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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57화 (157/1,132)

< -- 157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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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나?"

함교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플라칼 가 제후군 총사령관 헤즈 플라칼 경이 히르직스 에게 나즈막히 물었다.

"예."

히르직스는 자신의 직속상관이며 손윗처남이기도 한 헤즈 경에게 짧게 대답했다.

"한바탕 기를 죽여놨죠,"

"잘했네. 잠시 후면 영웅탄생의 순간이 오겠군. 후훗......그년이 얼마나 황당해할까. 자살까지 하고싶을 정도로 외가를 지키고 싶었을텐데......."

헤즈 경이 혼자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트라티누스 가 종장새끼가 죽었다니 다행이군. 안그래도 신경쓰이는 년이었는데 말이야."

"최고제후 맏아들 아르군 녀석이 죽은것도 생각외의 큰 소득이죠."

헤즈 경이 그제서야 히르직스를 힐끗 돌아보았다.

"생각외의 소득이라니? 그깟놈이?"

"2제후도 죽고 그녀석도 죽었으니 동부녀석들이 연합기병대를 구성해도 쓸만한 지휘관감이 없을겁니다. 2차 혼란기 직후에 무장들은 싹 다 목을 쳐버렸으니......그렇다고 최고제후가 직접 창들고 나오기도 어려울테고."

"그 뒤에 자란 녀석들이 있지않은가. 정히 안되면 보병지휘관들 끌어다가 써도 될테고."

히르직스가 보일듯말듯 얼굴을 찌푸렸다. 중장보병대 출신의 저 사령관은 기병지휘관이 철저히 전문화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틀린 작자였다. 그에게 있어 동부에서 아버지와 마굴루 부인에 이어 가장 쓸만한 지휘관이었던 아르군 경의 죽음은 아무나 끌어다가 때울 수 있는 별볼일없는 수확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어쨌든.....한놈도 못죽이고 몰살당할 줄 알았는데.....둘이나 죽이다니.....역시 플라칼 가문의 피를 받은 전사로군."

헤즈 경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히죽거렸다.

다시 히르직스를 돌아본 그가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행성계 수도인 6번 행성은 미뤄두기로 하고 내일 공격목표를 5번 행성으로 수정하기로 했네."

"그건......"

"대병력이 동시에 움직이니 에너지장벽이 먼저 작동될 가능성이 높아.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바엔 에너지장벽이 없는 5번 행성을 기습해서 교두보를 구축하고 6번 행성은 그 다음에 천천히 공략하는 편이 나아. 거기만 차지하면 동부 수도인 요동 행성계가 코앞이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지."

"그래도 속전속결로....."

헤즈 경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히르직스는 괜히 나섰음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일수밖에 없었다.

"속전속결 좋지. 하지만 우리 목표는 한방으로 동부를 무릎꿇게 하자는 게 아니라 페로 자이센에게서 떼어놓는거야. 그러려면 느려도 좋으니 녀석들의 영토를 질근질근 밟아가면서 진을 쏙 빼놓는게 더 중요하지. 한방에 쓰러진놈은 금방 회복하지만 지칠때까지 두들겨맞고 쓰러진 놈은 못일어나는 법이거든."

헤즈 녀석이 비유까지 써가며 제법 잘난체하고 있었지만 히르직스는 그의 말 뒤에 '동부놈들 정도는 느긋하게 두들겨패줘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오만함이 숨어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이러쿵저러쿵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있었다.

"다친거야?"

영상으로 나타난 카렐의 걱정스런 시선이 페로의 손목으로 향했다.

"별것 아냐. 약간 삐끗 했어."

페로가 건재함을 보이려는 듯 감고있던 붕대를 훌훌 풀어버렸다. 그런 페로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카렐이 중얼거렸다.

"플라칼 가 녀석들이 대제례를 먼저 덮치다니 정말 뜻밖인걸. 그걸 바보짓이라고 보아야 하나......아니면 뒤에 숨은 뜻이 있는건가.....순전히 군사적인 의미만 생각한다면 이런 요란스런 예고 따위 없이 곧바로 샤레이 행성계를 기습하는 편이 나았을텐데."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얼굴을 찌푸리는 페로에게 카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기병지휘관감인 그 둘이 다 죽어버렸으니 동부 연합군 기병은 도대체 누가 맡아야 하는거지?"

"솔직히 나도 걱정돼."

페로가 어깨를 으쓱 했다.

"남극성당쪽 일만 마무리되면 내가 동부로 갈께."

카렐의 말에 페로의 눈에서 반짝 하고 빛이 뿜어나왔다. 내심 든든해진 페로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근위대와 자신의 가디언 부대에서 줄곧 대병력을 지휘해온 카렐은 베흔과 함께 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막강한 지휘관이었다. 여전히 페로의 손목을 살피던 카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부었네."

자신의 손목을 더듬는 카렐에게는 여전히 파란색의 가디언 팔찌가 끼워져 있었다.

카렐의 큰 손과 파란색 팔찌를 멍 하니 바라보던 페로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으, 응."

"뭘 그렇게 쳐다봐. 내 손 큰거 처음봤냐."

카렐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쫙 펼쳐보였다. 그런 카렐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행복감을 느끼던 페로는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최고제후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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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페로가 숲 속으로 달아나버린 멧돼지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긴 창을 들고 흰 백마에 올라탄 페로의 수려한 용모는 동부의 가을 사냥대회에 참가한 쟁쟁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고 있었다.

"저놈만 잡으면 바툴 가를 따라잡는 거였는데."

페로를 따라온 아르군 슈트란 경이 덩달아 아쉬움을 표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페로가 창을 거두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썅, 바툴 가 새끼들은 뭘 처먹었길래 곰까지 잡아대는거야?"

남극성당 박사생도라는 신분이 무색할정도로 거친 막말을 툭툭 뱉어내곤 하는 젊은 페로는 역시 그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부지고 탄탄한 체구와 구릿빛으로 그을린 매력적인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미 36살에 들어선 그의 몸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성숙한 남성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바툴 가에 그 누구냐, 흑인 여자애 하나 있던데? 그여자 혼자 늑대 여섯마리는 잡았을걸. 곰도 그여자가 잡았대. 휴, 전쟁터에서 만났다간 뼈도 못추리겠어."

아르군 경이 동부 무사다운 능숙한 기마술을 보이며 앞장서 달려나가자 페로 역시 말에 박차를 가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네페티 부인의 도움으로 동부의 외가로 도망쳐올 수 있었던 페로는 이미 17년째 슈트란 가 사람으로 살아오고 있었다. 페로의 아버지 슈막이 '무단으로 훔쳐간' 21명의 가디언을 내놓으라며 종종 샤자한 공에게 신경질을 부렸지만 샤자한 공은 그럴때마다 옛날에 꿔간 빚에 대한 담보라며 태연하게 대꾸하곤 했다. 실제로 슈막은 처가에서 빌려간 돈 중 상당액을 아직 갚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며칠 전에 끝난 근위대와 카파키 가문 사이의 전쟁 때문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탓인지 요즘들어서는 아버지 슈막에게서도 별 연락이 없었다.

이곳 슈트란 가, 아니 동부의 귀족 젊은이들에게 요즘 단연 관심사는 북부와 근위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흥미진진한' 전쟁소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이길까 내기도 걸어가며 느긋하게 남의 일처럼 전쟁을 구경하던 페로와 슈트란 가 사람들은 어느날부터인가 동부 제후군이 카파키 가를 도와 참전할 것 같다는 흉흉한---몇몇 사람들에게는 반갑기 짝이없는---소문이 퍼지면서 그 분위기가 바싹 얼어붙어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소문의 진위여부를 묻는 가문 사람들에게 최고제후 샤자한 공은 별다른 대답 없이 웃음만을 지어보이면서 더더욱 의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21명의 가디언을 이끌고 틈날때마다 직접 도적소탕작전에 앞장서면서 나름대로 실전감각도 익히고, 밥값도 하고있던 젊은 페로 역시 동부제후군의 참전 여부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날릴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있던 페로에게 카파키 가의 패전소식은 조금은 실망스러운 그것이었다.

그래도 이 전쟁의 결과는 혈기넘치는 동부의 귀족 젊은이들의 가슴에 묘한 자극을 심어준 것이 사실이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하임달의 결전'에서 카파키 가 사령관 오르마즈 경이 보여주었다는 그 놀라운 무용담은 페로를 비롯한 많은 동부 젊은이들 사이에 회자되면서---물론 단신으로 가디언 5천명을 돌파했다느니 하는 말도안되는 과장이 조금 더해졌다는 건 접어두고라도---제국 사상 최고의 '우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고, 젊은 페로 역시도 그런 영웅적인 전투와 지휘관에 대한 동경에 잔뜩 빠져있었다.

"소문 들었어? 투르케스크 공이 산채로 껍질이 벗겨져 죽었다면서?"

아르군 경이 말을 몰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세네피스 황후도 절단났다죠.....참, 나......여기 다녀갔던 게 언제라고......"

페로가 역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바로 몇달 전, 이곳 슈트란 가 종가를 방문했던 세네피스 황후를 페로도 먼발치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하기사, 5년쯤 전 남극성당 학부 졸업식에 참석했던 페로는 황후로부터의 '수석 졸업생에 대한 포옹'까지 받아본 짜릿한 기억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몇달 전, 먼발치에서나마 황후의 모습을 바라보았던 페로는 그 온화하기 짝이없던 황후의 얼굴에서 어딘지모를 긴장감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황후를 맞이하던 최고제후 샤자한 공의 모습도 평소와 비교해 어딘가 조금 달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황후가 돌아간 직후, 샤자한 공에게서 웬 '칠보상자'를 건네받은 페로는 그것을 가문의 최고 기밀자료들만을 보관하는 종가 지하의 보관고에 가져다놓는 심부름을 한 일도 있었다.

내용물을 절대 보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그 안을 몰래 들쳐보았던 페로가 발견한 건 그다지 볼품없는 은목걸이 한개와 그 안쪽에 교묘하게 끼워져있는 새끼손가락만한 이상한 캡슐, 그리고 두루마리 한 개와 파란색 종이에 쓰여진 봉인된 편지 3통, 그리고 역시 봉인되어있는 한 꾸러미의 문서가 고작이었다.

그 편지들 중 2통은 껍데기에 아무 표시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나머지 1통은 '코리온 수신'이라는 글이 꽤 미려한 해서체로 쓰여져 있었다. 학교에서도 악필로 소문난 페로였지만 그 힘있는 글씨만 보아도 이 편지글을 쓴 사람이 상당한 공부를 한 유학자임을 어렵지않게 짐작했던 터였다.

어쨌든 어딘지 불안해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문득 불길함을 느꼈던 페로는 황후의 황제령 귀환길에서 황궁에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아연질색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당장은 그런 격변의 한켠으로 비켜나 이 조용한 동부에 머무르고 있던 젊은 페로에게 있어 권력의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그런 모든 일들은 아직 '강건너 일'일 뿐이었다.

눈앞에서 사슴을 발견한 페로가 말에 거세게 박차를 가했다. 아르군 경도 덩달아 말에 속도를 가했지만 앞장서 달려가는 페로의 기마술은 그 이상이었다. 능숙하게 말을 몰아간 페로는 창을 꼰아잡고 사슴의 뒷덜미를 능숙하게 내리찍었다.

"정말 역부족이네."

페로와 아르군 경이 머쓱한 표정으로 바툴 가 앞에 쌓여있는 엄청난 양의 수확물들을 바라보았다. 굳이 헤아려볼 필요도 없이 이번 사냥대회 우승도 7제후 바툴 가였다. 그 유난히 큰 덩치에 깜짝놀랄 기마술과 상무적인 기질로 똘똘 뭉친 망할 탈라스 유목민들은 여지껏 사냥대회에서 우승을 놓쳐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고있던 가벼운 라멜라갑옷을 벗어던진 페로는 몸에 잔뜩 앉은 먼지를 털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각 가문의 젊은이들이 모두 모이는 동부의 여름 사냥대회는 그 순위여부보다 그들간의 친목도모의 성격이 더 짙었고 귀족가문 남녀간의 만남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때이기도 했다. 물론 상급제후가문간의 교제는 그들간의 애정문제라기보다는 이해타산에 따른 '거래'의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페로."

샤자한 공의 부름에 페로가 즉시 고개를 숙여보였다. 원로석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샤자한 공은 이곳에 모인 청년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이 잘생긴 손자를 아까부터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예. 할아버님."

"궁금한 게 있는데......혹시 지금 교제하는 여자가 있느냐?"

"아뇨.......없습니다."

페로가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페로는 지난번 가비와의 사건 이후로 '여자들'이라면 진절머리를 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샤자한 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올해로 36살이구나."

"예."

"네가 남극성당 학부를 수석으로 조기졸업했다는 소문에 제후들 칭찬이 자자하단다."

샤자한 공의 갑작스런 칭찬에 페로가 얼굴을 붉혔다.

"지금 이런 말 하기 조금 이른 건 알지만.....널 사위로 삼고 싶다는 가문이 꽤 된다."

페로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당황한 얼굴을 급히 감추고 있었다.

당장으로서는 전혀 별볼일없는 남극성당 박사생도에 불과한 페로를 사위로 삼겠다는 의도는 말하나마나한 일이었다. 페로를 사위로 삼는다면 최고제후 슈트란 가와의 친목은 물론이고 황제령의 신흥갑부 자이센 가의 종장까지도 넘볼 수 있는 위치에 서는 셈이었다. 물론 제국의 총리까지 지냈던 투모카프 경 이후로 변변한 인물을 못내고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네베드 부인이 그 기반을 다져놓은 가디언 수련장은 최초이며 최고 명문의 수련장으로 가문의 든든한 돈줄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비록 이런저런 문제로 이곳까지 쫓겨나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페로는 그 가문의 엄연한 적장자였고 할아버지 투모카프를 닮은 인물중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충분한 '투자가치'를 지닌 셈이었다.

"네가 젊은나이에 가족도 없이 혼자사는것이 안스러워보여 미치겠구나. 기대보다 훨씬 대단한 혼담이 들어왔으니 한번 만나보려무나."

샤자한 공이 원로석 반대편에 손짓을 해 보이고 있었다. 샤자한 공의 모계이기도 한 4제후 눌레딘 가였다. 샤자한 공의 이종사촌이기도 한 종장 골루크 경의 옆에는 큰 키에 갈색머리와 파란눈을 지닌, 꽤 야무져보이는 여자가 함께 서 있었다. 종장을 꼭 빼닮은 그 얼굴로 보아 그 딸임에 틀림없었다.

페로는 급히 그 여자와 자신과의 촌수를 계산해보고 있었다. 외가쪽 고조부를 공유하는 셈이었으니 페로에게는 7촌의 이모뻘에 해당하는 여자였다.

상급귀족 특유의 순계혈통주의에 의해, 혹은 수명개조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한 근친혼이 성행하면서 사촌간 혼인 정도는 구설수거리도 못될 비일비재한 일이었고, 드물게 남매지간이나 심지어 부녀, 혹은 모자간에 혼인했다는 황당한 소문까지 번지고 있는 현실에서 7촌 정도면 근친 축에도 들지 못했으니 문제삼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자이센 가 장남이고 내 손자인 상급귀족 페로 슈트란 자이센이요. 지금 36살이고 남극성당 육서과정에서 박사과정 생도로 있다오."

"우리 집안 적장자인 나람 칼리 눌레딘이고 상급귀족입니다. 지금 83살이고 제 밑에서 가문 일을 보고있습니다."

페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4제후의 적장자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 종장의 지위를 물려받을 여자였다. 게다가 종장의 밑에서 '가문 일'을 보고 있다는 것은 이미 후계자 수업에 들어갔다는, 그 신임과 지위가 확고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엔간하면 '적장자끼리는' 혼인을 시키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아 꽤 파격적인 혼사임에 틀림없었다.

그 지위에 어울리게 사냥에도 직접 참가했던 듯 그쪽도 역시 먼지앉은 라멜라갑옷을 입고 있었다. 큰 키에 보기드문 미남인 페로를 힐끗 보며 나람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페로는 여전히 여자라면 넌덜머리를 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샤자한 공이 직접 소개한 여자인지라 무어라 나설 입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페로 스스로도 '이번에는 혹시나'하는 호기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페로와 나람의 시선이 부드럽게 마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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