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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54화 (154/1,132)

< -- 154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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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번쩍 든 제네르는 멍 해진 얼굴로 눈앞을 스쳐날아가는 투창을 바라보았다. 즉시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온 시로가 하크로딘 가 종장 플로브 경의 코앞까지 날아온 투창을 도끼로 힘껏 쳐냈다. 하지만 미처 막지 못한 또 한 개의 투창이 겁에 질려있는 귀족들의 머리위를 넘어 반대편에 서 있던 2제후 트라티누스 가의 종장 마굴루 부인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다시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쳐오른 시로가 자객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찍어버렸다.

"시로! 종장님을 지켜!"

반사적으로 고함을 지른 제네르가 죽은 자객이 타고있던 호마에 훌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나머지 한 명이 다시 퀴버에서 투창을 뽑아들며 플로브 경에게 던지려 했지만 특급가디언인 시로가 이미 막아서고 있는 플로브 경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시선은 말에 달려있던 단창과 방패를 꼰아잡고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제네르 쪽으로 휙 돌았다. 순간 당황한 녀석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플로브 경에게 던지려던 투창을 제네르를 향해 던졌다.

"으익!"

방패를 들어 가까스로 투창을 막아낸 제네르는 하마터면 뒤로 중심을 잃을 뻔 했다. 하지만 1격을 막아낸 이상 이젠 제네르의 차례였다. 창을 들고 돌진한 제네르가 미처 자신의 창을 치켜들지 못한 녀석의 가슴을 푹 꿰어버리자 치명상을 입은 자객이 비명을 지르며 말 뒤로 떨어져버렸다.

순간 제네르는 앞쪽의 슈트란 가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바로 페로가 있을 곳이었다. 제네르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자리를 지켜! 시로!"

"예!"

행렬 앞쪽을 향해 달리는 제네르의 눈에 띈 건 한팔이 잘린 채 이미 저항불능이 된 듯한 자객 한 명과 창을 휘두르며 최후의 저항을 하고있는 또한명, 그리고 퀴버에서 자리드를 뽑아들고 있는 뒷쪽의 또한명이었다. 제네르는 이 말에 달려있는 퀴버에서 투창을 뽑아들었다. 제대로 던질 수 있을지는 그도 자신이 없었다. 그도 젊은 시절 탈라스에서 기병 훈련을 받으며 투창을 몇번 던져보긴 했었지만 이쪽에 그다지 소질이 있어보이지는 않았었다.

"에라,"

무작정 투창을 뽑아든 제네르는 거의 자리드를 던질 태세로 있는 적에게 되는대로 힘껏 집어던졌다.

"이크,"

민망할정도로 맥없이 날아간 투창은 아니나다를까 목표를 한참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자리드를 막 던지려던 그 유목민이 타이밍을 잃고 자신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순간 녀석에게도 보병들이 우루루 달려들었다.

"으아악!"

뒤에서 들린 큰 비명소리에 제네르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창을 들고 마지막 저항을 하던 적 자객의 말이 슈트란 가 귀족들 사이로 무작정 쳐들어가고 있었다. 서너명의 슈트란 가 사람들이 그 큰 호마의 발굽에 짓밟히며 바닥에 나동그라쳤다. 경호하는 보병들의 공격에 말을 모는 기병과 말 모두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죽음을 각오한 듯 창을 마구 휘두르며 돌진해오는 거의 미친듯한 발악에 그 누구도 접근할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제네르는 말에 달려있던 세이버를 치켜들고 큰 고함소리와 함께 그 말에게 돌진했다.

"비켜요!"

뒤로 접근해들어간 제네르가 적병의 뒷덜미를 향해 온 힘을 주어 휘두른 세이버에 끔찍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목민의 목이 삭둑 잘려나갔다. 떨어지는 머리에 귀족 한 명이 놀라 뒤로 자빠졌지만 일단 날뛰던 적은 저지한 셈이었다.

창에 찔린 슈트란 가 사람 중 한명은 이미 숨이 끊어진 듯 했다. 제네르의 시선은 떨어지는 머리에 깔려 뒤로 넘어져있던 네자드 경과 다시 마주쳤다.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공포에 질려있던 그의 표정은 말 위에서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제네르의 표정에 한결 밝아졌다.

"전......괜찮습니다......"

째지는 고함소리가 다시 등뒤에서 들려왔다.

"달아난다!"

뒤를 휙 돌아본 제네르는 보병들의 포위를 뚫고 초원 쪽으로 달아나고 있는 마지막 한 명을 발견하고는 다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바로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투창공격을 했던, 바로 그녀석이었다. 그새 주변에서 달려온 슈트란 가 경기병 한 명이 제네르보다 앞장서서 녀석의 뒤를 쫓고 있었다.

"네놈! 죽여주마!"

경기병이 녀석을 공격하기 위해 투창 한 발을 뽑아들며 팔을 치켜들어 사이클롭스에 채웠다.

"으앗!"

적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제네르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정신없이 도망가는 듯 싶던 녀석이 갑자기 뒤로 몸을 홱 돌리더니 투창을 막 치켜들던 경기병을 향해 눈 깜짝할새 자리드를 내던졌다. 준비동작조차 없는 그 무시무시한 공격은 동부에서 자란 제네르도 난생 처음보는, 엄청나게 빠른 것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일직선으로 날아온 그 묵직한 투창은 막 투창을 발사하려던 경기병의 스코프를 그대로 꿰뚫고 눈과 머리를 관통해버렸다. 경갑이나마 입고있던 경기병에게 '드러나있던' 유일한 부분을, 별다른 조준장치도 갖추지 않은 적이 단 한발로 쓰러뜨린 것이었다. 뒤를 따라가던 제네르는 그 무시무시한 정확도에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나동그라지는 경기병을 급히 피하며 제네르가 다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녀석의 놀랍기까지 한 기마실력은 나름대로 기마술에는 제국 최고라 자부하던 제네르로서도 따라잡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젠 녀석을 잡을 수 있는 건 자신 뿐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몇 기의 경기병이 더 쫓아오고 있었지만 저정도 실력으로는 앞의 저 무서운 녀석을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헤얏!"

큰 기합소리와 함께 앞을 가로막는 차 위를 간단히 뛰어넘은 녀석은 다시 속도를 내며 거대한 숲 속으로 뛰쳐들었다. 제네르도 말에 박차를 가해 걸르적거리는 차 지붕을 훌쩍 뛰어넘었다. 결코 쉬운 장애물이 아닌 차를 뛰어넘어 쫓아오는 제네르의 모습에 상대방이 조금 당황했는지 뒤를 계속 돌아보고 있었다.

서있는, 혹은 그보다 더 위험한 쓰러진 나무들과 바위들, 풀숲을 귀신같이 피하며 숲을 가로질러 잡힐 듯 말 듯 무섭게 질주하는 녀석의 귀신같은 솜씨에 약이 바싹 오른 제네르가 말에 최대한 박차를 가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도무지 좁혀지지를 않았다. 제네르는 방패를 쥔 왼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타고있는 말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결사적으로 달렸지만 앞의 녀석을 도저히 따라잡을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녀석이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보아서 조만간 자신을 향해 투창을 던질 것이 확실했다. 제네르는 말을 조금씩 좌우로 움직이며 녀석이 자신을 제대로 겨누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으잇!"

녀석은 그런 제네르의 노력을 비웃듯 갑자기 방향을 휙 돌리며 또한번 투창을 날렸다. 제네르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패를 치켜들었다. 45도 측면에서 날아온 자리드는 몸을 잔뜩 움츠린 제네르의 가슴을 향해 정확히 날아오고 있었다.

"악!!"

비명을 지른 제네르가 순간적으로 뒤로 중심을 잃고 말았다. 돌격해오는 랜스에 정면으로 타격당한듯한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그때까지도 그 위력을 과소평가하고있던 제네르는 한구석이 부서져버린 방패를 바닥에 떨구며 자리에 주춤주춤 멈춰설수밖에 없었다.

"으, 윽."

제네르가 왼쪽 어깨를 움켜쥐며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자리드에 스쳐 찢겨져나간 팔뚝이 문제가 아니었다. 팔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탈구가 분명했다. 한때 근위대의 고문도 이겨냈던 그의 눈에서 찔끔 하고 눈물이 솟았다. 어깨가 탈구된채로 흔들리는 말을 타는것은 기마민족인 동부인들 사이에서 팔다리를 생으로 잘라내는것보다 더한 고통으로 치부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지근거리였다지만 방패를 쥔 어깨를 탈구시킬정도의 위력적인 투창공격은 제네르로서도 난생 처음보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말에 오른 적 자객은 비틀거리는 그를 놔둔 채 숲 속 멀리로 조금씩 모습을 감추어가고 있었다. 제네르는 어깨를 움켜쥔 채 최대한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페로는 칼을 내던지며 쓰러져있는 페다이에게 달려갔다. 등에 두 대의 자리드가 명중한 페다이는 자신을 안아주는 주인의 모습에 가벼운 미소를 띠어보였다. 비교적 근육이 얇은 어깨죽지를 꿰뚫은 한 대를 빼고 나머지 한 대는 날갯죽지 바로 위의, 비교적 근육이 두꺼운 곳에 박혀있었다. 질긴 비단전포와 가디언 특유의 강철같은 근조직이 아니었다면 가슴을 완전히 뚫고나가 즉사시켰을 위치였다.

"빨리 후송하지 않고 뭐해!"

페로가 째지는 목소리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보병들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뺨이 찢긴 샤자한 공은 얼굴의 상처를 가볍게 더듬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런......기가막힌 일이 있나......도대체....."

"트라티누스 가의 마굴루 부인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지휘관 한 명이 샤자한 공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망연자실한 샤자한 공이 페로를 휙 돌아보았다. 2제후 마굴루 트라티누스 부인은 2차 혼란기때부터 동부 경기병대를 이끌어온 명실상부한 제국 제일의 경기병 지휘관이었고, 페로를 지원하기 위해 임시로 편제해놓은 '동부연합군'에서 그 핵심인 기병사령관을 맡기로 예정되어있던 인물이었다. 단단히 악문 샤자한 공의 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휘관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아르군 경께서도.....운명하셨습니다."

"뭐? 뭐라고?"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샤자한 공이 충격을 받아 비틀거리는 모습에 페로가 그를 급히 붙들어 주었다.

"말도 안돼, 아르군 그애가.....아르군이....."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한 샤자한 공이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페로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간 그곳에는 목이 잘려나간 자객의 시체와 함께 가슴에 창이 박힌 채 죽어있는 샤자한 공의 적장자, 틀림없는 아르군 슈트란 경이 쓰러져 있었다. 아들의 시체 앞에 꿇어앉으며 샤자한 공이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도 잊은 채 바닥의 흙을 손에 꽉 움켜쥐며 하늘을 향해 거친 함성을 내뱉었다.

"어떤 놈의 소행인지......잡히면 산채로 사지를 갈갈이 찢어놓을테다!!"

울부짖는 샤자한 공의 얼굴에서 떨어진 피어린 눈물이 흙바닥에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페로가 한숨을 내쉬며 '난리통이 되어버린' 2제후 트라티누스 가 쪽을 돌아보았다. 종장이 죽어버린 그 가문의 충격은 슈트란 가보다도 몇 배는 더 클것이 확실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최고제후부터 3제후까지 모두를 노린듯한 이번 공격은 적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절반의 성공, 아니 실패에 조금 가까운 셈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같은 혼란상황에서 제2제후의 죽음은 동부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페로 경, 도대체 어떤 놈 같습니까?"

아들의 시체 앞에 꿇어앉은 샤자한 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페로는 다시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의 가장 큰 행사에서 마치 '엿먹으라는 듯' 암살을 저지를 대담한 세력은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몇 되지 않았다. 흥분한 트라티누스 가 사람들 쪽에서 벌써부터 '피의 복수'를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문득 초원쪽을 돌아본 페로의 시선에 말 목을 껴안은 채 거의 죽어가는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 제네르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로! 시로!"

제네르가 힘을 쥐어짜내 겨우 외쳤다. 힘없이 덜렁거리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겨우 받친 채 가까스로 돌아온 제네르의 얼굴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있었다. 사색이 다 되어 달려간 시로가 흐느적거리는 제네르를 말 위에서 끌어내려 풀이 자란 부드러운 바닥에 눕혀주었다.

"어깨.....어깨가 빠진 것 같아. 맞출 수 있겠어?"

"그럼요, 아파도 참으세요."

시로가 제네르의 비단포를 벗겨내고 그의 등뒤에 바싹 붙어앉아 오른팔로 그의 어깨을 껴안고는 팔을 비틀어 올렸다.

"악,"

제네르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뼈가 맞은 듯 했지만 말을 타고오면서 다른 부분들도 많이 손상된 듯 어깨가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제네르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시로가 많이 걱정스러운 듯 제네르의 셔츠 안쪽을 슬쩍 들쳐보았다. 상처가 심상치않음을 깨달은 시로가 들것을 들고 돌아다니던 보병들을 큰 소리로 불렀지만 슈트란 가 쪽의 상급귀족들 부상자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시로의 '말빨'이 밀려서인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있었다.

"뭐하는 짓인가?"

어깨를 붙들고 바닥에 앉아있던 제네르가 위를 문득 올려보았다. 플로브 경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시로의 가슴에 안겨있는 제네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로가 대신 입을 열었다.

"어깨가 탈구되어서....."

"자네가 의사인가?"

"그건 아닙니다만......원래 일선에서 이정도는....."

"그래서 주인의 몸을, 그것도 고귀한 귀족 여성의 몸을 마음대로 주물러도 된다는건가? 아주 한술 더 떠서 옷 속을 쳐다보기까지 하더군. 제네르. 내 자네가 천박하게 자란 건 알고있으나 사람들 눈이 많은 곳에서 이렇게 생각없이 굴 정도로 품위없는 사람인줄은 몰랐네."

"......죄송합니다.....종장님......"

제네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아직까지 자신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껴안고있던 시로에게서 가볍게 떨어져 앉았다.

"아니, 탈구된 채로 말을 타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흥분한 시로가 무어라 언성을 높이려는 것을 제네르가 급히 가로막았다. 아직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제네르의 왼팔에서는 꽤 많은 피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아메스가 제네르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다소곳한 태도는 귀족의 미덕이거늘, 우리같은 상급귀족가 여성이 방정맞게 말을 타고 칼과 창을 휘둘러대다니, 참으로 부끄럽기가 짝이없군. 다른 가문 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얼마나 비웃었겠나? 내 자네가 기사단장이라 하여 후방에서 지원이나 하는 줄 알았건만, 설마 일선에서 직접 나가 싸웠을줄은 생각도 못했네."

제네르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도대체 어느시절 이야기인지도 모를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저녀석을 그냥 죽게 놔둘걸 하는 흉악스런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종장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잔뜩 흥분한 시로와 아메스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네르는 이자리에 카렐 혹은 이미 죽은 제국 제일의 명장 오르마즈 경이 있어서 저녀석의 아구창을 날려버리는 황당한 상상을 하며 참는수밖엔 없었다.

"이런 천하에 수치스런 일이 있나,"

"큰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과하신 말씀이십니다. 플로브 경."

제네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담요를 껴안고 달려오던 네자드 슈트란 경이 하크로딘 가 종장 플로브 경 앞에서 두눈을 똑바로 뜬 채 쏘아붙이고 있었다.

"기마중 탈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기마민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것입니다. 빠른 정복만이 통증을 피하는 길이니 평소 비슷한 일을 자주 당하는 특급의 가디언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족히 그 일을 맡길만한 사람입니다. 빠른 판단으로 종장님과 많은 제후들 목숨을 구했으니 치하해도 부족할 것이거늘 질책하심은 가당치 않으십니다."

플로브 경이 잠시 기가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최고제후가 사람이라지만 제3제후 종장인 자신에게 눈을 부릅뜨고 대드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무례하기 짝이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하던 플로브 경이 무슨 이유엔지 갑자기 피익 웃음을 지었다.

"알겠네.....네자드 경. 내 오늘은 이대로 참도록 하지."

멀어져가는 플로브 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네자드 경이 들고온 담요를 제네르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시로가 무표정하게 뒤로 돌아섰다.

"응급셔틀에서 잠깐 빌렸습니다. 탈구 후유증에는 따뜻하게 보온하는 것이 중요하니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쉬십시오. 당장 북반구의 제 사택에서 전담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부상자가 많이 나서 그편이 더 나을겁니다."

"아뇨.....그러실것까지는......큰 병도 아니고 어느정도 약품은 항상 가지고다니니 괜찮을겁니다."

제네르가 고개를 떨구며 낮게 대답했다. 네자드 경이 큰 소리로 들것을 든 보병을 부르고 있었다. 보병들은 그제서야 들것을 들고 쓰러져있던 제네르 쪽으로 달려왔다. 제네르를 부축해 들것에 눕히려는 네자드 경을 가로막은 시로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의 체구를 보아서는......제가 하는 게 낫겠군요."

네자드 경은 그의 작은 체구를 비꼬는 듯한 시로의 한마디에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예상외로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제네르를 번쩍 안아든 시로는 그를 조심스럽게 들것 위에 눕혀주었다.

숲을 가로질러 돌파하면서 추격병들을 가까스로 떨궈낸 베아트릭스는 나즈막한 언덕 밑에 멈춰서서 지친 말의 목을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제길....."

그는 텅 비어버린 퀴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져온 자리드를 모두 다 써버린 그로서는 다시 적과 마주치면 창을 잡고 목숨을 건 백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망할 노랑머리 년,"

이를 악문 베아트릭스는 막판까지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온 그 금발머리 여자를 떠올렸다. 하크로딘 가의 머플러를 하고 있던 그 망할 여자만 아니었다면 최소한 제1타겟이었던 페로 자이센을 자기 손으로 저승에 보낼 수 있었을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만 성공했다면 최소한 '실패하고 돌아온' 치욕스러운 지휘관으로 낙인찍히는 것 정도는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갑자기 갈증을 느낀 베아트릭스는 말 엉덩이에서 이미 뜨뜻하게 데워진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지쳐있는 말의 입에도 남은 물을 모두 부어주었다. 그는 텅 비어버린 수통을 미련없이 옆에 내던지고는 귀환셔틀의 접선지점인 동쪽 강변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지막까지 결사적인 저항을 벌였던 자신의 부장 녀석은 플라칼 가문 출신 전사답게 슈트란 가 녀석들의 한중간까지 뛰어들어 동부 최고제후 맏아들의 가슴에 창을 찔러넣는 큰 공훈을 세우고 장렬하게 죽어갔다. 물론 그 망할 금발머리 여자에게 목을 잘리지만 않았다면 서너명쯤 더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자신은 물론이고 부하들 역시 각자의 타겟을 향해 모두 일격을 날릴 수 있었으니 과정만으로 보자면 할일을 다한 셈이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중요한 건 결과였다. 샤자한 공과 함께 움직일 페로 자이센에게 특급 가디언 하나 정도가 별도로 경호를 서리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래서 전방을 공격한 두 녀석에게는 시차없이 동시에 공격을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었다. 어차피 녀석은 둘 중 하나밖에 막지 못할테니 나머지 하나는 죽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부하 둘과 자신까지 세 명이 일시에 공격을 했다면 제아무리 날고뛰는 특급가디언이라도 다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뒤에 또 한 명의 특급가디언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생각하기도 싫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어느구석에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그 망할 여자, 아니 노랑머리 '년'은 생각만해도 머리털이 곤두버서릴 정도로 지독한 놈이었다. 나름대로 기마술이라면 제국 최고라고 굳게 믿고있던 자신이었지만 자신을 끝까지 따라오던 그 망할 여자의 솜씨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것이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미련들도 다 소용없었다.

그는 살기위해 도주한 것이 아니었다.

접선지점에 도착한 베아트릭스는 말 등에 실려있던 사슴가죽 매트리스를 끌러내려 낮은 풀들이 자란 땅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말없이 꿇어앉아있던 베아트릭스는 동쪽하늘에서 들려오는 셔틀 엔진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예리한 단검이 놓여져 있었다. 신분이 드러나 외가가 멸족당하는 것보다, 어머니가 영영 외토리로 남부에서 살아가는것보다, 저 전쟁에 미친 친가 사람들이 자신의 시체를 거두어가는 편이 나았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유서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자신이 이번 작전에 투입되었음을 절대 밝히지 말 것과, 어머니 엘룬 바툴에 대한 연금을 풀어주고 고향인 동부 탈라스로 돌려보내 줄 것을 부탁하는, 많지는 않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사자의 유언만은 꽤 충실히 챙겨주는 가문의 전통을 믿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어머니....."

그는 젖어오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단검 끝을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자신이 깔고앉은 사슴가죽은 동부 유목민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영광스러운 죽음'의 상징으로 그 주인의 시체를 돌돌 말아 어머니가 계실 집에 가져다줄 터였다. 자신을 낳고 키워준 동부에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그였지만 죽을때만큼은 동부인이고 싶었다.

낮은 한숨을 내쉰 베아트릭스는 칼을 쥔 양손에 최대한의 힘을 가해 자신의 목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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