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6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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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샤자한 공과 어머니의 뒤를 이어 새로 제2제후가 된 그의 장남 제르베 트라티누스, 제3제후 플로브 경, 페로가 원탁에 둘러앉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플라칼 가문이 쳐온다면 첫번째 목표는 저희 가문이겠군요."
제르베 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남부에 가장 가까운 샤레이 행성계를 영지로 가지고 있는 것이 그들 트라티누스 가문이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피의 복수'를 부르짖던 그들이었지만 상대가 그 호전적인 플라칼 가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인 종장의 복수를 주저할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선택은 참으로 제한적일수밖에 없었다.
"일단 전군에 비상대기상태를 선포는 해 놓았습니다만....."
제르베 경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측은한 듯 바라보던 페로가 자료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중장보병 6만에 경보병 2만, 중장기병 1만 5천, 경기병 5천정도. 제가 파악한 플라칼 가의 총 병력입니다. 델루지 가가 플라칼 가 영지를 인수인계했으니 치안군을 제외한 거의 전 병력이 출동했을겁니다. 트라티누스 가 병력이......"
"중보병 1만 5천, 경보병 1만 3천, 중장기병 5천과 경기병 7천입니다."
"총 병력은 10만대 4만. 하지만 그 전쟁기계 플라칼 가 녀석들 스타일을 생각하면......"
페로가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미리 상의한대로 제후 연합군 4만은 이곳 시간으로 내일 16시에 샤레이 6번 행성에 집결하기로 합니다."
샤자한 공이 침착하게 말했다. 슈트란 가에서 2만, 하크로딘 가에서 만 명과 다른 군소 제후들에게서 끌어온 만 명의 병력은 군사력에서는 궁색하기 짝이없는 동부에서 당장 끌어붙일 수 있는 최대규모의 연합병력이었다.
"하크로딘 가의 플로브 경께서 지원군 총 지휘를 맡아주시고 제 둘째아들인 다히르가 기병사령관을 맡도록 합시다."
수도를 함부로 떠날 수 없는 최고제후 샤자한 공 대신 지원군의 지휘를 맡은 플로브 경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깊이 숙이자 페로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유목민 용병들에게도 출동령을 내려야겠습니다. 지금 2만 정도가 동원가능하니 1차로 파견하고 나머지 만명은 샤자한 공께서 지휘해서 파견해주십시오."
"그렇게되면 지휘권이 애초 계획하고는 틀려지는데....."
플로브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확보한 유목민 용병들을 2만이나 트라티누스 가에 빼앗기게 될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를 샤자한 공이 급히 막아서고 나섰다.
"물론 그생각을 했으나 문제는 지휘권입니다. 아직 녀석들의 지휘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서......이런저런 잡다한 부족에서 모여든 녀석들을 통제하려면 그 단계에서 거쳐야되는 홍역도 보통이 아닐겁니다."
페로는 잠시 머뭇거릴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가장 큰 고민거리도 바로 그것이었다. 2차 혼란기 이후로 대규모 기병 전력을 가져본일이 없는 동부에는 그정도 역량을 지닌 지휘관이 거의 전멸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에 마굴루 부인과 아르군 경까지 죽으면서 당장 대규모 기병대를 지휘할 역량을 지닌 지휘관의 씨가 말라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최고제후인 샤자한 공 스스로가 2차 혼란기 당시 동부 최고제후의 차남으로서 당시 보병을 맡았던 북부의 오르마즈 경과 함께 10만에 달하던 연합기병대를 지휘했던 탁월한 기병지휘관이었지만 이제 최고제후가 된 이마당에 정규군도 아닌 엉망진창에 가까운 3만의 유목민 용병대 지휘를 맡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샤자한 공의 나머지 여섯 직계자녀들 역시 죽은 맏이 아르군을 따를만한 지휘력을 지닌 인물은 없는것이 문제였다.
"사실 딱 한사람이....."
또 한사람을 떠올린 페로는 샤자한 공과 제르베 경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그렇다면 탈라스에 있는 7제후 카이두 바툴 경은....."
아니나다를까 샤자한 공과 제르베 경이 일제히 얼굴을 찡그렸다.
"탈라스 쪽은.....괜히 기분이 안좋군, 그리고....."
샤자한 공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무려 2만의 기병을, 일개 하급제후인 7제후에게 맡기는 것도 그러려니와 이번 암살사건과 탈라스가 무언가 관련이 있는듯한 찜찜한 상황에서 탈라스의 제후에게 대병력을 맡기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제르베 경과 플로브 경 역시 최고제후의 의견에 동감하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휴우......"
난감해진 페로는 한쪽 구석에 아메스와 함께 말없이 서 있는 제네르를 문득 돌아보았다. 탁월한 지휘력과 판단력, 침착성과 카리스마까지 갖춘 우수한 기병지휘관인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놈의 형편없는 신분이 문제였고, 더우기 그 역시 탈라스 출신이었다.
게다가 정규 연합군을 하크로딘 가 종장 플로브 경이 맡고있는 상황에서 역시 하크로딘 가 사람인 제네르에게 용병대까지 맡긴다면 제네르가 가문에 충성스럽건 아니건을 떠나 나머지 가문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페로는 일단 어떤 식으로건 결정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용병대는 일단은 제가 지휘하죠."
샤자한 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의 뜻밖의 말에 아메스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총리께서 어떻게......황제령은 어쩌시고......"
"황제령의 전선은 어차피 답보상태입니다."
페로가 침착하게 찻잔을 들이켰다.
"타르서스를 제가, 코아 전사단의 정규군부대가 ㅤㅋㅞㄹ크를 장악하고 있으니 이쪽에서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황제령의 현 상황은 근위대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을겁니다. 내각은 어차피 마비상태고 세 세력이 자치형태를 띠어가고 있으니 제가 없다해도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겁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사실 페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가디언 위주의 군 편제로 지금까지 많은 소탕전과 수만을 아우르는 대규모 전투도 치러본, 산전수전 다 겪은 페로였지만 모두 보병간, 혹은 소수의 기병이 섞인 혼성부대간 싸움이었고 순전히 기병부대는 단 한번도 지휘해본적이 없었다. 워낙 사람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맡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스스로도 너무 무모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 페로의 시선이 제네르를 향한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대신,"
"대신?"
"제네르 하크로딘 경을 제 부장으로 삼겠습니다."
플로브 경이 아연질색했고 샤자한 공도 얼굴이 조금 굳어지고 있었다. 기병대에서 부장은 필요할때는 대장을 대신해 일기투를 벌여야 하고, 대장이 위험에 처하면 대신 목숨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공격시에도 모든 지휘관들이 꺼리는 가장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목숨을 건 직책이었다. 보병만을 생각하고 아무생각없이 '부장'이라 표현했던 페로는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절감했지만 이미 샤자한 공과 플로브 경은 충분한 충격을 받고 난 후였다. 물론 페로는 카렐이 가장 아끼는 부하인 제네르를 그런 '파리목숨'으로 소모시킬 생각은 결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또하나의 걱정거리 역시 빤한 노릇이었다. 문제는 야전에서 대장과 부장은 상당히 오랜시간을, 때로는 잠자리까지도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페로가 여자보기를 돌보듯 하는 별종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페로도 남자, 그것도 매력적인 미남중의 미남이었다. 제네르 본인이 안다면 웃겨 뒤로 자빠질 노릇이겠지만 이 문제는 가문혼례를 생각하고있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였다. 그들의 걱정을 눈치챈 페로가 잽싸게 다음번 말을 꺼내들었다.
"경험도 쌓을 겸 제 후계자 아메스도 함께 참모로 삼아 데리고나가겠습니다."
샤자한 공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자식이라고는 달랑 딸 하나뿐인 자이센 가 종장 페로가 유일한 후계자인 딸까지 전장에 함께 데려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만용일수도 있었고 달리보면 자신감의 표현일수도 있었다. 어쨌든 친딸까지 데려간다면 페로가 진중에서 '몹쓸 짓'을 할 가능성은 낮아지는 셈이었다.
"영광이옵니다."
제네르가 페로에게 재빨리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는 기병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페로가 자신을 부장으로 삼으려 하는 의미를 이미 꿰뚫고 있었다.
어쨌든 천하의 페로가 직접 용병대 지휘를 맡겠다는데 감히 반대하고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네르를 대장으로 삼으려 했다면 이자리가 한바탕 뒤집어지고도 부족했을 것이 뻔했다. 결국 모두의 동의를 얻은 페로는 당장 오늘밤부터라도 '기병 지휘 교범'을 다시 읽어야한다는 사실에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문득 눈을 뜬 베아트릭스는 자신이 이승에 있는 것인지 저승에 있는 것인지 잠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묶여있기라도 한지 목을 전혀 움직일수가 없었다. 방 천장의 우유빛 하얀색이 묘한 살벌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행여 포로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최악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기우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곧 깨져버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제기랄,'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다 반가운것은 결코 아니었다. 목을 꼼짝도 하지 못하는 그의 시야에 중장보병대 지휘관의 정복을 입은 약혼자 쿤제 스비아토 중랑의 달갑지않은 모습이 나타났다.
"종장님께서 직접 연락하셔서 두시간쯤 전부터 계속 기다렸습니다. 수술이 성공적이라 다행입니다."
'그래, 죽어버렸으면 오죽 아까왔겠냐.'
베아트릭스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플라칼 가문의 사위가 될 기회를 자칫 날려버릴 뻔 했을 저 남자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것이 확실했다. 다시한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역시 귀에 익지만 결코 달갑지는 않은, 또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네."
경기병단장 히르직스 경이 그의 얼굴 위에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는 스비아토 중랑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해보이고 있었다. 그가 다음번에 어떤 주제로 말을 꺼낼지를 짐작한 베아트릭스는 할수만 있다면 쥐구멍으로라도 숨어버리고싶을 지경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차라리 선공을 하기로 했다.
"여기가.....어딥니까?"
처음으로 말을 꺼낸 베아트릭스의 목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목 중앙이 아닌, 조금 옆쪽에 심한 통증이 있는 것을 보아 단검날이 급소를 조금 비껴나간 모양이었다.
"병력수송선."
어느새 무뚝뚝해진 표정의 히르직스 경이 짧게 대답했다.
"작전실패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려 든 태도는 가상하나,"
베아트릭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한명의 지휘관이 아까운 시기니 자네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기로 하고 치료를 결정했네."
히르직스는 손에 쥐고있던 베아트릭스의 유서를 북북 찢어버리며 쌀쌀맞게 한마디 덧붙였다.
"이건......못본걸로 해두지."
베아트릭스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또다시 저들의 전쟁놀이에 한심한 말 신세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총공격입니까?"
"내일 샤레이 행성계에 상륙한다. 자네 몸상태로 보아선 첫 전투에는 참가하기 어려울 듯 하니 쉬고있도록 해."
무뚝뚝하게 쏘아붙인 히르직스 경은 멍한 표정의 베아트릭스를 병실에 놔둔 채 밖으로 나와버렸다. 병실 밖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기다리던 스비아토 중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들어가서 만나 봐. 지금 기분이 최악일테니."
휙 돌아선 히르직스 경은 빠른 걸음으로 함교쪽을 향해 걸었다. 큰 키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매서운 눈매, 약간 마른 듯 한 다부진 몸매의 그는 다른 플라칼 가 사위들에게는 입지전적인 존재였다. 황제령 출신인 그는 한때 황실 근위기병대였던 슈로 기사단에서 단장이던 토로 로버넬 경의 부장이었고, 토로 경의 황궁 습격계획을 근위대장 베흔에게 밀고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당시의 밀고로 당연히 토로 경의 뒤를 이어 신임 단장에 오를 것으로 믿었던 그는 기사단 자체가 해체되면서 졸지에 오갈곳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전력도 갖고있었다.
당시 베흔은 시간이 지나면 기사단을 재건해 자신에게 맡기겠다고 공언했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그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베흔이 대신 내준 카드는 상급귀족으로의 승진과 플라칼 가 종가 적생자와의 혼인이었다. 평민과의 사이에서 난 부끄러운 사생아라는 이유로 명문 쉐너 가 상급귀족인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던 그에게 '신분'은 치가 떨릴정도로 한맺힌 벽이었다. 게다가 남부 2제후 종장의 적생자녀라는 어마어마한 혈통과의 혼인 역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그는 그때까지 100년을 넘게 함께해온 하급귀족출신 조강지처와 미련없이 이혼하고 새로운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터였다.
묵직한 갑주 차림의 기사단 하급간부 녀석 한 명이 그에게 끄덕 하니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는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히르직스 경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기사단 녀석들의 시건방진 태도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플라칼 가 제후군에서 경기병단은 경보병단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천대받는 병종이었다.
애시당초 이쪽에서 경력을 시작했었다면 이젠 이제는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그는 슈로 기사단 출신이라는 그 경력이 말해주듯 원래 경기병 출신은 절대 아니었다.
사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제3기사단장으로 제후군 내에서도 꽤 잘나가는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기사단에서 밀려나 경기병단장으로 '사실상 좌천' 당해버린 건 그 망할 마누라 때문이었다. 자신 외에도 네 명이나 되는 남편을 더 가지고있는 아내는 요즘들어 그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뒤를 이어 제3기사단장에 오른 그 개자식도 바로 이 망할 마누라가 그리 총애하던 세째남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희망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임신 2개월인 아내의 뱃속에 들어있는 아들이 바로 자신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그의 입가에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오곤 했다.
유전자검사결과가 나오는 순간 보였던 나머지 네 녀석들의 실망하는 표정은 첫째남편으로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 썩을자식들에게 당연히 돌아갈 댓가였다. 자신의 피가 섞인 새 직계 손자를 얻게 될 종장의 총애만 되찾는다면 조만간 그리운 기사단에 금의환양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히르직스는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푸른색의 망토자락---경기병단장의 상징이기도 한---을 괜히 발로 꾹 밟아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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