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0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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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고,"
헤즈 사령관이 평소처럼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5스타디아정도 떨어진 곳에 금속과 강화수지로 만들어진 탄탄한 요새 안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트라티누스 가 병사들의 긴장한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선두의 사역병들이 적들의 지상 에너지장벽을 해체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각각 5천명씩 이루어진 3개의 중장 기사단과 2만의 경보병단, 히르직스 휘하의 경장 창기병 3천5백은 주변에 흩어져서 행여 있을지 모를 적 기병의 후방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얼마나 빨리 끝내는지가 관건이겠지."
'병신, 누가 모르냐.'
히르직스가 다시 속으로 조소를 퍼부었다. 플라칼 가 공격군의 핵심인 6만의 '전쟁기계' 중장보병단들은 이미 천여명 단위씩의 반밀집 레기온 대형을 이루고 큰 함성을 지르며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사각방패와 중장갑, 난전을 위한 짧은 검, 단거리용 투창 한두개씩으로 무장한 이들 중보병들은 중장기사단과 더불어 가장 '플라칼 가 다운' 저돌적인 공격을 펼치며 항상 공격의 선두에 서는 녀석들이었지만 오늘의 공격은 그 양상이 조금 틀려질것이 확실했다. 물론 저 머저리같은 트라티누스 가 수비병 녀석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이 닥쳐올지 아직 상상도 못하고 있을테지만.
"뚫었습니다!"
정면의 사역병들 쪽에서 큰 함성이 오르자 십여군데에서 일제히 비슷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뚫린 구멍을 통해 기어든 선봉의 '파괴조' 보병 이십여명이 큰 도끼를 들고 에너지장벽 포스트를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언제 적에게 후방기습을 당할 지 모르는---물론 기습당해도 아무도 도와줄 길이 없는---위험한 일이었기에 제일 멍청하거나 돈에 미친 괴상한놈들이 아니면 절대 자진해서는 맡으려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저 일을 자진해서 맡으려는 희한한놈들이 꼭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에너지장벽 바로 안쪽에 매복중이던 적 경기병 백여기가 우루루 달려나와 이들 '파괴조'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기 시작했다. 공격군 측에서는 가장 기분나쁜 순간이었다. 하지만 단 한놈이라도 살아서 포스트를 연이어 서너개쯤 때려부순다면 빈틈이 생길 것이고, 그 틈새로 창기병들을 들여보내 저 기분나쁜놈들을 쫓아낼 수 있을 터였다.
어쨌든 구멍을 통해 보병들이 미친 듯 계속 몰아닥치자 모두를 막기가 버거워진 기병들이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제일 먼저 뛰어들었던 삼사십여명의 보병들이 목숨을 날린 댓가였다. 큰 소리와 함께 포스트들이 연달이 폭발하면서 1차 관문인 지상 에너지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새끼들, 별것도 아니군."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침을 퉤 뱉고는 큰 소리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히르직스는 보병들을 데려나온 케세크 경의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적의 농성진을 뚫을 때 당연히 중심이 되어야 할 중보병단이 오늘은 '조연'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10만의 플라칼 가 공격군들은 평소의 공격할때의 그 양상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만 이천의 수비병이 지키고 있는 베하라 요새를 향해 발소리까지 맞춰 진격해들어갔다. 요새 위에 선 트라티누스 가 병사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지상에는 이미 공격용 장비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장애물들이 꼼꼼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녀석들도 나름대로 꽤 준비한 모양이었다.
"정지!"
케세크 경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당장이라도 요새를 무너뜨릴 기세로 돌격하던 중보병들이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적 요새 약 1스타디아 전방이었다. 갑작스런 정지명령을 받은 중보병단 지휘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한참 기세를 올리고있던 적 수비병들 역시 멍 한 표정을 짓고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히르직스는 드디어 자신이 나설 시간임을 깨달았다.
"궁기병대 돌진!"
히르직스 특유의 높고 째지는 목소리와 함께 후방의 수송선에서 아직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천 오백의 궁기병대가 일렬을 지어 동서 양편에서 무서운 속도로 내달려오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 녀석이 봤다면 감격스러워 눈물이라도 흘렸겠군."
히르직스가 조소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지휘관의 이런 자기비하를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으로 실전의 주역을 맡은 궁기병 천 오백명은 자신들의 지휘관인 용감한 베아트릭스 플라칼 중랑장을 떠올리며 적 요새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발사!"
정확히 적진 1스타디아 밖에서 외친 궁기병대 부지휘관 달리 플라칼 교위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천 오백개의 경투창이 동시에 공중으로 솟구쳤다. 너무나 뜻밖의 공격에 당하는 트라티누스 가 병사들마저 잠시 멍 해져 있었다. 최소한 그들 머릿속에선 남부제후군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스타일의 공격이었다. 짧은 검을 이용한 밀집공격을 펼칠 적들을 대비해 1선에서 장창과 할버드로 무장하고 있던 수비군 경보병들 사이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몸을 낮춰! 산개해! 중보병 1선으로!"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동부 보병대 지휘관의 고함소리가 무색하게 제1공격에 백명이 넘는 1선의 경보병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2선에서 대기중이던 중보병들이 방패를 쥐고 1선으로 나서면서 요새 안에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그사이 발빠른 천 오백의 궁기병들은 방금전보다 절반의 거리로 달려들어 있었다.
"중투창!"
달리의 두번째 명령과 함께 그들이 일제히 중투창 자리드를 뽑아들고 돌진했다.
"발사!"
트라티누스 가의 지휘관이 1, 2선의 교체가 바보짓이었음을 깨닫는데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육중한 중투창 천 오백발이 무서운 기세로 하늘을 덮어 날아오고 있었다.
"제기랄!"
굉음과 함께 이번엔 수백의 중보병들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방패나 갑주를 꿰뚫은 무거운 투창이 바닥에 박히며 째지는 금속성의 마찰음을 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중보병들 중 절반 정도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사격! 사격하란 말이다!"
수비군 지휘관이 2선의 경보병들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공격군 궁기병들은 이미 지그재그를 그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궁기병 전통이 강한 동부제후군들 대부분은 어느정도 투창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옛 화살이라는 물건과는 달리 그 무게 때문에 보병들은 기껏해야 서너발 정도 소지할 수 있는것이 고작인 투창은 보병이 대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성격의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보통의 보병이 던지는 투창의 위력과 사정거리는 장비를 갖춘 전문 궁기병의 그것에 채 절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플라칼 가 궁기병들은 보병이 던질 수 있는 투창의 사정거리 바로 밖까지 접근해 중투창을 던지고 유유히 물러나고 있었다.
겁먹은 동부보병들은 요새의 방벽 뒤에 몸을 숨긴 채 도저히 몸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났던 플라칼 가 궁기병 천 오백은 다시 경투창부터 던지며 돌진해들어왔다. 뜻밖에 당한 1격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미처 몸을 피하지 못했던 상당수의 보병들이 적 궁기병의 2차 공격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2선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플라칼 가 중보병단 사이에서 큰 고함소리가 올랐다.
"공격!"
케세크 경의 고함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궁기병대의 활약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던 중보병들이 드디어 공격장비를 동반하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천 오백 궁기병들의 엄호사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휴우~"
히르직스가 스스로의 전과에 자신도 놀랐는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완전히 기선제압을 당한 적 수비군들은 돌격해오는 중보병들을 상대로 속수무책으로 허둥대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군 중보병들에게 공격을 하기 위해 몸을 내밀던 몇몇 용감한 적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수발의 집중사격에 처참한 몰골로 쓰러지고 있었다.
"볼만하군요."
히르직스의 부장들이 궁기병대의 놀라운 활약에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플라칼 가의 유명한 '전쟁기계' 중장보병들은 방패를 앞세우고 적들의 장애물을 돌파해 요새에 접근하고 있었다. 날아드는 투척무기들에 선두의 보병들이 차례로 쓰러졌지만 밀집대형에서 전열이 무너지면 후열까지 가로막히는 기병들과는 달리 그정도 손실에도 쓰러진 동료를 뒤에 남긴 채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 보병부대의 최고 강점이었다.
게다가 후방에서 끝도없이 쏟아대는 궁기병들의 엄호사격덕택에 보병들에 대한 공격은 그 위력이 반감되고 있었다. 히르직스 눈에도 중장보병들의 지나간 '흔적'에 쓰러져 신음하는 보병들의 수가 이전보다 훨씬 적어진 것이 눈에 확 들어오고 있었다. 갑주도 챙겨입지 못한 종군 노예들이 전장을 바삐 뛰어다니며 쓰러져 대오에서 낙오된 부상병들을 허겁지겁 후방으로 실어날랐다.
아직 보병은 들이닥치지도 않은 적 요새에는 이미 수백구의 시체인지 부상병인지 알 도리가 없는 몸뚱아리들이 딩굴고 있었다. 백전노장 히르직스는 이미 절반은 승패가 갈려가고있는것을---물론 그 공로의 대부분은 자기 것, 아니 궁기병대의 것이 확실했지만---느끼고 있었다.
굉음과 함께 공격장비가 적 요새에 부딪히는 육중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드디어 대대적인 살육이 벌어질 시각이었다.
"4시 방향입니다!"
스캐너를 살피던 장교의 고함과 함께 헤즈와 히르직스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제1기사단이 위치해있는 남쪽의 낮은 계곡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고함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고 있었다. 히르직스가 말머리를 천천히 돌리며 만일을 대비해 창을 꼰아잡았다.
"후훗, 올 게 오셨군."
히르직스가 히죽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기사단장 세베토 녀석은 아까부터 할일없다고 궁시렁거리더니 결국 적 기병대가 녀석의 후방을 기습하려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어느정도는 예상했던 공격이지만. 내심 쌤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히르직스는 그 잘난 제1기사단이 얼마나 잘 버티는지 구경하기로 했다. 기왕이면 제3기사단을 공격해서 꼴보기싫은 세째남편놈을 죽여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중장기병 천과 경기병 천 오백정도 같습니다. 적 기병이 모두 출동한 모양입니다."
"잘난 기사단 혼자 잘 상대하겠구만."
괜히 심통이 난 히르직스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유명한 동부기병들인데......"
히르직스의 부장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히르직스는 그제서야 그 소름끼치는 베아트릭스 녀석 역시 저놈의 '동부기병'출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창기병 천만 저쪽에 지원해. 나머지는 적 요새가 깨지면 패잔병을 쫓아야 하니까."
총사령관 헤즈 플라칼 경이 별것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스코프를 작동시킨 히르직스의 눈에 들어온 적 기병들은 그 달려오는 자세부터가 예사롭지않았다. 저으기 걱정스러워진 히르직스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나갔다.
"제가 직접 다녀오죠!"
제1기사단과 함께있던 세베토 경은 후방에서 돌진해온다는 적 기병들의 소식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적 기병들의 후방기습은 어느정도 예상했기에 놀랄것까지는 없었지만 하필 기사단 총사령관인 자신이 있는 곳에 온다니 내심 운도 지지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돌격!"
세베토 경의 고함소리와 함께 플라칼 가 중장기병들이 일제히 방패와 함께 창을 치켜들고 적을 향해 돌진해들어가기 시작했다. 땅을 뒤덮고 달려드는 적 기병들의 선두는 천오백여 동부 경기병들이었다. 남부 중장기병들과 그 유명한 동부 기병들이 2차 혼란기 이후 처음으로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으익!"
창을 들고 돌진하던 5천기의 중장기병들이 경악하고 말았다. 적 경기병들의 손에는 장창이 아닌, 중투창이 하나씩 쥐여있었다. 세베토 경은 며칠 전 오리엔테이션 당시 동부 경기병들은 전문 궁기병이 아니더라도 창과 함께 사이클롭스와 몇개의 투창으로 동시에 무장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던 베아트릭스의 말을 이제서야 떠올리고 있었다.
"발사!"
동부 지휘관의 명령과 동시에 그들의 손에 들려있던 중투창이 일제히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느정도의 투창공격은 미리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당한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기병끼리의 전형적인 돌격전을 예상했던 그들에게 자신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중투창은 털이 쭈삣 곤두서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악!"
근거리에서 날아온 중투창에 명중한 말과 중장기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딩굴렀다. 방패에 투창이 박혀 기동력을 상실해버린 기병들까지 포함하면 족히 2백여명은 당한 모양이었다. 1선의 기병들이 쓰러지자 뒤에 달려오던 기병 중 일부가 가로막히면서 진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빠른 적 경기병 1선의 8백여명은 마치 물이 갈리듯 두갈래로 갈라지며 쐐기꼴로 밀집해 돌진해들어가는 플라칼 가 중장기병들에게 그대로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적을 '돌파'했다고 착각한 중장기병들 앞에 또 한무리의 경기병들이 투창을 던지며 나타났다.
"제기랄! 썩을 놈들!"
세베토 경이 자기도모르게 욕을 토해냈다. 적 2선의 경기병이 던진 투창에 또다시 방금전 만큼의 기병들이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2선의 경기병들이 또다시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서 번쩍이는 장갑으로 무장한 동부 중장기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무거운 창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경기병들에 넋을 빼앗겼던 제1기사단 중장기병들이 느닷없는 그들의 공격에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한팔에 방패와 말고삐를, 나머지 한팔에 창을 움켜쥐고 안장에 엉덩이를 바싹 붙이고 '돌격'하는 것이 남부 중장기병들의 조금은 단순한 스타일이라면, 그런 스타일의 '돌격전'은 물론이고 사나운 군마를 고삐없이 발로만 제어하며 두 팔로 휘둘러대는 묵직한 창으로 사방의 적을 쓸어넘기는 놀라운 기마술과 창술은 전설적인 동부기병,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북부 창기병들만의 특이한 스타일이었다.
현란한 창놀림을 구사하는 천여명의 동부 중장기병들은 경기병들을 잡기위해 옆으로 조금 빠져나와있던 천여기의 기병연대와 본대 사이를 가르며 순식간에 돌파해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세베토 경이 자신의 바로 앞에서 창에 찔려 나동그라지는 부장을 가까스로 피하며 비명 비슷하게 소리를 질렀다. 전열이 흐뜨러져있던 플라칼 가의 오천여 제1기사단은 측면을 스치듯 대각선으로 가르고 지나가는 천 기의 동부 중장기병들에게 그 숫자가 무색할 정도로 무참하게 돌파를 허용하고 말았다.
"간격! 간격을 유지해!"
제1기사단장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지만 바닥에 나딩구는 동료들과 말들의 시체 때문에 제대로 진형을 유지하는것도차 힘들었다. 그들의 머리위로 기사단을 에워싼 적 경기병들의 투창공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편 중장기병들 역시 방패로 가까스로 투창공격을 막고는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둘씩 낙마하는 기병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저놈의 발빠른 경기병들은 이편에서 잡을래야 잡을수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쐐기꼴의 한쪽을 토막내어버린 동부 중장기병들이 주변을 한바퀴 빙 돌아 이번엔 반대편으로 돌격해들어왔다. 세베토 경의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이쪽의 중장기병들은 실력에서도 녀석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정도까지 무기력해진 건 결국 심리적인 원인이 더 컸다. 결국 이럴 때 활로를 뚫고 사기를 올려야 하는 것이 사령관의 역할이었다.
그는 방패와 창을 굳게 움켜쥐고 고함을 한 번 질렀다. 그리고 좌우를 에워싼 수백의 근위기병들과 함께 적 중장기병 선두에서 달려오는 대장임에 틀림없어보이는 녀석---투구에 날개모양의 붉은 술을 단---에게 돌진했다.
천 기의 경장 창기병들을 이끌고 제1기사단을 지원하러 달려가던 히르직스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해짐을 느꼈다. 기사단과 적 기병들과의 전투가 벌어지던 곳에서 갑자기 와아 하는 큰 함성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거물---이쪽이든지 저쪽이던지---하나가 당한 것이 확실했다.
"제기랄, 뭐야?"
선두의 히르직스가 내지른 창에 적 경기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적 기병들이 이쪽에 투창을 던졌지만 최대한 산개한 채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경창기병들은 투창으로 잡기에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불리함을 눈치챈 적 경기병들이 공격을 중단하고 중장기병 옆으로 급히 몸을 피하고 있었다.
"에이, 썅!"
창을 꼰아잡은 히르직스는 그대로 적 중장기병들에게 돌진해들어갔다.
히르직스는 '경기병' 단장인 자신의 직분을 잊고 옛 기사단장 시절의 습관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별 문제 아니었다. 경기병이 중장기병에게 감히 '정면돌진'하는 것은 천하의 바보짓으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제국 최고의 일기투 실력을 자랑하는 히르직스에게는 그건 별로 적당한 명제가 아니었다.
천 명의 경기병 지원군이 오면서 동부 경기병들의 사격이 주춤해지자 그제서야 정신을 조금 차린 제1기사단 나머지 기병들이 일제히 히르직스의 뒤를 따라 동부기병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히르직스는 자신을 향해 피묻은 화극을 휘둘러오는 날개모양의 술을 단 중장기병을 목표로 잡았다. 차려입은 모양으로 보아 저녀석이 대장임에 틀림없었다. 둘의 창이 무서운 기세로 맞부딪히면서 굉음이 울려퍼졌다.
"이 가소로운 놈!"
히르직스의 고함과 함께 녀석의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녀석의 투구가 산산조각나더니 공중으로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히르직스의 두번째 공격이 녀석의 머리를 다시 노렸지만 녀석은 얼굴과 목이 피투성이가 된 채 잽싸게 말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퇴각! 퇴각!"
중장기병을 선두로 경기병들의 엄호를 받으며 적들이 급히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생각없이 그들의 뒤를 쫓으려던 중장기병 몇이 그들의 투창공격에 다시 당하고 말았다.
"바보새끼들! 쫓지 마!"
히르직스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달아나는 경기병을 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임은 2차 혼란기를 경험해본 백전노장 히르직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히르직스는 말에서 훌찍 뛰어내렸다. 그의 발밑에는 방금전까지 자신이 그리도 부러워했던 번쩍이는 중갑옷을 입은 세베토 플라칼 경의 시체가 가슴이 두조각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세베토 경 스스로 어릴적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플라칼 가의 후예다운 '영광스러운 죽음' 이었다.
세베토 경의 전사소식에 헤즈 사령관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을 뿐이었다. 하기사 그깟 방계출신 지휘관 하나정도 죽어나가는 건 이 희한한 집안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세베토 경에게는 그 잘생긴 얼굴 탓인지 종장 부인의 정부일지도 모른다는 꼬리표까지 항상 따라다니곤 했다. 어쩌면 저 재수없는 사령관은 자신의 친어머니의 정부일지 모른다는 저 신경쓰이는 기사단 사령관이 죽은 것을 도리어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 기병들이 달아났다니 간이 에너지장벽 치기가 영 껄끄러워지는군. 새끼들 조만간 무너질것 같은데. 달아나면 곤란한데......"
헤즈 사령관이 이미 거의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는 적 요새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일단 작업은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죠."
히르직스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녀석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해놓고 완전히 궤멸시켜야 뒤이어 쳐들어갈 적 수도 6번 행성의 공략이 쉬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간이 에너지장벽은 재빨리 설치해서 녀석들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만드는데는 탁월했지만 외부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이 흠이었다.
어느새 요새를 방벽을 돌파한 중장보병단은 바닥에 널부러진 수천구의 적 보병 시체를 짓밟으며 허둥지둥 도망가는 적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도끼와 창 등을 든 만여명의 경보병들이 '최후처리'를 위해 중장보병단의 뒤를 이어 뛰쳐들고 있었다.
적병들은 후방에 미리 준비해둔 병력수송용 셔틀에 올라타고 있었지만 그들의 머리 위에는 이미 그들의 숨통을 막을 푸른빛의 간이 에너지장벽이 작동을 개시한 후였다. 퇴로까지 막혔다는 사실에 절망한 적군들이 차례차례 항복해오기 시작했지만 몇몇 충성스런 적군들은 단신으로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는 이도 있었다. 요새 문까지 열리면서 대기하던 히르직스의 경창기병대들까지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말을 타고 여유롭게 베하라 요새 안에 들어선 히르직스는 에너지장벽에서 들려오는 그 묘한 진동음이 갑자기 작아지자 문득 공중을 올려보았다.
"제기랄,"
히르직스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남쪽 일부의 간이 에너지장벽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방금 전 달아난 그 기병녀석들 짓임에 틀림없었다. 안그래도 성이 머리끝까지 난 헤즈 사령관이 제2기사단을 그쪽으로 보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할룩스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깨지지나 말라지."
자존심이 상해버린 히르직스가 다시 빈정거렸다. 경기병 없이 중장기병 5천만 보내서 그 잽싼 동부 기병 2천5백을 잡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 머저리같은 사령관은 방금전 세베토 녀석이 죽은 것을 보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 모양이었다. 히르직스는 따라온 부장에게 귀엣말로 일렀다.
"바깥에 있는 궁기병 오백하고 창기병 천만 데려가서 지원해. 난 이쪽 챙길테니까."
"알겠습니다."
예상대로 마지막 저항을 벌이던 오천여명의 적 보병들이 뚫린 구멍에 희망이라도 얻었는지 일제히 셔틀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을 저지하려는 플라칼 가 보병들과 '궁지까지 몰린' 트라티누스 가 보병들의 최후의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남아있던 적병들의 절반 이상이 셔틀에 올라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저정도면 보병들로서는 나름대로 할 만큼 한 셈이었다.
요새가 아니고 초원이나 사막이었다면 녀석들 기병대의 근사한 사냥감이 되었을텐데 참으로 아까운 노릇이었다. 어쨌든 히르직스는 보병들의 '탁월한 생존성'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수백년의 그의 군 경험을 뒤집어봐도 얼핏 제일 약해보이는 보병들을 '전멸'시킨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참이나 재밌는 일이었다.
어쨌든 저항이 없지않았지만 베하라 요새는 플라칼 가 제후군 손아귀에 들어온 셈이었다. 이곳에서 오랜시간 끌어주기를 바랐을 적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도 단 5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결판나버린, 그럭저럭 화끈했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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