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5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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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객들의 시체가 놓여있는 보관실에 칼을 찬 채 군복 차림으로 들어온 제네르의 모습에 플로브 경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팔과 어깨에 붕대를 감은 제네르는 처참한 몰골로 죽어있는 4구의 시체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물론 그 중 둘은 자신의 손에 죽은 녀석들이었다. 페다이에게 밀려 넘어지면서 한쪽 손목을 다친 페로 역시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느새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온 샤자한 공이 제네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고맙네. 자네 공이 컸어."
제네르는 맏아들의 죽음을 잠깐새 떨치고일어난 샤자한 공의 얼굴을 보며 '강철심장'이라 알려진 그의 명성이 헛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플로브 경은 이 최고제후가 행여나 이 손자며느리감의 행동들에 실망하지나 않았을까 전전긍긍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검은 투창을 한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페로가 제네르에게 그것을 불쑥 내밀었다.
"처음보는 종류의 투창인데 혹시 아나?"
"자리드, 혹은 시난이라고 불리는 중투창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고 탈라스 유목민들 사이에서만 드물게 쓰이는 겁니다. 그 위력이 대단하지만 다루기가 어려워서 고도로 훈련된 전문 궁기병이 아니면 쓰지 못합니다."
제네르가 아직 피가 묻어있는 자리드를 죽 살피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 투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녀석이 무려 다섯놈이라.....그럼 탈라스계 유목민이라 여겨지나?"
"아닙니다."
탈라스 지역 출신인 제네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녀석들이 탄 호마는 유목민 방식으로 길들여진 말이 아닙니다. 상태로 보아 잘 훈련된 군마 같습니다. 다만....."
"다만?"
"마지막에 도주한 녀석의 기마스타일은 전형적인 탈라스계 유목민 방식입니다만 나머지 녀석들은 일반적인 기병의 교범적 기마술에 탈라스지역 방식이 혼합된 스타일이었습니다. 짐작이지만 도주한 녀석이 모든것을 가르친 지휘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네르의 박식함에 샤자한 공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제네르가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보통의 궁기병이 쓰는 사이클롭스라면 특수 스코프로 조준해 던지기 때문에 사정거리가 1스타디아까지도 달하지만 녀석들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가난한 유목민들이 사냥할때나 쓰는 구형의 조잡한 사이클롭스만을 달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측 기병들을 그 대장녀석이 맡은것이 아닌가 합니다. 갑주를 꿰뚫을정도의 위력을 기대할 수 없으니 정확도로 승부하려 한 것이었겠죠. 나머지는 이녀석들을 조사하면 알 수 있을겁니다."
페로가 옆에 선 경비병들을 문득 돌아보았다.
"이녀석들 옷 다 벗겨 봐. 몸 상태를 봐야겠다. 혹시 근위대일지도 모르고....."
병사들이 바닥에 늘어진 뻣뻣해진 시체들에서 옷을 벗겨내는 모습을 제네르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플로브 경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제네르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내심 통쾌함을 느끼며 더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알몸이 된 네 남자의 끔찍한 시체가 바닥에 차례로 놓여졌다. 제네르는 그들에게 얼굴을 바싹 붙이고 그들의 피부 상태와 체취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페로 뒤에 서 있던 아메스가 구역질이 올라오는지 급히 입을 틀어막았을 지경이니 플로브 경의 표정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페로와 샤자한 경은 생각외로 태연한 표정이었다.
제네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유목민은 절대 아닙니다. 유목민의 피부치고는 각질이 너무 적습니다. 그리고 햇빛에 탄 상태도 틀립니다. 체취도 틀립니다."
"제가보긴 근위대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근위대라면 당연히 저를 알아보았을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네르 뒤에있던 시로가 덧붙이자 페로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플라칼 가밖에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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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혼자 책을 읽던 페로에게 아버지의 느닷없는 호출이 떨어진 건 가비와의 그 뜻밖의 사건이 있고 난 이틀 후였다. 페로를 데리러 온 집사 로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페로에게 낮게 귀띔했다.
"대체 왜그러셨습니까?"
"뭘?"
지은 '죄'가 있던 페로는 내심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애써 추스리며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로카는 페로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말했다.
"가비 말입니다."
"그 여자가 왜?"
페로가 짐짓 태연한 얼굴로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 주인의 의지와는 반대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시치미떼실 것 없습니다. 다 소문났어요,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무, 어?"
순간 페로의 눈앞이 아찔 해왔다.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진 페로의 표정을 본 로카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우제크 도련님과 그런 사이였다는 거 모르셨습니까?"
"뭐라구? 무슨 소리야?"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페로가 자기도모르게 큰 소리로 물었다. 이제 겨우 19살인 페로에게 그런 복잡한 '어른들의 문제'는 지금까지 완전히 관심 밖이었다. 로카가 소리를 지르는 페로에게 목소리를 낮추라 재빨리 손짓했다.
"우제크 도련님이 밀고하신 모양입니다. 지금 주인님이 노발대발하셨습니다."
페로의 발바닥이 땅에 붙어버린 듯 제대로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로카를 따라 방을 나서기는 했지만 사랑채로 향하는 페로의 다리는 침착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애쓰는 그의 마음과는 달리 제멋대로 후들후들 떨려오고 있었다.
'죽도록 비는수밖에 없겠군.....'
페로가 눈을 꼭 감았다. 이미 1년 전에 '비슷한 사고'를 먼저 저질렀던 수우 녀석은 그 댓가로 열흘동안 독방감금을 당하고도 다시 학교에 나타나 친구들에게 그 일을 무슨 무용담인 양 떠벌리고 다녔던 일도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된 여자'와 잠자리를 해봤다는 친구 수우가 그리도 부러웠던 페로였지만 지금 이 상황을 생각해보면 수우도 당시에는 기분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페로가 아직까지 잊고 있는 것은 수우에게는 그나마 자신을 변호해줄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페로입니다."
사랑채 앞에 대청에 읍하고 선 페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확 열리더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버지 슈막이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뛰쳐나왔다.
"저, 저 망할 후레자식 같으니!"
슈막의 뒤를 이어 무표정한 얼굴의 우제크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가비가 따라나오고 있었다. 가비가 이미 사실을 털어놓았음을 눈치챈 페로는 변명 따위로 빠져나갈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사랑채 마루 밑 마당에 급히 꿇어앉았다.
"소자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닥쳐라! 이 썩을 놈 같으니, 네놈이 감히......"
극도로 분노한 슈막의 아랫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페로는 땅바닥에 이마를 들이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아버님,"
"어떤 벌? 지금 어떤 벌이라고 그랬느냐? 네놈은 겁간을 한 녀석이 어떤 벌을 받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냐?"
'겁간'이라는 말에 엎드려있던 페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슈막의 팔에 울며 매달려있는 가비를 문득 바라보았다.
"거......겁간이라뇨.......소자는 겁간을 한 일이 없습니다. 저, 전......"
"썩을 놈! 그럼 네 작은어미가 너와 화간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슈막이 자신의 팔에 매달린 가비를 연신 토닥거려주며 사랑채가 떠나가라 고함을 질러냈다. 가비는 슈막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거의 알아듣기도 힘든 소리로 페로를 향해 소리지르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제가 막 물고 할퀴었어요! 제가 저 큰 덩치를 어떻게 당해냈겠어요? 저녀석 몸에 그 상처가 틀림없이 남아있을 거예요! 벗겨보시면 다 남아있을 거예요!"
바닥의 거친 흙을 한웅큼 움켜쥔 페로가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페로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일은 걷잡을수없는 상황이었다.
"아버님! 제발 믿어주십시오! 전 겁간을 한 일이 없습니다! 저......저 망할 여자가 절 먼저 유혹했습니다!"
하인들의 손에 붙들린 채 웃옷이 강제로 벗겨지며 페로가 결사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슈막은 들을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우제크와 가비가 한패거리가 되어 자신을 얽어넣은 것이 확실했다. 아버지의 눈앞에 드러난 그의 상체 곳곳에는 가비 말마따나 군데군데 할퀴고 깨문 상처가 남아있었다. 가비의 증언을 눈앞에서 확인한 슈막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페로가 다시 바닥에 엎드리며 눈물로 호소했다.
"아버님! 어찌 아들의 말을 안믿고 저런 요물의 말을 믿으십니까! 소자는 겁간을 한 일이 절대 없사옵니다! 모두 저를 몰아내기 위한 저년의 계략이옵니다!"
"닥쳐라!"
슈막이 엎드린 페로의 얼굴을 향해 신발을 집어던졌다.
"아버님! 제발 믿어주십시오! 전......"
"네놈 말고도 자식은 많다!"
슈막의 마지막 말에 페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신은 슈막의 유일한 적생자였다. 슈막의 그 말은 그가 무얼 생각하고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이 집에서 꺼져라! 앞으로 네놈 꼴도 보지 않을 것이니 이곳 주변에 얼씬 할 생각도 말아라! 그때는 네놈을 죽도록 두들겨패서 네놈 어미가 죽은 검은 숲에다가 내던져버릴테다!"
"아, 아버님!"
너무나 놀란 페로가 비명 비슷하게 소리를 질렀다.
"제발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억울하옵니다! 아버님! 전......"
"빨리 끌어내! 대문으로 내보내기도 치욕스러우니 서쪽 쪽문으로 쫓아버려라!"
잠시 머뭇거리던 하인들이 버둥대는 페로를 붙들었다. 워낙에 기운이 센 청년인지라 네 명의 하인들이 모두 달려들어 팔다리를 붙들고 끙끙대며 겨우 들어내가고 있었다.
"아버님! 이러시면 안되옵니다! 저 요망스런 것들에게 속으시면 안되옵니다! 아버님!"
페로가 눈물을 흩뿌리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슈막은 부들부들 떨고있는 가비를 겨드랑이에 꼭 껴안은 채 장남 우제크와 함께 다시 방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도련님, 식당에서 집어왔습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다룬이 품에 숨겨온 주먹밥을 얼른 페로에게 내밀었다. 집안 아랫사람들이 드나드는 서쪽 쪽문 앞 흙바닥에 멍 하니 꿇어앉아 있던 페로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이미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페로는 그 비마저도 그대로 맞고 있었다. 총명함으로 빛나던 그의 검은 눈동자는 이미 탁하게 흐려진지 오래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그의 옷 사이로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벌써 4일째입니다. 이러시다가 정말로 큰일납니다. 한입만이라도 제발 드십시오."
페로는 현기증이라도 느꼈는지 조금 비틀거리고 있었다. 쪽문이 열리는 소리에 페로와 다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간 탁해져있던 페로의 눈에서 갑자기 살기가 번득이기 시작했다. 쪽문 앞에 서 있던 우제크가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명의 노예들이 무언가를 들고와 문앞에 내버리기 시작했다.
"허, 헉....."
완전히 절망한 페로가 옆에 있던 다룬의 품 안으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별당의 페로 방에 있던 물건들이 노예들 손에 들려와 차례대로 문앞에 버려지고 있었다. 비로 질척질척해진 땅바닥에 버려진 페로의 책들과 옷가지들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노예들을 지휘하던 로카가 페로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도련님, 상황이 안좋습니다. 주인님 기분이 풀리시기는 커녕 더 단호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로카는 품에서 돈 조금과 할룩스를 꺼내 페로의 품에 꽂아주었다.
"주인님이 오늘 밤까지 물러가지 않으면 검은 숲에 내다버린다고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어디라도 좋으니 일단 피해계십시오. 더 챙겨드리고 싶지만 제가 가진 돈이 얼마 안되서......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운이 빠져버린 페로를 껴안고있던 다룬이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4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꿇어앉아 이곳을 지키던 페로는 이미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탈진해 있었다. 해도 저물고 다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룬과 네피를 비롯한 가디언 동기생들이 번갈아가며 언제 도적떼나 야생동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험한곳에 혼자 내버려진 페로를 지켜주고 있었지만 그들로서도 옛날 자신들을 친자식같이 지켜주었던 네베드 부인의 유일한 혈육 페로에게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쪽문 앞에 버려진 페로의 수북한 짐들이 거세어지기 시작한 비를 고스란히 맞고있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문 다룬은 축 늘어진 페로를 빗물이 흥건한 바닥에 눕히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페로의 떨리는 눈동자를 뒤로 한 채 집 안으로 뛰쳐들어간 다룬은 꽤 한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한 페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껏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져온 갖은 음모와 속임수, 그리고 자신을 적장자로 대우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 환멸이 솟구친 이 청년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자포자기상태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그의 귀에 빗물을 튀기며 달려오는 수십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눈을 뜬 페로의 앞에는 이십여명의 건장한 가디언들이 짐가방 하나씩과 각자의 무기를 쥔 채 서 있었다.
"판. 네가 업어드려라."
네피의 굵은 목소리였다. 명령을 받은 판이 축 늘어진 페로를 등에 업자 다룬이 그의 등에 방수포를 덮어주었다.
"뭐하는 짓이야......"
페로가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제 동기 열 명과 아랫녀석들 열 두명입니다. 나머지 동기 열 명은 이곳에 남아 정세를 보고하기로 했습니다."
"이러면......"
페로가 추위에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다룬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끼리 상의해 결정했습니다. 저희 주인은 네베드 부인이셨으니 이젠 도련님이 주인님이십니다. 저흰 당연히 도련님을 따릅니다."
페로는 숨을 헐떡이며 생각이 잠겼다. 자신의 일생이 걸린 문제였다. 혼자 이곳을 떠난다면 가문에 다시 돌아올 여지라도 남기는 셈이었지만 자이센 가문 가디언들의 최고 핵심멤버들인 이들을 데려가는 것은 앞으로 아버지를 영영 보지 않겠다는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아들은 속좁은 아버지가 감당하기는 너무도 커져 있었다.
페로가 판의 등에 기대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가자."
페로는 자신의 옆에 서 있던 킵을 문득 돌아보았다. 네피와 다룬보다는 약간 뒷순번이었지만 머리는 가장 쓸만한 녀석이었다.
"킵 넌 돌아가도록 해."
"예?"
순간적으로 당황한 킵이 움찔 하고 놀랐다.
"네피와 다룬이 떠나면 네가 수련장에서 최고 고수니까......수련장을 네가 장악하고 있도록 해. 그리고.....동기들이나 선배들 단속을 맡기겠다."
"아,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들은 킵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도련님'은 이미 이곳을 도망치는 것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널......믿겠다."
"감사합니다."
웃음지어보인 킵이 집 안으로 다시 뛰쳐들어갔다.
네피가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가진 돈이 얼마 안되니......일단 도시에 있는 수우 녀석 집에 가야겠다."
"알겠습니다."
판의 등에 업혀가던 페로는 쪽문 앞에 쌓여있던 자신의 물건들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 잠깐....."
"예?"
"저기.....왼쪽에 있는 검은 상자......저걸 가져가야겠다."
짐더미에 달려간 다룬은 페로가 가리킨 검은 상자를 집어들고 가볍게 흔들어보았다. 마른 꽃잎과 낡은 옷가지같은 잡동사니가 전부인 카렐의 물건들이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이거 말씀입니까?"
"그래......그거."
페로가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한때 자이센 가의 후계자였던 19살의 페로와 도망자 신세를 선택한 21명의 '페로' 가디언들은 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이 살벌한 종가 주변의 벌판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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