥔 페로는 이미 쓰러져 숨이 끊어진 자객의 등을 미친 듯이 찌르고 또 찔렀다.

그는 16살에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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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연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물가물해서 오늘은 3연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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